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말씀드리는 건 한 게시판 뿐 아니라 다양한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글을 옮겨온 것이라는 겁니다.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 또 다른 반론이 나올테고 그렇게 하다보면 좀더 정확한 추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퍼왔습니다.
한번씩 보시고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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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C인사이드 -팔공산인 님
※원문은 여러개의 글이었습니다. 내용구성은 제가 했습니다.
당대 조선의 문인들이 남긴 글
1. 만기요람(1808년경 편찬)에서 1) 조선은 동, 서, 남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동과 남은 왜와 접하고, 남과 서는 중국의 오(吳)ㆍ월(越)ㆍ연(燕)ㆍ제(齊)의 지방과 마주보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 점. 2) 동해의 해안선을 방향을 가지고 그 굴곡의 모양을 설명하면서 경로상의 지명을 열거하고 있는 점 3) 남해 , 서해남부, 서해북부의 해안선을 설명하면서 열거한 관련 지명들 4) 유성룡의 말에 의한 바, “동해 일변(一邊)이 경상좌도에서 강원도에 이르며, 강원도에서 함경도에 이르기까지가 다 바다에 면한 지역이다. 남해는 섬들이 많지만 동해는 섬들이 없고, 또한 물결이 급하여 배가 통행하기에 불편하다고” 한 점 5) 통문관지를 인용하여, 조선의 부산에서 일본의 江戶까지 이동경로상에 언급한 지명들과 그 리수(뱃실 3290리, 육로 1310리) 6) 김세렴 풍향기를 인용하여 부산, 대마도, 대판, 상관, 일기등의 지명의 상대적 위치를 알 수 있는 바 현재의 위치와 모순되지 않는 점 - 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한반도가 아닌 임의 지점으로 옮겨버릴 경우, 그와 관련되는 일본의 지명은 어디로 모순없이 옮겨야 할 것인가? 옮길 수 있을까?
※ 燕行 기록은 약 300여가지가 있어 너무나 많아 몇가지만 추려 봅니다
2. 연행기사(1777년) 1) 문견잡기에 서술한 북경의 연혁기사 2) 기록한 바, “대체로 연경(燕京)의 노정(路程)은, 우리 한양에서 의주(義州)까지가 1070리, 의주에서 봉성(鳳城)까지가 150리, 봉성에서 심양까지가 443리, 심양에서 산해관까지가 803리, 산해관에서 연경까지가 660리, 통산하여 3126리이니, 우리 노정을 제하여도 실로 2050리가 되는 것이다….” 3) 조선의 한양에서 북경으로 가기위해 거쳐야 하는 노정상의 지명들을, 현재의 한반도에서 북경으로의 경로외에 다른 곳으로 동정할 경우 과연 모순없이 설명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이 그 이정(里程)만을 간추려 본다. 경성→고양 40리→파주 40리→장단 30리→개성 40리→금천(金川) 70리→평산 30리→총수참(蔥秀站) 30리→서흥(瑞興) 50리→검수참(劍水站) 40리→봉산 30리→황주 40리→중화 55리→평양 50리→순안 50리→숙천 60리→안주 60리→가산 75리→정주 45리→곽산 30리→선천 40리→철산 45리→용천 30리→소관참(所串站) 40리→의주 35리→압록강 5리→소서강(小西江) 1리→중강 1리→방파포(方坡浦) 1리→삼강(三江) 2리→구련성(九連城) 15리→망우(望隅) 5리→자음복이(者音福伊) 8리→비석우(碑石隅) 2리→마전파(馬轉坡) 5리→금석산(金石山) 15리→온정 8리→세포(細浦) 2리→유전(柳田) 10리→탕참(湯站) 10리→총수산 2리→어룡퇴(魚龍堆) 1리→사평(沙坪) 2리→혈암(穴巖) 10리→상룡산(上龍山) 5리→책문(柵門) 10리→안시성(安市城) 10리→진평(榛坪) 2리→구책문(舊柵門) 8리→봉황산(鳳凰山) 5리→봉황성(鳳凰城) 10리→차호(叉湖) 10리→건자포(乾者浦) 10리→백안동(伯顔洞) 10리→마고령(麻姑嶺) 10리→송참(松站) 10리→소장령(小長嶺) 5리→옹북하(瓮北河) 5리→대장령(大長嶺) 5리→팔도하(八渡河) 14리→장항(獐項) 1리→통원보(通遠堡) 29리→석우(石隅) 15리→초하구 답동(草河溝畓洞) 15리→분수령(分水嶺) 20리→연산관(連山關) 10리→회령령(會寧嶺) 15리→첨수참(甛水站) 25리→청석령(靑石嶺) 20리→대소석령(大小石嶺) 2리→낭자산(狼子山) 18리→삼류하(三流河) 15리→왕상령(王祥嶺) 10리→석문령(石門嶺) 3리→냉정(冷井) 10리→아미장(阿彌莊) 15리→신요동 15리→접관청(接官廳) 17리→방허소(防虛所) 8리→삼도파(三道把) 5리→연대하 10리→요포(腰鋪) 5리→오리대(五里臺) 5리→십리보 5리→판교포(板橋鋪) 5리→장성참(長盛站) 10리→사하보(沙河堡) 5리→포교와(暴交哇) 10리→화수교(花水橋) 8리→전장포(氈匠鋪) 2리→백탑보 10리→일소대(一所臺) 5리→홍화포(紅花鋪) 5리→혼하(混河) 1리→심양성 9리→원당사(願堂寺) 5리→탑원(塔院) 7리→방사촌(方士村) 3리→장원교(壯元橋) 1리→영안교(永安橋) 14리→쌍가자(雙家子) 5리→대방신(大方身) 10리→마도교(磨刀橋) 5리→변성(邊城) 10리→신농점(神農店) 12리→고가자(孤家子) 13리→주류하(周流河) 8리→주류하보성(周流河堡城) 9리→필자점(泌子店) 3리→오도하(五道河) 2리→사방대(四方臺) 5리→곽가둔(郭家屯) 5리→신민점(新民店) 5리→소황기보(小黃旗堡) 5리→대황기보(大黃旗堡) 8리→노하구(蘆河溝) 8리→석사자(石獅子) 15리→고성자(古城子) 10리→백기보 5리→소백기보(小白旗堡) 10리→일판문(一板門) 20리→이도정(二道井) 20리→신은사(新隱寺) 8리→신점(新店) 22리→토자정(土子井) 1리→연대(煙臺) 