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0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G20 홍보 포스터에 ‘쥐’ 그렸다고 대학강사에 영장 신청… 기각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홍보 포스터에 낙서를 한 40대 남성에 대해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기각됐다. 검찰과 경찰은 “G20을 방해하려는 음모”라고 영장 신청이유를 밝혀 G20을 앞두고 무리한 법적용을 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들은 당시 주변을 지나가던 한 시민의 112신고로 출동한 경찰관들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됐다.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1-03 04:54: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1030454205&code=940301
2009 - 국내 첫 쇄빙선 아라온호 인천항 입항 12월 말 남극 시범운항 국내 첫 쇄빙선(碎氷船) 아라온호가 2일 새벽 인천항에 들어왔다. 아라온호는 지난 3년여간 부산에서 건조를 마치고 인천에 있는 극지연구소로 인도되기 위해 인천항에 입항했다.
2009 -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실 공개 한반도의 첫 나라 고조선에 대해 남한 국사책은 기원전 2333년 단군이 건국해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한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남북한, 중국, 일본의 학계에서 고조선은 강역, 국가 성격 등을 놓고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논란 와중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 2일 낮 신설한 고조선실을 언론에 내보였다. 1층 고고실 선사시대 방 옆에 자리잡은 작은 전시실이다. 고조선의 형성과 변화, 발전, 멸망과 문화파급 등 네 가지 영역으로 나뉘어 익히 알려진 고조선계 유물들이 올망졸망 모였다. 대표 유물로 인식되는 비파 모양의 요령식 동검과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청천강 이남에서 만들어낸 세형 동검, 잔무늬 거울 등이 보인다. 평북 위원에서 나온 국내 최고의 가래, 괭이 등의 농기구와 납작바닥에 아가리 크게 벌어진 미송리형 토기, 당시 쓰였던 중국 화폐 명도전 등은 익히 알려진 유물들. 북한강 유역의 경기 가평 달전리에서 나온 배부른 단지 등의 최근 발굴품들도 있는데, 전반적으로 선사실 일부를 그대로 뗀 듯한 느낌을 준다. 3일부터 일반 공개.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2009-11-02 오후 05:36:11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85382.html
2005 - 로자 파크스 여사 장례식 엄수 지난주 타계한 미국의 여성 흑인 민권운동가 로자 파크스 여사의 장례식이 디트로이트의 한 교회에서 엄숙히 거행됐습니다.
2000 - 최초의 국제우주정거장 거주자 3명을 태운 소유즈로켓, 우주정거장과 도킹 성공 국제우주정거장 [International Space Station(ISS), 國際宇宙停車場] 미국과 러시아 등 세계 16개국에서 참여하여 건설 중인 우주정거장으로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국제우주정거장(International Space Station/ISS)은 1986년에 쏘아올렸던 러시아의 우주정거장 미르(Mir)가 낡아 수명이 다하게 되면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98년 11월 20일 러시아가 우주정거장 전체 구조물의 한 부분인 자랴 모듈을 우주에 쏘아올림으로써 시작되었다.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벨기에,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위스, 일본, 캐나다 등 세계 16개국에서 참여하여 건설중이다. 현재 가장 크고 유일한 우주정거장으로 시속 27740km의 속도로 하루에 지구를 15.78회 공전하고 있다. 로켓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여러 장치들이 우주 공간에서 조립되고 있는데 현재 6개의 실험실을 갖추고 우주인이 7~10명 정도 머무를 수 있는 규모로 건설중이다. 2008년 4월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이 이곳에서 머물면서 과학실험을 수행하였다. ... /네이버
1998 -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제4차 유엔기후변화회의 개막 지구 대기중의 이산화탄소, 메탄, CFC 등은 지표에서 반사되는 단파 전자기장을 흡수하여 지표의 기온을 높이는데 기여하므로 '온실가스'로 불리운다. 대기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매년 0.4%씩 증가하여 지난 세기에는 25%가 증가하였다. 오늘날의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지난 16만년동안 가장 높은 360ppm 수준이다. 지금의 추세대로 나아간다면 100년 후에는 600ppm이 되어 1850년 수준의 두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약 10년 전만 해도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 온난화에 관한 우려를 환경론자들이 공연히 제기하는 그럴싸한 가설에 불과하다며 무시하던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이제는 유엔기후변화협약을 통해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 제재조치를 취하기로 결의할 만큼 달라졌다. 작년 (1998년) 11월 지구온난화방지를 위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렸던 유엔기후변화협약 제4차 당사국 총회에서 참석한 세계 1백69개국은 1997년 12월 일본 교토 제3차 당사국 총회에서 채택된 `교토 의정서'를 이행키로 하는 행동의 틀에 합의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행동계획'을 채택하였다. 교토 의정서에 따르면 2008~2012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90년 대비 유럽연합(EU) 8%,미국 7%,일본 6% 씩 감축하는 것을 비롯해 총 38 개국이 평균 5.2%를 줄이고 1백30여 개도국은 자발적으로 감축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일찍이 질병과 기후 사이에 연관이 있으므로 의사는 환자가 사는 지방의 기후에 관하여 잘 알아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지구온난화로 표현되는 기후의 변화는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준다. 이 글에서는 하바드 의과 대학 '건강과 지구환경 센타(Center for Health and the Global Environment)'의 Paul Epstein 교수가 환경산업의학 교과서 최신판(Rom WN ed. Environmental and Occupational Medicine, 1998)에서 정리한 내용을 중심으로 지구온난화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보건학적 결과를 살펴 보고자 한다. 지구온난화에 의한 환경변화의 보건학적 중요성 (서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조교수 김록호 /기상청 http://web.kma.go.kr/edu/young/ind/lifew/health_w/1175404_2125.html
