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설
신화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적 교리 및 의례의 언어적 진술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 정의가 대체로 적용될 수 있는 한국의 신화로는 흔히 고조선·신라·고구려·백제 및 가락의 이른바 건국신화 또는 시조신화를 으뜸으로 꼽아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각 성씨의 시조신화인 씨족신화와 여러 마을의 수호신에 관한 마을신화, 그리고 무당사회에 전승된 무속신화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네 묶음이 될 한국의 신화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의 공통성은 이들이 다같이 창시자 내지 창업주에 관한 이야기, 곧 본풀이 내지 본향풀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고, 둘째의 공통성은 이들 신화가 실제에 있어 전설적인 속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한국의 네 가닥 신화들은 창시자의 본풀이인 신화·전설의 복합체라는 공통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본풀이란 근본 내력에 관한 이야기풀이라는 뜻이다. 어떤 신격(神格)이 어떤 내력을 지니고 어떤 과정을 밟아서 신격을 향유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사설이 본풀이이다.
그것은 이야기로 진술된 신 또는 신령의 이력서이다. 따라서, 당연히 신 또는 신령의 전기(傳記) 내지 생애 이야기라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 때 전기의 길이, 세부적인 부분의 취사 선택에는 신화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태어나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신격에 오르는 과정을 포함하는 근본 골격에는 변함이 없는 일군의 신화와, 애초부터 신격을 타고난 인물이 범상을 넘어선 과업을 성취하는 근본 골격에 변함이 없는 또 다른 일군의 신화를 갈라서 생각할 수 있다.
전자의 전형은 무속신화이고, 후자의 전형은 이른바 건국신화이다. 고려왕조의 시조전승들도 이 후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근본 골격 가운데 전자만을 두고 본풀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던 것이다. 이 말은 무속사회, 특히 제주도의 무속사회에 적용된다. 무속신화가 무당시조에 관한 본풀이라면, 건국신화는 건국시조에 관한 본풀이이다.
마찬가지로 씨족신화는 씨족의 시조에 관한 본풀이이다. 여기서 한국 신화에서 시조 혹은 창시자가 지닌 비중이 떠오르게 된다. 한국 신화가 시조 혹은 조상령에 바치는 신앙과 맺어져 있음을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한국 신화는 조상 숭배의 신화라는 일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조상 숭배의 실현으로서 한국 신화는 조상의 역대기(歷代記)라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예컨대 단군신화(檀君神話)와 동명왕신화(東明王神話)가 각기 그 왕국 창업주들의 삼대기라면, 고려왕조 전승은 왕건(王建)의 조상들의 사대기이다.
<용비어천가>가 이 선례를 답습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특히 조선왕조의 소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삼대기의 연원을 이들 신화 삼대기에서 구할 수 있음은 흥미롭다.
한국 신화들의 또 다른 속성인 ‘신화·전설의 복합성’은 한국 신화가 역사화된 신화 내지 역사 속에 편입된 것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무조, 곧 무당의 시조에 관한 신화는 이 사례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고조선·삼국 및 가락의 건국신화는 실존한 왕국, 역사적인 왕국의 시조에 관한 이야기인만큼 그 신화성이 역사성과 공존하고 있다.
분명히 여러 가지 신비징후 내지 신성징후(예컨대 천마, 자줏빛, 신령의 공수 등) 들을 수반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임에도(또는 그와 같은 존재의 아들이나 손자임에도) 인간 세계에서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 신화에 등장하는 건국 시조들이다.
신이면서 동시에 왕인 이들은 신이자 인간이기도 하다는 면모를 지니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화적 존재가 ‘탈신화화’하여 역사적인 왕국의 창업주로 변모하는 것이다. ‘탈신화성’은 다름 아닌 ‘역사성’이거니와 그런 뜻에서 한국신화는 피안의 원리, 초월적인 어떤 원리가 인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단군신화에서 유명해진 ‘홍익인간’, ‘재세이화’ 등의 이념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과 관련지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탈신화화하여 역사화된 신화가 곧 한국신화, 특히 건국신화이거니와 전설이 역사적 믿음을 그 이념으로 삼고 있음을 전제로 하여 한국신화가 ‘신화·전설의 복합’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복합성은 고려왕조의 조상전승의 경우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학술적으로는 설화를 신화(神話)와 민담(民譚)과 전설로 분류한다. 전설은 민담과 달리 역사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증거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傳)이 뜻하는 바와 같이 전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 오는 통시간적(通時間的)인 존재이며, 이 시간에 따라 널리 전파되므로 넓은 공간에 파급된 문화 형태라고 하겠다.