15리→소흑산(小黑山) 4리→양장하(羊腸河) 12리→중안보(中安堡) 12리→우가대(于家岱) 5리→구참리(舊站里) 13리→이대자(二臺子) 5리→달자점(㺚子店) 5리→대소가자(大小家子) 3리→신점(新店) 2리→신광녕(新廣寧) 7리→흥륭점(興隆店) 5리→쌍하관(雙河館) 7리→장진보(壯鎭堡) 5리→상흥점(常興店) 2리→삼대자(三臺子) 3리→여양역(閭陽驛) 15리→이대자(二臺子) 10리→삼대자(三臺子) 5리→사대자(四臺子) 5리→오대자(五臺子) 5리→육대자(六臺子) 5리→십삼산(十三山) 10리→삼대자(三臺子) 12리→대릉하(大凌河) 14리→구릉하참(九凌河站) 4리→사동비(四同碑) 12리→쌍양점(雙陽店) 10리→소릉하참(小凌河站) 8리→소릉하교(小凌河橋) 3리→송산보(松山堡) 17리→행산(杏山) 18리→십리하점(十里河店) 10리→고교보(高橋堡) 8리→탑산점(塔山店) 12리→주사하(朱獅河) 5리→조라산점(罩羅山店) 5리→이대자(二臺子) 3리→연산역(連山驛) 7리→오리하(五里河) 5리→쌍석참(雙石站) 5리→쌍석성(雙石城) 3리→영녕사(永寧寺) 10리→영원위(寧遠衛) 8리→청돈대(靑墩臺) 7리→조장역(曹莊驛) 6리→칠리파(七里坡) 5리→오리교(五里橋) 7리→사하소(沙河所) 8리→건구대(乾溝臺) 3리→연대하(煙臺河) 5리→반랍점(半拉店) 5리→망해점(亡海店) 2리→곡척하(曲尺河) 5리→삼리교(三里橋) 7리→동관역(東關驛) 3리→이대자(二臺子) 5리→육도하교(六渡河橋) 11리→중후소(中後所) 2리→일대자(一臺子) 5리→이대자(二臺子) 3리→삼대자(三臺子) 4리→사하점(沙河店) 8리→섭가분(葉家墳) 7리→구어하둔(口魚河屯) 2리→구어하교(口魚河橋) 1리→양수하점(兩水河店) 9리→전둔위(前屯衛) 6리→왕가대(王家臺) 10리→왕제구(王濟溝) 5리→고령역(高寧驛) 5리→송령구(松嶺溝) 5리→소송령(小松嶺) 4리→중전소(中前所) 11리→대석교(大石橋) 7리→양수호(兩水湖) 3리→노계둔(老雞屯) 2리→왕가점(王家店) 3리→팔리보(八里堡) 10리→산해관(山海關) 10리→심하(深河) 3리→홍화점(紅花店) 7리→범가장(范家莊) 20리→대리영(大理營) 10리→왕가령(王家嶺) 3리→봉황점(鳳凰店) 2리→망해점(望海店) 5리→심하보(深河堡) 10리→망자점(網子店) 10리→유관(楡關) 10리→영가장(榮家莊) 3리→상백석포(上白石鋪) 2리→하백석포(下白石鋪) 3리→오가장(吳家莊) 3리→무령현(撫寧懸) 9리→양하(羊河) 2리→오리포(五里鋪) 3리→노봉구(蘆峯口) 10리→다붕암(茶棚菴) 5리→배음보(背陰堡) 5리→쌍망포(雙望鋪) 5리→요참(要站) 5리→부락령(部落嶺) 12리→십팔리보(十八里堡) 3리→여조(驢槽) 13리→누택원(漏澤園) 3리→영평부(永平府) 2리→청룡하(靑龍河) 1리→남구점(南坵店) 2리→난하(灤河) 2리→범가장(范家莊) 10리→망해대(望海臺) 5리→매화점(梅花店) 8리→야계둔(野鷄屯) 12리→사하보(沙河堡) 8리→사하역(沙河驛) 12리→왕관묘(王官廟) 5리→마포영(馬鋪營) 5리→신점포(新店鋪) 5리→우하점(于河店) 5리→신평점(新平店) 5리→강우교(扛牛橋) 12리→청룡교(靑龍橋) 7리→진자점(榛子店) 1리→철성감(鐵城坎) 20리→소령하(小鈴河) 1리→판교(板橋) 7리→풍윤현(豐潤縣) 22리→조가점(趙家店) 2리→장가점(蔣家店) 1리→어하교(漁河橋) 1리→노가점(盧家店) 4리→고려보(高麗堡) 7리→초리장(草里莊) 1리→연계보(軟鷄堡) 10리→다붕암(茶棚菴) 2리→사하(沙河) 12리→양수교(兩水橋) 10리→양가점(兩家店) 5리→십오리둔(十五里屯) 10리→동팔리보(東八里堡) 7리→용지암(龍池菴) 1리→옥전현(玉田縣) 7리→서팔리보(西八里堡) 8리→오리둔(五里屯) 5리→채정교(彩亭橋) 3리→대고수점(大枯樹店) 9리→소고수점(小枯樹店) 2리→봉산점(蜂山店) 8리→나산점(螺山店) 2리→별산점(鱉山店) 8리→이리점(二里店) 2리→현거(現渠) 4리→소교방(小橋坊) 2리→어양교(漁陽橋) 14리→계주성 5리→오리교 5리→방균점(邦均店) 25리→백간점(白澗店) 12리→공락점(公樂店) 8리→가가령(假家嶺) 1리→석비(石碑) 9리→호타하 5리→삼하현(三河縣) 5리→조림점(棗林店) 6리→백부도(白浮圖) 6리→신참(新站) 6리→황친점(皇親店) 6리→하점(夏店) 6리→유하둔(柳河屯) 6리→마이핍(馬已乏) 6리→연교포(煙郊鋪) 8리→삼가점(三家店) 5리→등가장(鄧家莊) 3리→호가장(胡家莊) 4리→습가장(習家莊) 3리→백하(白河) 4리→통주 1리→팔리교(八里橋) 8리→양가갑(楊家閘) 2리→관가장(管家莊) 3리→삼간방(三間房) 3리→정부장(定府莊) 3리→대왕장(大王莊) 2리→태평장(太平莊) 3리→홍문(紅門) 3리→십리보 2리→팔리보 2리→미륵원 7리→조양문 1리(조양문은 즉 황성(皇城) 동문(東門)임) 4) “지나다가 망해정(望海亭)에 올라 바라보니 금주(金州)ㆍ개주(蓋州)는 저 위에 있고 등주(登州)ㆍ내주(萊州)는 아래쪽에 있으며, 앞의 남쪽은 바라보아도 끝이 없다. 건너편 언덕은 곧바로 우리나라의 양서(兩西) 연변인데 한 바다가 서로 연하였기 때문에 물빛이 같고 조수도 왕래한다. 지금 이 발해를 천하의 동쪽 대양(大洋)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서쪽에 있고 물빛과 조수도 실상 우리나라 서해와 서로 통한다. 이로 보면 우리 영동(嶺東)의 바다가 참 동해이고, 중국에는 참 동해가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기사에서 보면, -> 여기서 보면 발해가 서해이고 중국에는 동해가 없다고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3. 연원직지(1833년) 1) 유관별록에 나타난 한양서 북경까지의 소요일수 1832년 10월 20일 한성을 출발, 12월 19일 북경에 도착 1833년 2월 7일 북경을 출발하여 4월 2일 한성에 도착 -> 당시는 하루에 약 100리정도를 이동했으므로 위의 일수룰 볼 경우, 한반도 서울에서 북경까지의 대략적인 일수를 파악할 수가 있다. 지명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경우 양자간의 거리가 이와 같을 까?
