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여 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는데
현재의 영호루는 철근 콘크리트로 된 한식 누각이다.
북쪽 면에는 공민왕의 친필 현판을, 남쪽 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영호루’를 걸었다.
내부에는 갑술년 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회수한 현액들과 새로 복원한 현액들을 게판하였다.
현재 게판되어 있는 시판, 제영,중수기등 46점과 현판 2점이 있다.
영호루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때
왕이 이 곳 복주(福州)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으며, 사장에서 활쏘기경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한 映湖樓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중기 명종(明宗) 2년(1547년) 대수(大水)로 누각이 유실(流失)되었으나
현판만은 김해(金海)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어 6년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 안한준 중창 하였으며,
영조(英祖) 51년(1775년)에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申孟彬)에 의하여 중건 되었다.
정조(正租) 15년(1792년)의 홍수때 또 유실되어 4년뒤에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중건 하였으며
1820년 (순조20) 부사 김학순(金學淳)이 중수하고 자신이 쓴
낙동상류 영남명루(洛東上流 嶺南名樓)라는 현판을 걸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1934년 갑술년(甲戌年) 대수(大水)도 면할 수가 없었으며 누각은 유실되고 「금자현판」만은 수개월후
선산군(善山郡) 구미리(龜尾里) 부근의 강물 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 후 빈터로 있던것을 1969년 12월 안동시.군민이 「영호루 중건 추진 위원회」를 조직 하여,
안동시가지 남편 강언덕인 정하동(亭下洞)에 1,085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1970년 11월에 역사적인 영호루의 중건을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영호루(映湖樓) 전경
공민왕 친필의 영호루(映湖樓) 편액
박정희 대통령 친필 편액
영호루 측면
영호루 내부
1820년(순조20) 안동부사 김학순(金學淳)이 영호루를 중수하고
자신이 쓴 낙동상류 영좌명루(洛東上流 嶺左名樓)현판을 걸었다
영좌명루(嶺左名樓)
누대에 걸린 40여개의 시(詩) 편액들 중 포은 정몽주의 시
정몽주(鄭夢周, 1337~1392고려 말기의 충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영일(迎日), 관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안동 영호루회자일본작(安東 映湖樓回自日本作)
일본서 돌아와 안동 영호루에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열편동남군현다(閱遍東南郡縣多) 동남으로 여러 고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영가형승각우가(映嘉形勝覺尤加) 영가의 경치가 제일 아름다워라.
읍거최득산천세(邑居最得山川勢) 고을이 산천 형세 가장 좋은 곳에 있어
인물분연장상가(人物紛然將相家) 인물도 많아라, 장상가가 분분하네.
장포세공요숙속(場圃歲功饒菽粟) 논밭에 풍년 들어 곡식들은 넉넉하고
루대춘몽요앵화(樓臺春夢繞鸎花) 누대의 봄날엔 꾀꼬리와 꽃이 있네.
직수명정종금석(直須酩酊終今夕) 모름지기 오늘 밤이 다 새도록 취하리
만리초회해상착(萬里初回海上槎) 만리 길을 처음으로 배를 타고 왔잖은가?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의 시
정도전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관직은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이다
제영호루(題暎湖樓)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비룡재천롱명주(飛龍在天弄明珠) 나는 용이 하늘에서 맑은 구슬을 희롱하다가
요락영가호상루(遙落永嘉湖上樓) 멀리 영가고을 영호루에 떨어 뜨렸구나
야상불순근병촉(夜賞不須勤秉燭) 밤경치 구경코자 불 밝힐일 따로 없네
신광만장사정주(神光萬丈射汀洲) 신기한 광채가 물가를 만길이나 비추네
백운 우탁(白雲 禹倬)의 시
우탁은 고려 후기 학자로, 본관은 단양.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도 햇으며 아버지는 천규(天珪)이다.
우탁은 합리적이고 사변적인 학자로서 특히 정이(程頤)가 주석한
주역(周易)의 정전(程傳)을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후학들이 그를 종사(宗師)로 삼았다.
예안 역동서원(易東書院), 안동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유작으로 시조 2수가 전하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백운 우탁(白雲 禹倬)의 시
영남유탕열연다 (嶺南游蕩閱年多) 영남지방을 여러 해 노닐었지만
최애호산경기가(最愛湖山景氣加) 호수와 산의 경치 가장 좋았네.
방초도두분객로(芳草渡頭分客路) 풀 우거진 나루에 갈림길이 있고
녹양제반유농가(綠楊堤畔有農家) 버들 숲 언덕에 농가가 서 있네.
풍념경면횡연대(風恬鏡面橫煙黛) 거울 같이 물 위에 먼 경치 비치고,
세구장두장토화(歲久墻頭長土花) 낡은 담장 위에 토종 꽃이 자라네.
우헐사교가격양(雨歇四郊歌擊壤) 비 개자 사방 들판에 풍년가 들리는데,
좌간임초창한사(坐看林杪漲寒槎) 누각에 앉아 숲 위로 외로이 뜬 배 보네.
성도공(成度公) 조효문(曺孝門)의 시
조효문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조우희(曺遇禧)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조경수(曺敬修)이고, 아버지는 참판 조혼(曺渾)이다.
조선전기 평안도관찰사, 예조참판, 대사헌, 악학도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성도(成度)이다.
