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 백사골(백사실 또는 백석실)*주1) 별서(別墅)는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115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별서는 담장 안쪽인 내원(內苑)과 담장 밖 외원(外苑)으로 나뉜다. 내원에는 34평 규모의 건물터와 135평 규모의 건물터, 140평 규모의 타원형 연못과 정육각형의 초석 6개만이 남은 정자터 등이 있다. 연못 좌측 산 중턱의 큰 바위에는 월암(月巖)이라는 각자가 있다. 별서 터에서 위쪽으로 100m 정도 올라가면 큰 바위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각자가 있다. 또한 근처에 7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칠성바위가 있다. 종로구는 이 일대에 대한 학술용역을 2004년 1월 상명대 최규성 교수팀에 맡겨 관련 사료 존재 여부와 역사적 가치, 정원 조성 주체 등의 연구를 의뢰했다. 2004년 1월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은 현장조사를 하고, 사적 지정을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문화재청은 2004년 10월 이 일대에 대한 사적지정을 예고했다. 2004년 12월 현재 공주대학교 문화재보존과학연구소에서 발굴을 위한 실측조사를 하고 있다.
*** 주 1) ‘~실’이라는 말은 ‘버드실’, ‘닭실’, ‘모래실’, ‘대실’의 예처럼 땅이름의 어근에 붙어 ‘골짜기’나 마을을 나타낸다. 한편 ‘~실(室)’은 ‘연려실(燃藜室)’이나 ‘사무실(事務室)의 예처럼 ‘집’이나 ‘방’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春秋左氏傳』에서 ‘故天子建國 諸侯立家 卿置側室’라는 표현에서 ‘~실(室)’은 높은 벼슬아치의 ‘집’을 뜻한다. 이 일대가 ‘백사실’과 ‘백사골’이라는 땅이름 혹은 집이름으로 불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백석실’ 혹은 ‘백석골’로 불렸을 가능성도 높은 것 같다. ***
이 일대는 조선 초인 1396년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5부 52방으로 나눌 때, 5부에 속하지 않은 도성 밖(城外) 지역이었던 것 같다. 그 후 효종 9년∼현종 9년(1657년~1668년) 사이에 북부(北部)에 상평방(常平坊)이 신설되었는데*주2), 이 일대는 상평방 관할 지역이었다. 영조(1724~1776) 때 방(坊)아래 계(契)를 두어 부-방-계의 행정조직을 갖추었는데*주3), 이 일대는 상평방(常平坊) 경리청계(經理廳契)에 속했다. 상평방에는 경리청계(經理廳契), 선혜청계(宣惠廳契), 금창계(禁倉契), 어창계(御倉契) 등이 있었다. 177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암미술관 소장「한양도성도」의 세검정 주변을 보면 경리청계(經理廳契)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주2) 손정목,『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일지사, 1977 p.38 손정목은 효종 9년∼현종 9년 사이에 성저각면이 5부로 편입되어 한성5부의 구역확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
*** 주3)『수성책자(守城冊子)』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을 보면 영조 27년(1751)에 반포한 328개의 계의 명칭이 나온다. 또한, 영조 14년(1738)에 한성부에서 작성한 호적(戶籍)에도 계의 명칭이 나온다. ***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5부를 오서(五署)로 고치고 계와 동을 늘려 47방 288계 775동으로 하였을 때, 이 일대는 북서(北署) 상평방(常平坊) 경리청계(經理廳契)의 백석동(白石洞)에 속했다. 백석동이라는 명칭은 이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행정구역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주4) 경리청계(經理廳契)에는 무계동(武溪洞), 부암동(付岩洞), 백석동(白石洞), 홍지문내동(弘知門內洞), 삼지동(三芝洞), 구기동(舊基洞), 응암동(鷹岩洞), 왕정평(王亭坪), 신영동(新營洞), 남문동(南門洞) 등이 있었다.