2) 천지산전조에서, “천지 산천(天地山川) 압록강을 건너 심양(瀋陽)까지는 곧장 서남향이요, 심양에서 대릉하(大凌河)까지는 약간 비스듬히 북쪽으로 가다가 혹 서쪽으로 향하는 때도 있으며 능하(凌河)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정남으로 향한다 봉성(鳳城)에서 영수사(迎水寺)까지를 동팔참(東八站)이라 하는데, 팔참 중간에 산들이 어지러이 둘러 있고 큰 개울도 여러 차례 건넌다. 그러다가 요동 벌판에 이르면 400여 리를 가서야 비로소 자그마한 구릉들이 나타나지만 큰 준령(峻嶺)은 하나도 없다. 대개 요동 벌판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수천여 리는, 동남은 모두 평야로 바다에 닿았고, 서북은 광녕(廣寧) 이후로는 의산(醫山)을 오른쪽에 끼고 산해관(山海關)까지 가게 되어 있는데 그 거리가 혹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무릇 이 지방 토질은 요동에서 북경까지가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霧)처럼 먼지가 인다. 그래서 아무리 큰 눈이 쏟아져도 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버리면 이내 눈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는데 그중에도 사하역(沙河驛)이 제일 심하다. 산해관 안쪽은 왕래하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아서 밤낮으로 먼지를 일으키어 아주 바람이 없는 때라도 꼭 잿가루가 날리는 것같이 분분하다.” -> 압록강서 심양까지 서남향으로 이동, 심양에서 대릉하, 대릉하서 산해관으로는 정남방향, 요동벌판서 북경까지 수1000여리는, 동남은 바다에 접한 광활한 평야, 서북으로는 산들이 보이고 토질은 다 모래란 묘사는 현재의 지형과 일치한다
4.김정중의 연행록(1791년) 한양서 북경 남관까지 총 3087리의 이동경로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이동경로상의 약 300개의 지점을 기록하고 있는바. 이들을 현재 한반도와 중국의 지도상에 찍어 볼 경우, 현재의 한반도와 요녕성을 지나가는 경로상의 해당 지점과 모순이 없는 점
5. 국조보감에서 1)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시 일본군의 조선침략경로가 서술되어 있는 데, “당초 적은 동래(東萊)에서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 길은 중도(中道)로 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ㆍ선산(善山)을 경유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일(李鎰)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한 길은 좌도(左道)로 장기(長鬐)ㆍ기장(機張)을 거쳐 좌병영(左兵營)인 울산(蔚山), 경주(慶州)ㆍ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함락하고 용궁(龍宮)의 하풍진(河豐津)을 건너 문경(聞慶)으로 진출해서 중로의 군사와 합류한 다음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침입하였다. 이들은 다시 충주에서 두 갈래의 길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여주(驪州)로 가서 강을 건너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을 건너 경성의 동로(東路)로 진출하였고, 하나는 죽산(竹山)과 용인(龍仁) 쪽으로 나아가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또 한 길은 김해(金海)를 경유하여 우도(右道)로 진출, 성주(星州) 무계현(茂溪縣)을 따라 강을 건너 지례(知禮)ㆍ금산(金山)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서 충청도 영동현(永同縣)으로 진출, 청주(淸州)로 침입하였다가 방향을 바꾸어 경기로 향했다. “ -> 이들 기록은 분명히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지명이다. 임의로 지명을 다른 곳으로 동정할 경우 , 과연 이 이동경로와 모순이 없을까?
2) 같은 해의 기사에서, “요동 순무어사 학걸(郝杰)이 주본(奏本)을 올리기를, "총병 동양정(佟養正)이 품보(稟報)를 받았습니다. 조선이 대국(大國)이라고 일컬으면서 대대로 동번국(東藩國) 노릇을 하여 왔는데 한번 왜적의 침입을 받자 소식만 듣고서 도망쳤습니다. 혹시라도 그 나라가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갑자기 달려올 경우, 수신(守臣)의 입장에서 거절하자니 그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속국의 신뢰하는 마음을 잃게 될 것이고,..” -> 조선이 명을 대국이라 일컫고, 대대로 동번국(동쪽에 있는 속국)노릇을 해왔다는 것을 알수 있음. 명에 대해 약자의 입장이었음이 분명하다. 명의 군사를 징병하는 것이 아니라 파병을 애걸하고 있는 내용이 계속 보인다
6. 이의현의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1720년) 에서 “산해관(山海關)은 영평부(永平府)에 소속되는데 바다와의 거리가 겨우 10리쯤 된다. 출발 후 서울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23일이 걸렸다. 머문 날까지 모두 계산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압록강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32일이 걸렸고, 북경에 42일 동안 머물렀다. 돌아올 때에는 북경에서 압록강까지 28일이 걸리고, 의주에서 서울까지 13일이 걸렸다. 왕복한 것이 도합 138일이요, 이역(異域)에 있었던 것이 101일이다. 이수(里數)로는 왕복을 모두 계산하여 대략 6000여 리가 되고 압록강을 건넌 후에 이틀을 노숙하고, 책문(柵門)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참(站)에서 잤다. 그 참은 모두 30개인데 각 참마다 각각 찰원(察院) 하나씩을 설치하였으니 우리나라 사신을 거처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朝鮮), 유원(柔遠) 등의 관명(館名)을 붙였던 것이다. 그 30참이란 봉황성(鳳凰城), 송참(松站), 통원보(通遠堡), 연산관(連山關), 첨수참(甛水站), 낭자산(狼子山), 요동(遼東), 십리보(十里堡), 심양(瀋陽), 변성(邊城), 주류하(周流河), 백기보(白旗堡), 이도정(二道井), 소흑산(小黑山), 광녕(廣寧), 십삼산(十三山), 소릉하(小凌河), 고교보(高橋堡), 영원위(寧遠衛), 동관역(東關驛), 양수하(兩水河), 산해관(山海關), 무령현(撫寧縣), 영평부(永平府), 사하역(沙河驛), 풍윤현(豐潤縣), 옥전현(玉田縣), 계주(薊州), 삼하현(三河縣), 통주(通州)이다.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 떠나온 후 경성(京城)에서 의주(義州)까지 39일, 머문 날까지 모두 계산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30일 걸렸다. 또 북경에 머문 지 25일이었다. 돌아올 때는 북경에서 압록강까지 27일이요, 의주에서 경성까지 17일이 걸렸다. 왕복한 총계는 137일 이역에 있은 것이 81일이다. 이요, 이수(里數)는 왕복이 대략 6435리다. “ -> 조선을 중국대륙의 어디로 임의로 주장할 경우, 이 기록과 분명히 모순될 것이다
글 원문에는 이것 말고도 더 많은 사료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려면 원문 대륙조선설에 대한 의문점들(1)에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천문자료에 대한 의문점
조선이 내내 중국에 있었다고요? 주장하시는 분들이 금과옥조로 인용하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931년 장려화가 편찬한 책이라는 군요. 미국이나 호주의 지명을 연구하는 데 영국지명사전을 펼쳐놓고 같은 이름을 찾아가는 식으로 연구한다면 그 결과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다음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1. 증보문헌비고 상위고에 있는 글입니다
가) 조선 세종때 정인지의 말.....
"고려는 따로 역을 만들지 않고 당나라의 선명력을 이어받아 썼는 데.. 중국에서는 역에 의한 추산이 실제와 맞지않을 경우 즉시 고쳐 모두 22회나 개력했는 데 고려는 그대로 선명력을 쓰다가 충선왕때 원의 수시력으로 바꿨는 데 제곱근을 구하는 법을 몰라 일월식은 선명력의 방법을 답습해 실제와 전혀 맞지 않았다....." - > 고려가 그토록 강대문명국이었다면서요??? 제곱근 구하는 법도 몰라서 계산을 엉터리로 할 정도면..... 이런 세태는 조선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심지어 뇌물까지 줘가며 중국천문가에게서 새로운 역법이 나올때마다 그 계산방법을 배워오기 급급했으니까요.
나) 정조 15년(1791)년 한양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해서 팔도의 경도를 잰 것이 있습니다 관찰사의 營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해서, 관북은 동으로 1도, 관서는 서로 1도 15분, 해서는 서로 1도 24분, 관동은 동으로 1도 3분, 호서는 서로 9분, 영남은 동으로 1도 39분, 호남은 서로 9분 -> 이 위치가 과연 중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리적인 위치측정기록은 중국 고금지명대사전을 펼쳐놓고 하는 지명동정의 수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근거입니다 관북은 함흥, 관서는 평양, 해서는 해주, 관동은 원주, 호서는 공주, 영남은 대구, 호남은 전주 가 분명합니다. 기존의 설대로... 설이 아니라 사실이지요.
2. 역상고성(1721년 청나라 하국종, 매각성이 편찬한 역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가) 숙종39년(1713년) 청나라인 하국주가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37도 39분 15초를 얻음 또한 한양의 동서偏度로 연경의 동쪽 10도 31분을 얻음. -> 지금의 북경은 동경 116도 20분입니다. 한양이 어디로 보입니까?
