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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의 글 >
- 주님의 기도 -
신학자 칼 라너 신부
내 마음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비록 내 마음이 지옥 같을지라도
아버지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시며,
말 대신 신음소리가 나오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소서...
모든 것이 우리를 버릴 때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비록 땅에서는 서로 죽일지라도
아버지의 뜻은 생명이며,
땅에서는 생명의 끝처럼 보이는 것이
하늘에서는 당신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그리고 이 양식을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나누지 않거나 배가 불러
나 자신이 가련한 피조물임을 잊지 않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시련 중에 죄와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하소서.
죄와 유혹은 결국 아버지를 믿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듣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풀어주시고,
우리를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자유와 생명 안에서 해방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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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 마태오 14, 14 )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 하신지도 2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에 와서 추기경님의 사상을 고찰해보면 그 중심은 항상 인간이었고, 특별히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다른 여타 학문이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는 부분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이유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됨을 추기경님께서는 강조하십니다.
특별히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첫 번째로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계속해서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을 언급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강생과 더 나아가서는 수난 그리고 죽음은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였고, 이것은 인간을 끊임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빵”이시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로서 인간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오로는 독서를 통하여 이 세상 어떠한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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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2011. 8. 7
마태오 14, 22 ~ 33
♠ 복음 연구
* 22-23절 : 산 위 놓은 곳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다 가까이 느끼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부터 아버지께로 흘러 들어가는 그러한 조용한 기도를 원하신다. 여기에는 누구도 간여할 수가 없고 목격할 수도 없다. 이 기도는 빵과 물고기에 대해 바치셨던 이전의 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이전의 기도는 형식적인 식사기도로서 백성을 위하여, 그리고 백성의 이름으로 아버지가 바쳐야 되는 축복의 기도였으나, 이 고독한 기도 속에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기도는 인간과 하느님을 이어 주는 다리인 것이다.
* 24-27절 : 제자들은 그 동안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는데, 심한 역풍을 만나 힘들게 애를 써도 거의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이 참으로 보잘 것 없으며,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풍랑의 힘 앞에 거의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새벽녘에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오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인간은 하느님이나 신적인 것을 만나게 되면 항상 그렇게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의 소개나 설명 없이 "나다" 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신뢰와 헌신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 28-31절 : 베드로는 "주님" 이라는 엄위로운 칭호를 사용하여 예수님께 말을 건넨다. 베드로는 깨닫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시라면 저 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믿는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께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물 위에 확고하게 서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며, 바람의 힘을 지배하는 것이다.
* 32-33절 :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즉시 바람이 그쳤다. 예수님의 현존만이 평화를 가져오며 제멋대로 날뛰는 폭풍우를 잠재운다. 이 광경에 압도된 제자들은 엎드려 스승에게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엄청난 신앙고백을 한다. 믿음을 초월하여 제자들이 배울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진리가 점점 분명해진다. 즉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이다.
♠ 복음 요약 : 전체의 장면은 베드로에게 집중되어 있다.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 첫째이며, 사도들 모두를 대효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 이상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즉 첫 번째 신앙인이요, 모든 믿는 자들의 본보기로 나타난다. 신앙이 무엇인지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앙이란 '나다"하고 말씀하시며 사람을 부르시고 이끄시는 위엄 있는 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께 가서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생겨난다. 확신이 약해지기도 하고 힘을 즉시 잃어버리는 일도 있지만, 신뢰와 사랑의 힘으로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심연을 건너게 된다. 신뢰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인간은 즉시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신앙인의 확실한 신뢰도 우리 인간은 위험에 처했을 때 약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기가 쉽다. 아무런 조건 없는 베드로의 투신적인 신뢰와 용기를 보며 위험이나 두려움이 있을 때 어떻게 그 위험을 이겨냈는지 체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② 또한 주님께 참된 신앙고백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마태오복음 (성 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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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일
2011. 8. 14
마태오 15, 21 ~ 28
♠ 복음 연구
* 21-24절 :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게 철저히 멸시를 당한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너는 이방인이므로 내가 돌보러 온 양들이 아니다. 나는 너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신다.
