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파리코뮌(1)
혁명과 패전
1870년 7월 3일 파리에는 프로이센의 호엔 촐레른(Hohenzollern)왕가의 레오폴트(Leopold) 공이 스페인 왕에 즉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스페인에서는 1868년에 혁명이 일어난 후 왕위가 비어 있었는데, 이제 그 자리에 프로이센 왕가의 친척이 즉위한다면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스페인의 중간에 끼에게 된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프로이센은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북부 독일연방의 맹주로서 중부 유럽의 최강국으로 등장하였다. 거기서 프로이센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을 받고 있는 남부 독일을 점령하여 독일통일을 완성하려고 프랑스를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프로인센 호엔촐레른 왕가가 프랑스의 남서쪽 스페인에까지 세력을 미치게 된다니, 프랑스로서는 정말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16세기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일 황제와 스페인 왕을 겸함으로써 일어났던 사태의 재현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즉각 프로이센에 레오폴트의 즉위 철회를 요구하였다. 다행히도 프로이센은 이 요청에 응하였다. 7월 12일 레오폴트 자신이 사의를 표명하였다. 프랑스 외교의 큰 성공이었다. 그런데 올리비에 내각의 외상 그라몽(Gramont)은 베를린 주재 베네데티(Vincent Benedetti) 공사에게 훈령을 보내어 앞으로도 호엔촐레른 왕족이 스페인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으라고 지시하였다. 이것은 외교적으로 매우 졸렬한 일이었다. 베네데티는 엠스 온천에 휴양 중인 프로이센 왕을 알현하고 그라몽의 훈령대로 왕의 약속을 요청하였다. 왕은 매우 격분하였다. 레오폴트의 사의면 충분할 뿐 그 이상의 보장이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한편 왕은 프랑스 공사와의 일을 베를린의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렸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의 좋은 구실을 잡았다고 기뻐하면서 프랑스와의 전쟁 준비 상황을 군부에 확인한 후, 독일과 프랑스의 두 국민이 모두 격분하여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게끔 전보문을 고쳐서 신문에 공표하였다. 즉 독일 국민에게는 프랑스 공사가 프로이센 왕에게 매우 무례한 언동을 했다고 하여 격분케 만들고, 프랑스 국민에게는 프로이센 왕이 공사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하여 격분케 하도록 전보문을 고친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계략은 신통하게 적중하였다.
흥분하기 잘하는 프랑스 국민이 먼저 폭발하였다. 프랑스 의회는 흥분 속에 7월 15일과 16일 이틀간에 전시 채무를 가결하고 19일 독일에게 선전을 포고하였다. 프랑스 의회의 성급한 행동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티에르 같은 노련한 정치가들은 그라몽의 지나친 외교 행동을 나무라고 의회의 성급한 행동을 경고하였다. 프랑스는 이제 유럽 대륙의 최강국을 적으로 싸우게 되었지만 실은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우선 외교적으로 프랑스는 아무 동맹국도 없었다. 프로이센의 침략에 대비하여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한 일이 있기는 했으나 결국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외교상의 불비(不備)보다 더 중대한 실책은 군사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앞서 얘기한 닐 법안의 부결로 결국 프랑스는 군비 증강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데, 그 불행의 중요한 원인은 이상하게도 프랑스 군대에 대한 과대 평가와 프로이센 군대에 대한 과소평가에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초에 보름만 주어지면 40만 병력을 국경까지 동원할 수 있다고 장담한 일이 있는데, 이제 막상 실전에 임하자 보름간 동원한 병력은 25만뿐이었다. 이것은 그가 프랑스의 군사력을 얼마나 크게 오산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주는 하나의 방증이었다. 이에 반하여 당시 프랑스의 선각자적인 정치가 프레보스트 파라돌(Lucien Anatole Prevost-Paradol)은 프랑스의 군사력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다. 