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크 여행-6월19일
헤미스 곰파로 가는 길
라다크 레Leh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아내와 나는 서둘러 헤미스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오래된 미래의 땅 레에서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헤미스 사원이었다. 그 유명한 쎄추Tse Chu 축제가 열리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불교 수행을 하며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헤미스로 가는 미니버스는 만원이었다. 헤미스 축제는 인도 최대의 가면 축제다. 쎄추 축제 기간에는 전 세계의 사진작가들이 해발 3,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열리는 희귀한 가면 축제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몰려든다. 신비한 히말라야산맥으로 둘러싸인 헤미스 곰파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후 탓에 인도 내륙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몰려들어 초만원을 이룬다.
라다크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악령과 싸운 전설적인 구루 파드마삼바바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6월에서 7월 사이(티베트 5월경)에 열리는 축제이다. 쎄추라 불리는 이 축제는 원래 1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원숭이해에 열렸으나 최근에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매년 열리고 있다.
헤미스 곰파는 라다크의 중심인 레에서 50km여 떨어진 헤미스 지역에 있다. 우리는 스리나가르에서 만난 유럽인 여행자 샌드라, 아가와 함께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헤미스로 향했다. 버스는 인더스강을 따라 꼬불꼬불한 길을 천천히 달려갔다. 워낙 깊숙한 곳에 있는 헤미스는 마치 낯선 행성으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
헤미스로 가는 길에 나는 예수님을 생각했다. 또한 130여 년 전 예수님의 행적을 찾아 이 길을 갔다는 러시아 탐험가 니콜라스가 떠올랐다. 미니버스를 타고 이 길을 가는 나 역시 니콜라스와 똑같은 심정이었다.
예수의 알려지지 않는 생애
-니콜라스 노도비치의 증언
2000년 전 과연 예수님이 이 길을 걸어갔을까?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스 노토비치(Nichols Notovitch)의 저서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The Unknown Life of Christ>에 의하면 예수는 14세에서 29세까지의 16년 동안 예수는 신드(Sindh, 파키스탄 인더스강 하류 네 개 주중의 하나)를 지나 인도로 가서 베다를 공부하고 이곳 북인도로 헤미스 곰파로 와서 불교 수행승이 되어 불교를 공부했다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12살 때에는 사원에 있었다고 시술되어 있다. 그리고 서른 살 무렵에는 요르단강 강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사이 16년 동안의 행적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16년 동안 누가복음에는 ‘지혜와 정신적 능력을 키웠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1887년 러시아의 역사가이자 탐험가인 니콜라스 노도비치는 그동안 예수가 인도에서 구도 생활했으며, 불교의 라마승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니콜라스는 헤미스 사원에서 라마승이 전해준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두 권의 기록서를 연구하여 화제의 책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를 발간하였다.
나는 니콜라스가 걸어온 같은 길을 따라 카슈미르를 지나 라다크로 왔다. 그가 헤미스 곰파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발견한 사실은 흥미진진하기도 하지만 어떤 게시 같은 일이기도 하여 목영일 박사 저, <예수의 마지막 오디세이> (Jusus’ Final Odyssey) ‘제4장 예수는 헤미스 복음서에서 말한다’를 발췌하여 그의 행적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이 역사소설 저자 목영일 박사님은 1936년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해방 후 남하하여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를 졸업, 군필 후 도미 뉴욕대에서 공학 석, 박사 학위취득, MBA 취득, 듀뽕(Du Pont)사 중앙연구소 수석 연구원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귀국하여 국방과학연구소 연구개발 부장, 아주대 교수, 대학원장, UC버클리 초빙교수, 유네스코 아, 태지역 에너지기구 사무총장, 한국화학공학회, 생물공학회, 기술경영경제학회 학회장,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상, 국방과학상 수상,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전국 과학기술인 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셨던 사회지도자급 인물로 인류의 위대하신 대스승 '예수'에 대해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소설 역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출처] < 예수의 마지막 오디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1회|작성자 내용 인용)
1890년 봄 30대 초반의 가냘프게 보이는 몸집에 안경을 걸친 30대 초반의 한 낯선 외국인(니콜라스 노도비치)이 말을 타고 말과 뒤로 또 한 마리의 말을 여벌로 끌고 산소마저 희박한 히말라야 언덕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몇 년 동안 별러오던 여행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이 그와 흡사하다고나 할까? 나 역시 몇 년 동안 벼르고 벼르던 여행길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갔지만 나는 말 대신 덜덜거리는 버스를 타고 왔다.
