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보고서는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왕이 되지 못한 이들에 대해 적어놨습니다..
(출처 :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1. 의경세자 (이름 : 장/자 : 원명)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이다..
1445년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를 아내로 맞아 1454년 월산대군을 낳고, 1457년에 성종을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잔병이 잦았으며, 그 때문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세조의 가족들은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사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경세자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는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제를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더을 파헤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둘째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2. 순회세자 (이름 : 부/아명 : 곤령)
1551년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557년(7세)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윤원형의 추천으로 참봉 황대인의 딸과 혼담이 오고 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이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 호군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하고 1563년(13세)에 세상을 떴다. 이 때문에 명종의 대를 이어 중종의 서손자 하성군이 대통을 이어야 했다.
3. 소현세자(이름 : 왕)
인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인렬왕후 한씨이다.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에 강석기의 딸과 혼인 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심양에 인질로 잡혀 갔다. 그는 이후 8년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그와 해결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이 같은 외교솜씨를 발휘하는 한편으로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을 접하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소현세자의 이같은 활동을 친청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비난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청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소현세자를 좋아하지 않고, 급기야는 그가 조선 국왕으로서 부젹격하다는 판단을 히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귀인 조소용과 세자빈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 시켰다.
소현세자가 9년동안의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귀국하였을때 인조는 그를 무척 박대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철저한 친청주의가자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안는 용렬한 모습을 보인다.
입국 후 2달 뒤인 4월 23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고, 와병한지 3일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그의 온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학자들은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34세의 혈기왕성한 나이로 죽은 이듬 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가 두 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인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현세자는 죽은 후 경기도 고양시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이 무덤을 소현묘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4. 효장세자
영조의 맏아들이며 정빈 이씨의 소생이다. 비는 좌의정 조문명의 딸 효순왕후이다. 1724년 경의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8년(10세) 병으로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능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영릉이다.
5. 장헌세자((=사도세자)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세 때 홍봉한의 딸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그는 3살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하였다. 또한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눠줬으며, 10세 때 이미 소론측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옥사를 비판하였다고 한다.
1749년(15세)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떄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고, 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관서 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증에 대해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으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이 같은 말에 비추어 볼 때 사도세자는 일종의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듯 하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그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가둬 8일만에 굶겨 죽였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가 죽은 뒤 영조는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의 무덤은 처음에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었는데,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릉으로 정해졌다.
6. 문효세자
어린 나이로 죽은 탓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음..
7. 효명세자 (이름 : 영/자 : 덕인/호 : 경헌)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으며,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 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미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아들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익종에 추존되었으며 180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었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