그는 “전에는 대륙 국가들의 군사력을 논하게 되면 프랑스가 유럽 동맹군에 대항할 수 있을까가 유일한 문제였느느데, 이제는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이길 수 있을까가 문제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그는 프랑스의 군사력을 결코 과신학지 않고 있었으나 프랑스 국민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의 군사력은 예나 다름없이 막강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제 전선의 소식은 패전만을 잇달아 전해왔다. 독일군은 훈련과 장비의 기동성 민에서만이 프랑스군에 우월한 것이 아니라 병력과 군비에서도 우월하였다. 프랑스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독일군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이 전황의 불리함은 파리 시민에게 제정에 대한 불신을 자극하였다. 8월 7일 파리에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8월9일 입법원의 임시 회의에서 공화파 의원들이 행정권을 15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위임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이 안을 190대 53으로 부결하고, 패전의 책임을 올리비이ㅔ 내각에 전가시켜서 그를 파면하고, 보나파르트파의 팔리카오 백작(Comte de Palikao)에게 조각을 명하였다. 그러나 새 내각은 비상사태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우유부단하였고 또 정세 판단도 정확하지 못하였다. 파리 시민의 동향은 날로 제정 반대로 기울어졌다. 의회에서도 공화파 의원들의 발언권이 강해졌다. 파리 주재 영국 대사는 본국 정부에 “제정은 날로 쇠퇴해 가고 새 외상 투르 도베르뉴(Tour d'Auvergne) 공만이 아직도 재정에 충성스런 발언을 할 뿐이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제국은 종말에 이르렀다는 신념이 갑자기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8월 20일에는 가장 중요한 요새 메츠에서 바젠(Francois Achille Bazaine) 원수 휘하의 군대가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군의 주력부대인 마크마옹(Marie Ddme Patrice Maurice de MacMahon) 원수의 부대가 바젠 부대를 구출하려고 이동하다가 8월 31일과 9월 1일 벨기에의 국경 근처 세당에서 독일군과 일대 격전을 펼쳤다. 9월 2일 마크마옹 원수 휘하의 전 부대는 황제 나폴레옹 3세와 함께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장군 39명, 장교 2,700명, 사병 8만 4,000명이 황제와 함께 고스란히 포로가 된 것이다. 프랑스의 긴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굴욕적인 참패였다. 파리 시민은 이런 참패를 가져온 제정을 더 존속시킬 수 없다고 다짐하였다. 9월 4일 드디어 혁명이 일어났다.
헤일(Richard Hale, Jr.은, 당시의 파리 주재 미국 대사 워시번(E. Washburne)이 목격한 바에 따라, 1870년 9월 4일에 프랑스 제2제정이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선포되는 경과를 흥미 있게 전해 주고 있다. 나폴레옹 3세가 세당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극비리에 황비 외제니 드 몽티조에게 전해진 것은 9월 3일 저녁 6시였다. 섭정의 자격으로 외제니 드 몽티조의 주제하에 각의가 열렸으나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어 심야에 입법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공화파의 두목 파브르(Jules Fabre)가 제정의 종결과 초당적인 임시 국방정부의 구성을 동의하였다. 이 동의에 대한 표결은 보류되었다. 그날 밤 파브르의 동지이며 공화파의 젊은 투사 강베타는, 의사당 주변의 불온한 공기 속에 웅성거리는 군중에게 공화국 수립을 위한 투쟁의 의사를 표명하였다. 9월 4일 일요일 아침 공화파의 한 조간신문은 국민 방위대에게 무장은 하지 않더라도 정복 차림으로 입법의회 의사당으로 집합했으면 하는 뜻을 암시하였다. 가두의 폭력에 의한 혁명의 쟁취는 1789년 7월 14일 이래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이었다. 공화파는 이제 또 그 방법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 시가에 숨가쁜 흥분의 순간들이 흘러가고 있는 9월 4일에 리옹 시가 공화정을 선포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황비는 총총히 영국을 향해 도망했다. 입법의회와 파리 시는 군중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789년 7월과 1848년 2월이 반복된 것이다.