그는 처음에는 파리나 런던 같은 화려한 도시를 여행할까 하다가 대도시에서 북적대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 온 자신을 생각하며 목적지를 바꾸었다. 그는 한적한 시골 지역을 몇 달이든 느긋하게 발길 닿는 대로 여행하고 싶은 마음에 히말라야의 고산지역을 택했다. 하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가냘픈 이 이방인 젊은이는 처음 예상과는 달리 여행이 점점 힘들어지자 그냥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라다크로 방향을 돌렸다. 나는 아픈 아내와 단둘이서 티베트 라싸를 여행하고 에베레스트 초모랑마 베이스캠프를 넘어 부처님이 행적을 따라 네팔, 인도 룸비니, 보드가야, 델리, 다람살라, 카슈미르, 라다크, 레에 이르기까지… 그 길은 무모하리만큼 위험하고 고단한 순례길이었다. 길고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이곳 헤미스로 가고 있었다. 어쩌면 안경을 쓰고 내 가냘픈 모습이 니콜라스를 닮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니콜라스는 길을 따라오다가 라다크 물벡(Moulbeck) 길거리에서 초로의 한 라마승을 만났다. 물벡은 미륵부처 상으로 유명한 곰파가 있는 곳으로 우리가 카슈미르에서 레로 오는 길에 잠시 쉬었단 곳이다. 물벡에서 그는 목이 몹시 말라 보이는 라마승에게 물통을 건네자, 늙은 라마승은 단숨에 반 이상을 들이키고 한숨을 돌린 나더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내가 거처하고 있는 수도원이 있으니 묵고 가게.”하고 말했다. 힘든 여정에 지친 그는 라마승을 따라가서 좀 쉬고 싶었다. 동행을 하던 길에 라마승이 대뜸 말을 건넸다,
“당신네 백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이 이곳에서 수행 생활을 하셨다는 건 전혀 알지 못하더군.”
노도비치는 속으로 믿어지지 않았지만 반신반의한 태도로 말했다.
“스님, 그건 참으로 놀라운 얘기로군요. 입증할 수만 있다면 말이죠.”
그러자 라마승은 오히려 정색하며 말했다.
“예수님에 관한 얘기는 여기 수행승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오. 헤미스에 있는 수도원에 고문서가 있는데, 예수님이 이곳에서 불교 수행을 하신 얘기가 죄다 적혀있으니 말이오.”
라마승에 의하면 헤미스 사원에 보관되 있는 8,400개의 고문서 가운데 불교도로서 인도에서의 예수 생애가 기록된 것이었다. 흥분과 궁금증으로 밤을 지새운 니콜라스는 다음 날 아침 서둘러 헤미스 사원으로 출발하였다. ‘도대체 예수님이 이곳에서 불교 수행을 하셨다는 게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 어쨌든 가서 내 눈으로 직접 보면 확인이 되겠지.’
흥분을 억누르기 힘든 그는 헤미스 사원에 도착하여 수도원장을 만났다.
“스님, 저는 예수님의 행적이 담긴 그 문서를 한번 보려고 이렇게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너그러운 부탁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라마 수도원장은 이 낯선 외국인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글쎄, 그런 문서가 있다면야 왜 안 보여드리겠소? 그렇지만 그게 다 헛소문이라오. 그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소?’
괜한 소문에 허탕을 친 니콜라스는 헤미스 사원을 떠났다. 그는 되돌아가는 도중 내내 그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그들은 왜 그 문서를 보여주지 않을까? 도대체 문서가 있기는 한 걸까? 물벡에서 만났던 노승이 나에게 실없는 소리를 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고 가던 중 그 순간, ”흐으억! 으아악!“ ”히히이잉!“ 비명소리와 함께 그는 말과 함께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그는 일어서려다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왼쪽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마침 천만다행으로 지나가던 라마승이 그를 발견하고 그를 다시 헤미스 사원으로 데려가 간호를 해주었다.
