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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신학 연구 1부 : 찬양신학이란 무엇인가 1부에서는 찬양신학의 이론적 측면을 주로 다루고자 한다. 특히 찬양이 예배의 하나의 부분이나 음악적인 요소로만 이해되거나 혹은 목회음악의 한 갈래 정도로만 이해되는 현재의 견해를 뛰어 넘어 교의신학이나 실천신학, 성서신학과 같은 하나의 신학의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앞으로의 목회의 방향이 목회와 예배 양쪽 분야 모두에서 찬양과 음악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찬양에 대한 바른 정의와, 또한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고 그것을 목회와 사역에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앞으로 다루겠지만 찬양신학은 단순히 찬양과 경배나 혹은 찬양예배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찬양이 성경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재의 예배와 목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정리가 되지 않고서는 앞으로도 여전히 찬양은 목회적 스킬(Ministry Skill)의 하나에 불과하게 될 것이고 성서적 바탕위에 서지 못한다면 일부 노래 잘하고 음악 잘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에 불과한 기독교의 보조적 도구로 머물게 될 것이다. 앞으로 1부에서 다루게 될 찬양신학은 성경적 정의와 내용에 대한 이해, 찬양과 예배의 관계, 확장된 예배 속에서의 찬양의 개념, 음악목회자가 알고 있어야 될 찬양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게 될 것이다. 각 분야는 찬양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며,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높여야 되는지에 대한 보다 성격적인 근거에 대한 연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분야에 대한 답변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목회에 있어서 더욱 충실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역을 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장 찬양신학의 정의
1. 찬양신학의 성경적 접근이유(연구자들의 의견이 취합되어 문서화 될 예정) * 오늘날의 찬양에 대한 교회와 목회자의 견해 : 찬양에 대한 좁은 의미의 인식과 성경적 이해가 없는 찬양인도자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일반적으로 찬양을 [음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고 그나마도 찬양은 예배 순서 안에서 예배를 돕는 보조적인 역할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찬양인도자들 역시 성경적 이해 없이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이나 곡들을 중심으로 찬양을 구성한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찬양신학은 왜 예배에서 찬양이 필요한가, 그리고 찬양이 공적인 예배와 사적인 경건의 삶 양쪽 모두에서 왜 중요한가를 다루는 학문이다. * 기도원 문화로 대변되는 찬양에 대한 부정적 이해 : 찬양은 흥을 돋우기 위한 예비의식인가?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주일 오후 예배나 금요 기도회에서 찬양은 설교 전에 흥을 돋우거나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정도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80년대까지 한국교회의 흐름을 주도하던 기도원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열광시키는 정도로 찬양을 이해했던 무지한 과거의 찬양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로잡기 위해 찬양신학은 반드시 성경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찬양신학이 필요한 이유 : 찬양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셔야 되는 이유와 찬양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답변을 찾기 위해 찬양신학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이 찬양을 해야 되는 이유와 찬양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신학적 이유를 정립하여 신앙의 근본적인 감격과 기쁨을 찾기 위함이 찬양신학의 성립이유다.
