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 |
유형 | 시가지 |
주소 | Gamla Stan, Stockholm |
가는방법 | 세르옐 광장에서 도보 30분, 또는 버스로 15분 |
스톡홀름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은 곳으로 꼽는 곳이 감라스탄 지구다. 스웨덴의 옛 모습과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감라스탄은 하나의 거대한 옥외 박물관 같다. 작은 섬이지만 고딕, 바로크, 로코코 등 다양한 양식으로 건축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하다. 옛 건물을 개조한 레스토랑과 카페들도 이색적이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은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중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를 걷다 보면 16세기 유럽의 어느 마을 속에 와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감라스탄은 13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 온 곳으로, 건물 외벽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역사다. 지금은 스톡홀름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고급 주택가로 거듭났지만 그리 부담스러운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저렴하게 스웨덴 전통 요리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 많아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들이 선호한다.
감라스탄 구시가의 중심은 중세 분위기가 남아 있는 대광장이다. 노벨 박물관, 노벨 도서관, 증권 거래소 등 주요 명소들이 작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분위기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도 늘어서 있다. 여름에는 수많은 관광객과 거리로 나온 예술가들로 활기가 넘치고 겨울에는 광장 주변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선다. 지금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광장이지만 1520년 ‘스웨덴 대학살 사건’이 발생한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감라스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는 감라스탄 북쪽에 위치한 대성당과 왕궁이다. 13세기에 세워진 대성당은 스톡홀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왕실의 주요 행사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다. 고딕과 바로크 양식이 융합된 웅장한 건축물이며 내부에는 조각가 비겔란의 작품인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섬세한 천장 벽화가 볼만하다.
대성당과 이웃하고 있는 왕궁 역시 13세기에 처음 지어졌다. 원래는 요새였으나 왕궁으로 발전했다. 1697년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후 오랜 공사를 거쳐 1740~1754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는 스웨덴 왕족의 공식 집무실이자 스톡홀름을 방문하는 국빈들의 연회 장소로 사용된다. 3층 높이의 건물 안에는 유명한 장인과 예술가들의 손길로 아름답게 장식된 방 1430개가 있는데 일부만 관람객들에게 공개한다. 그 중 압권은 ‘보물의 방’이다. 에릭 14세의 왕관을 비롯한 역대 왕실의 보물들을 볼 수 있다.
스웨덴 왕궁이 위치한 섬(Gamla Stan)의 바로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인
셉스홀멘(Skeppsholmen)에서 바라본
감라스탄(Gamla Stan)
스웨덴 왕궁이 위치한 섬(Gamla Stan)의 바로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인
셉스홀멘(Skeppsholmen)에서 바라본
셉스홀멘(Skeppsholmen)의 해안
스웨덴 왕궁이 위치한 섬(Gamla Stan)의 바로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인
셉스홀멘(Skeppsholmen)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감라스탄(Gamla Stan)의 대성당
스웨덴 왕궁이 위치한 섬(Gamla Stan)의 바로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인
셉스홀멘(Skeppsholmen)에서 바라본
셉스홀멘(Skeppsholmen)의 해안
이칭별칭 |
스웨덴왕국, Kingdom of Sweden |
위치 |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반도 |
인구 |
904만 5000명(2008년 현재) |
면적 |
44만 9964㎢ |
수도 |
스톡홀름 |
국화 |
은방울꽃 |
화폐단위 |
크로나(Krona) |
언어 |
스웨덴어 |
종교 |
복음루터교, 가톨릭교 |
수교일 |
1959년 3월 11일 |
정치·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단원제 |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는 입헌군주국.
정식 명칭은 스웨덴왕국(Kingdom of Sweden)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 동남부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가 3,218㎞에 달한다.
면적은 44만 9964㎢, 인구는 904만 5000명(2008년 현재), 수도는 스톡홀름(Stockholm)이다.
종족구성은 게르만족인 스웨덴인이 95%를 차지하며, 핀란드인이 4% 정도이다. 스웨덴어가 공용어이며, 전국민의 87%가 기독교의 한 분파인 복음루터교를 믿으며, 가톨릭교가 1.5% 이다.