부상이 회복되는 동안 그는 라마승들과 사귀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장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확대경을 선물로 주었다. 눈이 어두웠던 그는 글자들이 왕거미만큼 큼지막하게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수도원에서 머물러 온 지 한 달 반 남짓, 어느덧 이 러시아 여행자의 다리도 회복되었다. 그는 정들었던 라마승들에게 내일은 떠나겠다고 일일이 인사를 하였다. 모두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날 밤, 새벽길을 떠나려 그가 일찍 잠자리에 막 누우려는 순간, 도서관을 담당하는 라마승이 고문서 뭉치를 한 아름 가득 안고 들어와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 고문서 몇 장을 집어 들고 그 라마승의 도움을 받아 가며 더듬더듬 읽어 나가다 예수를 가리키는 대목을 만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듯 뜨거워지고 전율로 부들부들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신약성서에서 삭제당한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즉 14세에서 29세까지의 16년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예수의 사상적 기반과 그 형성과정을 알려주는 더없이 귀중한 사료이다. 내용에서도 기존의 신약 4 복음서를 능가하는 '제5 복음서 the Fifth Gospel'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서구인들은 기독교의 약점으로 제기되던 예수의 불교 수행에 관한 고문서들을 훔치거나 말살시키는 작업을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펼치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라마 학승(學僧)의 도움을 받아 가며 불교 승려 역사가들에 의해 티벳어로 쓰인 많은 고문서의 내용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문서의 중요한 부분을 옮겨 적었다. 그는 이 문서에서 예수가 인도, 페르시아, 네팔,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견된 고문서는 운문(韻文)으로 되어 있었으며 제5편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사가 13살이 되자 이스라엘 관습에 따라 결혼해야만 하였다. 그날그날 겨우 먹고사는 그의 양친에게 이 영리한 아들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귀족, 부자들이 찾아왔다. 이사는 몰래 집을 나가 예루살렘을 버리고 동으로 가는 상인을 따라 인도에 갔다. 그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은 의욕에 불탔으며, 붓다의 가르침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 고문서에 의하면 그때 예수는 신드(Sind, 파키스탄 남동부 주)를 지나 오릿사Orissa, 인도 동부 주)로 가서 베다를 공부한다. 그 후 예수는 6년 동안 자간나스, 라자그리하, 베나레스(지금의 인도 바라나시)등지에서 베다를 공부하고 위대한 스승들을 찾아가 배운다. 그의 지식과 교사로서 능력도 수련되었다. 예수는 요가의 대가들에게서도 배운다. 예수는 베다를 열심히 공부하고 브라만 사제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는 브라만의 계급제도와 노예제도에 반발하게 된다. 그는 카스트제도에 의해 천민에게는 금지되어 있던 신성한 베다를 천민들에게 가르쳐 주거나 인간의 평등을 설교하여 브라만 사제들과 지배계급의 노여움을 사고 목숨까지 위험한 지경에 놓이게 된다. 그는 북인도로 도망쳐 이때부터 그는 불교 수행승으로서 불교를 공부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네팔과 티베트를 여행하며 가르침과 치료를 베풀어 지역주민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는 소아시아로 가서도 메시지를 전달하다가 고국으로 돌아간 것은 29세 때라고 고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중요 문서를 발견한 공적을 기려 그 고문서를 노토비치 복음서라고 명명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니콜라스 노토비치는 발견지의 이름을 따서 헤미스 복음서, 또는 제5 복음서로 불러줄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1858년 크리미아 Crimea의 부유한 러시아 가문에서 태어난 니콜라스 노토비치는 어린 시절 유대교에서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저널리스트 겸 정치평론가로 유럽에서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소위 헤미스 복음서의 발견 때문이었다.
노토비치가 고문서의 번역을 책으로 세상에 알리려 하자, 기독교에서는 온갖 방해 공작으로 출판을 방해하였다. 노토비치의 발견을 은폐하기 위한 갖가지 시도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그가 헤미스 사원을 방문한 적이 없다든지 심지어는 그 사원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지금 내가 찾아가고 있는 헤미스 곰파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도).