의회는 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군주으이 환호 속에서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크와 그 일가가 이제는 더 이상 프랑스를 통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포했으나, 흥분한 군중은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라고 요구하였다. 파브르는 군중에게 ”공화국의 선포는 여기서 할 것이 아니라 시청에서 해야 합니다. 우리 다 거기로 갑시다“라고 하였다. 파브르와 강베타는 군주으이 선두에 서서 시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공화국을 선포하는 동시에 파리 시 출신 의원들로 구성되는 임시 정부의 조직을 발표하였다. 이 모든 것은 군중의 압력과 환호 속에서 진행되었다. 의회는 시청에서 발표한 임시정부를 추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준에 반대하는 의원도 있었으나 티에르는 기정사실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타일렀다. 강베타는 내무부로 가서 전국의 모든 도지사에게 공화국의 수립과 임시 국방정부의 성립을 알리는 동시에 정부 수반에 파리 시 군정 장관 트로쉬(Louis Jules Trochu) 장군이, 내상에 강베타 자신이 취임했음을 통첩하는 전보를 쳤다. 이와 같이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제국은 무너지고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뷔리가 지적한 대로 이 혁명은 1848년 2월혁명과 흡사했다. 두 혁명 모두 공화주의자들이 민첩하게 행동하면서 갑작스레 집권했고, 집권 과정이 두 번 다 합법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았으며 군중이 의사당에 진입해 정상적인 의사 진행이 불가능한 가운데서 입법부의 기능과 권위를 군중에게 빼앗겼고, 또 혁명의 성취와 공화국의 선포가 두 번 다 선례에 따라 시청에서 야당 의원들에 의해 하나의 의식처럼 행해졌다. 이리하여 혁명의 전통이 하나의 의식으로 바뀌었다. 1792년의 공화주의 혁명의 전통은 이제 19세기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코뱅파와 바뵈프의 혁명적 전통은 결국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프랑스의 패배로 끝나자 파리 코뮌을 일으키게 한다. 그것은 마치 1848년 혁명이 6월 폭동을 일으켰던 것과 흡사했다.
여기서 1871년 9월의 혁명은 1792년과 1848년을 연상케 하였다. 특히 독일과 치른 전쟁은 1792년을 방불케 했는데, 임시 국방 정부의 다음과 같은 첫 선언은 1792년을 그대로 연상케 하였다.
공화정은 1792년의 침략에 대항하여 승리하엿다. 이제 공화정이 선포되었다. 공화정은 언제나 민중의 안전과 권리의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이 선언은 1792년 때처럼 프랑스 국민을 분기시켰고 국민 총동원에 의한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게 하였다. 이러한 확신은 각의의 인준을 거쳐 외무 장관 파브르가 해외 공관장들에게 보낸 유시에 잘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국토의 1인치도 요새의 돌 하나도 양보하지 않는다......파리는 석 달은 견딜 수 있다. 만일 파리가 함락된다 해도 프랑스는 언제든지 파리의 부름에 응하여 그 보복을 하리라. 프랑스는 싸움을 계속하고 침략자는 망할 것이다.
이렇게 1870년 9월의 혁명은 그 진전 과정만을 보면 공화주의의 전통에 따라 혁명적이고 매우 과격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1870년 9월에 구성된 임시 국방정부는 1792년의 공화국처럼 과격하지도 않았고 1848년의 공화국처럼 분열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새 정부는 출발부터 대체로 온건한 공화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리 출신 입법 의원들은 오를레앙파의 티에르를 제외하면 모두 공화주의자였으나, 그들 공화주의자 가운데서 출판법 위반으로 복역 중에 있다가 풀려나온 블랑키파의 로슈포르를 제외하면 모두 온건파에 속하였다. 그리고 그들 온건 공화파 사이에는 날카로운 의견의 대립도 분열도 없었다. 이 사실은 다음 해 1871년 2월 8일 총선거의 결과로 출현하게 될 보르도 의회의 보수성과 함께 1870년 9월에 선포된 새 공화국의 보수적인 방향 설정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파리 민중에게는 못마땅하여 파리 코뮌의 원인이 된다.