기후는 겨울은 한랭하고 여름은 온화하다. 다른 서유럽제국에 비하여 공업화 착수가 다소 늦었으나 제1·2차 세계대전시 전쟁수요에 힘입어 공산품 위주의 수출주도형 경제로 발전하였다.
그 뒤 1960년대의 자유무역환경, 노사관계의 협조분위기, 정치적 안정 등에 힘입어 세계적인 산업국가로 등장하였다. 특히, 풍부한 수력, 임산자원, 철광석 등을 이용한 기계·운송기기·에너지·통신·전자·전기 부문의 산업이 발전하였다.
스웨덴은 북구의 낙원이라 불리는 세계최고수준의 복지국가로서, 전국민에 대한 의료혜택·실업수당·무료교육·노후연금 등 완벽한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2007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4,553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9654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입헌군주제의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349석)이다. 주요 정당은 사민당, 보수당, 좌파당, 기민당, 자유당, 중앙당 등이다.
이 나라의 역사는 중세 초기 스베아족이 중부지방에 촌락을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 9∼11세기의 바이킹시대를 거쳐 13세기 초에 신왕조를 창시한 비르에르얄(Birger Jarl)이 통일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14세기 말 인접한 덴마크·노르웨이와 함께 칼마르동맹을 결성하였고, 1523년 구스타브 에릭슨(Gustav Eriksson)의 지휘 아래 독립할 때까지 사실상 덴마크왕조의 지배를 받아왔다. 1809년 6월 헌법을 제정하였고, 17세기 후반에는 한때 유럽의 강대국으로 국세를 떨치기도 했으나, 나폴레옹전쟁 이후 덴마크로부터 양도받은 영토인 노르웨이가 1905년에 독립함에 따라 오늘날의 스웨덴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명목상의 국가원수는 국왕이지만 정치권력은 수상의 책임하에 행사되는 내각책임제 정부형태이다. 현재 1973년 9월 즉위한 구스타프 16세(Carl Gustaf ⅩⅥ) 국왕 아래 실권자 라인펠트(Fredrik Reinfeldt) 총리가 2006년 10월 취임하여 내각을 이끌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우파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46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스웨덴의 외교정책의 기조는 한마디로 ‘전시의 중립을 목표로 한 평화시의 비동맹’이다. 따라서 완벽한 방위능력을 보유하고, 유사시에는 입체적으로 격퇴한다는 총력방위개념으로서, 주요 물자 비축, 생산대체 태세 및 전시 대비 병력 동원체제를 갖추고 있다.
스웨덴은 6·25전쟁 당시 야전병원선을 파견한 바 있으며, 휴전 후에는 중립국감시위원단으로 활약하고 있어, 실질적인 양국관계는 1959년 3월 11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59년 5월 주 영국 대사가 초대 공사로 신임장을 제정하였으며, 1960년에는 양국관계가 대사급 외교관계로 승격되었다. 1963년 7월에는 주 스웨덴 한국상주대사관이 설치되었으며, 2008년 현재 존속되고 있다. 스웨덴은 1973년 7월에 주 한국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다.
양국은 1968년 7월 가족계획에 관한 기술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69년 10월 사증면제 협정, 1978년 2월 섬유 협정, 1981년 5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3년 11월 스포츠교류 협정, 1985년 1월 경제 및 과학기술협력 협정, 1997년 6월 투자증진 및 보호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스웨덴은 우리나라의 농어촌 통신시설현대화작업, 중소도시 시외자동전화교환기설치계획에 참여하는 등 한국기업과의 합작투자를 확대시켜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해외시장 개척능력과 스웨덴의 기술 및 자본이 합작하여 제3국에 플랜트·엔지니어링 중심의 해외건설 분야 등에 공동 진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2007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스웨덴 수출액은 9억 5,004만 달러로 주종목은 선박·자동차·무선전화기 등이고, 수입액은 11억 9,279만 달러로 주종목은 화물자동차·의약품·승용차 등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284명의 스웨덴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2007년 현재 스웨덴에는 KOTRA를 비롯하여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1만 64명의 한국민 교민과 159명의 체류자가 있다. 대부분의 교민들은 스톡홀름 등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교민들에 비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또한, 교민 및 체류자들의 친목단체로 1962년에 조직된 재스웨덴한인회가 있으며, 교민 이외에 한국출신 입양고아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1973년 4월 7일 외교관계를 체결하고, 같은 해 6월 상주대사관이 개설되었으며, 2008년 현재 존속되고 있다.