* 24-27절 : 예수님은 그녀를 개에 비유하심으로써 그녀의 자존심을 철저히 뭉개버리신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딸이 아파서 근심 중에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헤아려 주지는 않으시고 “너 같은 개에게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 는 식으로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오해할 수 있다. ‘어떻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애원하는 여인에게 사람의 면전에서 개에다 비교하여 인격을 능멸할 수 있을까? ’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의 태도는 어떤가? 오히려 당사지인 여인은 자신의 그러한 대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말한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비하적인 발언 앞에서 자존심을 다 내어 던지고 예수님에게 매달린다. 자기 스스로를 밥상 밑에서 음식 부스러기를 기다리고 있는 개에 비교한다. 어찌 보면 벨도 없고 오장육부도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여인의 이러한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진리 자체이신 주님 앞에서는 자존심이란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 진리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면 진리로부터 배척 받는 일밖에 없다. 진리이신 주님 앞에서 한없이 낮아진 겸손한 모습 앞에서 주님께서는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이다.
* 28절 : 여인은 예수님에게서 ‘믿음이 참으로 크다.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라는 응답을 받게 된다. 성경 전체에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크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백부장의 믿음, 가나안 여인의 믿음, 열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았던 여인의 믿음. 사실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숫자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대대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녀는 주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끈질긴 인내의 믿음, 어떠한 고난과 멸시와 천대도 이겨낸 믿음의 표본이다. 그녀는 원하는 딸의 치유응답을 받은 것은 물론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큰 사람이라는 칭찬까지 받게 된다.
♠ 복음 요약 :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존심이 철저히 뭉개진 뒤에 주님을 만났는가? 그 잘났던 자존심이 다 무너지면서 비로소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간증과 체험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여인은 인내의 표본이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불쌍한 딸을 어떻게 해서라도 고치겠다는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을 포기한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그렇게 감동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을 위한 사랑과 헌신은 언제나 위대한 것이다. 이 여인에게는 딸을 위한 숭고한 사랑과 주님께 대한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에 주님 앞에서 자신이 받는 어떠한 능멸도 참을 수 있었다. 자신보다도 더 귀한 딸에 대한 사랑,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랑하는 딸을 위하여 온갖 능멸을 기쁨으로 감수하는 여인의 간절한 눈빛과 숭고한 마음을 보신 주님께서는 그녀를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찬하신다.
♠ 대화 방향 : 예수님께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께 전적으로 매달려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응답을 받았는가를 서로 나누어 보자.
♠ 참고 문헌 : ▪ 송봉모 신부님 성경 해설,
▪ 마태오 복음 해설 (C.M 마르티니 저 / 성 바오로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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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
2011. 8. 21
마태오 16, 13 ~ 20
♠ 복음 연구
* 13-14절 : 예수님은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당신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를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라고 여긴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예언자로 자처하셨다. 예수님을 예언자로 본 견해 이외의 다른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 15-16절 : 예수님은 당신의 신분에 대한 제자들의 견해를 물으셨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을 대표하여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고 대답했다. 예수 메시아는 하느님의 아들, 즉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사자요, 세상종말의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죽음의 힘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
* 17절 : 예수님은 당신의 신분을 제대로 파악한 시몬을 축복하며, 그의 고백이 ‘살과 피’, 즉 인간적인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계시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시몬의 메시아 고백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모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임을 암시한다.
* 18절 : 예수님은 시몬의 믿음을 토대로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고, 이 이름이 뜻하는 ‘바위(반석)’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이 새 이름을 주신 것은 베드로를 통해 교회를 만드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베드로를 중심으로 영적인 뜻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베드로는 사도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교회의 토대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저승의 문들’, 즉 죽음의 세력이 교회를 정복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하셨다. 교회를 창립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도들이 순교하거나 죽더라도 교회는 망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분과 함께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 19절 :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 왕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열쇠는 그가 사람들을 하느님의 왕국에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권한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뜻을 가장 권위있게 해석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행위인지, 혹은 일치하지 않는 행위인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리킨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당신 가르침과 그 밖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수호하는 교도권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베드로가 받은 교도권에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신자들의 잘못을 징계하는 권한이 포함된다. 베드로는 사도들의 대변인과 대표로 뽑혀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지 않는지에 따라 구원 공동체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선언할 권한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교도권으로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 하느님은 그가 이 세상에서 행사하는 교도권과 징계권을 하늘에서도 인정하심으로써 신적인 권위를 보장하셨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대리하여 이 권위를 행사한다.