전달하는 내용, 전달하는 사람, 전달 방법, 이것을 수용하는 사람, 그리고 어떤 변화가 있다는 점은 언어나 문학·언론과 비슷하지만, 일정한 형식과 내용이 결합한 형태로 전하는 과정을 수없이 대를 물려서 현재까지 이르렀다는 시간의 여과(濾過)와,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살아남은 것만 전승되었다는 점이 다른 문화 현상과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아무 것이나 전설이라고 할 수 없고, 전설은 일정한 민족 또는 지방에서 민간에 의해 내려오는 설화인데, 신화가 신격(神格) 중심이라면 전설은 인간과 그 행위를 주제로 이야기한 것이다.
전설은, ① 말하는 화자와 듣는 청자가 그 이야기의 사실을 믿으며, ②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기념물이나 증거물이 있으며, ③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어 역사에서 전설화했다든가, 혹은 역사화의 가능성이 있는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설화는 문헌으로 전하는 문헌전설과, 현재 들을 수 있는 구비전설(口碑傳說)로 나뉜다. 구비전설은 다시 첫째 대상, 둘째 전파·분포, 셋째 증시물(證示物)의 수, 넷째 시간성(時間性), 다섯째 표현 방법, 여섯째 지역적 분포에 따라 하위 분류가 생긴다.
첫째의 대상은, 설명하는 대상에 따라 ① 자연물(자연전설) : 육지(지역지명·산·고개·바위·굴·식물·동물), 하해(샘·우물·못·강·섬·곶·항구·바다·항만), ② 인공물(인문전설) : 유적(성터·집·정자와 누각·다리·비석·둑·廟堂·무덤), 유물(복식·음식·가구·가면·신앙물·武具), 사찰연기담(사찰·탑·불상·종·經版·佛具), ③ 인간과 동물 : 물적 증거는 없으나 보조분류하면, ㉠ 인물(長者·高僧·충신·학자·武將·시조), ㉡ 인간행위(과거·풍수·修練·怪誕·占卜·棄老·힘내기·人身供犧·戰亂), ㉢ 동물(용·호랑이·개·지네·뱀·기타동물)로 분류할 수 있다.
이것은 물적 증거에 따라 쉽게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의 전파·분포는,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어 민담과 가까우나 증시물이 있는 광포전설(廣布傳說)과, 국내의 유일하거나 몇 개 되지 않는 사건을 담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특수전설(特殊傳說)로 나눈다.
쌀 나오는 구멍[米穴] 전설이나, 홍수로 산꼭대기까지 물이 잠겼다는 홍수전설은 광포전설이고, 어느 가문이나 동네에만 있는 것은 특수전설이다. 이 분포를 지도에 그릴 때 전국 골고루 분포된 균포(均布)전설과 한쪽으로 치우쳐 몰려 있는 편재분포(遍在分布)전설로 나누기도 한다.
셋째의 증시물의 수는, 전설의 공간적인 증거물인 증시물의 수에 따라서, 단 하나뿐인 단일증시전설과, 한 전설에 연결되어 전설이 사실임을 강조하는 연쇄증시전설로 나눈다.
넷째의 시간성은, 전설이 미치는 시간을 따져 이미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설명하는 설명전설과, 다분히 신앙적인 예언성을 가진 예언전설로 나눈다. 이것은 과거에 예언 완성이 된 완성형과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은 예언미완성형으로 나눌 수 있다. 예컨대, 지리산 근처에서 장차 나라를 구할 영웅이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은 예언미완성형이 된다.