2. 찬양신학이란 무엇인가 *찬양신학(Praise Theology) : 찬양의 의미와 영적 개념에 대한 신학적 접근과 이해와 적용 - 성서신학과 실천신학의 중간에 위치한 학문으로서 예배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학문의 갈래 찬양신학을 어떤 범주의 신학의 카테고리에 넣을지는 더 많은 연구와 학문적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 찬양신학이라는 신학적 장르가 하나의 독자적인 카테고리로 자리 잡는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찬양신학이라는 학문적 장르가 교의신학이나 성서신학, 역사신학과 같은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기에는 범위나 적용부분이 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현재로서 찬양신학은 실천신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맞을 것이다. 찬양신학은 결코 교회음악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음악이 찬양신학 안으로 들어옴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찬양신학은 교회음악을 포함한 음악목회 전반을 모두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찬양신학은 예배에 대한 본질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고찰한다는 차원에서는 예배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고 현실적인 목회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실천신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따라서 찬양신학의 학문적 위치는 실천신학의 카테고리 안에서 음악목회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실제적 적용에 관련된 학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옳을 것이다. 찬양신학의 연구범위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개략적인 범위만을 따져본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1)찬양의 본질에 대한 연구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 고찰 2)예배에서 찬양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역할 - 찬양과 예배의 정확한 성경적 의미의 연구 3)찬양의 방법에 대한 성경적 연구 - 다양한 찬양의 방법들의 성경적 의미와 적용 4)찬양에 대한 역사적 이해연구 - 시대에 따른 찬양의 변천사와 교회음악의 변화 5)찬양예배에 대한 연구 - 찬양예배의 신학적 정립 6)교회음악과 예배음악에 대한 연구 - 기독교적 가치가 있는 음악들에 대한 성경적 기준과 적용에 대한 연구 7)교회음향과 건축에 대한 연구 - 실제적인 찬양을 위한 예배적 음향과 교회건축에 대한 연구
위와 같은 범주들은 현재 연구가 진행되어지는 부분도 있으나 거의 대부분이 연구가 되어있지 않거나 체계적인 결과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와 적용이 찬양신학이 지향하는 학문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찬양은 단순한 음악적 행위가 아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돌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adoration)이다. - 예배학적 차원에서는 음악적 행위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찬양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협의적 의미다. 본 연구에서 앞으로 찬양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현재까지 이해되어지고 있는 찬양(praise)이나 경배(worship), 영광(glory)의 개념을 뛰어 넘기를 바라고 있다. 역시 앞으로 더 자세히 연구되겠지만 성경 안에서(특히 시편을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찬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이 행하신 일들만을 가지고 찬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찬양도 분명한 찬양이지만 성경적 찬양의 본질은 사전적 의미의 찬양을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성경의 기자들은 하나님이 행하시고 인간에게 베푸신 것만을 기뻐하며 찬양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상황이 아닐 때, 고통과 핍박 속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중요한 공통적 요소다. 왜 그러할까?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이 부분을 더욱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실 때 비로소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찬양의 본질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갈 수 있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바로 adoration이다. 한글로 번역하자면 숭모(崇慕)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이 단어는 [어떠한 대상을 끝없이 사모하고 경외하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하나님을 선천적으로 사모하게끔 창조되어 있는 인간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보통 일반적으로 예배학에서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라고 정의하지만 [왜] 하나님을 높여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는 보통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과 앞으로 행하실 일들에 대한 감사라는 정도로 답변을 하고 있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협의적 의미라고 생각된다. 단순히 찬양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들에 대한 반응정도로 그친다면 우리의 예배는 늘 수동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는다면, 아니 오히려 우리 생각에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것들을 행하실 때에는 찬양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에 상관없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당연한 반응이 바로 찬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인간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나타나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모함, 이것이 바로 숭모(adoration)가 될 것이다. 따라서 찬양은 음악적 행위나 예배 때에 드려지는 하나의 절차가 아닌 하나의 독립적인 신앙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찬양은 예배의 가장 큰 축이자 하나님께서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가장 큰 기쁨이기도 하다. - 이것을 단순한 음악적 행위로 국한하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와 직결된다. 