*** 주4) 동(洞)은 원래 공(空) 혹은 동혈(洞穴)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里) · 촌(村)과 같은 「마을」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으며 또는 깊은 골짜기를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동의 명칭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보이는 등 그 역사가 오래되었으나, 행정구역으로서 동(洞)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부터 쓰였다고 한다.『한경지략(漢京識略)』 각동조(各洞條)에는 이문동(里門洞) 향교동(鄕校洞) 등 44개의 동이 보이나, 이것을 행정구역 명칭으로 보기 힘들다고 한다.(『서울 600년사』시대사편) ***
1911년 4월 1일, 일제는 경기도령 제3호으로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개정하였다. 도성 안을 5부 36방으로 하고 도성 밖인 성저 10리 지역을 8면으로 하였다. 8면에 해당하는 지역은 일부가 때에 따라 고양에 편입되기도 하고, 서울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이 일대는 경기도 은평면에 부암리에 속하기도 했고, 경성부 은평면 부암리에 속하기도 했다. 부암리는 무계동(武溪洞), 부암동(付岩洞), 백석동(白石洞)을 합친 것이다. 해방 후인 1945년 10월 16일에 구제 실시로 서대문구역소를 서대문구로 개칭하였고, 1949년 8월 13일에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과 연희면이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서울시 서대문구 은평면 부암리가 되었다. 그 후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의해 구관할구역이 변경됨에 따라 이 지역은 서대문구 부암동에서 종로구 부암동이 되었다.
백석동(白石洞)이라는 명칭은 세검정 계곡 일대에 희고 큰 돌들이 많은데서 유래했거나 백악(白岳)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현존하는 조선 후기의 서울지도에는 세검정 일대의 바위들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1760년대 제작된「한양도」(채색필사본, 91.5X80.8cm, 개인소장)*주5)에는 백악이 위치한 부분에 ‘백유병(白有幷)’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19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동국여도(東國輿圖)』에 들어있는「연무대도(鍊武臺圖)」(채색필사본, 47.0X66.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에는 세검정(洗劒亭), 삼계동(三溪洞), 무계동(武溪洞), 조지서현(造紙署峴), 도은동(道隱洞) 등의 지명이 나타난다.
*** 주5) 이 지도에는 특색있는 지명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흥인지문과 동대문을 병기한 것이라든지, 광희군과 수구문을 병기한 것, 혜화문과 서소문을 병기한 것, 사평에서 헌릉을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한글로 ‘다라치고개’라고 표기한 것, 정선릉과 보은사의 우측에 ‘뭉동셤’이라는 한글 표기를 한 것 등이다. ***
세검정은 조선 초기 성종 연간에 월산대군과 강희맹·서거정·이승소·성임 등이 서울의 아름다운 풍경 열 곳을 읊은 시가인「한도십영(漢都十詠)」*주6) 중의 하나(藏義尋僧)와『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국도팔영(國都八詠)」*주7) 중에 하나(洗劍氷瀑)로 꼽힐 만큼 유명한 서울의 명승지였다. 삼월 삼짓날의 화전놀이, 유월 유두의 탁족, 9월 9일 중앙절의 등고 시기뿐만 아니라 연중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주6)『신증 동국여지승람 』에 수록된「한도십영(漢都十詠)」은 다음과 같다.