9월 9일 정부는 10월 중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공포하였다. 국방정부가 비록 국민의 대표자인 파리 출신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제2제정의 입법의회 의원으로서의 대표자였고 또 공화국의 선포는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새 공화국 정부는 의당 국민의 대표 기관에 의하여 승인된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 바로 새로 집권한 공화주의자 자신의 민주주의적 기본 원리였다. 또 독일과 끝까지 항전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신임에 의한 합법 정부의 수립이 긴급히 요청되었다. 따라서 외무장관 파브르는 페리에르에서 비스마르크와 회견하고 총선거를 위한 임시 휴전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한편 공화주의의 강력한 중심지 파리는 공화정을 선포함으로써 사기가 크게 올랐다. 파리 시민은, 비록 세당에서 근 10만이 포로가 되고 또 메츠에서 바젠의 군대가 적에게 포위되어 있더라도, 전체 국민의 무장 항쟁으로 능히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신념은 파브르가 해외 공관장들에게 보낸 공한에도 잘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독일군은 파리를 향하여 물밀듯이 쳐들어오고 있었다. 파리가 곧 적에게 포위될 위험이 눈 앞에 다가왔다. 적에게 포위되더라도 정부는 철수하지 않고 파리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철수할 것인가? 머물 경우 누가 어떻게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할 것인가? 또 철수할 경우, 수도의 정치는 극좌파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험이 크고 사회적 무질서와 시민의 사기 저하를 막을 길이 없을 것이었다. 여기서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정부는 수도에 남되 가장 나이 많은 법무 장관 크레미외와 국방 장관 푸리숑(Fourichon) 제독 등 3인을 정부 대표로 투르에 자리잡게 하였다. 이들이 투르로 떠난 지 이틀 뒤 파리는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당시 유럽 대륙 최대의 도시이며 유럽 문화의 중심이고 세계 굴지의 강대국의 수도가 그 정부와 함께 그 시민이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었다. 당시 세계의 어느 누구도 파리가 포위된 상태를 4주일 이상 견딜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파리 정부의 힘은 파리 이외의 지역에는 미치지 못했고 투르의 3인의 대표의 권위는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얻기 전에는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너무나 미약하였다. 투르의 정부 대표는 강화되어야 하고 국민 총동원은 실시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파리 정부의 누군가가 투르로 파견되어야 했다. 파리 정부는 가장 왕성하고 정열적이며 또 지방의 동원에 책임이 있는 내무 장관 강베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적의 포위를 뚫을 길이 없었으므로 기구를 타고 적의 위를 날기로 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항공 기술로는 극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강베타는 그 모험을 맡고 나섰다. 그리하여 강베타는 10월 10일 기구를 타고 파리를 빠져나와 투르로 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노약한 국방 장관 푸리숑의 뒤를 이어 스스로 국방장관을 겸하고 프리시네(Charles de Freycinet)를 국방 차관에 임명하여 밀려오는 독일군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전세는 불리하기만 하였다. 이때 국민의 전폭적 지리를 얻기 위한 총선거의 필요성이 다시 주장되었으나 강베타는 그런 의견에 반대하고, 오로지 끝까지 항전에서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고 전쟁 수행에만 전념하였다. 강베타는 많은 청년을 동원하여 전투 태세를 다시 갖추고 새로 루아르군을 창설하였다. 그의 불철주야의 분투와 정력은 많은 국민을 분기시켰다. 그러나 파리를 포위한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으려는 작전을 수차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또 10월 말에는 바젠 원수의 17만 9,000 병력이 메츠에서 항복하였다. 메츠의 항복과 함께 독일군의 파리 포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일시 반격에 성공했던 루아르군도 후퇴하기 시작하고, 투르의 ‘3인 대표’도 보르도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동부군을 편성하여 벨포르를 탈환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격퇴되었다. 파리는 독일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용감한 저항을 늦추지 않았다. 파리는 시 전체가 약 10미터 높이의 성벽으로 방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벽 앞에는 3미터 높이의 호가 파여져 있고, 호에서 1.5킬로미터 내지 5킬로미터 전방에는 사방에 열여섯 군데에 견고한 요새가 구축되어 있었다. 요새마다 50문 내지 70문의 대포가 적을 겨냥하고 있었다.