3. 국조역상고(정조 때인 1796년 서호수 편찬)에 있는 내용입니다
가) 정조15년(1791년) 8도의 관찰소재지의 위도를 결정합니다 관북 40도 57분, 관서 39도 33분, 해서 38도 18분, 관동 37도 6분, 호서 36도 6분, 영남 35도 21분, 호남 35도 15분 -> 지도에서 찾아보십시오
나) 한양은 연경의 동 10도 30분에있으며 8도의 관찰영의 소재편도를 위의 값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1.의 나)와 동일)
4. 세종시대 편찬한 칠정산내외편을 보면 매일의 일출입시각과 주야의 시각이 주어져있는 데, 역산한 결과 이 값들은 지금의 서울의 위도를 기준으로 계산된 것입니다(유경로 교수의 말입니다)
5.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조11년(1465년) 당대 천문학자 이순지의 작고기사에 보면, 세종때 이순지가 本國(한양을 말하겠지요)의 북위를 38도强(중국식도수)으로 산정해내자, 그 위대한(?) 세종은 이를 의심합니다.(네까짓게 뭐...........하는 심정이겠지요?) 때마침 중국에서 온사람이 역서를 바쳤는 데 그속에 高麗北極出地三十八度强이라는 내용이 있자 그제서야 크게 기뻐하며 순지에게 간의, 규표,천평, 앙부일구등의 천문기기를 교정시킵니다. -> 느끼는 점이 없으십니까? 모든 것을 중국에 의지한 듯한 태도, 중국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세종의 태도가 보이는 듯하군요. 조선이 정말 더 강국이었다면 이런 태도가 있을 수 있을까요?
천문기록은 강력한 과학적 증거입니다. 중국에 조선(의 도읍)이 있었다는 궤변을 버리십시오.
외국인들의 기록
외국인의 조선에 대한 기록 발췌
1. 하멜표류기/조선전/조선서해탐사기, 1999.6. 집문당, 신복룡/정성자 譯註에서 1) 하멜표류기(1668년 최초발간) ⊙ 발행자(James Burney, 1813년)의 해제 - 중국의 수학자들이 관찰한 조선 수도의 위치는 북위 37도 38분이다 - 하멜이 살던 당시의 네덜란드 지리학자인 Cornelis Vischer(1625-1662)와 W.Jansen Blaeu(1571-1638)는 그들의 해도에서 조선을 섬으로 표기하고 있다. 같은 시대의 다른 지리도에서도 조선을 똑같이 오기하고 있다. 서구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은 폭 3리그(1리그=3마일)의 강으로 중국과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유럽인들이 조선에 대해 얼마나 잘못 알고있는가를 보여준다 ⊙ 1653.1.10 네덜란드 Texel 출발 7.16 대만 도착, 7.30 대만 출발, 바다로 나가 폭풍우 만남. 8.11까지 중국대륙과 대만사이를 오르내리다가 폭풍우로 북동쪽으로 떠내려가 3일간 방향도 모르는 채 표류함. ⊙1653.8.15밤 제주도(Quelpart)에 표착, 북위 33도 32분(현재 남제주군 大靜邑 山房山 앞바다임)임을 조타수가 알아냄. 8.21 약 4리그 떨어진 대정이라는 마을에 도착. 8.22 대정을 출발해 목사가 있는 마을에 도착함. 10.29 조정에서 파견된 Jan Jansen Weltevree 만남 ⊙ 제주도는 육지로부터 12-13리그 떨어져있고 섬의 북쪽에는 배를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있고 여기에서 대륙으로 배를 출항시킨다 ⊙1654년 서울로 호송되어 가는 길… 제주섬-배로 출발 하루만에 육지도착- 海南- 다음날 靈岩-그날 밤 羅州-다음날 밤 長城-井邑-큰 산을 넘어 笠巖山城-泰仁-다음 날 金堤-그날 밤 全州-連山-公州-큰 강을 지나 경기도에 들어감-여러날 후 큰 강(한강)을 건너 1리그를 가 서울에 도착함(약간 서쪽으로 방향 튼 적도 있으나 계속 북상해서 옴) ⊙1666년 조선 탈출 9.4 순천에서 배로- 남동쪽으로- 9.6 일본 平戶섬에 접근- 9.8 五島列島 도착- 9.12 나가사키 도착 ⊙ 조선의 위도는 34도-44도사이이고 동서폭은 75리그(1리그=3마일) ⊙ 동북해에서 매년 고래잡이가 성하고, 12월-3월에는 동북해에서 청어잡이가 한창이다 ⊙ 조선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은 황해의 가장 좁은 지역을 항해하여 건너간다 ⊙ 조선의 무역은 대부분 일본과 조선 남동쪽에 있는 부산에 창고를 가지고 있는 대마도사람들과 이루어 진다 ⊙ 조선은 산중의 성과 요새를 제외하고는 360개의 도시를 포함하는 8개의 지방으로 나뉘어 있다. ⊙ 조선과 일본사이의 대마도는 이전에 조선에 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과 맺은 평화조약에서 제주도와 대마도를 교환하였다 ⊙ 조선은 南京灣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떨어져 있지만 북쪽은 길고 높은 산들로 중국과 접해있다
2) 조선전(프랑스 P.Du Halde(1674-1743)신부) ⊙ 북에서 남쪽까지 조선의 폭은 위도 34-43도에 이르는 거의 9도의 넓이이다. 동쪽에서 서쪽까지의 길이는 고르지 못하고 너비에 다소 못미치는 편인데 최대폭은 6도를 넘지 않는 다 ⊙ 鳳城은 요동의 목채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위치가 북위 10도 30분 20초, 동경 7도 42분이다.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지점은 중국 수학자들이 측정한 바 북위 37도 38분 20초이다 봉성의 동쪽에 이르면 현왕조가 통치하고 있는 조선의 서쪽경계선이 나타난다. 중국을 침략하기에 앞서 조선을 복속시킨 만주와 조선간의 전쟁이 종결된 후 양국은 목책과 조선의 경계선사이에 비거주지역을 존속시키기로 합의했다. ⊙ 조선의 언어는 중국어나 타타르어와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중국을 방문하는 이는 누구나 통역사를 대동했다 ⊙ 조선은 동서 1200리, 남북 2200-2300리이다 ⊙ 궁궐이 있는 지방의 북쪽으로는 북악산이 있다. 수도의 서북쪽에는 환도산이 있다. 왕건은 송악이라고도 불리는 개성산에 그의 궁궐을 세웠다. 평양의 북동쪽으로는 요양이 있다.조선의 강들중에는 궁궐이 있는 지방을 흐르는 요수가 있다, 평양에는 대동강이 흐른다. 압록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 데 강어귀로부터 길이가 300리에 달한다. 그리고 수도의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른다. ⊙ 조선은 중국과 일본사이의 동해로 나있는 곶의 형태로 내달린 큰 반도이다 ⊙ 조선의 수도 漢城은 북위 35도, 경도는 북경보다 10도이상 동쪽에 있다 ⊙ 남원에서 전주까지는 100리가 채 못된다
3.)朝鮮西海탐사기(Basil Hall, 1816년) ⊙ 1816.9.1 섬에 닿아 Sir James Hall Group 군도라 명명하다. 동경 124도 46분, 북위 37도 50분에 위치한다(현재의 서해 5도임) ⊙ 1816.9.3 북위 36도 30분, 동경 126도 가까이 다다르니 주요육지로부터 6-7리그이다 섬에 올라 Hutton island로 명명하다. 북위 36도10분, 동경 126도 10분이다(현재의 신안군 智島임) ⊙ 1816.9.4 Basil’s bay에 상륙하여 현감과 手話로 대화하다(현재의 장항만. 순조실록 16년 7월조에 기록있음) ⊙ 1816.9.6 섬에 상륙하다. 동경 126도 2분 45초, 북위 34도 22분 39초이다 ⊙ 1816.9.10 오전에 남으로 출발해, 해질녘에 남동쪽의 제주도를 봄
