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이야기
(전 선 재)
우리들 마음속에는 조국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있는 것 같다. 유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표하는 노래는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문득<아리랑>을 떠올렸다.
올해는 3.1만세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4주년이 되는 해다.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셨던 수많은 애국지사와 선조들의 넋을 기리며, 약 10년 전 3.1절에 대한민국 청년들이 만든 프로젝트 [This is Arirang]을 늘푸른대학에서 해설과 함께 동영상으로 시청하였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에게는 ‘제2의 애국가’라고 할 만큼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많은 한국인은 <아리랑>의 참 뜻을 잘 모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아리랑>은 버림받은 한 여인의 한 맺힌 노래가 아니다. <아리랑>의 뜻과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최초의 아리랑은 <정선 아리랑>으로 600여 년 전 강원도 정선에서 만들어졌다. 먼저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를 살펴보자.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많은 고려의 신하들이 조정을 떠났다. 그 중에 72명의 고려 신하들이 모여 살던 곳이 바로 개성에 있는 두문동이었다. 이성계는 이들의 재능을 무척이나 아껴 관직에 나오게 하려고 애썼으나 아무리 설득을 해도 그들은 두문동에 숨어서 나오질 않았다. 그러던 중 “두문동에 불을 내면 나오겠지” 생각하고 방화를 했으나 그들은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죽고 말았다. 이 일을 배경으로 어느 곳에 한 번 들어가 영영 소식이 없을 때 두문불출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두문동에서 살아난 고려 충신 일곱 명이 강원도 정선으로 은거지를 옮겨 살면서 고려 왕조에 대한 흠모와 두고 온 가족 및 고향에 대한 그리운 심정을 노래했는데 이것이 <정선 아리랑>의 시초다.
세월이 흘러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타버린 경복궁을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여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책임을 맡게 되었다. 건축용 목재를 강원도에서 베어 한강을 통해 뗏목으로 운송하였다. 한강의 최상류인 조양강에서 출발해 남한강을 거쳐 마포로 이어지는 여정을 따라 <정선 아라랑>을 부르면서 뗏목을 운반하였던 것이다. 정선에서 마포까지는 천리물길이고 영월, 평창 일대는 험한 물길로 인해 떼꾼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을 만큼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떼꾼들의 삯은 매우 높았다. 뗏목 한두 번 타면 1년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떼돈을 벌었으므로 너도 나도 뗏목을 타려고 했다. 여기에서 ‘떼돈’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뗏목을 몰고온 떼꾼들이 마포 객주에 머무를 때 부른 <정선 아리랑>이 한양에 전파되었고, 이 노래를 들은 한양 사람들이 좀 더 부드럽고 부르기 편하게 편곡한 노래가 <경기 아리랑>이다. 마포에서 <경기 아리랑>이 크게 유행할 때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듣고 배워서 보름이나 걸리는 고향길에 전하고 고향에 가서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노래가 영남지방에서 널리 불리는 <밀양 아리랑>과 전라도 지방에 전해져 편곡된 <진도 아리랑>이 있다. 그러므로 <정선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은 한국의 3대 전통 아리랑이 되었고, 그중 <정선 아리랑>은 모든 아리랑의 모태가 되었다.
노랫말을 어원으로 살펴보면 그 뜻이 좀 더 애틋하고 가슴에 사무쳐 온다.
‘아리’는 ‘아름답고 멋진’의 뜻이다. ‘아리따운 = 아리 + 다운’의 합성어로 고어에서는 ‘고운’ ‘곱다’로 쓰인 흔적이 있다. 몽골에서 ‘아리’는 아직도 ‘곱다,성스럽다, 깨끗하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다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으로도 쓰인다. 우리말에서 ‘마음이 아리다’라는 뜻은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랑(郞)은 한자로 ‘임’을 뜻하며 젊은 남녀를 모두‘郞’으로 표시했다. 따라서 “아리랑‘은 ’아름답고 고운 님‘ 혹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뜻한다. ‘고개‘는 고대 전통사회에서 마을 공동체의 경계선으로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은 ’이별‘을 의미한다.
이렇듯 <아리랑>은 크게 두 가지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첫째는 연인들이 부르는 연가요, 둘째는 나라에 대한 충절의 노래라 할 수 있다. 특히 고려 말 충절과 지조를 지키며 ‘아름답고 멋진 사람’으로 살고자 했던 두문동 72현들의 고귀한 의지의 표현이며,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충신들의 삶과 죽음의 서사시였다. 후에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나라 잃은 슬픔과 일제에 대한 항거의 노래로 이어졌고, 그 후 우리민족의 정서를 대표하는 노래로 계승되어 애창되고 있다.
‘아리랑’은 이제 한국을 넘어서 세계 속의 아리랑으로 그 입지를 굳히고 있다.
1990년, <아리랑>은 미국 연합장로교회 찬송가 229장으로 수록되었다. 당시 찬송가 후보곡이 3천여 곡이나 되었으나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서 모인 편찬위원회 전원의 찬성을 이끌어내 당당히 찬송가집에 실리게 된 것이다.
2001년, 제31차 유네스코 총회는 ‘세계 구비문화 유산의 전승’을 위해 <아리랑 상>을 제정하였고, 2002년, 일본 카시와 고등학교 오케스트라가 <아리랑>으로 일본 전국대회 우승은 물론, 세계 취주악 경연대회에서도 1등을 했다. 일본 고등학교 오케스트라 지도교사가 한국여행 중 우연히 듣게 된 <아리랑>에 반해 한국을 오가며 배워 단원들에게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2003년, 독일에서 유럽 작곡가들이 모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선정위원회’에서 <아리랑>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의 작곡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의 82% 지지율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선정되었다.
2012년, 유네스코는 <아리랑>을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하기에 이르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는 ‘아리랑’을 듣고 싶어서 한국을 방문한 한 외국인이 한국에서도 가장 한국적이라는 인사동과 민속촌 한옥마을을 찾았으나 그 어디에서도 ‘아리랑’을 들을 수 없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2013년 3월 1일 인사동 쌈지길에 한 청년이 등장했다. 곧 이어 한명씩, 한명씩 악기를 들고 도착한 40여 명의 한국 청년 연주자들에 의해 ’아리랑‘연주가 플래시 몹*으로 진행되었다. 지나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아리랑‘ 연주에 맞춰 다 같이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애국가‘연주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애국가를 제창하였으며, 마지막은 “대한민국 만세!”로 갈무리하였다. 전혀 사전 예고도 없이 플래시 몹으로 이루어진 이 행사로 시민들은 감동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만세를 부르면서 하나가 되었다. 오늘의 우리도 그랬다.
이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아리랑’이 울려 퍼진 날이다. 언제 들어도 우리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아리랑, 일제 강점기 치욕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정서를 면면히 이어오게 했던 아리랑, 아리랑을 들으면 가슴 한편이 저리고 사무친다.
* flash mob : 특정 다수인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사전 약속된 퍼포먼스로 모임의 성격을 대변하는 행동을 하고 곧바로 흩어지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