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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부 전통의 빨리어 자료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산스크리트어 자료와 인명, 지명 등등으로 인해
그동안 카페에 올린 내용과는 소소한 차이가 있지만
불자님들의 안목을 넓혀줄 좋은 논문이라서 네 번에 거쳐 나누어 옮기겠습니다.
- 대연 두 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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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전의 결집 과정과 논쟁점
- 상좌불교, 무시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조준호
고려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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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교 경전의 성립과 역사
제1차 결집과 제2차 결집에 대한 문헌적인 연구는 루이 드 라 발레 뿌생(Louis Dela Vallee Pou-ssin)과 두트(N. Dutt) 그리고 국내에서는 호진 스님 등의 논의가 정교하다. 제1차 결집과 제2차 결집은 율장(Vinaya-Piṭaka)에서 교단(敎團) 생활의 규칙을 설하고 있는 건도부(犍度部, Khandaka)의 끝부분에 부수된 2장에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제3차 결집은 스리랑카 전승의 《디빠방사(Dīpavaṁsa; 島史)》 《마하방사(Mahā-vaṁsa; 大史)》 그리고 《사마타빠사디까(Samatapāsādikā)》에 나타난다. 《사마타빠사디까》는 율장의 주석서적인 성격으로 동아시아는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로 한역되어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는 결집에 관한 기존의 여러 연구 결과물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다시 재구성해 본다.
1) 제1차 결집(Paṭhama saṁgīti)
제1차 결집은 붓다가 열반에 든 해에 라자가하(王舍城)에 500명의 비구가 모인 가운데 행해졌다고 한다. 때문에 ‘왕사성 결집’이나 ‘오백집법(五百集法)’이라 불린다. 제1차 결집을 전하는 문헌은 율장은 물론 경장의 경(經)과 논서 그리고 율장의 주석 문헌 등에 나타난다. 예를 들면, 경으로는 《비니모경(毘尼母經)》 《반니원경(般泥洹經)》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가섭결경(迦葉結經)》 《아육왕경(阿育王經)》 등이고, 율장으로는 Vinaya-Piṭaka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 《십송율(十誦律)》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근본설일체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毘奈耶雜事)》 《대사(大事; Mahāvastu)》 그리고 논서로는 《대지도론(大智度論)》 《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 등이다. 율장의 주석 문헌으로는 《사마타빠사디까(Samatapāsādikā)》와 이에 대한 한역본으로 《선견율비바사》 등이다.
제1차 결집을 언급한 각 문헌들의 성립 시기는 경장의 경우 대체적으로 빠알리의 수따삐따카(Sutta-piṭaka; 經藏)나 한역 아함경(阿含經) 이후로 볼 수 있고, 율장의 경우 초기불교 범위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율장과 경전은 초기불교 전통의 여러 부파 소전(所典)이다. 나아가 논서는 흥미롭게도 용수(龍樹)의 저술로 알려진 초기 대승경전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의 주석서에 제1차 결집이 나타난다. 이 외에도 스리랑카 불교 역사서인 《디빠방사(Dīpavaṁsa; 島史)》 《마하방사(Mahāvaṁsa; 大史)》나 중국 구법승의 여행기인 《법현전(法顯傳)》이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역사서나 인도를 여행했던 구법승들의 기록에도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인도 불교에 있어 제1차 결집에 관한 전승의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문헌들에 따라 이야기 구성이 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여기서는 빠알리 소전인 율장(Vinaya-Piṭaka)의 《소품(Cullavagga)》에 나타난 결집 기사를 중심으로 결집 과정을 재구성해 본다.
먼저 제1차 결집을 결행하게 된 계기는 나이 들어 출가한 수밧다(Subhadda)의 망언으로 출발한다. 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spa)은 제자들과 함께 유행하는 도중에 한 외도로부터 석가모니 붓다의 반열반(般涅槃) 소식을 듣게 된다. 함께한 비구들 대부분이 붓다의 반열반을 슬퍼했지만 수밧다 비구는 다음과 같은 충격 발언을 한다.
“존자들이여, 이것으로 충분하다. 울지도 슬퍼하지 마시오. 우리는 드디어 대사문(大沙門)으로부터 벗어났다. 우리는 이제까지 대사문으로부터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하지 마라’와 같은 말을 들을 때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하고, 좋아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마하가섭은 이 같은 말을 듣고 내심 붓다 이후의 교단 상황에 대해 염려를 하게 되고 ‘결집’을 단행하여 교단의 기강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붓다의 장례식을 마치자 곧바로 모든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결집의 당위성을 긴박하게 호소하였다고 한다.