노토비치에게는 신약성서에서 삭제되어버린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Jesus' Missing/ Lost Years'를 복원하여 예수의 전 생애를 담는 완전한 복음서를 이룩한다는 사명 의식이 있었다. 종교 세력에서는 그에 대한 매수 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문제의 문서를 사들여 모조리 파기하려 하였다. 처음에 노토비치는 교황과 친한 여러 추기경에게 그 자료를 보여주었다. 파리의 로텔리 Rotelli 추기경은 그 자료의 출판은 수많은 적을 만들 뿐 아니라 이익이 없으니 돈이 필요하면 그 자료수집에 쓴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여 많은 보상을 할 테니 대신 그 자료를 양도하라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노토비치는 한 가톨릭 신학자가 바티칸 당국 역시 예수의 동방 여행과 관련된 비밀 기록을 열람이 금지된 극비서류로 분류하여 비밀 서고에 소장하고 있다고 그에게 귀띔을 해주자, 이에 고무되어 그는 끝까지 출판을 강행하기로 마음먹는다. 또한 프랑스학계의 동양학자 에르네스트 르낭 Joseph Ernest Renan은 그 고문서를 자신이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발표하겠다고 제의하였다. 노트비치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노토비치는 예수 연대기의 발견자로 머무는 데 그치고, 거기에 대해서 논하고 보급하는 영광은 르낭이 독차지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1894년 니콜라스 노트비치는 마침내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The Unknown Life of Christ」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예수가 인도와 티베트에서 불교 수행을 하였다는 내용을 소개한 것으로, 발간 즉시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894년 10월 옥스퍼드 대학의 유명한 동양학자 막스 뭘러 Maz Muller는 노토비치의 저서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막스 뭘러의 친구인 아베다난다 Swami Abhedananda가 헤미스에 가서 문제의 고문서를 직접 확인하여 뭘러를 놀라게 하였다.
성서에 단 한 줄도 기록이 없는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즉 14세에서 29세까지의 16년 동안 예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예수가 생업에 종사하며 나사렛 집에 머물렀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단 한 줄의 기록에도 근거하지 못하는 그러한 주장은 기독교에서 믿고 싶은 희망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 이상 아무런 의미도 설득력도 없다. 니콜라스 노토비치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핍박받았고 그래서 고독했다. 그는 만년에 자신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술회한 적 있다. 보디사트바 Bodhisattva (보리살타(보살): 菩提薩埵) 예수, 즉 성인 聖人 예수는 동방에서 수행할 때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종종 고난에 맞닥뜨리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진리는 우주의 법칙이며 그 어떤 힘도 진리를 침묵시킬 만큼 강하거나 영속적인 것은 없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진리를 따라 행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행복하다." (담마파다 (DHAMMAPADA) 13:2)
예수는 이 말을 로마의 속박에 묶여 신음하고 있는 조국과 동포들의 현실에 맞게 고쳐 말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요한복음 8:32&18:37)
한편, 인도, 네팔, 티벳 지역에서는 같은 시기에 예수가 머무르며 수행하였다는 기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신학자가 이 시기에 예수가 동방에 가 있었다는 학설을 수용하고 있는 점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인도와 티벳에서의 기록에는 예수를 이사 Isa, Issa 또는 이사 마시 Issa- Masih로 부르고 있다. 오늘날에도 인도에서는 예수를 이사 또는 유즈 아사프 Yuz Asaf, Yus Asaph라 부른다. 이슬람에서는 유수 마시 Yusu-Masih등으로 부른다.
-이상의 내용은 목영일 박사의 <예수의 마지막 오디세이> ( Jesus' Final Odyssey )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악귀를 몰아내는 헤미스 곰파 가면 축제
나는 목영일 박사의 <예수의 마지막 오디세이> 내용을 회상하며 예수가 걸어갔을, 그리고 러시아 작가 니콜라스 노도비치가 걸어갔을 길을 다소 흥분된 마음으로 가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나도 예수님의 행적이 담긴 그 고문서를 확인하고 싶었다(행운이 따라 준다면… 나는 다르질링 부띠아버스터 곰파에서 ‘티벳 사자의 서’ 원본인 ‘바로도 퇴돌’을 친견했던 행운이 있다). 헤미스 곰파는 워낙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침내 길이 끝나는 곳, 깎아지른 암벽 아래, 거대한 성처럼 보이는 헤미스 곰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헤미스 곰파는 마치 거대한 주상절리가 사선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에 요새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곰파(Gompa)’란 ‘고독한 은둔자’란 뜻이다. 라다키들은 찾아가기도 쉽지 않은 깊은 오지, 찾아오는 사람도 드문 외부와 단절된 곳일수록 수행의 성취도가 높아진다고 믿고 있어,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곰파를 세웠다. 헤미스 곰파는 라다크 지방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으로 17세기 남걀왕조 시대에 세워졌다. 헤미스 곰파는 까규파의 한 지파인 드룩파의 중심 사원으로 남걀왕조의 지원 속에 크게 번성했으며, 그 이름을 따서 이 지역도 헤미스라 부르게 되었다.