1992 - 영국 찰스 왕세자 부처 내한 영국의 대한관계는 1986년 4월 대통령 전두환의 방영에 이어 5월 총리 대처가 내한하였고, 1989년 11월 대통령 노태우가 방영하였다. 1992년 11월에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내외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1995년 대통령 김영삼, 1998년 대통령 김대중이 영국을 방문하였다. 1996년 총리 메이저, 2000년 총리 블레어가 방한하였고 1999년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안동시에서 한국 전통의 70회 생일 잔치를 치렀다. 2001년에는 대통령 김대중이 영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양국간에는 친선위원협회, 한영경제협력위원회 등이 구성되어 있다. /naver
1988 - 5공비리 특위 청문회 기금모금의 강제성과 재단기금의 청와대 관리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재단의 엄청난 재산규모는 국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1982 - 올빼미 등 21종, 독도 등 5개섬 천연기념물 지정 천연기념물(Natural Monument)은 고유한 한국의 자연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기념물적 성격의 자연물을 보전·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위원회에서는 1963년 728점의 지정문화재를 재분류 지정하면서 98점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2001년 11월 현재 지정된 천연기념물은 329점에 이른다. 천연기념물 가운데, 동물과 식물은 생명이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죽거나 이동하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는 경우가 많다. /naver
1966 - 미국의 물리학자 피터 디바이(Debye, Peter) 사망 디바이 [Debye, Peter Joseph William, 1884.3.24~1966.11.2] 미국의 물리학자. 네덜란드계(系) 독일인으로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뮌헨대학에서 공부하고 위트레흐트(1912) ·괴팅겐(1914) ·취리히(1920) ·라이프치히(1927) 대학 교수를 역임한 후 베를린의 카이저빌헬름연구소 물리학주임이 되고(1935), 1940년 도미, 그 뒤 코넬대학 교수로 있다가 미국에 귀화하였다. 저온에서의 비열(比熱)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의 비열식을 개량한 ‘디바이의 비열식’(1912)을 제출함으로써, 양자론(量子論) 진보에 공헌하였고, 또 X선 회절(回折) 연구에서는 P.셰러와 함께 디바이셰러법(法)을 고안하여, 작은 결정으로 된 물질에 대해서 결정의 구조해석에 유력한 수단을 제공하였다(1915). 그 밖에 X선 산란(散亂)의 이론이 있고, 1923년 강전해질(强電解質) 용액 이론에서는 이온 간의 쿨롱힘을 고려하여 이상용액(理想溶液)과의 차를 설명하고, 아레니우스 이후 의문시되어온 강전해질의 특이성을 해명하였다. 유극분자(有極分子)의 연구도 유명하다. 쌍극자모멘트, X선 ·전자회절에 의한 분자구조 연구의 업적으로, 1936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 Faysal
역사속 오늘[1964년 11월 2일] 사우디국왕, 왕위 이양식 1964년 오늘 ! /YTN 2012-11-02 http://www.ytn.co.kr/_pn/0422_201011012258472959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1927년 리야드 출신의 압둘 아지즈(Abdul Aziz, 통칭 이븐 사우드 Ibn Sa‘ud)가 국가를 통일한 후 초대 국왕이 되었고 1953년 장남 이븐 사우드가 뒤를 이었다. 외교·경제적 측면에서 시대적 요구에 따르지 못한 사우드 국왕은 1964년 쿠데타로 왕족회의의 결정 아래 물러났고 그의 이복형제 파이잘 빈 압델 아지즈(Faisal bin Abdel-Aziz)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975년 3월 파이잘 국왕은 조카인 파이잘 빈 무사드 왕자에게 암살되고, 왕족회의에서 그의 이복동생 칼리드(Khalid)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으며, 1982년 6월 칼리드 국왕이 죽고 그의 이복형제인 파드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1963 - 베트남에 쿠데타, 대통령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피살 응오딘지엠(고딘디엠) [吳廷琰(오정염), Ngo Dinh Diem, 1901.1.3~1963.11.2] 1963년 11월 1일 베트남 해병대 1개대대와 육군부대 1부가 고 딘 디엠(Ngo Dinh Diem, 1901~1963)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1916~2001) 장군 주도하의 반정부군은 이날 오후3시까지 경찰본부 및 방송국을 점령하고 사이공시의 주요전략요소를 장악했다. 사이공 주변과 대통령관제 부근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11월 2일, 밤사이에 일어난 쿠데타로 고 딘 디엠 대통령은 실각했다. 이때부터 베트남의 정국(政局)은 쿠데타의 악순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디엠 대통령은 1954년 7월 친미파의 수령으로 베트남의 수상이 됐고 1955년 10월 98%의 국민의 지지를 받고 베트남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던 그는 해를 거듭함에 따라 독재를 강화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친족정치의 아성을 쌓아 올려 부패를 일삼았다. 결국 두옹 반 민 장군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조선
1950 -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Shaw, Bernard) 사망 쇼 [Shaw, (George) Bernard, 1856,7.26~1950.11.2]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 사망 영국의 극작가, 소설가, 비평가로 알려진 조지 버나드 쇼가 9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 작품을 구상하다 1950년 11월 2일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책갈피 속의 오늘]1950년 英극작가 버나드 쇼 사망 “끈질기게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때가 오면 과감히 돌진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3&oid=020&aid=0000322007
1948 -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재선 [책갈피 속의 오늘]1948년 美트루먼 대통령 재선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해리 트루먼처럼 칭송과 혹평을 한 몸에 받았던 이도 드물다.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켰지만 일본에 떨어뜨린 원자폭탄 탓에 ‘Give 'em Hell Harry(엿 먹인 해리)’라는 악명이 따라붙었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20071102/8507181/1
- Television camera - Daily broadcasting in the UK, 50th anniv.