“존자들이여, 우리는 마땅히 법(法)과 율(律)을 결집해야 합니다. 비법(非法)이 정법(正法)을 가리고 드세지기 전에, 계율이 아닌 것이 계율을 가리고 드세지기 전에, 비법을 설하는 자가 힘을 얻고 정법을 설하는 자가 힘을 잃기 전에, 계율이 아닌 것을 설하는 자가 힘을 얻고 계율을 설하는 자가 힘을 잃기 전에 결집을 합시다.”
이때에 자리에 모인 모든 대중은 마하가섭의 호소에 찬동하여 본격적인 결집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결집 개최를 위한 적절한 장소는 당시 최고 강국이었던 마가다의 수도인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가 선정되었다. 이유는 많은 대중이 일정 기간 함께 머물 수 있는 적당한 곳이라는 것이다. 최대 강국의 수도답게 물자가 풍부한 곳이어서 음식물과 생활필수품을 쉽게 공급받을 수 있는 요충지였다. 그리고 다시 왕사성에서도 칠엽굴(七葉窟, Sattapaṇṇiguhā)이 특정한 장소로 더 좁혀졌다.
칠엽굴은 왕사성 가까이에 있는 웨바라(Vebhāra: 毗訶羅) 산 정상의 커다란 두 개의 동굴을 말한다. 이곳은 초기경전에 먼 유행길에 있는 비구들의 거처로도 나타나며, 붓다도 종종 머물던 장소로 반열반 전에 시자 아난다에게 붓다로 하여금 이 세상에 1겁을 더 머물러 주시기를 청하도록 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칠엽굴은 큰 도시 가까이 있어 탁발이 용이했던 점과 함께, 특별히 결집 장소로 채택된 또 다른 이유는 오래 머물면서 필요한 물품의 구입이 가능했고, 산과 동굴이어서 외부와 차단할 수 있는 독립공간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즉 오랫동안 결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을 찾아 다시 지리적 상황을 살펴보아도 경사가 급한 산 중턱에 두 동굴 밖이 멀리 트여 있어 전망이 좋다. 이 결집을 굴외결집에 반해 굴내결집(窟內結集)이라 하지만 500명의 인원이 동굴 내에 머물기는 비좁은 장소처럼 느껴지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후대 율장 주석서나 스리랑카 역사서는 당시 결집을 후원하였던 마가다의 왕인 아자따삿뚜(Ajātasattu; 阿闍世)가 칠엽굴 밖에 설치해 준 회의장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결집 장소가 결정되자 다시 40일 뒤에 마가다 국의 칠엽굴에 집결(集結)하기로 하고 마하가섭과 아누룻다의 인도하에 장례식 장소인 꾸시나라의 말라(Malla) 국을 떠났다. 당시 교단의 제도는 3개월 안거(安居 ; Vassa) 기간이 있었다. 인도에서 안거는 비가 부정기적으로 계속되는 몬순 기간에 출가자들이 유행하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 머물며 수행하는 기간이다. 때문에 결집 시기와 기간을 안거 기간으로 말하는 것은 당시 교단 상황으로 볼 때 적절하다. 그리고 마가다 지역의 몬순 기간은 대략 6월부터 9월에 걸친 3개월 동안이다. 이는 불교사에서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불기(佛紀)의 시작이 바로 그것이다. 즉 불기의 첫 해는 위대한 스승과 함께하지 못한 첫 안거의 해부터 산정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결집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으로 500명의 아라한이 선출되어 후에 500결집이라고도 한다. 마하가섭이 사회자가 되고 이발사 출신 우파리(優波離, Upali) 존자가 율(律, Vinaya)을, 아난다(阿難, Ananda)가 경(經)에 해당하는 법을 암송하여 그 내용이 불설(佛說)임을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마하가섭이 먼저 우파리에게 어느 장소에서, 누구에게, 어떠한 이유로, 계율이 제정되었는지를 질문하면 이에 답변으로 송출한 것이 바로 Pātimokha(波羅提木叉, 戒本)라는 율(律)이다. 마찬가지로 아난다에게 붓다가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설하였는가를 묻는 것에 대해 아난다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송출한 것이 경(經, Sutta)이다. 붓다가 계(戒)를 주고 삭발할 때 이발사 출신인 우파리가 맡았기 때문에 계율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아난다의 경우 오랫동안 붓다를 시봉하면서 설법을 많이 들을 수 있어 각각 율과 경을 송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우파리와 아난다에 의해 송출된 율과 경은 참가한 아라한들에게 진위의 심의를 거친 후 참가자 전원이 합송하는 형식을 거쳤기에 결집의 다른 말이 합송인 것이다. 