* 20절 :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그 분이 이 세상의 모든 왕국을 제패하고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제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 메시아가 아님을 암시한다. 오히려 그 분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메시아이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더냐? ” 고 물으신 후 다시 질문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고 계신 질문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 ” 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맞는 대답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셨다. 베드로의 올바른 신앙 고백을 주춧돌로 당신 십자가 희생의 열매로 이루어 주실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과, 하늘나라의 열쇠, 맺고 푸는 권한, 즉 사죄권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열쇠는 관리 책임과 권한을 의미한다. 베드로에게 교회 전체에 대한 으뜸 통치권을 약속하신 것이다. 교회는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될 것이며, 주춧돌은 견고해야 하고, 올바른 신앙 고백은 요구된다. ‘맺다’, ‘푼다’ 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법을 권위있게 해석하여 어떤 행동의 금지나 허락을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상에서 베드로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도 그대로 인정하시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그 후계자에게 그 권한을 주셨다. 엄청난 권한부여이다.
♠ 대화 방향 : ① 예수님은 실제로 어떤 분이며, 나에게는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 봅시다.
② 교황님의 교도권은 베드로 사도의 교도권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 교도권에 순종하는가? 아니면 교회에 대한 애정 없이 하느님과 직접 거래하려고 하지 않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 (가톨릭 신문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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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일
2011. 8. 28
마태오 16, 21 ~ 27
♠ 복음 연구
* 21절 : 이 단락부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시리라고 세 차례에 걸쳐 예언하신다. (마태 16,21-23 ; 마태 17,22-23 ; 마태 30,17-19)
* 22-23절 :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예기치 않았던 것이므로 제자들의 귀에는 부활하시리라는 마지막 말씀이 미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느님의 종이 수난을 받으리라고 한 예언자들의 말을 제자들의 머리에는 분명하게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십자자의 신비를 모르고 있었다. 베드로는 사랑에 넘친 애원으로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로부터 신랄한 꾸지람을 듣는다. “사탄아, 물러가라! ” 하느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길은 골고타의 길이다. 이 길을 벗어나게 하려는 자는 인간적인 생각을 키우는 하느님의 생각을 따르는 자가 아니며, 따라서 유혹자가 된다. 십자가는 예수님 생애의 절정이며 구원의 참된 비밀을 구성하는 신비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살아야 하며 예수님의 부활로 다시 일어나야 한다.
* 24절 : 하느님의 생각 안에 완전히 들어오기 위해서는 욕망과 계획과 생각까지 모두 버려야 한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 은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하여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도 ‘자기를 버리는 것’ 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결국 그것이 실제의 죽음에 관계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인 것이다.
* 25절 : ‘얻느냐, 잃느냐’ 하는 문제가 모든 것의 결판과 관계되어 있다. 생명에 이르는 길과 파멸에 이르는 길이 모두 인간에게 열려져 있다. 결국 이 말씀의 진리는 말씀에 따라 살려는 자들에게만 계시된다.
* 26절 : 가장 중요한 것은 참 생명을 얻어 죽지 않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참된 목적에 비교해 볼 때, 그 밖의 다른 목적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목숨을 누리고 영원히 살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기적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목숨은 최상선이며 너무도 고귀한 것이기에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갈망해야 할 것이다.