다섯째의 표현 방법은, 그 전설의 줄거리만 간단히 들어 증시물만 설명하는 건조체 전설과, 길게 수식하여 흥미를 주는 재미있는 윤색체 전설로 나눈다. 여섯째의 지역적 분포는, 국가별·도별·군별 등 지역에 따라 같은 계열의 전설이라도 미묘한 차이와 형편에 따라 분류를 새로이 만들 수 있다.
시간을 제시하는 단어에 따라 고정적인 진행상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전설은 맨 처음 시작할 때, “옛날 어느 곳에 한 사람이 살았는데”라고 말하는 ‘옛날에’가 나온다. 전설에는 되도록 구체적인 시기를 밝히려 하지만, 대개는 엄밀히 말해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전설이 전개될 때는 ‘하루는, 어느 날’이 제시된다. ‘하루는’이 제시되기 전에는 막연히 시간과 공간과 인간을 제시했을 뿐 능동적인 힘(운동)이 가해진 것이 아니므로 이야기가 활동하지 않는 정적(靜的)인 상태로 발단 부분이 되고, ‘하루는’ 이후가 전개 부분이 된다.
그 다음은 이야기 내용이 바뀔 때마다 ‘마침, 그 때, 한편, 이 때, 얼마 뒤’ 등 구체적인 변화 시간이 제시된다. 그러다가 과거 이야기 내용이 끝나 현재까지 순식간에 이어지려고 할 때는 “지금도 그 증거가 있다.”는 ‘지금도’가 제시된다.
이런 시간 제시 단어를 시간화소(時間話素)라 하고 ‘옛날에-발단부 시작, 하루는-전개부 시작, 제시된 가변적인 시간-전개부와 결과부, 지금도-증시부’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곧, 시간화소에 따라 전설의 진행은 발단부→전개부→결과부→증시부 등 네 부분이 된다.
전설을 크기에 따라 분석해 가면, 맨 처음에 다른 전설과 구분이 되는 전설형(傳說型, type)이 있고, 다음에 독립될 수 있는 이야기인 삽화(揷話, episode)로 나눌 수 있다. 이 삽화는 전설마다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어서 일정하지 않다.
다음에 작은 이야깃거리인 모티프(motif)가 있다. “일본에 간 박제상을 기다리던 아내가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람이 돌로 변한 화석(化石) 모티프가 되는 것이며, 그 아내가 죽어서 새가 되었다면 화조(化鳥) 모티프가 되는 것이다.
민담 내용
그러나 현실적으로 민담이라는 용어는 훨씬 제한된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즉, 민간에 전승되는 민중들의 이야기의 뜻으로는 ‘민담’이라는 용어 대신에 ‘설화’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반면, 민담은 이 설화 갈래를 다시 세분했을 때의 하위 범주로 생각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민담이라는 용어는 외연적으로는 매우 넓은 뜻을 가지고 있으나, 내포적으로는 다소 좁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용어이다.
설화의 하위 범주로서 민담을 정의하려면 필연적으로 설화의 다른 하위 범주들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신화나 전설에 비하여 구분될 수 있는 민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화나 전설은 과거의 특정시대에 일어났던 일회적인 사건을 그리는 데 비하여, 민담은 과거 언제 어디서나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사건을 그린다. 따라서 신화나 전설은 진실성이 문제되는 데 반하여 민담은 진실성이 문제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민담은 가장 시적인, 공상에 찬 허구이다.
둘째, 신화나 전설이 현존 증거물에 대하여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과 경험을 설명하려는 객관성을 띠는 데 반하여, 민담은 경험하는 자, 즉 작중인물의 잇따라 일어나는 다양한 운명을 주관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므로 화자(話者)에 대하여는 양자가 주관적인 문학이거나 객관적인 문학이라는 차이가 있다.
셋째,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는 피안관념(彼岸觀念)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존재하지만, 민담에서는 주인공을 돕거나 해를 가하기 위한 힘이 되고, 주인공을 예정한 목표로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신화나 전설은 늘 엄숙하지만, 민담은 엄숙함과 해학 사이를 오간다. 즉, 민담은 본질적으로 오락성을 띠므로 엄숙성과 신앙성에서 본다면, 신화나 전설은 사회적 맥락이 큰 데 반하여 민담은 사회적 맥락이 작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화·전설·민담 사이에 이와 같은 확연한 차이가 늘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모티프(motif)로서 본다면 이 셋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내용에 의하여 설화를 신화·전설·민담으로 세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나, 민담이 전설이나 신화의 세계로 혼입되거나, 그와 정반대의 경우도 흔히 있다.