찬양의 방향성을 정하는 것도 찬양신학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예배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지속되겠지만 기본적으로 예배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인간 입장에서는 최고의 표현이자 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배 가운데서 가장 최고의 하나님을 향한 숭모의 단계는 찬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찬양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하나님이라고 말하겠지만 실제 오늘날의 예배 가운데 드려지는 찬양과 경배의 곡들과 가사의 내용, 또한 그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의 행동적 표현은 하나님과 상관없거나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는 것들이 상당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곡이나 가사가 사람들의 개인적인 취향에 맞춰서 무분별하게 드려지기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결과다. 이것을 검증할 장치도, 기준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은 계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찬양의 방향성에 대한 분명한 기준으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을 말하고 싶다. 역시 각론에서 다루겠지만 찬양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그것은 예배자들과 인도자들의 마음이 상태와 직결되는 문제다. 공적예배든 사적인 예배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만이 예배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한 찬양은 역시 그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본질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예배와 찬양이라면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중 가운데, 혹은 개인 가운데 나타나며 성경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잠잠해지는 것이 올바른 찬양의 궁극적 모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예배워십과 별도로 진행되어지고 있는 콘서트와 공연 중심의 CCM장르는 [예배]라는 본질적 의미에 비추어 봤을 때는 예배적 찬양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논증이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에서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 찬양의 모습, 특히 성막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질 제사와 예배와의 상관관계에서는 인간의 엔터테인먼트가 나타나는 것은 예배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가사와 아무리 좋은 음악적 배경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찬양신학에서 연구되는 찬양의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공적, 개인적 예배를 지향한다. - 찬양은 학술적인 용어가 아니라 예배적인 용어다. 이러한 차원에서 찬양은 학문적으로 정립되는데 그치지 않고 예배와 삶의 현장에서 표현되고 이해되어질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찬양신학에서는 찬양의 학문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실천적 적용과 현대적 의미의 적용까지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찬양은 바른 관계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하나의 근거로 성립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의 은혜다. 찬양신학에서 또 하나 관심 있게 살펴보게 될 찬양의 주요한 동기는 관계(relationship)에 대한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진정으로 행할 수 없는 신앙적 행위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찬양신학적 관점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보혈에 근거하고 있다. 즉, 찬양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중생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로 인한 속사람의 새로움(고후 5:17)을 경험해야만 하는 기준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없거나 불충분한 사람들은 본질적인 찬양을 드릴 수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문화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에 대한 성경적인 기준을 말할 때에도 적용될 것이다. 즉, 예배자와 찬양인도자의 삶의 기준에 관한 것들인데 문화적 차이의 다름을 인정한다고 해서 성경적 윤리기준의 근본까지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머리를 염색한 사람이 찬양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적인 방종을 일삼거나 마약을 하는 사람들을 예배인도자의 위치에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죄의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만 적어도 우리의 기준 역시 성경과 일치해야 한다면 무엇이든 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되어야 한다는 것은 혼합주의적 발상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참된 예배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중생과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적 삶 또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진다. 물론 이것이 우리의 인간적 노력과 열심히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성령의 역사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가는 것 역시 성경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은 예배자의 당연하고도 원칙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찬양은 변화된 사람들만이 드리는 것이다. 과거의 모습과 과거의 육신적 행동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에 예배하며 찬양한다는 것은 참된 예배와 찬양이 될 수 없다. *찬양신학은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깊은 관계에 대한 성경적 성찰이자 예배에 대한 적용이다. 찬양신학이 무엇인가라는 부분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정리하자면 찬양신학은 찬양의 본질에 대한 성경적 성찰과 연구이자 실제적 예배에 적용되어지는 실천적 학문이다. 이것을 위해 찬양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의 성경적 연구와 신학적 판단, 그리고 역사와 교회사를 통해 변화된 찬양에 대한 변천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들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 한국교회를 위시한 각 교회현장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찬양의 모습들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배와 찬양의 개념과 얼마나 차이가 있고 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보다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사역을 위해 중요한 밑거름들이 될 것이며 개인의 영성훈련과 교회의 목회방향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현재 많은 교회들이 표류하고 뚜렷한 목회적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 중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의미 없는 예배의 남발과 성도들의 이중적 신앙의 모습일 것이다. 성도의 가장 기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정립인데 이것이 되지 않은 상태로 양산된 [표면적] 기독교인들의 성장은 교회의 건강한 성장에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찬양신학의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더 성경적이고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세우는데 중요한 근거들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넘치는 예배와 찬양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 찬양신학의 과제다. |