1936 - 영국 BBC, 세계 최초로 TV방송 실시 [텔레비전 연표](발췌) 1925 - J.L. 베이어드(영국), 텔레비전 공개실험에 성공 1926 - 야기 히데쓰구[八木秀次]·우다 신타로[宇田新太郞(일본)], 야기-우다안테나 발명 1927 - 벨연구소(미국), 워싱턴~뉴욕 사이 텔레비전 공개 실험 1928 - 미국 WGY국, 텔레비전 실험방송 시작. 베이어드(미국), 대서양 횡단 송신 및 컬러텔레비전 실험에 성공 1932 - BBC(영국), 텔레비전 실험국 개국 1933 - V.K. 즈보리킨(미국), 촬상관(撮像管) 아이코노스코프 발명 1935 - 독일, 세계 최초의 정기방송 시작 1936 - BBC(영국), 하루 2시간씩 정규 텔레비전 방송 시작 1939 - NBC(미국), 뉴욕박람회 개막식 중계, 최초로 실시된 텔레비전 중계 1940 - 로즈(미국), 촬상관 오시콘 발명. 미국에서 컬러텔레비전 실험방송 시작 1946 - RCA사(미국), 이미지오시콘 발명 1948 - 벨연구소(미국), 트랜지스터 발명 1950 - RCA사(미국), 촬상관 비디콘 및 섀도마스크수상관 발명 1952 - 미국, UHF텔레비전 방송 시작 1953 - NHK(일본), 텔레비전 본방송 시작 1956 - 앤펙스사(미국), VTR 개발 1958 - NHK기술연구소(일본), 각형(角形) 컬러텔레비전 수상관 개발 1960 - NHK(일본), 컬러텔레비전 본방송 시작 1961 - 한국 KBS 텔레비전국 개국 1962 - 텔스타 1호 위성에 의한 미국~유럽 사이 텔레비전 중계 성공
- 꽃밭에서(어효선 작사, 권길 상 작곡) 어효선 [魚孝善, 1925.11.2~2004.5.15] 본관은 경흥(慶興), 호는 난정(蘭丁)이다. 1925년 11월 2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나 한영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년 교원검정시험에 합격한 뒤, 1945년부터 1957년까지 초등학교 교사,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중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20 - 미국, 라디오 정시 방송 시작 오늘의 역사 (11월 2일)[1920년] "대통령 선거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1920년 11월 2일 피츠버그 라디오 방송국 KDKA가 세계최초로 정해진 시각에 방송을 시작했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된 방송은 하딩 후보와 코크스 후보의 표대결을 리얼타임으로 보도했다. KDKA의 전신은 1916년에 설립된 8XK국으로 상무부 허가를 받아 실험방송을 시작했다. 레코드 음악방송으로 라디오방송이 인기를 끌자 웨스팅하우스는 다량의 라디오 수신기 판매를 위해 방송국 개설을 준비했고, 1920년 10월 16일에 개국신청을 한 지 2주 만인 이날 정시 방송을 시작했다. 1920년대 대중화시대를 연 것은 라디오와 자동차였는데 작은 스피커 상자에서 나오는 소리는 `만화경`이었다. 이탈리아 테너 카루소의 감미로운 노래, 월드시리즈에서 베이브 루스가 친 홈런, 가축도둑을 쫒는 보안관의 말발굽 소리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1922년까지 미국 499곳에 방송국이 설립됐고 라디오 10만대가 팔렸다. 한국에서는 1926년 경성방송국이 설립되어 이듬해 2월 공식 개국방송을 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330_0015 [오늘의 경제소사/11월2일] 라디오 첫 정규방송 1920년 11월2일 오후6시, 미국 피츠버그시. 창고를 개조한 사무실에서 네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상업적 라디오가 정규방송을 시작한 순간이다. 최초의 정규방송은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선거 개표 속보를 실시간으로 중계했기 때문이다. 결과가 집계되는 동안 방송국은 축음기를 틀거나 악사들의 직접 연주를 내보냈다. 청취자가 극소수였지만 라디오는 하딩의 당선을 가장 빨리 알려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캐나다의 한 방송국이 6개월 전에 정규방송을 시작했다는 논란 속에서도 ‘최초의 라디오 정규방송’으로 공인 받은 개표방송의 주인공은 KDKA. 웨스팅하우스전기회사가 라디오 판매촉진책의 일환으로 세운 방송국이다. 첫 방송의 성공에 자극받아 1922년까지 499개 방송국이 생겼다. 방송 영역도 클래식 음악에서 예배 방송, 권투 중계까지 넓어져 다양한 문화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아마추어 무선사들이나 자작하던 라디오의 판매시장도 형성돼 1922년 매출 6,000만달러(요즘 가치 27억달러)를 기록한 뒤 1929년에는 8억4,255만달러 규모로 커졌다. 방송광고 시장도 태어났다. 1922년 한 부동산 업자가 50달러를 내고 10분 동안 광고할 시간을 따낸 뒤 기업들이 뛰어들며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라디오는 미국 문화를 하나로 묶었다. 라디오의 재즈 선율, 권투와 프로야구 중계, 선거 속보와 광고방송은 거대한 미국 땅에 동일한 유행과 문화를 심었다. 미국뿐 아니다. 라디오로부터 시작된 전파는 TV와 인터넷으로 진화하며 국경을 허물고 있다. 모든 게 라디오 첫 정규 전파송출로부터 87년 만의 변화다. 변혁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87년 뒤의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할까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7/11/01 17:50 /200711/e2007110117505563820.htm
- Arthur Balfour - Chaim Weizmann
1917 -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 유태인 국가건설을 지원하는 '밸푸어선언' 발표 오늘의 역사 (11월 2일)[1917년]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외무장관 A.J.밸푸어(Balfour)가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유대인 금융재벌 로스차일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통해서였다. 영국은 앞서 맥마흔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지 의사를 메카의 태수 후세인에게 편지로 알린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적대국인 오스만제국을 교란시키기 위한 영국의 전략이었다. 수백 년 동안 오스만이 지배해 온 팔레스타인 지역을 미끼로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각각 지지 의사를 표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1916년 5월에는 전쟁이 끝나면 프랑스와 아랍 지역을 분할해 통치한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비밀리에 체결하는 등 애당초 아랍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밸푸어 선언은 훗날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초석이 됐지만 아랍인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영국의 배신이었다. 중동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329_0013