민담이 입으로 전해지면 구전민담이라 하고, 구전되던 민담이 문자로 기록되면 문헌민담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구전민담이 구비문학에 속하는 것이라면, 문헌민담은 기록문학에 속한다. 구비문학의 여러 다른 장르가 그러한 것처럼 민담의 생명은 구전된다는 데 있다.
문헌민담의 경우 그것은 원래 구전민담의 기록이며, 일단 그것이 기록되어 버리면 생명력은 식는다고 볼 수 있다. 기록된 민담이 다시 민중 속에서 구전될 때에야 비로소 그 문헌설화는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민담의 현장성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문헌민담이 문자를 해득할 수 있는 일부의 유식계급 사이에서만 행해졌던 반면에, 구전민담은 문자의 사용이 시작된 뒤에도, 오랫동안 문자와는 관계가 없었던 대다수의 민중 사이에서 구전된 문학인 것이다.
민담연구를 위한 구전민담의 자료 및 채록은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다. 어느 학문이건 자료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는 없겠지만, 민담자료는 특히 현지조사에서 직접 얻은 원문 그대로의 것, 곧 현장성이 있는 자료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렇다고 하여 문헌자료가 쓸데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구전민담의 경우, 그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확실히 전승되어 왔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는 반면, 민담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증거가 남아 있는 문헌기록을 통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문헌민담의 경우, 기록자 임의대로 고쳐서 기록하는 것이 심함을 자료 이용에 앞서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설화의 하위 범주 중에서도 특히 민담의 표현형식은 고정된 방법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민담의 표현형식을 논할 때, 지금까지 가장 많이 언급되어 온 것은 서두와 결말의 형식이다.
가령 민담의 서두는 늘 ‘옛날 어떤 곳에’ 또는 ‘옛날 옛날 오랜 옛날’ 따위로 시작된다. 또한 민담의 결말도 대개 고정된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데, 가령 ‘이게 끝이오.’ 등의 끝났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 잘 살다 죽었지.’ 등의 행복한 결과를 나타내는 말, 혹은 ‘이건 어렸을 때 조부님께 직접 들은 얘기지요.’하면서 이야기의 출처를 밝히는 말, ‘모두 말짱 거짓말이지요.’ 하면서, 이야기 자체의 신빙성에 대한 부정적 태도, ‘바로 엊그제가 잔칫날(혹은 장삿날)이었는데, 내가 가서 잘 먹고 방금 오는 길일세.’ 하면서 해학적으로 이끄는 말 따위가 그것이다.
민담의 표현형식에 대한 폭넓은 고찰로는 덴마크의 올릭(Olrik,A.)의 논문 <설화의 서사법칙>(1909)이 있다. 올릭의 논문을 근거로 하여 민담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담론(談論, Discourse) / 담화(談話), 언술(言述), 언설(言說)
지난 삼십 년간 담론이라는 용어는 말하기나 글쓰기에서의 정격(正格, 바른 격식) 표현이라는 전통적인 의미와는 다른 수많은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렇게 의미가 늘어난 원인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전반 구조주의가 도래한 이래 이론과 비평이 취한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에서 찾을 수 있다. 언어학자들에게 있어서 담론은 문장보다 긴 언어의 복합적 단위를 가리킨다. 담론 분석은 쓰여지거나 말해진 언어에 들어 있는 이 단위들의 관계에 관한 연구이다.
서사학에서 담론은 (사건의 배열과 반대되는) 서술 내지 텍스트의 언어를 지칭한다. 포스트주조주의 비평가와 이론가들도 이 용어를 선택했지만, 그 서사학적 언어학적 용례들과 관련되는 동시에 구별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들에게 담론은 텍스트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언어의 의미작용 일반도 가리킨다.