3. 찬양에 대한 성경적 해석
*찬양(Praise)에 대한 정의 찬양의 사전적 뜻은 [어떠한 대상을 칭찬하다, 높이다]이다. 즉, 대상을 향한 환호와 경의, 감사와 기쁨 등이 모두 함축된 단어라고 볼 수 있다. 이 찬양이 기독교적인 의미로 이해될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성경에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찬양의 사전적 정의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높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찬양의 사전적 의미, 특히 어원과 어근(root word)에 대한 조사에 지면을 할애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이미 각종 서적과 논문 등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잭 테일러 저, 요단출판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에 찬양에 대한 히브리어와 헬라어 어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또한 요약을 원하는 사람들은 [찬양의 어원에 대한 연구, 이 국병, 총신 대학원(2005) 석사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 논문에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요약이 충실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어원에 대한 연구보다는 찬양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고찰을 좀 더 해보려 한다. 위의 소개한 책에서도 나오지만 찬양에 대한 히브리어 어원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할렐루야]라는 단어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면 할랄(칭찬하다 - 여기에는 시끄러울 정도로 적극적이라는 뉘앙스가 있다)+야(하나님의 이름의 축약단어)의 합성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찬양은 결국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칭찬한다는 말이 된다. 찬양의 성경적 정의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선 찬양은 수동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본인의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이 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본인의 의사를 초월하여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영광과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나의 의지와 감정으로도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나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찬양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잘못된 입장을 고쳐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기분에 따른 찬양의 형태다. 다시 말해 나의 마음이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하면 찬양을 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하게 된다. 내가 하기 싫으면 심지어는 맡겨진 찬양의 자리에서도 도망가 버린다. 찬양팀 리더가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연락해 보면 그냥 기분이 안 좋거나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서지 않던 경험들이 다들 있을 것이다. 이것은 찬양이 얼마나 개인적인 영역에서 드려지고 있는가에 대한 증거의 일부다. 찬양사역자의 영역에서 훈련받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찬양은 나의 삶 혹은 나의 기분을 초월하는 영역의 것이다. 구약의 시편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찬양은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것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에게 쫓기고,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겪으며 적들의 조롱과 야유 속에서 번민하는 속에서 나온 찬양의 시편도 적지 않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적어도 성경의 사람들은 찬양을 자신의 삶이 찬양할 만한 분위기 혹은 상태에서만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찬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만 되는 창조주로서의 권리다. 또한 피조물 된 인간은 하나님 되심에 대한 마땅한 반응과 영광이 찬양이라는 형태로 드려져야 한다. 찬양사역자들은 이 부분에 대한 훈련과 인식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 적어도 자기 기분이 나쁘면 안 하고 좋으면 펄쩍펄쩍 뒤는 모습은 사라져야 함이 옳다. 따라서 찬양신학적 관점에서 찬양이란 단순히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고 우리의 감정과 상태에 상관없이 마땅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돌려드리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분명히 배울 수 있는 것은 찬양의 어원의 의미에서 찬양은 [적극적]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춤을 추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의 모든 전 인격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즉, 찬양은 단순한 행위나 음악적 표현으로만 드려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행동과 결과까지도 찬양에 합당한 모습이 되어야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찬양 사역자들의 중요한 윤리적 지침이 된다. 음악적 숙련도와 기술은 높고 말과 무대매너는 뛰어나지만 정작 그의 삶이 그것을 따라오지 못한다면 그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위선을 행하게 된다. 적어도 그에 상응하는 삶의 태도와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함이 바로 찬양하는 사람들의 자세다. 음악과 악기, 조명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곳을 나와서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수준의 생각과 행동을 한다면, 결국 [찬양]이라는 주제에 대한 성경적 통찰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찬양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높이되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본인의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대한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리는 모든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찬양의 대상 찬양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예배 가운데 드려지는 찬양의 대상에 대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성부하나님의 영역이다. 