영국, 밸푸어 선언 발표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영국계 유대인 지도자인 라이어널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서한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가 수립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밸푸어 선언은 런던의 시오니즘 지도자인 카임 바이츠만과 나훔 소콜로프의 끈질긴 노력이 낳은 결실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제한적인 선언으로서 시온주의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조국을 건설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주었으며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촉진했다. 영국 정부는 이 선언으로 미국계 유대인의 여론이 연합국 쪽으로 향하기를 기대했고, 영국을 지지하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 인접국인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1922년 7월 24일 밸푸어 선언이 포함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이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913 - 미국의 영화배우 버트 랭커스터(Lancaster, Burt) 출생 랭커스터 [Lancaster, Burton Stephen "Burt", 1913.11.2~1994.10.20] [역사 속의 인물] 곡예사 출신 배우, 버트 랭커스터 그의 영화는 재미 있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그저 그만이었다. 버트 랭커스터(1913~1994)는 탄탄한 체격과 날렵한 몸매를 앞세운 액션 배우에 가까웠지만, 연기력까지 겸비해 30년 넘게 은막을 누볐다. 1913년 오늘, 뉴욕에서 우편배달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교 때 농구 선수를 하다 졸업후 어릴 때부터 배워온 체조 실력을 살려 서커스단에 들어갔다. 6년간 곡예사를 하다가 다치는 바람에 포기하고 영화계에 뛰어 들었다. 해적 두목으로 나오는 '진홍의 도적'(1952년)과 공중곡예사 역할의 '공중그네'(1956년)에서는 곡예사 경력을 발휘, 줄을 타는 스턴트를 직접 했다. 정상급으로 인정받은 것은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년)부터였다. 중대 선임하사로 나와 중대장의 부인(데보라 커)과 하와이 해변에서 벌이는 키스신은 명장면으로 꼽힌다. 그가 흰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을 때면 야비한 악당 그 자체였다. 악당으로 나오는 서부영화 '베라 크루즈'(1954년)와 사기꾼 전도사로 분한 '엘머 갠트리'(1960년)가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 역의 'OK목장의 결투'(1957년)보다 훨씬 더 좋았다. 악역이 잘 어울리는 배우였다. 박병선 동부지역본부장 /매일신문 2011년 11월 0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2817&yy=2011
- 'Il Gattopardo' - 'Ossessione'
비스콘티 [Visconti, Luchino, 1906.11.2~1976.3.17] 정식 이름은 Conte di Modrone Don Luchino Visconti.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현대사회의 갈등에 사로잡힌 개인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제2차 세계대전 뒤 이탈리아 영화의 변혁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신사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몇 년 간은 혁신적인 연극·오페라 연출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비스콘티는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재능있는 음악가였고,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배우들을 고용해 개인극장에서 공연하게 했다. 그는 10년간 첼로를 배웠고 잠시 극장의 무대장치가로 일했으며, 고전어 교육을 충실히 받기도 했다. 1935년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조감독으로 기용되면서 사회적·정치적 현안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제임스 M.케인의 소설 〈포스트맨은 벨을 2번 울린다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를 각색한 영화 〈강박관념 Ossessione〉(1942)으로 감독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자연 세트를 배경으로 직업배우와 지방의 주민들을 함께 등장시켰고, 긴 이동장면을 실험했으며,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카메라를 감추고 찍은 일련의 장면들을 결합시켰다. 리얼리즘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는 전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비토리오 데 시카와 같은 감독들의 신사실주의적 작품의 전조가 되었다. 6년 뒤 배우를 쓰지 않고 완전히 현지에서 촬영한 시칠리아 어부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1948)로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밖에 많은 찬사를 받은 영화로는 안나 마냐니가 주연한 2편의 영화 〈벨리시마 Bellissima〉(1951)와 〈우리 여자들 Siamo donne〉(1953), 〈로코와 그의 형제들 Rocco e i suoi fratelli〉(1960), 자유주의 신념을 가진 전통적인 귀족(비스콘티는 이 인물이 자신과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음)을 그린 주세페 디 람페두사의 소설을 각색한 〈표범 Il gattopardo〉(1963), 낯선 사람 Lo straniero〉(1967), 〈저주받은 자들 La caduta degli dei〉(1969), 〈베네치아에서 죽다 Morte a Venezia〉(1971) 등이 있다. 그는 가브리엘 단눈치오의 소설을 개작한 영화 〈죄없는 사람 L'innocente〉의 편집을 채 끝내지 못하고 죽었다.