헤미스 곰파가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다. 그중 하나는 예수가 부활한 뒤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사원이라는 것, 호기심이 많은 나는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다.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스 노도비치처럼…
다른 하나는 인도 최대의 가면 축제인 쎄추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티베트불교의 위대한 성자인 파드마삼바바의 탄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헤미스 축제는 원래 1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원숭이 해에 열렸지만,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최근에는 매년 여름 6~7월(티베트력 5월)에 열리고 있다.
벌써 많은 지프가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미니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헤미스 곰파를 향해 걸어갔다. 헤미스 곰파는 길이 끝나는 곳 깎아지른 거대한 암벽이 마치 성벽처럼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빗금을 그어 놓은 듯 갑자기 가로막힌 암벽은 기기묘묘하게 보였다. 어떻게 이런 외딴곳에 곰파를 건축했을까?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설악산 깊은 곳에 봉정암을 짓고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헤미스 곰파를 둘러싸고 있는 암벽 위로 하얀 눈에 덮인 히말라야 설산이 신기루처럼 보였다. 지상에 샹그릴라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햇빛이 따가웠다. 곰파 앞에는 푸른 초목들이 싱그럽게 자라고 산비탈에는 푸른 밀밭이 척박한 산들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생명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프랑스에 온 샌드라가 밀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컷 찍자고 했다. 그녀는 마치 푸른 밀밭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늘씬한 몸매에 해맑은 미소를 짓는 그녀는 이 순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밀밭을 지나니 하얀 티베트 전통 탑이 늘어서 서 있고, 탑을 지나니 마침내 헤미스 곰파로 오르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따라 들어서니 넓은 광장이 나왔다. 광장에는 벌써 여행자들이 초만원을 이루도 있었다. 심지어는 옥상까지 입추의 여지 없이 여행자들과 사진작가들이 광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떤 백발의 서양인은 티베트 전통의상을 입고, 다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윽고 나팔 소리가 울리고 라마교(티베트불교)를 창시한 파드마삼바바의 거대한 탕가가 걸리고 가면 축제가 시작되었다. 티베트 왕국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우다야 왕국의 파드마삼바바 왕자는 구루 린포체라는 이름으로 티베트와 주변 지역에 대한 대승불교를 정착시켰다. 파드마삼바바가 태어났을 때 손바닥과 발바닥이 밝은 붉은 빛을 띠고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그는 ‘붉은 연꽃에서 태어난’이라는 의미의 ‘파드마삼바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원색 가면을 쓴 스님들이 ‘창’이라 불리는 춤을 추며 광장으로 나왔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과 화려한 의상을 입고 선신이 악신을 무찌르는 내용을 춤으로 보여주었다. 이는 불교가 이 지역의 여러 토착 신앙을 조복시키며 사람들 마음속의 악을 무찔러 선이 승리했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면을 쓴 스님들의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 절 입구에 있는 사대천황처럼 무섭게 생겼다.
칼을 들고 있는 광대, 인형의 항문에 창은 꽃은 광대, 쇠꼬챙이를 들고 있는 광대, 형형색색의 탈을 쓴 광대들이 귀청을 찢는 악기 소리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어릿광대가 아내에게 다가와 흰털이 달린 총채를 들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어주었다. 이는 몸속에 있는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활짝 웃는 아내의 모습이 건강하게만 보였다. 제발 아내의 몸에 붙어 있는 병고를 모두 씻어내 주었으면 좋겠다.
가면 축제가 끝날 무렵 우리는 헤미스 법당으로 들어갔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의 1층은 긴 화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정교한 마누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거나 널찍한 테라스가 있다. 헤미스 곰파의 내부는 36개의 커다란 나무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중심에는 듀캉 법당이 자리를 잡고, 헤미스 곰파 역대 고승들의 모습을 조상한 라캉, 그리고 높이 12m의 거대한 파드마삼바바 상이 위협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법당 내부는 아름다운 벽화와 크고 작은 탕카들이 장엄하고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나의 관심사는 헤미스 박물관이었다. 혹시나 라다크에서 머물렀다는 예수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접어야만 했다. 박물관에는 세월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빛바랜 탕카, 각종 법회에 사용되었던 의식용 불교용품, 왕실에서 보시한 순금 장신구 등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박물관은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눈도장만 찍어야 했다.
정말 예수님은 이곳에 머물며 수행했을까? 리콜라스 노도비치는 2천 년 전의 예수님의 흔적을 정말 발견했을까? 룽다가 휘날리는 헤미스 곰파의 하늘이 신비롭게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