물론 예수님과 성령님도 우리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지만 공예배 시에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여기에 밝혀진 하나님의 이름은 마땅히 창조주 되시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잘 알고 있듯이 인간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본질은 하나님이시지만 창조와 통치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뜻할 때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기도할 때 우리가 실수하기 쉬운 부분이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기도의 대상을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듯이(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자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에 합당한 분을 의미한다.) 예배 역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해서,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님의 감화와 역사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예배 때 드려지는 호칭에 대한 실수는 이런 부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찬양의 본질적 요소
1)지(知 : inteligence) 말씀과 기도에 지, 정, 의적인 요소가 있듯이 찬양에도 역시 그러한 요소가 있다. 지(知)의 영역은 찬양이 성경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아는것에 있다. 찬양의 어원과 그 뜻, 성경상에서 찬양이 쓰여진 방법과 형태에 대한 연구, 찬양과 예배와의 관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연구 등이 이에 속한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모르고서는 찬양은 그야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 개인의 여흥에 불과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예배를 인도하는 음악목회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함부러 사람들 앞에 서서는 안 될 것이다. 찬양은 자신을 나타내는 공연이 아니라 살아계신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의 자리에서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찬양에 대한 성경적 고찰과 학문적 이해가 없는 음악목회자는 성경을 모르고 설교하는 목회자와 다를바가 없다.
2)정(情 : feel / sentiment) 찬양은 감정적인 요소가 많다. 왜냐하면 찬양 자체가 풍부한 감성적 요소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높이고자 할 때 감수성과 감정의 발동 없이는 온전한 찬양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정적인 요소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외적인 분위기로 인해 나타나는 감정(feel)이다. 이것은 회중, 장소, 리더의 분위기에 따라 함께 동조되는 감정인데 이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감정은 자칫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감정의 표현이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예배 인도자과 회중은 내재적 감정, 즉,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묵상하고 만날때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반응적 감정(sentiment)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악기가 많던 적던, 음향시설이 좋던 나쁘던 예배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동일한 감성과 감정을 드릴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이 훈련된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감정의 동기를 외적인 감정의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낼 수 있게 된다.
3)의(意 : will) 찬양은 감정적 요소가 많기는 하지만 이것이 본질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찬양은 다른 신앙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의지적 요소가 존재한다. 즉, 선택의 문제이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결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기를 원하는데 이것이 찬양의 의지적인 부분이다. 이것은 나의 기분이 아닌 나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문제가 된다. 따라서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한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가 하나님을 찬양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언제나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의지와 결단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열매를 맺게 된다. 예배인도자들이라면 이 부분에 대한 훈련과 결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찬양의 범위
1)개인의 영역 이것은 개인의 경건의 생활과 찬양을 위한 훈련의 단계를 포함한다. 찬양은 몸에 습관처럼 배여 있어야 한다. 단순히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그 결과를 가지고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찬양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부분이 이루어지도록 삶 자체를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언제나 그분의 인도를 구하고 감사하는 찬양의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그것과 병행하여 예배인도자들은 찬양에 관련된 한계(boundary)를 끊임없이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넓으면 넓을 수록 더 풍성하고 더 깊은 찬양을 회중들과 나누며 하나님 앞으로 그들을 인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음악적인 깊은 이해와 악기와 보컬에 대한 연구와 연습, 무엇보다도 많은 찬송곡들을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찬양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찬송이라면 다양한 찬송곡들을 아는 것은 그만큼 풍성하고 다양한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예배인도자들은 찬송가와 고전 복음송가와 같은 전통적 찬송곡들로부터 최근의 CCM과 경배와 찬양곡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파토리와 주제들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절대로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계속해서 훈련해야 할 개인적 찬양의 영역이다.