비스콘티는 연극연출가로서 장 콕토, 장 폴 사르트르, 아서 밀러, 테네시 윌리엄스, 어스킨 콜드웰과 같은 프랑스·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이탈리아에 소개했다. 레퍼토리 극단을 세워 이곳에서 양성한 배우들을 자신의 후기 영화에 출연시켰다. 1950년대에는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를 출연시킨 오페라들을 제작하여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사실주의와 웅장함을 결합시켜 만든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1955)·〈몽유병 여인 La sonnambula〉(1955)·〈돈 카를로스 Don Carlos〉(1958, 런던 코벤트 가든)는 예술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브리태니커
1898 - 동독의 정치가 한스 로흐(Loch, Hans) 출생 로흐 [Loch, Hans, 1898.11.2~1960.7.13] 동독의 자유민주당 의장, 재무장관. Hans Loch (* 2. November 1898 in Köln; † 13. Juli 1960 in Berlin) war Vorsitzender der LDPD und Finanzminister der DDR. Leben [Bearbeiten] Loch wurde nach dem Besuch des Gymnasiums 1917 zum Militärdienst eingezogen. 1918 bis 1923 studierte er Rechtswissenschaften an den Universitäten Köln und Bonn und arbeitete danach als Justitiar und Steuersyndikus. 1936 emigrierte er in die Niederlande, kehrte 1938 nach Deutschland zurück und war 1939 bis 1945 Soldat der Wehrmacht. 1945 war Loch Mitbegründer der LDPD im Kreis Gotha, ab 1947 Vorsitzender des Ausschusses Gemeindepolitik beim Zentralvorstand, ab 1949 stellvertretender Parteivorsitzender, ab 1951 zunächst gemeinsam mit Karl Hamann und dann nach dessen Verhaftung ab Ende 1952 alleiniger Parteivorsitzender. 1946 bis 1948 war er Bürgermeister von Gotha, danach bis 1950 Justizminister von Thüringen und bis 1955 Minister der Finanzen der DDR. Als Finanzminister war er auch Mitglied des Ministerrates. Seit 1949 war er Abgeordneter der (provisorischen) Volkskammer, seit 1950 stellvertretender Vorsitzender des Ministerrates und seit 1954 Mitglied des Präsidiums des Nationalrates der Nationalen Front. 1954 erhielt Loch den Vaterländischen Verdienstorden. Schriften
1897 - 미국의 정치가 리처드 러셀(Russell, Jr., Richard) 출생 러셀 [Russell, Jr., Richard Brevard, 1897.11.2~1971.1.21] Richard Russell, Jr. Richard Brevard Russell, Jr. (November 2, 1897 – January 21, 1971) was an American politician from Georgia. A member of the Democratic Party, he briefly served as speaker of the Georgia house, and as Governor of Georgia (1931–33) before serving in the United States Senate for almost 40 years, from 1933 until his death in 1971. As a Senator, he was a candidate for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in the 1948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and the 1952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Russell was a founder and leader of the conservative coalition that dominated Congress from 1937 to 1963, and at his death was the most senior member of the Senate. He was for decades a leader of Southern opposition to the civil rights movement. Early life http://en.wikipedia.org/wiki/Richard_Russell,_Jr.
1894 -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 결혼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의 결혼과 왕조의 몰락 러시아의 차르(황제) 체제가 몰락한 것은 1917년의 ‘10월 혁명’이 결정적이었지만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고질적인 유전질환도 혁명을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빅토리아는 9남매를 낳았고 이들이 유럽의 주요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인적으로도 ‘팍스 브리태니커’가 구현됐지만, 문제는 이들을 통해 혈우병이 유럽 황실로 퍼졌다는 데 있었다. 혈우병의 특징은, 여성은 병을 물려주는 매개자 역할을 할 뿐 직접적인 고통은 그 여성의 아들이 당한다는 점이다. 빅토리아도 아들 하나를 혈우병으로 잃었지만 고통은 빅토리아의 딸, 손자·손녀, 심지어 증손자에게까지 이어졌다. 막내딸은 혈우병으로 두 아들과 두 외손자를 잃었고, 둘째딸 역시 아들 하나를 혈우병으로 떠나보냈다. 둘째딸은 그녀의 막내딸 알릭스를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시집보내 혈우병 유전자를 러시아 황실에까지 전파했다. /(러시아문화원)
1890 - 스웨덴의 소설가 모아 마르틴손(Martinson, Moa) 출생 마르틴손 [Martinson, Moa, 1890.11.2~1964.8.5] 본명은 Helga Swartz. 스웨덴의 소설가. 스타타레(statare)라고 하는 스웨덴 농촌의 농업노동자, 즉 땅을 갖지 못한 무산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최초의 작가이다. 삶의 전반기를 가난하고 불행하게 보냈으나 무산계급의 삶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다섯 아이의 어머니로 25세에 남편을 잃고 생계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프롤레타리아 작가 해리 마르틴손과 재혼한 뒤(1940 이혼) 모아 마르틴손이라는 필명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성공을 거둔 작품은 자전적 3부작 〈어머니가 결혼하다 Mor gifter sig〉(1936)·〈교회의 결혼식 Kyrkbröllop〉(1938)·〈왕의 장미 Kungens rosor〉(1939)이다. 후기 소설들은 18, 19세기 무산계급의 인물들을 주로 다룬 작품이었다. /브리태니커