즉 saṁgīti는 당시에 유통되었던 불설을 참가한 500명의 아라한 전체가 합창하는 것으로 율과 경을 교정하여 공인한 정전화(正典化) 작업이었음을 의미한다. 상좌부의 율장(Vinaya-Piṭaka)을 포함한 초기불교 전적은 이때 결집된 것이 현재의 율장과 경장[Pañca Nikāya]이라고 한다. 제1차 결집이 끝난 후 부수적으로 아난다의 5가지 과실에 대한 문책이 마하가섭에 의해 거론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붓다가 직접 불멸 후 만약 교단이 원한다면 소소계(小小戒)를 버려도 좋다는 유언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묻지 않은 점. 둘째, 부처님의 가사를 밟은 허물.셋째, 여성을 먼저 조문하게 하여 눈물자국을 붓다의 유체에 남기게 한 허물. 넷째, 1겁 동안 머물기를 청하지 않은 점. 다섯째, 여성 출가를 허락하도록 한 점 등이다. 모두 아난다에 의해 참회와 함께 나름의 변호가 수용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같이 마하가섭에 의한 아난다의 문책은 아난다가 아라한이 아니기에 결집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까스로 아라한 경지를 성취하고 참석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붓다의 반열반 후의 교단의 상황을 보여 주는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난다가 문제시되는 분위기는 제1차 결집이 경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또한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붓다의 마부 출신으로 출가하여 포악한 성격 때문에 화합하지 못했던 찬나(Channa; 車匿)에 대한 제재 조치이다. 붓다의 유훈에 따라 찬나는 범단벌(梵檀罰; Brahma-daṇda)이 적용되자 이후 참회하고 개과천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역사적인 사실이든 아니면 뒤늦게 만들어진 이야기이든 붓다와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불멸 후 힘의 이동을 보여 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난다와 찬나는 붓다와 가까이 있었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행실에 있어 교단 구성원들이 비난을 사는 일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불멸 후 교단의 기강 차원에서 정리한 것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하가섭의 주도로 이루어진 결집이 끝났을 때, 뒤늦게 뿌라나(Purāna) 존자가 500명의 비구들과 함께 다끼나기리(Dakkhi-ṇāgiri)로부터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당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결집이 끝난 상황이어서 마하가섭 주도의 결집을 수용할 것을 제의했지만 뿌라나는 붓다로부터 직접 들은 가르침이 있다며 결집의 수용을 거부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은 굴외결집(窟外結集)이라 하여 미처 참여하지 못한 비구들이 나중에 도착하여 굴 밖에서 따로 왓시까(Vassikā; 婆師迦)를 중심으로 결집을 행했다고 한다. 이 같은 이야기는 교단의 위계적 주도권을 넘겨달라는 데와닷따의 요구를 거부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붓다의 마지막 유훈인 자등명(自燈明)·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으로 볼 때에도, 붓다의 교단은 위계적 차원의 단일한 교주나 후계자를 인정하지 않았던 상황에 연유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마하가섭 주도의 결집이 결코 대표성을 갖는다고 보지 않으려는 집단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제2차 결집(Dutiya saṁgīti)