2.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W.F.Sands 著(1930), 신복룡(申福龍) 역주, 집문당, 1999.9 - Sands(1874-1946)는 1900년에 고종의 고문이 된 미국인임 ⊙ 濟物浦는 큰 모험을 무릅써야 하는 관문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한 항구였다. 검은 바위와 갈색모래뿐 관목도 없고 높지 않은 척박한 언덕이 간조때에 모습을 드러냈다. 항구는 활기가 없이 漢江어귀에 위치해 있었으며 섬들이 그 주위에 많이 있었다. 주민의 배들이 간조때의 개펄에 널려있었고 몇몇의 조그만 증기선들은 훨씬 더 밖에 머무르면서 만조때 17피트까지 물이 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몇세기에 걸쳐 중국 및 일본과 혼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사람들은 원래의 인종과는 많이 다르며 선사시대에 반도로 이민된 흔적이 다소 보이고 대륙의 인접국과의 간헐적 접촉과 남쪽으로부터의 유입의 흔적도 보인다 ⊙ 이 나라는 눈덮인 모자와 같은 구릉의 나라이며 넓은 평원은 거의 없다. ⊙ 일본과 중국은 쇠약한 이 국가에 대해 서로 종주권을 주장했다. 1894년 청일전쟁까지 양국은 조선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북경이나 도쿄가 중국과 일본 국민의 생활의 중심인 것처럼 서울은 그 나라의 심장이고 생활의 중심이다…북쪽에는 평양이 있다. ⊙ 제물포에서 서울까지는 24마일이다 ⊙ 강화도는 한강어귀에 있는 데, 이 요새에서 75마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울이 있다 ⊙ 조선의 최남단 항구인 부산을 거쳐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다보면 제주도는 기선항로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파란색의 거대한 원추형 화산의 모습을 어렴풋이 나타낸다… 제주도는 고립성 때문에 조정은 제주도를 유배자들의 귀양지로서 이용했다. 제주도는 조정이 다스리지만 그것은 단지 명목상일 뿐이다. 독립의 전통뿐만 아니라 그곳의 여러 이상한 관습들은 제주도를 다스리기가 어려운 곳으로 만들었다. 세상에서 잊혀진 이 외딴 곳에서 남자는 열등하게 취급받았고 여인들이 모든 것을 차지했다. 여인들이 실질적인 가장이었고 여인들이 모든 재산을 소유했다… 제주도는 실질적으로 여인의 나라인 아마존사회이다. 거의 모든 곡식류는 60마일 떨어진 내륙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가져온다. 여인들은 수영과 잠수에 능숙하다.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가끔 암초 때문에 해수면에 떠 있는 박 가까이에 바구니를 띄어놓은 채 수영을 멈추기도 하며 전복이나 식용해초다발을 찾기위해 다시 깊이 잠수한다… 제주도는 뚜렷이 화산섬이다...6558피트 높이의 한라산이 있다. 분화구에는 호수가 있다. 제주도에는 세개의 도시가 있다. 북쪽 해안가에 위치한 수도인 제주는 바다로부터 조금떨어진 곳에 수백년동안 자란 덩굴로 우거진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또하나는 하멜이 난파해 도착한 大靜이다. 제주도는 길이가 약 40마일이며 폭은 17마일이고 모양은 타원형이다 ⊙ 10리는 약 3.3마일이다. ⊙ 월미도는 제물포 항구를 두개의 灣으로 나눈다
3. 내 기억속의 조선, 조선사람들(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퍼시벌 로웰 著(1885), 조경철 譯, 예담, 2002.1 - 퍼시벌 로웰은 미국의 유명한 천문학자(화성운하 발견주장자). 1883년에 조선을 방문. ⊙ 조선반도에서 대마도를 거쳐 이끼라는 섬을 지나 일본으로 들어간다 일본열도 바로 서쪽에 자리잡은 반도가 조선반도다. 반도북쪽으로 훨씬 더 큰 조선땅이 이어진다. (만주는 우리땅이라는 의미?) ⊙ 중국, 조선, 일본 3개국은 같은 한자라도 제각기 발음이 다르다. 그들은 글로써는 서로 통할 수 있어도 말로써는 통할 수가 없다 ⊙ 조선의 북쪽구석에는 정상에 항상 눈이 덮여 있는 걸로 잘 알려진 백두산이 있고 산의 높이는 30마일로 이는 일본식 방법으로 측정한 것인 데, 산의 높이가 경사의 길이 및 산길꼭대기까지의 길이와 같다고 한다. 접근이 어려운 정상 가까이에는 조그만 호수가 하나 있는데, 이는 두 강의 원류다. 압록강은 남서쪽으로 흘러 조선과 중국을 갈라놓고, 두만강은 북동쪽으로 흐르면서 조선을 극동지역내 러시아의 마지막 영토와 분리시킨다 ⊙ 조선의 조약항은 북쪽의 원산, 남동쪽의 부산, 서해안의 중간에 자리잡은 인천등 세곳이다. 혹독하게 추운 날씨 때문에 가장 북쪽에 위치한 원산항은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꽁꽁 얼어버린다. 부산은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현재의 운송수단으로는 수도까지 열흘이나 걸린다 ⊙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뭐니뭐니해도 수도인 서울로 반도에 존재해 온 역사상의 숱한 수도 가운데 가장 마지막인 셈이다. 위치상으로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 조선은 위도로 남으로는 남서군도의 최남단인 제주도가 북위 33도 15분에서, 북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이 북위 43도에 걸쳐있다. 두만강에서 약간 북쪽으로 러시아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다. 6월초에서 7월중순까지는 장마라 불리는 우기가 이어진다. 장마가 끝나면 뜨거운 두달이 이어진다. ⊙ 서울은 북위 37도 15분에 있다 ⊙ 조선의 동쪽 해안을 따라 일본어로는 쿠로시오, 곧 검은해류라 불리는 물줄기가 흘러든다 ⊙ 기선들은 나가사키에서 출발하여 열세시간이나 열여섯시간의 항해끝에 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부산항에 도달하게 된다 ⊙ 조선의 남단은 다도해다 ⊙ 남쪽에서 가장 멀고 큰 섬인 제주도를 지나자마자 바다는 뚜렷한 변화를 보였는 데, 쓰시마 해협을 지나는 동안 해수는 아름다운 푸른 빛을 띠었으나 막접어든 황해는 이름그대로 누런 진흙빛이었다. 부산을 떠난지 사흘째 되는 날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제물포는 한강하구에 자리잡고 있다. 제물포에서 서울까지는 약 27마일이다. 이나라 고유의 교통수단인 가마로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린다 ⊙ 서울서 삼각산까지는 약 7마일 거리다. 삼각산 정상의 동쪽 지맥위에 절이 있다. 화계사다
4. 스웨덴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I Korea), 아손 그렙스트(1912), 김상열 역, 2005.1, 책과함께 - W.Ason Grebst는 1904년 한국을 방문한 스웨덴 기자다 ⊙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발하여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으로 12시간 이내에 올수 있다 ⊙ 열차로 부산을 출발하여 한시간쯤 후에 낙동강을 지남. 08:30 부산역을 출발해 09:30경 대구역에 도착. 경상도의 수도임. 대구는 넓고 비옥한 분지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대구에서 숙박후 12시에 대구역 출발, 오후가 되어 공주에서 상당시간 정차. 어두움이 짙어가는 가운데 평택역에 정차, 수원으로 거쳐 서울로 감 ⊙ 서울은 대한제국의 수도로 갈색의 동산들과 검고 거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북동쪽에는 거대한 북한산이 있다. ⊙ 한강하류근처에 강화도란 섬이 있다. 조랑말을 타고 서울을 출발하여 그날 저녁무렵에 강화도를 육지로부터 갈라놓는 해협부근의 통진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도착함. 나룻배로 해협을 건너 전등사를 거쳐 단군단을 지나 (제단의 폭은 16피트 높이는 10피트 정도) 섬위에 우뚝 솟아 있는 마니산 도착함. 마니산 정상에서는 한쪽으로는 한강의 상류가 아스라하게 보였고 또 다른 한쪽으로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음. 강화도를 나와 배로 제물포로 가 기차로 서울로 돌아옴 ⊙ 조선은 남쪽에는 평야가 많고 숲이 드문 반면에 북쪽에는 산이 많고 거의 전지역이 깊은 숲으로 덮여있다
