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1~12)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0장 7절에서 11절과 동일한 '나는~이다'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라는 양식을 사용해서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밝히셨는데,
여기서는 '착한 목자'로 밝히신다,
이것은 '양의 문'과 '착한 목자'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짐을 보여준다.
여기서 '착한'에 해당하는 '칼로스'(kalos; good)는 '도덕적으로 선한', 혹은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칭찬할 만한' 등의 의미를 전달한다.
즉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목자이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윗은 주님을 가리켜서 '나의 목자'라고 하였다(시편23,1).
히브리어 '야훼로이'(yaheh roi)는 새 성경이 번역한 것처럼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라는 뜻인데, 70인역(LXX)은 이것과 다르게 '주님께서 나를 먹이신다'(kyrios
poimainei me'; '퀴리오스 포이마이네이 메')로 번역했다.
'먹이신다'에 해당하는 '포이마이네이'(poimainei)는 '포이마이노'(poimaino)
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이며, 목자의 직분을 잘 나타낸다.
말하자면, 양을 인도하고, 안내하고, 다스리며, 보호하고 양육하다는 뜻이 이 동사 안에
함축되어 있다.
또한 이 동사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 주님께서 자신을 이처럼 계속적으로 돌보고
계심을 다윗은 증거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들 때에, 너무나 유명한 시편 23장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 속에 담긴 목자의 의미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그리고 착한 목자의 특징은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에 해당하는 '텐 프쉬켄 아우투 티테신'(ten psychen auteu
tithesin; lays down his life; gives his life)는 능동형으로서,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일치하는 선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오셨다(1요한2,2).
죄 중에 있는 인생들을 속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신 것이며, 많은 이들의 죄를
대속하는 몸값은 예수님 당신의 목숨이셨다(마르10,45).
예수님께서 의인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은 불경한 자, 곧 죄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죽으신 사실(로마5,6~8)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당신 목숨마저 양들을 위해서 내놓으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악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된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점을 물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으며(마태23,4), 사람들을 모두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마태23,15).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대조적으로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었던 것이다(마태7,15).
오늘날도 역시 가장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을 수 있다.
사탄은 위장술의 대가이기 때문에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하며, 사탄의 졸개인
마귀들도 자기들을 의로움의 일꾼으로 꾸미는 특성이 있다(2코린11,13~15).
착한 목자와 같은 일꾼과 마귀의 일꾼을 분별하는 가장 명확한 방법은 과연 그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는지의 여부에 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삯꾼'에 해당하는 '미스토토스'(misthotos; the hired hand)는 '고용하다', '일을
시키다' 라는 뜻을 가진 '미스토오'(mistho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주인이 아니라 돈 때문에 고용이 되어 일하는 사람이다.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품꾼'을 뜻하는 히브리어 '싸키르'(sakir)의 번역어로 나타난다
(탈출12,45; 레위19,13 등).
이 사람들은 양들을 돌보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보수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참된 목자와는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비록 외형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참된 목자는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질 물질에만
있기 때문이다.
'목자가 아니고'에 해당하는 '카이 우크 온 포이멘'(kai ouk on poimen; is not the
shepherd)에서 '온'(on)은 '에이미'(eimi; is)의 현재 분사인데, 부정어 '우'('ou';
모음 앞에서는 'ouk')가 분사와 함께 쓰일 때에는 강한 어조나 대조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목자가 아니라는 확실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또한 현재 시제가 진행 중의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앞으로도 도무지 목자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요한10,1; '도둑이며 강도다'; 로마2,21.22; 마태21,12.13; 마태23,16~19).
착한 목자들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양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소유가 아닐지라도,
자기 양처럼 여기고 보호한다.
하지만 삯꾼은 다르다. 그는 다만 품삯을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어서 양들을 돌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은 주인 의식이 없기 때문에 양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요한 복음 10장 11절에 나오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보면'에 해당하는 '테오레이'(theorei; sees)는 '테오레오'(theoreo)
의 단수 3인칭 현재 시제이며, '응시하다', '감지하다'는 기본적인 뜻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즉 이것은 양을 노리는 이리가 접근하는 것을 현재 감지하고 있는 긴박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양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인 '이리'로 번역된 '뤼콘'(lykon; the wolf)의
원형 '뤼코스'(lykos)는 성경에서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
(마태10,16)고 말씀하신 것과,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감독들에게 사나운 이리들이
들어와 양 떼를 해칠 것(사도20,29)에 대해 경고한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들의
위험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제에브'(zeeb)의 번역어로 나오는데, '제에브'
(zeeb)는 개과로 알려진 육식성 포유 동물로서 혼자서, 혹은 떼를 지어 사냥을 하며,
용감하고 난폭하며 탐욕적이어서 보통 먹을 수 있는 분량 이상을 사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리가 접근한다는 것은 양들에게 위험이 임박했다는 징조인데, 이때 삯꾼은 양들의
안전을 지키려고 위험에 맞서는 대신에 양들을 버리고 도망치고 만다.
'버리고 달아난다'에 해당하는 '아피에신~카이 퓨게이'(aphiesin ~kai pheugei;
abandons~and run away)는 모두 단수 3인칭 현재 시제로서, 위험을 감지한 삯꾼이
취하는 약삭빠른 행동을 실감나게 보여 주며, 이 두 동사가 모두 현재 시제라는 점은
삯꾼들이 늘 이와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