1976년에는 북한외교관의 밀수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소원해졌고, 북한의 대 스웨덴 채무상환 실패로 냉각상태가 지속되었으나, 북한의 채무상환으로 1983년 이후 점차 관계가 정상화되어가고 있다.
양측은 1973년 11월에 무역 협정, 1996년 1월에 공업소유권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2002년 4월에는 경제 및 기술 협조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한 바 있다.
2007년 현재 북한의 대 스웨덴 수출액은 14만 1,000달러로 주종목은 전기기기·잡품 등이고, 수입액은 118만 달러로 주종목은 철강·화학제품·동물성유지 등이다.
스웨덴에 우리 문화가 소개된 것은 구스타프 6세(Gustaf Ⅵ) 국왕이 왕자이던 1920년대에 경주의 고분발굴에 참가한 뒤 약간의 값진 유물을 가져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56년이 되어서야 웁살라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69년 동아시아 언어연구와 교육체계가 재조직됨에 따라 한국학연구는 스톡홀름대학교로 이양되었다.
그 뒤 이 대학의 동양언어연구소에는 한국어 관계의 정규강좌가 개설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강좌는 초급반·중급반 및 고급반Ⅰ·Ⅱ로 되어 있고, 시간강사들이 이들 과목을 담당한다. 1974년에는 「중부한국어의 억양에 관한 연구(A Study on Tones and Tone marks in Middle Korea)」라는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이 나왔다.
한국어의 어원과 알타이 비교언어학에 대한 연구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 관한 연구는 다른 대학교의 여러 연구소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1970년대 말 웁살라대학교의 경제사연구소에는 여러 학생이 한국경제를 연구하고 같은 대학 사회학연구소에서는 박사학위 과정에 한국가족사회학을 두기도 하였다.
스톡홀름대학교의 경제연구소는 「남북한의 생태문제들(Ecological Questions in Different Parts of Korea)」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을 같은 때 통과시켰다. 이 대학교의 경제사연구소와 정치과학연구소에서도 약간의 학생들이 한국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특히, 룬드대학교 경제과학과에서는 남북한의 교육 및 사회체계에 대한 비교연구가 행하여져 1978년 그 결과가 『한국의 교육(Utbildung in Korea)』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같은 대학교의 평화 및 인간생태학연구소에서도 같은 해 「대한민국의 경제개발에 있어서 외국자본(Foreign Capital in the Developm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이 나왔다.
이들 연구를 위한 한국관계도서는 스톡홀름 대학도서관에 얼마간 있고, 구스타프 6세의 극동연구도서관에는 꽤 많이 모아져 있다. 1980년 이 극동연구도서관에다 스톡홀름대학교·스웨덴왕립도서관·극동고미술박물관의 동아시아관계 소장품을 통합하여 스톡홀름대학교에 태평양아시아연구센터(Center for Pacific·Asian Studies)가 설립되었으며, 여기에는 수천 권의 한국학도서가 갖추어져 있다.
특히 웁살라대학교의 동아시아언어연구소는 한국의 고인쇄자료를 수장하여 특기할만하다. 이들 자료를 중심으로 1974년 ‘한국고인쇄전시회’가 개최된 일도 있다. 한국문화관계의 유물을 다소간 소장하고 있는 스웨덴의 박물관·미술관은 무려 15개소에 이른다. 무용박물관 등의 특수박물관에는 소수의 유물만이 있을 뿐이고, 상당한 한국소장품으로 이름난 곳은 스톡홀름에 있는 동아시아박물관과 민족학박물관을 손꼽는다.