일찍이 나폴레옹 3세는 낡은 파리 시가를 철저히 정비하여 도시 중심에 사는 노동자를 변두리로 이주시켜 1870년 당시 파리는 부자구와 빈민구가 확연히 구별되어 있었는데, 그는 빈민구에는 국민 방위대를 조직하지 않았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파리의 국민 방위대는 부자구의 2만 4,000명 뿐이었다. 그러나 9월에 공화국이 선포되고 임시 국방정부가 수립되자 파리의 모든 구에 국민 방위대가 조직되어, 병력이 일약 9만으로 늘고 다시 9월 말까지느ㄴ 36만으로 팽창하였다. 그리고 파리 시내에는 갖가지 화포가 약 3,000문이 있었고 갑자기 증원된 국민 방위대도 무장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9월 중순이 되면 파리는 이미 완전히 하나의 큰 요새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파리가 포위되기 전에 정부는 독일군의 포위에 대비하여 파리 주변에서 적군의 식량과 연료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파리 시내로 들이게 하였다. 그 결과 양이 25만 마리, 소가 4만 마리나 파리 시내에 몰려들었다. 이것은 정부 당국이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귀중한 식량이 되었다. 그리고 파리 교외의 모든 숲의 날짐승을 철저히 사냥하였다. 적군의 밥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파리 시의 인구도 예상 밖으로 늘었다. 전쟁이 나자 주변의 주민이 파리가 안전하다고 피신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포위 당시의 인구는 200만이나 되었다. 파리가 적의 포위에 견딜 수 있는 기간을 정부는 최대한 80일로 잡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넉 달이나 걸렸다.
외부와의 모든 접촉이 끊긴 파리는 고독과 저느이가 뒤섞인 야릇한 열기로 들끓고 있었는데, 국민 방위대의 유력한 지도자이며 로슈포르의 친구인 플루랭스(Gustave Flourens)를 선두로 하는 공화 좌파의 움직임이 9월 초 이래의 혁명 열기를 한층 가열시키고 있었다. 플루랭스는 10월 5일 약 1만 명의 방위대의 선두에서 시청으로 행진하여 정부 수반 트로쉬에게, 어째서 파리의 포위를 뚫는 출격을 하지 않으며 방대한 방위대의 병력을 썩히고 있는지, 또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지 않는지를 물었다. 동시에 국민 방위대에 의한 즉각적인 출격과 방위대에 대한 새 제복과 새 무기의 지급 및 파리의 즉각적인 선거를 요구하였다. 정부는 투르 정부에게 지방의 동원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과 시 선거를 곧 실시할 것을 약속햇으나,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즉각적인 출ㅇ격이나 신식 무기의 공급은 거절하였다. 국민 방위대 사이에는 자신들의 군사적 가치에 대한 좌절감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혁명과 전쟁의 열기와 함께 좌절감과 고독을 술집에서 폭발시켰다. 술집은 그들의 토론장으로 바뀌었다. 한편 과격파들의 클럽은 혁명의 선전장이 되었다. 저녁이면 토론과 선전의 열기가 클럽을 메웠다.
이러한 분위기의 파리에 메츠의 바젠 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6,000명의 장교와 17만 3,000명의 사병이 고스란히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항복의 이유가 바젠 원수의 반역 행위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가 하면 파리 정부가 바젠 원수의 항복 굫섭에 은밀히 응했다는 소문도 퍼졌다. 동시에 정부의 진정한 의도는 ‘끝까지 항전’에 있지 않고 조기 휴전에 있다는 비난의 소리가 전차로 높아갔다. 그리고 정부의 휴전조건에는 알자스의 할양과 막대한 배상금이 걸려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거기서 파리 시민은 10월 31일 굴욕적인 휴전에는 결코 응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앞서 9월 15일에 파리의 20개구 대표자들이 구성한 20구 중앙위원회는 이날 정부에 48시간 이내에 파리 코뮌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고, 플루랭스는 국민 방위대를 이끌고 와서 공안위원회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수만의 군중이 파리 시 청사를 둘러쌌다. 청사 안에는 갖가지 과격파들이 제각기 새 정부의 구성을 발표했는데, 종류가 스물여섯 가지나 되었다고 하니, 그 혼란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오후 4시경에는 시 청사가 완전히 시위 군중에게 제압되고 붉은 기가 게양되는 형편이었다.