영호루(映湖樓)
조효문(曺孝門)
영남가려이무다(嶺南佳麗已無多) 영남의 좋은 경치 이미 많지 않은데
형승화산백배가(形勝花山百倍加) 지형이며 경치야 화산(안동)이 제일이지
방초청천분객로(芳草晴川分客路) 꽃다운 물 맑은 내에 나그네길 나뉘고
녹양수죽엄인가(錄楊脩竹掩人家) 푸른 버들 긴대는 인가를 가렸네
호심일난어취랑(湖心日暖魚吹浪) 호숫물 따뜻하니 물고기 뛰놀고
장각풍미연축화(墻角風微燕蹴花) 바람 잔 담 모서리엔 제비가 나네
남북분치하일요(南北奔馳何日了) 남북으로 바쁜 걸음 언제 그치랴
영주직욕문장사(瀛洲直欲問張槎) 영주에서 장건의 멧목을 묻고 싶구나?
점필제 김종직의 시
김종직(金宗直, 1431 ~1492)은 조선 성종 때의 학자로
.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본관은 선산(善山). 관은 지 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했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 높았다.
영호루(映湖樓)
점필제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落日簾旌灝氣多(낙일염정호기다) 지는 해 쓸쓸한 기운 발에 어리어
倚樓愁思亂交加(의루수사난교가) 누에 오른 이 마음 시름도 많아라.
透迤湖水秋通漢(투타호수추통한) 출렁이는 물결은 은한(銀漢)에 닿고
轂轆柴車夜向家(곡록시거야향가) 덜컹대는 수레는 집을 향하네.
光射汀洲星斗額(광사정주성두액) 모래톱을 비추는 북두의 별빛,
香生林簿蕙蘭花(향생임부혜란화) 들에서 스며 오는 혜란화 향기.
月明更想前朝事(월명갱상전조사) 달 밝은 밤 고려의 흥망을 다시 생각해 보니
惟有鶖鶬呌斷槎(유유추창규단사) 재두루미 우는 소리 간장을 끊네.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호는 신재(愼齋) 관직은 대사성,
동지중추부사,풍기군수, 백운동서원 건립
영호루(映湖樓)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등조고루물색다(登眺高樓物色多) 높은 누에 오르니 풍경이 좋고
전인비술우하가(前人備述又何加) 선인들이 남긴 시구가 찬란하여라
굉천소고삼천지(轟天蕭鼓三千指) 퉁소와 북 연주하는 소리 하늘을 울리고
박지여염일만가(撲地閭閻一萬家) 평민들 집집마다 땅을 두드리며 기뻐 한다네
원객금회공백수(遠客襟懷空白首) 길 떠나온 나그네 시름탓에 백발만 더 하는데
궁후절서속황화(窮秋節序屬黃花) 쓸쓸한 가을철 맞은 국화는 활짝 피었네
현지취수연은한(懸知翠水連銀漢) 푸른물이 저 먼 하늘 은하수에 닿았으니
직소응간범두사(直泝應看犯斗槎) 바로 올라가면 북두칠성까지 사달리 이어지리
퇴계 이황의 시
이황(李滉, 1501 ~ 1570)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 본관은 진보(眞寶). 관은 대제학(大堤學)이다
映湖樓(영호루)
퇴계 이황(退溪 李滉)
客中愁思雨中多(객중수사우중다) 나그네 시름이 비 만나 더한데
況値秋風意轉加(황치추풍의전가) 더구나 가을바람에 더욱 심란하구나,
獨自上樓還盡日(독자상루환진일) 홀로 루에 올랐다 해져야 돌아옴이여,
但能有酒便忘家(단내유주편망가) 다만 술잔들어 집 그리움 잊는다,
慇懃喚友將歸燕(은근환우장귀연) 은근히 벗을불러 돌아가는 제비는
寂寞含情向晩花(적막함정향만화) 쓸쓸히 정을품고 늦은 꽃을 향하구나,
一曲淸歌響林木(일곡청가향임목) 한 곡조 맑은 노래 숲속을 울리는데,
此心焉得以枯槎(차심언득이고사) 이마음 어쩌다 마른 삭정이 같이되었나.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의 시
이현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조작가로서도 유명했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中),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鬢翁). 아버지는 참찬 흠(欽)이다
일찍이 실천유학에 뜻을 두어 중용사상, 특히 경 사상을 바탕으로 수양했다.
, 조선 초기 시가에서 조선 중기 시가로 발전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고 교량역할을 했다.
대표작으로 (어부사), (농암에 올라보니)〈농암문집)이 있으며.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제영호루(題映湖樓)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落魄登樓歲月多(락백등루세월다) 낙백하여 누에 오르던 세월도 많았는데
重來非分印章加(중래비분인장가) 분에 넘는 벼슬 받고 다시 또 왔네
黌堂負笈留遺蹟(횡당부급유유적) 글 배우던 향교엔 옛 자취가 남아 있고
驛里居停有主家(역리거정유주가) 집 떠나 머물던 주인집도 그대로네
白首東西身已老(백수동서신이로) 동서로 분주하다 몸은 이미 늙었지만
靑山今古眼添花(청산금고안첨화) 청산은 예 같아 눈에는 꽃이 피네.
長林遠樹渾依舊(장림원수혼의구) 긴 숲 멀리 흐릿하게 뵈는 옛 나무들
三十年來半作槎(삼심년래반작사) 삼십 년 동안 반은 삭정이가 됐네.
누대
누대에서 보는 안동시가지
누대의 저녁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