전자에는 서화·도자기·인쇄술 등의 예술유물이 소장되어 있고, 후자에는 한국의 민속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유물이 모아져 있다. 이 밖에 스톡홀름의 국립박물관도 약간의 한국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2009년 4월 11일에는 전남 강진군에서 80여 일간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8개국, 9개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
스웨덴의 수도.
원어명 |
Stockholm(스) |
위치 |
스웨덴 |
경위도 |
동경18°04′ 북위59°21′ |
면적(㎢) |
377.3 |
시간대 |
UTC+1 |
홈페이지 |
www.stockholm.se |
인구(명) |
798,715(2008년) |
발트해로부터 약 30km 거슬러
올라온 멜라렌호(湖)
동쪽에 있으며, 시가는 많은 반도와 작은 섬 위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수면과 운하 때문에 흔히 ‘북구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기온은 1월이 -1.6℃, 7월이 16.6℃, 연간
강수량은 555mm이다. 해항·공항·지하철·버스망이 완비되어 있으며 이 나라의 정치·문화·상공업의 중심지이다. 스톡홀름은 1250년에 스타덴섬에서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그 무렵의 교회와 시장의 광장, 불규칙한 도로 등이 남아
있다.
1255년경부터는 한자동맹(Hansa League)에 속하는 항만도시로서 번영하였으며, 당시에는
독일계 시민의 세력이 컸다. 1520년에는 스웨덴 국왕을 겸하고 있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반대세력을 탄압하여 스웨덴계 귀족을 학살하였다. 이를 계기로
구스타브 바사(후일의 구스타브 1세) 아래 결속한 세력은 1523년에 한자동맹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17세기에는 크리스티나 여왕 치하에서 시의 정비가 진행되었으며, 수도였던
웁살라 대신 수도가 되어 북유럽의 문화적 중심지로서 급속히 발전해 나갔다. 그 특징은 바로크풍의 건물에 잘 나타나 있다. 1850년부터는 제3의 발전기에 들어갔으며, 낭만적인 전원도시에서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하였다.
1950년부터는 대규모의 도시계획으로 도심지를 헐어 새로운 비즈니스가(街)와 공원을 건설하였다. 특히
빈민가가 전혀 없는 것이 스톡홀름의 자랑이다. 시의 주요부는 스타덴섬의 북쪽 대안지구(對岸地區)에 있다. 도심 가까이에 중앙정거장이 있고, 수로를 건너 시청사(1911∼23 건조)가
있는데, 이 청사는 건축미로 유명하다. 역의 동쪽에는 상점가에
섞여서 은행·신문사·인쇄소 등이 각각 분화된 지구를 이루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스톡홀름대학·아카데미·국립박물관·노벨연구소
이외에 의학·경제·공학·행정·미술·음악 등의 전문학교가 있고, 2개의 교향악단과 하나의 가극단 등이 있다. 해마다
있는 노벨상 수상식은 콘서트홀에서 거행되고, 축하연은 시청사에서 베풀어진다. 시가지의 북부에는 1912년에 만들어진 올림픽 경기장이 있고, 동쪽의 스칸센섬에는 노르딕박물관과 유원지가 있다.
수로의 남안(南岸)에는 많은 조선소와 공장이 있으며, 그 밖에도 양조·식품·화학공업 등이 활발하다. 또
역사가 오래 된 성냥 제조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공업 중에서도 의복·인쇄 등의 공장은 시가지 쪽에
분산해 있고, 조선·화학·직물·자동차·고무·전기(電機) 등의 공업은 본사만 시내에 두고, 공장은 땅값이 싼 지역으로 옮기는 경향이다. 시의 서쪽 약 10km 지점의 브로마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시가지는 많은 섬과 반도에 흩어져 있으나 철도·지하철·버스 등으로 능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외에는 높고 낮은 아파트군(群)이 뒤섞여 변화의 묘를 보이고 있으며, 건설 당시의 기술과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에는 중립국의 수도로서 외교활동의 무대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핵무기 금지운동을 비롯하여 국제적인 회의가 많이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