이 혼란에서 탈출한 정부 수반 트로쉬는 국민 방위대를 소집하여 밤 1시에 시 청사를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부 측을 지지하는 대대들과 반대하는 대대들 사이에 유혈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이윽고 과격파와 정부 사이에 타협이 성립되었다. 코뮌의 즉각적인 선거와 정부 내각의 선거가 약속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 약속을 교묘히 어겼다. 코뮌 선거는 파리 구장 및 부구장 선거로 탈바꿈하고 정부 선거는 주민 투표로 탈바꿈하였다. 11월 3일 “파리 주민은 국방 정부의 권력을 지지하는가 아닌가”의 형식으로 국방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56만믜 찬성과 5만 3,000의 반대로 신임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5일에서 8일 사이에는 구장 및 부구장의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는 정부의 완벽한 승리가 아니었다. 당선자 가운데는 10월 31일의 주동자들이 꽤 섞여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계속하여 파리의 과격화에 앞장서게 된다.
11월의 파리는 추위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파리 시민의 생활은 나날이 궁핍해져갔다. 국민 방위대와 시민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는 출격전을 정부에 촉구하였다. 11월 29일부터 드디어 대출격전이 전개되었다. 비장한 각오를 시민에게 알리는 뒤크로(Auguste Alexandre Ducrot) 장군의 격문과 함께 파리 시 전체는 가슴을 안고 출격군의 승리를 빌었다. 이날만큼 파리 200만 시민의 생각이 한군데로 모아진 일은 일찍이 없었다. 온건파와 과격파의 차이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200만 시민의 간절한 소원은 사흘 뒤 무산되었다. 출격전은 1만 2,000의 장병을 잃고 실패하고 말았다. 12월 5일에는 강베타의 증원군이 오를레앙 시를 다시 독일군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파리는 절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암담할 뿐이었다. 게다가 추위와 물자의 궁핍이 파리 시민을 더욱 괴롭혔다. 물가는 매일같이 치솟았다. 개, 고양이, 쥐 고기까지 매매되었다. 다음의 표는 9월 말과 12월 중순의 물가를 비교하고 있는데, 물가 폭등은 대출격의 실패 이후 특히 격화되었다. 주부들은 가족의 입에 풀칠이라도 해주려고 아침 일찍부터 종일 얼어붙은 거리의 정육점, 빵집, 장작 가게 앞에서 줄을 지었다.
생활 물자의 궁핍은 나날이 극심해졌다. 12월 27읿주터 독일군이 파리를 폭격하기 시작하자 가게 앞에 줄을 짓는 것조차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장정들은 모두 참호 안에서 총대를 들고, 가족들은 모두 추운 방 안에서 굶주림을 참고 있어야 했다. 파리 시민이 경험한 그 전쟁은 인류 역사상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전쟁에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층은 노약자와 유아들이다. 파리의 포위 기간에 유아 사망이 4,800명이었는데 원인은 모두 영양 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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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하순 12월 10-24일 (프랑)
버터 4.00(1 파운드) 35.00
달걀 1.80(12개) 24.00
닭 6.00 26.00
토끼 8.00 40.00
치즈 2.00(1파운드) 30.00
돼지고기 1.10(1파운드) 품절
고양이 -- 6.00(1파운드)
쥐 -- 0.50
감자 2.75(1부셀) 15.00
당근 1.20(1상자) 2.80(1파운드)
배추 0.75(한 포기)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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