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인권 관련 역사적 현장을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근현대사에서 인권 탄압에 맞서온 명동성당과 중구 세종대로의 6·10항쟁 선언 현장 등 인권 수호의 생생한 역사를 간직한 장소에 ‘서울시 인권 현장 바닥동판’을 설치하였다
(2019년 6월 기준 총 61곳에 설치되어 있다)
∇= 국가 폭력, ○ = 시민 저항, □ = 제도 내 폭력
주소는 답사하면서 동판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였다
⑨ 명동파출소 (서울시 중구 명동길 30, 명동2가 50-13)
1973~1988
미니스커트·장발단속 등 국가의 통제와 청년들의 자유가 충돌하던 현장
1970년대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이 이뤄지던 당시 국가의 통제와 청년들의 자유가 충돌하던 대표 현장으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질서 정비와 치안 유지 업무를 수행 중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언론 및 시민 언행권 탄압을 선포한 1972년 10월 유신에 따라 ‘개정 경범죄 처벌법’을 만들어 장발과 미니스커트 등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단속을 시작했다
장발단속에 걸린 이들은 강제로 머리를 깎이고, 법이 정한 치마길이 한계선(무릎 위 20cm)을 넘긴 이들은 즉결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⑩ 명동성당 (서울시 중구 명동2가 1-13)
이곳은 민주화운동의 피난처이자 둥지다
명동성당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였다
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전두환 전(前) 대통령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에 반발해 ‘6·10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었다
경찰 진압으로 내몰린 시위대가 성당으로 모여들면서 성당은 경찰과 시위대의 대치 현장이 됐다
당시 치안본부장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차장이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려 했지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나를 밟고 가라”며 이를 제지하면서 6월 민주항쟁이 계속될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저 유명한 말씀 “그 사람들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려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을 쓰러뜨려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다음에야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경찰들의 성당 진입을 막았다
이밖에 1975년 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회복 및 국민투표 거부운동’,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세웅, 김승훈 신부 등이 발표한 ‘민주구국선언문 사건’, 1978년 ‘동일방직 사건’, 1979년의 ‘오원춘 납치 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 시위 현장의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⑪ YWCA 위장결혼식 현장 (서울시 중구 명동11길 8-2, 명동1가 1-3)
1979.11.24
위장 결혼식을 통해 집회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여기서 민주화를 외치다
1979년 11월 24일 서울 명동 YWCA 회관에서 재야 세력이 대통령 간선제 시행 저지를 위하여 결혼식을 가장해 집회를 개최하다가 적발된 시국 사건으로 이때 참여한 재야인사들은 윤보선, 함석헌, 양순직, 박종태, 임채정, 문동환, 김상현, 한명숙, 백기완, 최열, 김경남 등이었다
연세대 복학생 홍성엽과 윤정민양의 결혼식을 가장해 청첩장이 만들어졌는데, 홍성엽은 실존인물이었으나 윤정민은 그해 세상을 떠난 고 윤형중 신부의 성에 민주주의 정부에서 (정)과 (민)을 따와 이름을 지어낸 허구의 인물이었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고령인 관계로 서면조사로 대체했으나 나머지 핵심 주도인물인 14명은 용산구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 끌려간 백기완은 고문으로 여러 차례 혼절을 거듭하더니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열린 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된 154명을 복권했으며 민주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했다
⑫ 을지로 인쇄골목 (서울시 중구 을지로18길 31, 인현동1가 66)
이 골목에서 독재에 맞선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친 선언문을 인쇄하다
6.10 민주화운동은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하여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뜨겁게 타올라 6.29선언을 이끌어 냈다
그 중심에 '을지로 인쇄골목'이 있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1970~ 80년대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강은기가 없었다면 그 많은 유인물 제작은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때 운동권의 각종 인쇄물을 지칭하는 은어였던 ‘피(P).’ 실로 그것은 운동의 피(血)요 무기였다
⑬ 김귀정 사망현장 (서울시 중구 퇴계로 213, 충무로4가 125-3)
1991.05.25
성균관대학생 김귀정이 민주화 시위 중 경찰 과잉진압으로 숨진 자리
김귀정은 1991년 명지대학교 재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과잉 진압으로 시위 중 사망하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석했다가 대한극장 일대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 사과탄과 최루탄을 쏘고 곤봉으로 가격 등)으로 사망하였다
1995년 대법원은 전투경찰대가 과도한 방법으로 김귀정을 숨지게 한 책임이 있다는 확정판결을 내렸다
⑭ '체육관 선거' 현장 (서울시 중구 동호로 241, 장충동2가 200-102)
1972~1981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된 유신정권 이후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던 곳
1972년 박정희 정부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명분으로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유신헌법 제 35조를 바탕으로 헌법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치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 제 39조에 근거하여 '무기명 투표에 의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의 시행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회의장으로서 선거가 치러진 곳이 장충체육관 이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뜻과 괴리된 선거 방식과 체육관이라는 비공개적 장소에서 진행된 작태를 비판하며, 이와 같이 체육관에서 간선제로 진행된 선거를 체육관 선거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시절까지 유지되었다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⑮ 베네딕트 수도원 '피정의 집'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4길 14, 장충동1가 54-1)
1984.12.19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의 창립총회 장소로,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 실태를 공개함
'민주언론운동'의 시초는 1984년 12월 19일, 장충동 성 베네딕도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출범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이었다
이 모임은 1974년 동아투위 사태로 해직된 언론인들과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으로 해직된 언론인들이 모여 절치부심 끝에 탄생시킨 조직이다
이후 월간지 '말'(1985년 6월 15일), 일간지 '한겨레 신문'(1988년 5월 15일)을 창간해 가면서 기틀을 다져 이듬해인 1989년 1월 17일, 언론노동조합연맹이 주간지 '언론노보'를 창간하여 진보진영의 언론비평지 영역을 확보하였다
2006년 3월 24일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⑯ 전태일 분신 현장 (서울시 중구 청계천로 246, 을지로6가 17-465)
1970.11.13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여기서 근로 기준법 준수를 외치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을 비롯한 삼동회 회원들이 피켓시위를 벌이려다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게 되자 전태일은 휘발유로 자신의 몸을 적시고 불을 붙여 분신 항거하였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쓰러졌다
한 회원이 불길 속에 근로기준법 책을 집어 던져 예정했던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완수하였다
그의 분신 항거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가족과 동료 노동자들 모르게 준비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언론은 노동문제를 특집 기사로 다루고, 종교계, 대학생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추모집회, 철야농성이 이어졌다
전태일의 분신 항거는 정부의 산업화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중구를 마치고 기타 서남쪽으로 넘어갑니다
첫댓글 서울시 인권현장 바닥동판, 정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