5.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a and her neighbors), I.B.비숍(1897), 신복룡 역주, 집문당, 2000.3 - Isabella Bird Bishop(1831-1904)여사는 영국인으로, 최초의 왕립지리학회 여성회원이었음. 너무도 극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임. 1894년부터 1897년에 조선을 4차례 방문. ⊙ 조선의 인구는 1200-1300만명 정도다(다른 부분에서는 1200-1400만으로 적고 있음) ⊙ 이 나라는 북,동쪽으로 중국과 접경하여 있는 반도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대략 1740마일이고 북위 34도 17분-43도, 동경 124도 38분-130도 33분에 위치해 있고 면적은 8만평방마일이 조금 넘는 데 영국보다 조금 작은 크기이다. 북서쪽은 두만강, 압록강과 황해에 의해 러시아(?) 및 중국과 나뉘어져 있으며 동남쪽 경계는 은빛줄모양의 일본해이다. 러시아와 인접한 경계선은 불과 11마일이다 ⊙ 호수의 숫자는 적고 규모도 조그마하다. 강으로는 압록강, 대동강, 낙동강, 목포강, 한강등이 큰 데, 한강은 동해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원하여 전국토를 거의 이등분하며 흘러 서해안의 제물포에서 바다에 이른다. ⊙ 동해안은 가파르고 바위가 많으며 물이 깊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1-2피트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남서쪽과 서쪽 해안의 조수간만의 차는 무려 26-38피트나 된다. 남쪽과 서족해안에는 놀랄 정도로 많은 다도해가 흩어져 있다. ⊙ 조선은 분명히 산이 많은 국가이며 평야라고 이름을 붙일만한 장소는 거의 없다. 북쪽에 군집한 산중 대표적인 것이 백두산인 데 고도가 8000피트가 넘는다. ⊙ 서울의 북동부는 화산암이 넓게 널려 있으며 북부에는 화산암과 화성암이 흔하다 ⊙ 7-8월과 때로는 9월초순까지 덥고 비가 많이 온다. 서울의 여름 평균기온은 약 75F이고 겨울에는 33F. 최근 3년반동안의 관찰로 연평규강우량은 21.86인치이다. ⊙ 조선은 1392년 이래 현재의 왕조에 의해 통치되어 왔으며 13개 도와 360개 군현으로 나누어져 있다 ⊙ 조선의 언어는 혼합되어 있다, 식자층은 대화에서 가능한 한 중국어를 많이 사용하며 보고서의 모든 문자는 한문으로 되어 있는 데, 그것은 천년전의 중국의 고어형태여서 중국에서 현재 사용되는 중국어와는 발음이 완전히 다르다. 조선의 글자인 언문은 한문교육을 고집하는 지식층으로부터 무시되고 있다. ⊙ 나가사키에서 조선의 남단에 위치한 부산까지는 기선으로 15시간이 걸린다 ⊙ 낙동강의 어귀는 부산으로부터 7마일 떨어져 있는 데 吃水선이 5피트인 기선이 50마일 상류에 있는 밀양까지 항해할 수 있다.. 경상도는 13도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으며 전라지방을 제외하고는 가장 번창하고 비옥한 곳이다 ⊙ 섬이 점처럼 늘러서있는 한강어귀에 있는 제물포로부터 서울의 강나루인 마포까지 56마일은 배편을 이용하여 항해하여 올라갈 수 있다 ⊙ 조선은 해발 120피트, 북위 37도 34분, 동경 127도 6분에 위치하고 있는 데 2627피트의 삼각산이 있다. 북한산의 성벽은 높이가 25-40피트이고 길이는 14마일이다. 성채에는 8개의 관문이 있다 ⊙ 도시중앙의 종합에 1468년 서거정이 세웠다는 명문이 있는 거대한 청동종이 달려있다. ⊙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산은 약 5마일의 길이에 3마일의 폭의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으며 인구는 약 20만명이다 ⊙ 서울에서 출발하여 8일째 중원에 도착, 10일째 청풍에 도착, 30일째 단양에 도착 ⊙ 영월에서 20리 아래에 있는 영춘에서 동해까지는 약 40마일 거리이다 ⊙ 북한강의 좌측 4마일쯤에 춘천이 있다. 북한강은 높은 자수정 등성이를 얼마간 흘러오다가 춘천 바로밑에서 그 고장을 관통한다 ⊙ 가평은 강에서 1.5마일 떨어져 있는 400호가 사는 현이다 ⊙ 금강산 가는 길에 있는 雁門재는 고도 4215피트이고 正陽寺는 고도 2760피트에 있다. ⊙ 금강산에 長安寺. 楡岾寺, 表訓寺, 正陽寺등이 있다. 금강산은 12000봉우리가 있다하며길이 32마일, 폭 22마일의 지역을 포함한 톱니모양의 길쭉한 산지로서 북위 37도의 강원도에서 시작된다. 금강산 북동쪽에 神溪寺가 있다 ⊙ 장안사에서 유점사까지는 약 11마일인 데, 이 것을 따라가면 세개의 수도원인 표훈사, 마하연과 유점사가 있고 그 외에 작은 수도원이 몇 개 더있다 ⊙ 通川은 바다로부터 2마일 정도 들어온 고산지대인 데, 앞바다에서 본 동해는 녹색이며 해안가까이는 보라색이며 먼 곳은 짙은 푸른색이다. 서해안에서처럼 조수가 25-28피트나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일 없이 간만의 차이가 18인치이내이기 때문에 잔잔한 해면을 보인다. ⊙ 서울서 남산을 벗어나 원산으로 가는 큰 길에 이성계가 교육을 받고 자란 석왕사가 있다. 석왕사에는 현왕조의 첫왕에 대한 비문외에 500나한의 불상이 있다. 불상은 1피트가 넘지 않고 몇 개의 층으로 절을 에워싸고 있다. 석왕사는 원산으로부터 하루가 안 걸리는 거리이다. ⊙ 원산은 서울에서 동쪽에 있는 개항장이다 ⊙ 원산의 남서쪽에 영흥만이 있는 데, 면적은 거의 40평방마일정도이고 깊이가 6-12 fathom이며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원산항의 끝에서 원산까지는 약 16마일이다. 그곳에는 거칠고 광대한 염전이 얕은 해안에 있다. ⊙ 6.17에 기선을 타고 원산을 떠나 6.19 부산에 도착, 6.21 제물포에 도착 ⊙ 만주의 넓이는 약 38만 평방마일이다. 북만주지방은 춥고 거대한 숲이 펼쳐져 있어 농사를 짓기에는 어려움이 믾다. ⊙ 奉天은 紐昌으로부터 지름길로 120마일 거리이다. 봉천은 11.5마일의 토성으로 둘러 쌓여있다. 봉천은 해발 160피트, 북위 41도 51분, 동경 123도 37분에 있다. 요하의 지류인 혼하로부터 3마일 거리에 있다. ⊙ 서울 敦義門을 나와 高陽을 지나 坡州를 통과해(파주에서 1박) 너비 343야드의 임진강을 건너 송도에 도착함(만 2일만에). 송도의 성벽은 10마일 길이. 6만명 거주. 상단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 상단산은 높이가 2000-3000피트이다. 송도에서 유명한 품목은 인삼이다 ⊙ 송도를 떠나 瑞興을 지나고 鳳山을 거쳐 바다에서 36마일 떨어진 황주를 지남. 황주의 북쪽은 기름지고 돌이 없는 빨간 충적토의 넓은 평야로 되어 있으며 대동강을 향해 거의 40마일이나 펼쳐있음. 이후 평양에 도착. 평양은 너비 400야드인 대동강의 북쪽에 있음. 성벽은 25마일. 평양에서는 청일전쟁시의 격전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 12里는 3.75마일이다(여기서 환산해보면, 10리 = 5.0km??) ⊙ 관서지방 여행일정표 서울 –高陽 40리-坡州 40리-오목 40리-오죽교 30리-松都10리-오흥숙주 30리-군고개 30리-돌마루 35리-안성파발 25리-瑞興 30리-흥서완 30리-豊山 40리-黃州 40리-구문다리 30리-치돌파발 40리-平壤(고대의 수도) 30리-모리고개 30리-양양장 30리-慈山 30리- 수양리 40리-학여울 35리-가창 35리 –흑구리 40리-德川 30리 –서총 30리- 안길령(높이 3346피트의 고개) 20리 – 실위 40리- 無盡臺 25리-順川 35리- 慈山 30리- 신양천 40리- 안진미륵 30리- 平壤 20리, 총 1060리 ⊙ 평양에서 36리 떨어진 价川에는 강둑 가까이에 풍부한 탄광석이 매장되어 있다 ⊙ 1896년 10월 현재 한성판윤은 李采淵이다 ⊙ 제물포를 떠나 조선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서쪽입구인 돈의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갔다 ⊙ 서울은 이름이 한양이지만 보통 서울로 불리우고 있다