제1차 결집에 이어 제2차 결집은 율장(Vinaya-Piṭaka)의 《소품(Cullavagga)》과 함께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 《십송율(十誦律)》 《비모니경》과 율장의 주석 문헌인 《사마타빠사디까》와 역사서인 《디빠방사》 《마하방사》 등에도 나타난다. 제2차 결집은 제1차 결집 때보다 많은 수의 700 아라한이 참여했기에 ‘칠백집법(七百集法)’ 또는 ‘칠백결집(七百結集)’이라고 하고 결집 장소가 웨살리였기에 ‘웨살리 결집’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도 제1차 결집과 같이 율장의 《소품》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2차 결집은 불멸 후 대략 100년 후, 시수나가(Sisunāga) 왕조의 깔라소까(Kālāsoka) 왕의 치세 때에 일어난 일로 이야기된다. 계기가 된 것은 계율에 철저한 서인도 출신의 야사(耶舍; Yasa)라는 비구가 동인도의 웨살리(Vesali)로 유행할 때 그곳 비구들이 재가자들로부터 편법으로 금은(金銀)을 보시받는 광경을 목격하고서 정사(正邪)의 시비(是非)를 따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그들은 물을 담은 구리 그릇을 비구 승가의 중앙에 두고 금은을 받고서 야사에게도 분배받을 것을 권유했지만 야사는 계율상 비법(非法)이라고 거부하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야사는 재가자에게 계율을 들어 금전을 보시하지 못하도록 말렸다. 그러자 웨살리 비구들은 오히려 야사를 힐난하고 그에게 적법하지 않게 하의갈마(下意竭磨)를 적용하려 하였다. 이에 야사는 그들에게 계율상 하의갈마를 받은 비구는 수반(隨伴) 비구를 동행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들어 자신에게 수반 비구를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웨살리의 재가신자들에게 “나는 비법(非法)을 비법이라고 하며, 법을 법이라고 하며, 율이 아닌 것을 율이 아닌 것이라고 하며, 율을 율이라고 한다.”고 하며, 금은에 대한 비법을 말하였다. 이에 재가자들은 웨살리 비구들보다는 야사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웨살리 비구들은 분개하며 야사에게 거죄갈마(擧罪竭磨)를 다시 행하려고 하였다. 이 같은 시시비비로 인해 궁지에 몰린 야사는 서인도 등의 다른 비구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결국 교단의 구성원 사이에 큰 쟁점으로 발전하게 되어 웨살리에 동인도와 서인도 등지로부터 700명의 비구들이 모여 율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간으로는 8개월이 소요되었고 그 결과로 경과 율을 결집하는 제2차 결집이 결행되게 된 것이다.
당시 고명한 장로들을 중심으로 양측에 4명의 단사인(斷事人)을 각각 선출하였고, 사회는 레바타(Revata) 장로가 맡아 갈마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레바타(Revata) 장로가 십사(十事)의 항목 하나하나를 묻는 데에 대해 삿바까미(Sabbakami)장로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계율상 문제가 된 십사(asavatthuṇi)의 각 항목마다 설명을 한 후에 율에 저촉되는 근거를 심의하는 방식이었다. 십사의 내용은 전하는 문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율의 해석을 둘러싼 대립과 논쟁이 일어난 사실은 분명하다. 실제로 금은의 수수뿐만 아니라 동인도의 비구가 관행처럼 계율을 저촉했던 다른 비법을 포함한 십사는 선정된 장로들의 심의 끝에 결국 모두 불법(不法)으로 판정하였다.
여기서 비법으로 판정 받은 십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뿔로 만든 용기에 소금을 축적하는 것,
둘째, 정오가 넘은 뒤라도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를 넘기기 전에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
셋째, 한 번 탁발해서 충분한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다른 마을에 들어가 새 음식을 탁발하는 것,
넷째, 동일한 계(界; sīma)에서 따로 포살을 행하는 것,
다섯째, 교단의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 참석하지 않은 비구의 동의를 예상하여 먼저 결정한 후 나중에 온 비구에게는 사후 승낙을 구하는 것,
여섯 번째, 붓다나 아사리(阿闍梨, ācariya)의 관행을 자기도 행하는 것,
일곱 번째, 식사 후에 소유·석밀을 또다시 우유에 타서 마시는 것,
여덟 번째, 아직 술이 안 되었다고 생각된 발효한 야자즙을 마시는 것,
아홉 번째, 테두리가 없는 헝겊을 방석으로 쓰는 것,
마지막 열 번째는 금은을 보시받는 것 등이다.
이러한 십사(十事)에 대해 비법(非法)이라고 판정하였으나 금은을 받았던 비구들은 불만을 품고 1만 명이 모여 또 다른 큰 규모의 결집(Mahasangiti)을 행하였다고 스리랑카 불교역사서인 《디빠방사(Dīpavaṁsa)》 《마하방사(Mahāvaṁsa)》는 전한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단일한 교단이 최초로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되었고, 이를 인도불교사에서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한다.