- Sweden 50 Kronor (Banknote)
1887 - 스웨덴의 소프라노 가수 제니 린드(Lind, Jenny) 사망 린드 [Lind, Johanna Maria 'Jenny', 1820.10.6~1887.11.2]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제니 린드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선생님인 어머니의 딸로 '조아나 마리아 린드'(Johanna Maria Lind)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린드는 겨우 열 일곱 살에 스톡홀름에서 처음 오페라를 불렀습니다. 린드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자연스런 가창 스타일로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오늘 저녁 공연의 중요한 사건은… 제니 린드의 등장과 그녀의 완벽한 승리였다. 스웨덴 - 제니 린드 /Global KOMSCO 출처:http://www.numerousmoney.com/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lobalkomsco&logNo=120094458126
- Heinrich von Stephan, 75th Anniv. of the UPU
- UPU Monument 'Around the World', by Charles Rene de Saint- Marceaux, French Sculptor, 1909 Oct. 4, Bern Park
1874 - 만국우편조약 체결 만국우편조약 [Universal Postal Convention] 만국우편연합(UPU)의 법적 기초가 되는 일반적 조약. 우편에 관한 모든 업무의 조직 및 완성을 보장하고 이 분야에서 국제협력의 촉진을 목적으로 한다. 1874년 베른조약에 의하여 일반우편연합이 창설되고, 1878년 파리조약에서 현재 명칭으로 고쳤다.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현행 조약은 1951년 브뤼셀에서 서명하여 1953년에 발효한 것이다. 한국은 1954년에 가입하였다. /naver
[만국우편연합 연혁] 1874. 10. 09 - 제1차 국제우편회의 개최 (스위스 베른에서, 22개국 대표가 모여) 1874. 11. 02 - 일반우편협약/조약(베른 조약, 하인리히 폰 슈테판이 기초)에 서명/조인/체결 1875. 07. 01 - 베른조약 발효, (베른조약의 발효로) 일반우편연합(General Postal Union)이 창설/탄생 1878. - 제2차 국제우편회의 개최 (프랑스 파리에서), 일반우편연합의 명칭을 만국우편연합(Universal Postal Union, UPU)으로 변경 1948. - 국제연합(UN)의 전문기구가 됨 (자료종합)
- Yokoyama Taikan - 'Sacred Mt. Fuji' - 'Muga' - 'Cherry Blossom at Night'
1868 - 일본의 화가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 출생 요코야마 다이칸 [橫山大觀, Yokoyama Taikan, 1868.11.2~1958.2.26] 전통 일본화를 부활시킨 일본 화가. 일본 이바라키현[茨城縣] 미토[水戶] 출생. 도쿄미술학교 제1회 출신으로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에게 일본화를 배우고 오카쿠라 가쿠조[岡倉覺三] 교장의 기대를 모았다. 1896년부터 2년 동안 모교에서 디자인을 가르쳤고, 1897년 제2회 일본회화협회전에 《무아(無我)》를 출품하여 동상을 받았다. 1898년 오카쿠라 가쿠조, 히시다 슌소[菱田春草], 시모무라 간잔[下村觀山] 등과 함께 일본미술원을 창립하였다. 1907년 문부성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되었지만 전람회에 분규가 일어나자 사퇴하였다. 오카쿠라 가쿠조가 죽은 뒤 문을 닫은 일본미술원을 1914년에 재건하여 일본화단에 영향을 끼쳤고, 원전(院展)이라 하여 해마다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초기에는 선(線)에 의존하는 전통 일본화 기법을 재검토하여 선을 생략하고 색상에 무게를 두는 새로운 화풍을 일으켰지만 모로타이[朦朧體]라는 혹평을 들었다. 중기 이후부터는 수묵화를 중심으로 하는 오카쿠라 가쿠조의 동양적 이상주의에 따라 참신한 구도와 생생한 필치, 풍부한 정감이 넘쳐나는 그림을 그려 일본 근대 회화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주요작품으로 《유인유여지(游刃有余地)》 《산길》 《생생유전(生生流轉)》 《밤 벚꽃》 등이 있다. /네이버
1865 - 미국의 제29대 대통령 워런 하딩(Harding, Warren) 출생 하딩 [Harding, Warren Gamaliel, 1865.11.2~1923.8.2] [역사 속의 인물]美 29대 대통령 워런 하딩 “나는 대통령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 직책을 맡지 않았어야 했다.” 미국의 29대 대통령 워런 하딩이 한 말이다. 그 말대로 하딩은 정말로 대통령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 무능했다. 친인척의 부패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백악관을 빠져나와 밀조 위스키를 마시며 포커를 즐겼다. 그래서 그에게는 ‘대통령이라 할 수 없는 대통령’이라는 오명이 항상 따라다닌다. 1865년 오늘 오하이오에서 태어났다. 아내의 명예욕에 떠밀려 정계에 진출, 연방 상원의원까지 됐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2류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경제는 팽개치고 외교에만 주력하는 윌슨 대통령에 신물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대선 승부의 추는 이미 공화당으로 기울어 있었다. 자연히 공화당 후보 쟁탈전은 치열했다. 9차례의 투표에도 후보를 결정하지 못했다. 지칠대로 지친 공화당 원로들은 ‘모나지 않고 고분고분한’ 인물을 내세우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담배연기 자욱한 방’의 결정이다. 이렇게 떠밀려 나간 선거에서 하딩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1월 02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7302&yy=2009