* 27절 : 사람이 생명을 받을 것인가, 받지 못한 것인가에 대한 판결은 심판에 내려진다. 심판 때 각자는 자신의 생활에 따라 심판 받을 것이다. 생명을 얻는 가장 확실한 행동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세속적인 것을 포기할 확실하고 분명한 태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즉, 모든 것을 전능하신 분께 맡겨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적당히 하려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하느님께도 속하고, 사탄에게도 속할 수는 없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위대하심과 자비하심에 참여하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기에 그 외의 모든 것은 포기해야 하며, 하느님께의 봉헌은 조건없이 기쁘게 바쳐야 한다.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일,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죽음은 부활하기 위한 불가결의 조건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크리스챤)이다.
♠ 대화 방향 : ① 성서형제회 회원들은 하느님을 목표로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자신이 혹시 사탄이 된 듯한 체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② 나는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고통과 박해를 견디어 내고 있습니까?
♠ 참고 문헌 : ▪ 마태오복음 해설 (리카르도 굿츠빌러 저 / 성바오로 출판사)
▪ 영적독서를 위한 마태오복음 (울프강 트릴링 저 /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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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의 글 >
코이노니아 - 말씀대로 살아갑시다.(1)
안산 원곡동 성당 FB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교구청의 통계자료를 보면 성서사도직에 대한 교육을 많이 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몰래 말씀대로 살아가는지는 모르지만, 이를 드러내놓고 하는 이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로서 실천하는 이는 의외로 드물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주위의 권유를 받아서 세례를 준비하고 받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세속에서 말하는 대로 형편이 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의무만 늘어났지 더 힘들어졌다고들 말합니다.
이는 생활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상적으로 익숙하지 않는 생활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더군더나 성서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단기적으로는, 그리고 세상의 눈으로는 아주 말도 안 되고 나에게는 터무니없이 어려운 일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특별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하면서 때로는 불평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려운 지경에 부딪쳐서 달아나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그는 점차로 변화되어 가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되는 일들을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말씀 중에 복음서는 주님이 직접 이 땅에서 하셨던 일들을, 특히 공동체에게 하셨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기에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든 것은 우리의 죄가 원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느 길을 가는데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길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공동체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공동체를 통해서 그들을 돕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살피게 되고, 우리의 생활이 변하게 되어서 결국은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적신앙이나 외적신앙 둘 다 중요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과 <사도 야고보의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다만 공동체의 형편에 따라서 이를 강조한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우리는 우리가 한 주님의 부활체험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를 ‘선교’ 라고 말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볼 때, 우리는 ‘외적 신앙’ 도 ‘내적 신앙’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성화와 성상이 있습니다.
한때는 정교회에서 ‘성상성화 파괴운동’ 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성서에서 말씀하시는 ‘형상을 숭배하지 말라’ 는 것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행함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이는 반드시 우리의 내적인 신앙성숙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학고 말씀묵상하고 이웃을 바라보고 행함을 충분히 성찰하는 것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그런 일이 별로 없는데요. 예전에는 선행이나 어떤 레지오 회합 등 단체모임이나 활동을 위해서 주일미사를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극히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선행은 믿음을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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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그루터기 >
“무엇이 다를까요?”
-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
율사가 대사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불도를 닦으실 때 특별한 비법이 있습니까?”
“있지.”
“어떤 비법입니까?”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자는 것이네.”
율사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거늘, 그렇다면 모든 사람 또한 대사처럼 특별한 방법을 행하는 것입니까?”
“다르네.”
“무엇이 다릅니까?”
“밥을 먹을 때 기뻐하지 않고 다른 백 가지를 원하며, 잠잘 때 기뻐하지 않고 오만 가지 생각에 빠지는 사람이 있지. 그것이 나와 다르네.”
어떻게 생각하면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이 세상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내게 주어진 그 삶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기왕 이 세상을 사는 것이라면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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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지난 달 회계보고 중 오타 사항 안내 - 5/19 그리스도폴팀 FB ➡ 요셉팀 FB로 정정합니다.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마시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비밀헌금은 각 팀에서 필요한 만큼 쓰시되,
본부에서 전체 운영을 위해 중요한 자금이 되므로
의연금에 좀 더 정성을 기울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2011년 6월 1일 ~ 30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