이처럼 제2차 결집은 주로 계율상의 문제가 중심이었고 그 가운데 금은을 보시받아 배분하는 것이 가장 큰 쟁점이었다. 기본적으로 출가 비구의 계율정신이 무소유(無所有)에 바탕하고 있는 입장에서 출가자가 재가자로부터 금은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러한 보시물을 개인 소유 재산으로 삼는 행태로까지 율을 저촉하자 이에 대한 바른 계율에 대한 수지를 종용한 사건이었다. 이는 현재 한국 불교의 출가사회에 있어서도 관행화된 사안이라서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그렇지만 현대 학자들 가운데는 십사 논쟁은 시대 변화에 따른 계율 해석과 적용이라는 점을 들어 대중부를 진보적으로 그리고 계율을 엄격하게 고수하려 했던 상좌부를 보수적인 것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3) 제3차 결집(Tatiya saṁgīti)
인도불교사에서 제3차 결집은 제1, 2차 결집과 달리 율장(Vinaya-Piṭaka)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율장 성립이 이루어진 한참 후의 일이어서 제1차 결집이나 제2차 결집과 달리 율장 본문 등에 싣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신 율장의 주석 문헌인 《사마타빠사디까(Samatapāsādikā)》와 역사서인 《디빠방사》 《마하방사》 등에 나타난다. 제3차 결집은 모리야 왕조의 수도인 빠탈리뿌따(Pataliputta; 華氏城)에서 이루어졌기에 ‘화씨성결집(華氏城結集)’이라 하거나 1,000명의 아라한이 참여하였기에 ‘천인집법(千人集法)’ 또는 ‘일천결집(一千結集)’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도 《사마타빠사디까》와 역사서인 《디빠방사》 《마하방사》 등에 나타난 바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결집의 계기가 된 것은 불멸 후 대략 200년 후 모리야 왕조의 아소까(Asoka; 阿育王) 왕 때로, 불교를 깊이 신앙하게 된 왕은 불교 교단에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절과 탑을 세우고 승려를 잘 공양하자 6만의 외도가 들어와 7년 동안이나 포살(布薩 : Uposatha)과 자자(自恣 : Pavarana)를 시행하지 않는 등 교단이 크게 타락하였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왕은 당시의 고승인 목갈리뿌따 띠사(Moggaliputta-Tissa; 帝順)와 상의하여 교단 정화를 위한 결집을 단행하였다고 한다.
당시 많은 수의 외도(外道)들이 불교 승려로 가장하고 교단 내에 머물면서 교단의 화합을 깨뜨리고 있었다. 이러한 비구를 적주비구(賊住比丘; theyyasaṁvāsaka)라고 하는데, 적주비구란 진실한 수행에는 마음이 없고 이득이나 생존의 방편으로 또는 불교를 도둑질하기 위해 불교 교단에 출가한 자를 말한다. 즉 승복은 입고 있으되 출가자 본연의 생활을 하지 않고 생존 수단으로 위장 출가한 자를 말한다. 왕은 그들을 축출하기 위해 목갈리뿌따 띠사를 중심으로 교설의 확정과 승가의 화합을 도모하는 방안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에 목갈리뿌따는 천 명의 아라한 승려를 선출하여 스스로 상수(上首)가 되어 결집을 행하였는데, 아소까 왕 즉위 18년에 시작하여 9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결집 과정은 모든 비구 상가를 소집하여 왕이 참관하는 가운데 교리문답을 통해 적주비구를 색출했다 한다. 면전에서 불교의 대요를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써 비구들 가운데 불교의 참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도의 신앙이나 영혼론 등과 혼돈하여 답하는 자를 색출한 것이다. 이때 왕명에 의해 결집을 거부하는 몇몇 사문들은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려 6만의 비구가 적주비구로 판정되어 불교 교단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일종의 교단정화작업(佛敎淨化作業) 차원이었다. 불교 교단이 자체적으로 정화 능력이 없을 때 왕권이 불교 교단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인도불교사의 첫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적주비구를 정화하고 100명의 아라한에 의해 삼장(三藏)을 합송하는 결집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교단정화작업 차원의 결집으로 가장 중요한 결과물은 논장(論藏; Abhidhamma-piṭaka) 7론 가운데 《논사(Kathāvatthu)》라고 한다. 《논사》의 내용은 당시 비구들에게 교리문답을 통해 심사를 했던 것으로 당시의 이단적인 견해를 종합적으로 비판 정리하고 있는 논서이다. 이로써 제3차 결집에 이르러 경(經)과 율(律)과 함께 논(論)도 결집되어 삼장이 완성되고 확정되었다고 한다.
제3차 결집 이후 회의의 결정에 따라 아직 불교가 미치지 않은 인도 아대륙과 해외에 포교사 파견이 이루어졌다 한다. 이는 현재 발견된 아소까의 마애법칙(磨崖法勅) 제13장에도 아소까 왕이 인도 변경지와 다른 나라에 불교 전도단을 파견한 비문이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아소까가 불교 교단의 화합에 힘을 기울였던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비문 가운데 사르나뜨, 산찌, 꼬삼비에서 화합중(和合衆, samagga saṁgha)이 되지 못하고 교단의 분열 현상이 일어나자 승가를 파괴하는 일을 경고하는 문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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