1862 - 리투아니아의 시인 마이로니스(Maironis) 출생 마이로니스 [Maironis, 1862.11.2~1932.6.28] 본명은 Jonas Mačiulis. 리투아니아의 시인. 민족문학 부흥의 음유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로마 가톨릭교 사제였던 그는 카우나스의 신학교와 1888~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카우나스에서 2년간 지내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에서 장학관 겸 도덕신학교수로 근무했다(1894~1909). 그뒤 모교인 카우나스의 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중 1922년 리투아니아대학교의 도덕신학교수로 선출되었다. 그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이던 당시 리투아니아 민족의 바람과 열망을 자신의 시에 표현했으며 리투아니아의 과거와 시골의 모습, 언어, 전설 등으로 조국에 대한 사랑을 썼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전통적인 음절수 중심의 시를 강세와 음절수 중심의 시로 바꾸었으며 낭랑하고 음악 같은 시로 생전에 널리 인기를 끌었다. 그가 쓴 서정시 전 작품이 선집 〈봄의 목소리 Pavasario balsai〉(1895년, 초판 45편 수록, 1926년 6판 131편 수록)로 출판되었다. 또한 그는 3편의 서사시를 남겼는데 첫번째 작품인 〈젊은 리투아니아 Jaunoji Lietuva〉(1907)는 매우 서정미 넘치는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그밖에도 리투아니아 대공(大公) 비타우타스(1350~1430)의 일대기를 다룬 3편의 역사 드라마를 썼으나, 다른 작품에 비해 문학적 가치는 매우 떨어진다. /브리태니커
1844 - 오스만 제국의 제35대 술탄 메메드 5세(Mehmed V) 출생 메메드 5세 [Mehmed V, 1844.11.2~1918.7.3] 본명은 Mehmed Reşad. 오스만 제국의 술탄(1909~18 재위). 재위중 ' 통일진보위원회'가 절대적인 통치력을 행사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 투르크가 패배했다. 거의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던 중 형 아브둘하미드 2세가 강제로 폐위된 뒤 술탄이 되었다. 친절하고 온화한 성품이었으며, 전통적인 이슬람 과목과 페르시아 문학을 교육받아 오스만과 이슬람 역사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었으나 통치 능력은 부족했다. 그는 입헌군주제를 시도하면서 모든 권한을 청년 투르크 운동의 자유민족주의 단체인 '통일진보위원회'에 양도했다. 1911년 위원회의 권고로 그는 트라케와 알바니아에 친선여행을 했다. 그러나 1912~13년에 치룬 2차례의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고, 이탈리아와의 전쟁(1911~12)에서는 트리폴리를 잃었다. 메메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칼리프로서 이 전쟁을 지하드[聖戰]로 선포하고 모든 이슬람교도, 특히 동맹국의 이슬람교도들에게 오스만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가 죽을 때쯤 제국의 대부분이 연합국의 수중에 넘어갔고, 6개월 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이 군사점령에 놓이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1795 -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제임스 포크(Polk, James) 출생 포크 [Polk, James K(nox),1795.11.2~1849.6.15] 미국 제11대 대통령(1845∼1849).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생. 1820년 테네시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여 성공하고, 1823년 잭슨파의 민주당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839년 테네시주지사를 역임하고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 남부의 이익을 대표하여 팽창주의 정책을 취하였으며 오리건 문제를 해결하여 오리건을 영유, 텍사스 병합을 실현시켰다. 또한 미국·멕시코전쟁으로 캘리포니아·뉴멕시코를 획득하였다. 그 밖에 관세의 인하, 독립국고제(獨立國庫制) 수립 등의 정책을 실행하였다. /yahoo
1755 - 프랑스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출생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 혁명 세력에 의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프랑스 왕비이다. 1774~93년 재위한 루이 16세의 왕비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1770년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왕세자와 결혼했다. 루이 16세와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잘 맞지 않았으며, 마리는 신하들과 어울려 자주 사교 모임을 가졌다.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감돌 무렵 마리의 사치는 극에 달해 민심을 자극했다. 백성들이 빵이 없다고 하자 "그럼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 에피소드는 그녀의 철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혁명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며, 국민들의 왕비에 대한 증오심은 나날이 커져만 갔고, 이는 1792년 8월 10일 왕정을 타도한 반란의 촉진제가 되었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국민공회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고, 그해 8월 마리는 콩시에르주리의 독실 감방에 감금되었다가 1793년 10월 14일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2일 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브리태니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케이크를 먹게 하라. "
- 마리 앙투아네트
[오늘속으로(11월2일)] 마리 앙투아네트 1755년 11월2일 프랑스 루이16세의 비(妃)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1793년 몰(歿).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고,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1세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1-11-01 18:1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38&aid=0000107738