이 용어는 미셀 푸코를 본받아 사용 중인 언어를 가리키는 데 쓰기도 한다. 즉, 푸코에게 있어서 담론이란 특정한 대상이나 개념에 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또한 그러한 존재들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를 정하는 규칙을 형성함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성 있고 자기지시적인 집합체이다. 그래서 ‘법률적 담론’, ‘미학적 담론’, ‘의학적 담론’ 등의 말이 가능하다.
이 언표와 규칙의 집합체는 역사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의 가능성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변함에 따라 변화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담론은 T.S. 쿤(과학철학자)의 패러다임 개념 중의 하나와 유사하다. 푸코는 이런 의미에서 담론은 개인들 간의 교환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며 익명성의 층위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담론은 ‘사고하는, 인식하는 주체(subject)’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라고 말해진다’ 라는 층위에 위치한다. 가령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는 과학의 반대이지만, 푸코의 분석에서 과학은 또 하나의 담론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서사(敍事)는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글의 양식을 말한다. 서사는 인간 행위와 관련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언어적 재현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 외적인 영역에도 다양한 형태의 서사가 존재한다. 신문의 사건 기사와 취재 일지, 그리고 역사의 기록물들은 모두 서사에 속한다. 의사가 쓴 환자의 병상 기록이나 과학자의 실험 일지, 예술가의 공연 일지도 넓은 의미에서 모두 서사에 속한다. 이런 식으로 나열한다면 서사는 모든 인간 활동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의 양식으로서의 서사는 이러한 사실과 경험을 다루는 경험적(經驗的) 서사가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허구적(虛構的) 서사를 말한다. 허구적 서사는 서사를 구성하는 허구성의 원리 자체가 미적 형상성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문학적 서사가 된다. 그러나 경험적 역사적 서사는 사건에 담겨지는 정보의 실재성 자체를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미적 형상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문학적 서사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소설이다. 소설은 어떤 일련의 사건들을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화자(話者)가 청자(聽者)에게 말해주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소설에는 이야기를 말해주는 화자가 있고 화자에 의해 말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화자는 이야기를 실제의 사실처럼 말해주는 서술 행위의 책임을 맡는다. 소설의 화자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영역에 위치한다. 예컨대 소설이라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놓고 볼 때, 실재적인 화자는 작가이다. 작가는 이야기인 텍스트를 실재적인 독자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서사 내적인 상황에서 화자는 텍스트 내적 세계의 한 영역을 담당하는 허구적인 이야기꾼이다. 여기서 화자는 서사의 내용이 되는 이야기를 텍스트의 세계에 존재하는 허구적인 청자에게 전달한다. 작가/독자, 그리고 화자/청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통구조는 그러므로 텍스트 외적인 실재 공간과 텍스트 내적인 허구적 공간이라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공간에 자리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서로 관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마치 화자인 것처럼 이야기를 말하고 독자는 마치 자신이 청자인 것처럼 그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므로 서사에서 화자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의 내용에 참여하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예컨대 이야기의 내용 속에 등장하는 작품 내적 화자와 이야기의 외부에서 이야기를 말해주는 작품 외적 화자가 있을 수 있다.
소설의 이야기는 언제나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한다. 때와 장소는 이야기의 구성과 그 진행에 구체성을 부여한다. 시간과 공간의 결합이 없이는 서사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하다. 경험적인 내용이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서사에서 시간과 공간은 실재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적 서사는 이미 일어난 것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실재성을 재현하고 전달한다. 그렇지만, 소설과 같은 허구적 서사는 이와 다르다. 허구적 서사는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마치 일어났던 것처럼 꾸며내기 위해 인물을 만들어 어떤 행위를 꾸며내고 그 행위에 시간과 공간의 구체성을 부여한다. 허구적 서사의 시간과 공간은 실재의 때와 장소가 아니라 가공의 시간과 공간이다. 허구적 서사에서 이야기 내용에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공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고 실제의 일처럼 꾸며내는 행위, 이것이 바로 형상화이다. 이 형상화의 원리에 근거하여 소설은 허구적 서사로서 문학적 양식이 된다.
미메시스
[예술]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로서의 모방(模倣)이나 재현(再現)
내포독자『문학』 텍스트에 의해 내재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방식의 독서를 통해, 텍스트의 잠재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가상의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