2)교회 공동체의 영역 이것은 교회의 공적인 예배를 뜻한다. 이 부분에서 본 연구에서는 공적예배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고자 한다. 그것은 교회의 공적인 예배는 주일예배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명시된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며 훗날 완성될 천국에서의 완전한 예배와 안식을 기대하며 미리 그 축제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가장 감격스러운 것이라는 신앙고백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우리는 공식적이고도 성경적인 지침에 따르는 공적예배는 주일예배라고 생각한다. 그 외의 수요기도회나 금요기도회 등과 같은 집회는 사람들의 필요와 교회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서 소중한 것이기는 하되, 공식적인 예배로 말할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공적예배와 그 외의 일반예배나 집회의 성격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일예배는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십계명의 안식의 명령을 좇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쁨과 감사로 참여하는 거룩한 예배다. 따라서 이 주일예배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의무이자 특권이며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기쁨의 축제이기도 하다. 이 날은 어린이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들이 최우선 순위로 드려야 하며 이 날에 드려지는 어떠한 예배도 형식적이거나 편의주의적인 발상에서 드려져서는 안된다. 물론 이것은 다른 일반 예배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공적 예배에서 드려지는 찬송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이 예배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룩한 교통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찬양의 선곡과 형태 역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만이 합당할 것이다. 인간을 위한 위로와 교제, 또는 전도와 구제 등에 관련된 주제들은 다른 일반 예배나 집회에서 인도자들의 신중한 기획과 함께 드려지는 것이 옳다. 따라서 예배를 기획하고 준비할 때 음악목회자들은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공적예배가 인간의 편의주의적인 발상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3)사역의 영역 이것은 공적예배를 제외한 모든 목회적 사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심방이나 일반 집회, 특별 집회, 부흥회, 수련회, 세미나와 강습회, 장례식이나 결혼식과 같은 의식 등에서 찬양은 다양한 모습과 방법으로 쓰여질 수 있으며 이때는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이요 성도들의 신앙의 고취와 격려를 위해 찬양이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때 역시 찬양이 분위기 고취용이나 행사의 도구적 순서로 사용되서는 안되며 찬양 자체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감동과 임재하심을 기대하고 준비하며 드려져야 할 것이다.
4)사회의 영역 이 부분은 불신자와 같은 일반인들과의 접촉점을 위한 찬양의 영역을 뜻한다. 전도나 구제, 혹은 사회 봉사나 지역사회를 위한 나눔 등에서 이 찬양이 사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수평적 찬양의 확장의 개념이 되는데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혹은 복음의 정신과 기독교의 가치관을 전할 때 찬양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설교보다도 더욱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감리교의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존 웨슬리의 설교도 강력한 메시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렸지만 그것을 위해 찰스 웨슬리의 찬양인도가 미리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준비시킨 것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오늘날 역시 이 찬양을 불신자와 교회의 접촉점을 만들기 위해 좀 더 사회를 향한 CCM과 같은 다양한 장르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찬양들이 준비되어져야 하며 이것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와 방법들을 음악목회자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사회와 분리될 수도, 분리되어서도 안된다.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 하늘을 지향하는 교회의 특성상 언제나 목회는 신자들에게도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동일한 관심과 사랑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찬양은 그러한 측면에서 지금보다더 더 많은 역활과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인간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것중에서 찬양만큼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음악목회자와 찬양사역자들은 깊이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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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후원은 한분도 없고 카페도 그만둬야 하고
이렇게 기독교가 버림받는거 같습니다 먹어야 카페도 하는데..
통신료와 공과금으로 30만원이 필요합니다
카페운영을 계속하도록 도와주십시요
매일 이걸 해야하나 갈팡질팡하고 갈등합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사명인데 요즘은 너무힘드네요
카페운영을 위해 작은 성금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카페에 후원을 하신분은 사랑회원(최우수)이 되십니다...
카페지기의 생활이 어렵습니다 매달 정기 후원으로
도와주시면 카페 운영에 큰힘이 됩니다
후원이 없다보니 공과금과 약값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카페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건강이 않좋아 병원을 다니며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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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