1739 - 오스트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디터스도르프(Dittersdorf, Karl von) 출생 디터스도르프 [Dittersdorf, Karl Ditters von, 1739.11.2~1799.10.24] 본명은 Karl Ditters(~1773).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 기악곡과 경가극을 작곡했으며 징슈필 형식을 창시했다. 어린시절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으며 12세 때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公)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 것을 시작으로 그뒤에는 빈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다. 크리스토프 글루크와 가깝게 지냈으며 1761년에 그와 함께 볼로냐에 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이때 글루크의 음악은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1765년에는 그로스바르다인의 주교가 운영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고 거기에서 첫 오페라인 〈음악을 위하여 Amore in musica〉를 작곡했으며, 첫 오라토리오 〈이사코 Isacco〉 또한 이 시기에 쓴 것이다. 1770년경에 그는 슐레지엔의 요하니스베르크에서 브레슬라우의 대주교인 샤프고트슈 백작 밑에 있었으며, 이때 〈Il viaggiatore americano〉(1770)를 비롯한 11편의 희가극과 1편의 오라토리오 〈Davidde penitente〉(1770)를 작곡했다. 1773년에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라는 이름으로 작위를 받았다. 1779년경 요제프 하이든과 친해졌으며, 1783년부터 빈에서 모차르트와 함께 현악 4중주를 연주했고 그 이후로 많은 곡을 작곡했다. 오라토리오 〈Giobbe〉(1786)와 여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그중 〈의사와 약제사 Doktor und Apotheker〉(1786)·〈구두쇠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Knicker〉(1789)·〈빨간 모자 Das rote Käppchen〉(1790)는 크게 성공했다. 〈의사와 약제사〉는 특히 독일 징슈필의 고전적인 전형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는 또한 기악곡도 많이 썼다. 1795년 주교가 죽은 후 약간의 연금만을 받고 해직되었다. 가난하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보헤미아의 노이호프에 있는 슐로스 로틀호타에서 이그나츠 폰 스틸프리트 남작과 함께 일했다. 그는 임종시에 자서전을 구술했는데, 전문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이 자서전은 18세기 음악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빈 고전악파의 초기 작곡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교향곡은 매우 흥미진진하며 바이올린 협주곡은 연구할 만한 대상이다. 하프·플루트·하프시코드·더블베이스 등의 악기를 위한 협주곡은 많이 연주되고 음반으로도 나와 있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경쾌하면서도 때때로 감상적인 징슈필을 주로 썼다. /브리태니커
- Chardin - 'Grapes and Pomegrantes' - 'Inkwell and Quill' - 'Saying Grace'
샤르댕 [Chardin, Jean-Baptiste-Simeon, 1699.11.2~1779.12.6]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왕궁 부속 소목장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P.J.카즈에게 격식에 따른 교육을 받고, 이어서 N.코아페르에게 사사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1728년 6월의 성체(聖體) 축일에 거리에서 열린 청년화가 전람회에 《가오리》 《식기 선반》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고, 다시 이 작품들을 아카데미에 제출하여 회원으로 추천받았다. 그림은 정물 중에서도 가장 단순한 것, 예를 들면 부엌용구·채소·과일·바구니·생선·담배기구·그림상자 등을 잘 그렸다. 《식전의 기도》 《팽이를 들고 있는 아이》 《카드의 성(城)》 《시장에서의 귀로》 《요리하는 여인》 등 서민가정에서 지내는 견실한 일상생활이나 어린이들의 정경 등을 따뜻하고 평화롭게 그렸다. 두껍게 칠하는 기법과 견고한 색채는 독특하여 안정되고 심오함과 정취에 가득 찬 화풍이다. 만년에 파스텔로 초상화를 그렸는데, 1771년의 《자화상》과 1775년의 《아내의 초상》은 탁월하여, 당시 파스텔 초상화의 으뜸으로 일컫던 라투르를 능가한 예리한 색감과 기법의 확실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상상력에 있어서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 이를테면, 와토를 따를 수는 없었으나, 견실함과 직업화가로서의 서민적인 풍취를 지닌 면에서는 18세기의 손꼽히는 화가이다. /naver
1635 -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설립 아카데미 프랑세즈 [Academie Francaise] 프랑스 학사원(Institut de France)을 구성하는 5개의 아카데미 가운데 하나. 프랑스 한림원(翰林院)이라고도 하며, 가장 권위있는 명예로운 학술기관이다. 1635년 추기경 리슐리외(Cardinal Richelieu, 1585~1642)가 창설하여 프랑스혁명으로 중단되었다가 1803년 부활되어 오늘에 이른다. 입후보제의 보궐선거로 항상 40명을 유지하고 있는 정회원은 ‘불멸의 지성’이라고 불리며 당대 일류의 문학자, 다른 분야의 문학적 소양이 비범한 대가들을 망라하고 있으나 몰리에르(Moli憙 re),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오노레 드 발자크(Honor暴 de Balzac) 등이 회원이 아니었다는 예외도 있다. 내용과 형식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회원의 주요임무는 프랑스어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일로, 그들이 편집하는 《아카데미 사전》은 유명하다. 그밖에도 《아카데미 문전(文典)》의 편집, ‘아카데미 문학 대상’, ‘소설상’, ‘고베르 대상’ 등 문학관계 상의 전형(銓衡)·수여를 집행한다. 매주 목요일에 정례회합이 열린다. 1999년 10월 21일 엘렌 카레르 당코스가 여성으로는 최초로 종신 원장에 선출되었다. 당코스는 고령을 이유로 자진 사임한 모리스 드뤼옹(Maurice Druon) 후임으로 원장이 되었는데, 그녀는 러시아 전문가로 1978년 저서 《제국의 폭발》에서 옛소련의 붕괴를 예측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99년 6월에는 한국을 방문해 러시아 및 동유럽에 대해 강연하였다. /naver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