6. 내가 본 조선, 조선인, 카르네프외 4인 저, A.이르계바예브, 김정화 역, 가야넷, 2003.6 - 1885-1896년까지 조선을 여행한 5인의 러시아장교들의 조선 여행기
<조선 중남부 여행기, 1895-96년> – 카르네프, 미하일로프 ⊙ 1895.12.7 저녁 나가사키 출발, 12.8 아침에 부산항 도착. 부산만은 낙동강하구에서 12베르스타(1 베르스타 =1.067km)거리. ⊙ 1895.12.15 오후 말(馬)로 동래로 출발, 도착. 12.16 동래 출발해 양산, 외양(12.17), 경주(12.19)를 거쳐 영일 도착. 영일은 동쪽을 제외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위치함.영일서 멀지않는 곳에 도기를 생산하는 충산이라는 고을 있음. 이후 장하연, 연독, 영현, 양현을 지나 낙동강을 건너 봉학산을 넘어 영천에 도착. 영천의 인구는 700명이다. ⊙ 부산도착-동래-양산-울산-경주-영일-흥해-영천-풍기-단양-제천-충주-여주-양평을 거쳐 서울로 옴 ⊙ 서울-제물포-수원-당진-천안-공주-은진-전주-순창-담양-광주-나주-무안-영암-강진-장흥-보성-순천-광양-하동-사천-고성-마산-창원-김해-부산으로 돌아옴 ⊙ 조선의 남부해안에는 상어들이 많다 ⊙ 부산남쪽으로 만을 둘러싸고 있는 곳에 사슴섬이 있다. 사슴섬은 섬의 북쪽에서 해발 1300피트의 최고높이를 보인다 ⊙ 부산관찰사는 초량에 거주하며 동래, 양산, 거창, 울산, 경주, 영일, 창려, 흥계, 온양, 거제, 진주, 대구, 안동, 부산등 14개고을을 통솔하는 데 이름은 주석윤이다(1895.12월 현재) ⊙ 낙동강은 조선 동남지역의 젖줄이다. ⊙ 양산에서 외양까지 하루가 걸렸고 이틀후 경주에 도착. 경주 남산에서는 투명하고 붉은 돌이 나오는 데 옥돌이라 부르며 안경테의 재료로 쓴다. ⊙ 경주근교에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고분들이 있다. ⊙왕건이 건국한 고려는 수도를 현재의 개성인 송도로 옮겼다 ⊙ 조선의 인구는 1200만 정도다 ⊙ 충주를 떠나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충주에서 16베르스타에 강릉이 있다. ⊙ 양평과 여주는 35베르스타 거리이고 지평에서 양평까지는 7베르스타 거리이다 ⊙ 여주의 동북쪽 변두리에 江漢祠란 사당이 있어 송시열의 초상화와 저서를 보관하고 있다 ⊙ 서울은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 도읍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오강수라는 강에 의햐 두지역으로 분리. 도읍둘레에는 21피트 높이의 성벽이 19베르스타 길이로 쌓여 있음 ⊙ 1896.2.28 남서문인 소의문을 통해 서울을 나와 마포마을에서 배로 강을 건너 모래섬으로 가 오리골서 숙박후 제물포로 감. ⊙ 공주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넘. 금강은 공주에서 서남쪽으로 75베르스타 거리, 이강의 폭은 약 70사젠(149m).바닥에는 모래가 쌓여있고 매우 질퍽거림. 공주의 인구는 11000명이다. ⊙ 공주에서 바위 많은 계룡산 기슭을 따라 은진을 지나 전주로 감. 전주가까이의 계룡산맥은 동남쪽으로 돌아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음. 전주에는 시조인 태조의 궁궐이 있다. 전주의 인구는 24000명이다. ⊙ 전주에서 순창까지 거의 남쪽으로만 향해 갔는 데 양쪽으로 높은 산들이 솟은 협곡을 건너갔다. ⊙ 담양은 평지에 위치해 있고 인구는 2500명이다. ⊙ 나주의 인구는 6000명이다. ⊙ 무안은 동남쪽이 산으로 둘러져있는 분지에 위치해 있고 인구는 3000명이다. 무안을 떠나 서남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목포로 감. 목포에서 서쪽으로 3 베르스타 되는 지점에 灣이 보임. ⊙ 나주에서 무안을 거쳐 목포까지는 55 베르스타 300사젠 거리이다 목포는 만의 절벽에 위치한 인구 1300명의 고을이다. 목포에서 서남 2.25 베르스타에 고하도가 있고, 목포에는 삼태섬과 세개의 섬인 삼학도도 있다. 목포에서 서쪽으로 13-15마일 거리에는 1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주군도가 있다. 군도는 북에서 남으로 30마일, 동에서 서로는 170마일 까지 퍼져있다 ⊙ 목포에사 나올 수 있는 다른 길이없어 무안으로 되돌아 와, 무안에서 금강을 배로 건너 영암도착. 영암에서 강진으로 가는 길을 해발 767피트의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나있다. 길 동쪽에는 월출산줄기가 있다. ⊙ 강진은 해안의 내해에 있고 그곳에 고금도군도가 있으며 강진 인구는 6000명이다. ⊙ 강진에서 동쪽으로 14베르스타에 장흥이 있는 데 장흥의 인구는 1200명이다 ⊙ 장흥-보성-낙안-순천-동쪽 11.5 베르스타에 광양(인구 200명)- 다섯 고개 넘어 하동(인구 100명)- 사천으로 감. 사천군수는 44세의 손휘로다(1896.4 현재). 사천인구는 2000명. – 산문산 넘어 고성-진해-마산포 도착. 마산포는 남쪽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향이 높은 산으로 에워싸인 만에 위치한다. 남쪽에서 들어오는 입구는 커다란 거제도군도로 막혀있다. ⊙ 창원은 마산포에서 10베르스타 거리다.-김해. 김해는 동북쪽으로 높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쪽까지 넓은 평지다-구포-부산으로 돌아옴
<조선의 현상황에 대한 짧은 기록, 1885년까지>- 다데슈칼리안 공후 ⊙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인 조선은 두개의 큰 강을 사이에 두고 청국과 시베리아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그 강들은 거의 같은 산의 정상에서 시작되어 서로 반대방향으로 두개의 큰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간다 ⊙ 나가사키에서 배로 반도의 동남쪽끝인 부산항까지 가서, 부산에서 해안을 따라 15-18시간 동안 계속 서쪽으로 여행하면서 반도의 서남쪽 모퉁이를 돌아 해안을 따라서 제물포항을 향해 북쪽을 간다 ⊙ 조선에는 곰, 늑대, 여우, 너구리, 흑담비, 담비, 삵쾡이, 다람쥐, 멧돼지, 야생염소, 사슴등이 사는 데 이들은 특히 북쪽 지방에 많이 서식한다 ⊙ 조선에는 표범과 벵골산호랑이들이 많다 ⊙ 반도남쪽에는 원숭이들이 많이 산다 ⊙ 원산은 조선의 동쪽 항구인데, 대규모로 포경업이 이루아지고 있다 ⊙ 반도남쪽에는 도룡뇽과 악어종류가 서식한다. 이들은 때로 江에 나타난다 ⊙조선의 면적은 314,582평방킬로다. 인구는 약 1100만이고 이중 100만이 노비다. ⊙ 조선의 동남쪽 항구인 부산은 위도 35.66도, 경도 129.3도에 위치한다 ⊙ 조선 서해안은 조사간만의 차가 최고 30피트나 되어 만조시에는 큰 배들이 자유로이 다닐 수 있지만 썰물때에는 바닥이 완전히 드러나다시피 한다
<조선 중북부여행기, 1895.12-1896.1월>- 알프탄 ⊙ 한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지류로 갈라지면서 그 하구에서 강화도라는 섬을 형성하고 있는 데, 임진왜란때 왕족들이 이 섬으로 여러 번 피난을 갔었다 ⊙ 조선의 인구는 1300-1500만명 정도로 보인다 ⊙ 경흥 출발-150베르스타 거리에 경성-길주-성진-단천-이원-북청-흥원-함흥-원산 도착. ⊙ 경성에서 성진까지는 150베르스타거리. 북청에서 남으로 50베르스타 에 흥원 위치. ⊙ 함흥은 성천강의 넓은 계곡에 위치한다. 관찰사가 주재한다 ⊙ 경흥은 러시아와 경계가 되는 두만강에 위치한다 ⊙ 경성에는 관찰사가 있고 놋그릇 생산지로 유명하다. 경성은 해안에서 6.5 베르스타 거리에 있다 ⊙ 경흥에서 나진만까지는 34베르스타, 나진만에서 경성까지는 124베르스타, 성진에서 이원까지는 12베르스타 거리이다. ⊙ 이원에서 북청을 지나을 지나 홍원까지 108베르스타(고개 7개를 넘는다), 흥원에서 함흥을 거쳐 고원까지는 122베르스타 거리이다(고개 12개를 넘는다). 이원에서 19베르스타 지점에 높이 2110피트의 고개가 있다. ⊙ 고원에서 원산까지는 비교적 고른 평지이다 ⊙ 부산은 나가사키에서 12시간. 대마도에서 6시간 거리이다 ⊙ 단천은 러시아 국경으로부터 330 베르스타 거리에 있고 , 이원은 360베르스타 거리이다 ⊙ 1881년 작성된 조선의 총인구는 1627만 7855명이다 ⊙ 경성, 명천, 길주부근에 광대하고 질좋은 석탄층들이 있다. ⊙ 경성은 석탄층으로 유명한 데, 해안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점이 있다. ⊙ 아오지마을은 러시아 국경에서 15 베르스타 거리인 데 석탄이 노천에서 채취되고 있다. ⊙ 길주에서는 철이 생산된다. ⊙ 은광석은 단천의 것이 가장 좋고 수정도 여기서 많이 난다
<조선 북부여행기, 1889년> - 베벨리 ⊙ 러시아와 조선의 국경길이는 총 15베르스타밖에 안된다 ⊙러시아 국경에서 원산까지의 길은 한반도 전역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있는 주산맥의 동쪽비탈로 나 있었고 원산에서 서쪽으로 평양까지 길이 이어져 있었다. 주산맥은 위도 39도 20분을 지나간다.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길은 동남방향으로 뻗어있다. 국경에서 서울까지 약 1020 베르스타 거리이다 ⊙ 경흥 아래쪽 1.5베르스타 떨어진 지점에서 소형보트로 두만강을 건넜는 데, 강의 폭은 150사젠(320m)였다. 강은 물살이 약했으며 깊이가 겨우 3ft정도 였다.(1888.5.18 건넘) ⊙ 탄천강의 왼쪽 기슭과 하구에서부터 약 10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함흥이 있다. 탄천강의 길이는 약 100베르스타이다 ⊙ 함흥에서 원산까지는 100베르스타 거리이다. ⊙ 국경에서 300베르사타거리인 마천령은 해발 2380ft, 390베르스타인 부상령은 2000ft이다
이밖에도 우리나라의 잡지에 대해서 올린 것도 있는데, 그것또한 참조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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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기록을 봐도 조선은 분명 한반도에 있었습니다.
외세의 조작이라고 하기에는 그 '조작국'이 너무도 많습니다. (-_-);
여기있는 사료들까지 다 부정한다면, '조선왕조실록'또한 후세의 조작으로 보이는데, 그럼 남는게 뭐가있습니까?
대륙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승계했다고 인정하지 않겠다."라고 까지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모든 '사료'와 조국의 정체성까지 의심하면서 '국사'는 왜 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륙론을 열창하시는 분들이 정녕 우리나라의 영토가 이렇게 되었기를 희망하고, 그런 근거 없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우리나라의 '상권'이라도 저런 범위를 나타내도록 궁리할 수는 없습니까?
역사는 현재와 후세를 위한 것이지, 결코 과거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의 업적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배우는 진정한 목적은 우리 조상들의 업적만을 배워, 국수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남의 나라 선인들까지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는것에 있습니다. |
첫댓글 근거가 없다니요? 근거는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정사(?)인지는 모르나 정사의 기록에 의한 것입니다. 어차피 역사기록이란 피지배층과는 괴리된 기록입니다. 추측컨대 근대국민국가를 형성하면서 기존의 역사의 얼기설기 엮은것이 아닐까요 ?
단적인 사례로 조선의 지배층의 문화는 이른바 중국(?)으로 알려진 문화였읍니다. 단순히 한자를 빌린것이 아니라 글의 순서 즉 말의 순서까지도 한자문화였읍니다. 문자가 없어서 문자를 빌렸다는 가정은 이해할수 있으나 말의 순서까지도 빌렸을까요?
사람의 말이나 의식을 기록한 것이 문자로된 사서라면 기존의 한자사서들은 한글이나 우리말의 어순이 아닌 이른바 중국(?)식의 표현입니다. 사서를 보면 단순히 글자만을 차용한것이 아니라 말의 어순까지도 빌렸다는 것이지요.말이 없어서 말의 순서까지 중국(?)의 어순을 빌렸을까요 ? 이건 아니겠지요.
위의 언급한 내용처럼 기록이 한반도에 부합하는 내용도 있겠지만, 반대로 한반도에 부합하지 않는 기록또한 너무나 많습니다. 참고로 제국주의 시기에 제국주의 열강들은 피식민지에서의 역사고고학 유적과 유물의 발굴을 엄청나게 진행시켰읍니다. 그점은 일본도 마찬가지 였읍니다.
또한 기존의 지배질서을 무너뜨리고자 종족간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기도 하였지요. 한글학회 같은 경우도 해당되겠지요. 마치 프랑스가 베트남사람들에게 중국문화를 멀리하게 하기위하여 베트남의 문자를 고안하여 보급하였듯이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임정하고는 관계가 없고 조선총독부의 법통을 이었지요.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은 1948 년 정부수립이후이며, 미군정으로 부터 정권을 이양받았고,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에게서 정권을 이양받았지요. 조선총독부는 어디에서 ? 이후는 상상에 맡기지요.
인류사에서 역사는 수많은 단절이 있어왔읍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역사야 말로 조작의 증거이겠지요
안그래도 지금 최두완선생님의 글들을 퍼가고 있는데 -ㅅ-; 반론들이 멋지더군요.. 그 글들에 대한 반론들을 다시 추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런식의 방법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논리적으로나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다시 생각하여 더욱 진실에 다다르는 길을 찾기를 바랄뿐입니다...
이글 하단중...자꾸 눈길이 가는 글들... 조선의 현상황에 대한 짧은 기록들, 1885년까지>- 다데슈칼리안 공후 ⊙ 조선에는 표범과 벵골산호랑이들이 많다
⊙ 반도남쪽에는 원숭이들이 많이 산다 ⊙ 반도남쪽에는 도룡뇽과 악어종류가 서식한다. 이들은 때로 江에 나타난다
그렇군요. 원숭이가 사는 한반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