장의심승(藏義尋僧) ; 장의사(세검정)로 찾아드는 스님들의 모습
제천완월(濟川翫月) ; 한강변 제천정(한남동)에서의 달구경
반송송객(盤松送客) ; 서부 반송방(서대문사거리)에서의 길손을 전송하고 맞이하는 모습
양화답설(楊花踏雪) ; 한겨울에 양화진의 눈길을 걷는 정경
목멱상화(木覓賞花) ; 남산의 꽃구경
전교심방(箭郊尋芳) ; 전관평(살곶이벌)의 봄날 향기로운 꽃놀이
마포범주(麻布泛舟) ; 마포강 잠두봉 아래에서의 한가한 뱃놀이
흥덕상화(興德賞花) ; 흥덕사(혜화동) 연못의 연꽃구경
종가관등(鐘街觀燈) ; 사월초파일의 종로 연등축제
입석조어(立石釣魚) ; 한강 두모포 앞 입석포(금호동)에서의 낚시 ***
***주7) 『동국여지비고』에 수록된「국도팔영(國都八詠)」은 다음과 같다.
필운화류(弼雲花柳) ; 필운대의 꽃과 버들
압구범주(鴨鷗泛舟) ; 한강변 압구정의 배띄우기
삼청녹음(三淸綠陰) ; 북악 삼청동의 시원한 녹음
자각관등(紫閣觀燈) ; 자하골 창의문에서 보는 관등놀이
청계관풍(淸溪觀楓) ; 청풍계의 단풍놀이
반지상련(盤池賞蓮) ; 서부 반송정의 서지(西池) 연꽃구경
세검빙폭(洗劍氷瀑) ; 세검정 계류의 시원한 폭포
통교제월(通橋霽月) ; 광통교에서 보는 비 개인 후의 맑은 달 ***
백석동의 물들은 홍제천을 따라서 한강으로 흘러간다. 홍제천은 북한산 최고봉인 문수봉과 보현봉・형제봉을 발원지로 하고, 북악과 인왕산을 분수령으로 하여 청계천과 그 물길이 나누어지며, 수계로는 제1지류인 불광천과 제2지류인 녹번천이 있다.*주8)
홍제천은 ‘모래내’라고 불리던 하천으로 1750년경 제작된「경조오부 북한산성 부도」, 18세기 중엽에 제작된『해동지도(海東地圖)』에 수록된「경도(京都)」(채색필사본. 66.0X48.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1861년에 김정호가 제작한『대동여지도』첩의 「한성도」와「경조오부도」, 1864년에 김정호가 제작한「수선전도」등 조선 후기의 지도들에는 ‘사천(沙川)’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175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도성도」에는 불천(佛川)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성산천(城山川)이나 세검천(洗劍川)으로 불리기도 했다. 1892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세대학교박물관 소장의「수션젼도」에는 한글로 ‘모래내’라고 표기하고 있다.
3. 월암(月巖) 각자 바위
월암(月巖)이라는 각자 바위를 언제 누가 글씨를 써서 새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의 실학자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 1720~1783, 숙종 46~정조 7)가 그의 문집인『李參奉集』*주9) 卷一「步至洗劍亭巖寺僧人致晚飯」,「雨後自北漢沿溪看瀑 將出洗劍亭 見溪上又有一源高澗細瀑 其上有許氏茅亭 扁曰看鼎寮 不可以無詠三首」,「洗劍亭」등의 시를 통하여 그가 이 일대를 자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 주9) 『李參奉集』은 이광려가 사망한 후 이만수(李晩秀)·서영보(徐榮輔) 등이 시문을 수집·편차하여 1805년 간행하였다. 4卷 2冊으로 권1~2는 시, 권3~4는 문이며 서와 발이 실려 있다. 이만수가 序文을 썼고, 서영보가 跋文을 썼다. 이만수는 순조조 노론의 핵심인물 중 한 사람으로 홍경래의 난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다가 문책 파직을 당했다. ***
그러나 이광려의 호인 월암(月巖)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 돈의문 밖인 西部 盤松坊(城外) 池下契 月巖洞(종로구 송월동 3-1)이다. 松月洞은 1914년 松亭洞과 月巖洞이 합쳐져서 생긴 동명이다.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의『송남잡지(松南雜識)』*주10) 의「月巖序」에는 "돈의문 밖에 월암이라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어떤 호사가가 바위에 월암동 글자를 크게 새기고 붉은 주사를 채워 넣었다고 한다. 월암 밑에는 宜寧 南鍾鉉이 살고 있어 그의 호를 月巖이라 했다고 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광려의 집이 월암 아래 평동(平洞)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호를 월암이라 했던 것 같다. 월암은 서울 도성의 성곽이 지나가는 길목으로 성내와 성외의 경계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평동은 西部 盤松坊(城外) 池下契에 속했으며, 지금의 서울 종로구 평동이다.
*** 주10)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의『송남잡지(松南雜識)』는 7권 14책으로 구성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권3의 방언(方言)은 홍만종(洪萬宗)의『순오지(旬五志, 1678년, 숙종 4)』・정약용(丁若鏞)의 『이담속찬(耳談續纂)』과 『아언각비(雅言覺非)』・이덕무(李德懋)의『열상방언(洌上方言)』・박경가(朴慶家)의『동언고략(東言考略)』・편자 및 연대 미상의『동언해(東言解)』등과 함께 국어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송남잡지』에는 다음과 같은 춘향전의 근원설화로 볼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남원지방 전설에 남원부사의 아들 이도령(李道令)이 어린 기생 춘양(春陽)과 친근하게 지내던 중 이도령이 떠난 뒤 춘양이 수절(守節)을 하고 있었는데 새로 부임해온 부사 탁종립(卓宗立)이 춘양을 죽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애석하게 여겨 타령을 지어 춘양의 원혼을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
세검정과 북한산 주변은 연암그룹의 문인들의 모임인 백탑시사(白塔詩社)에서도 즐겨 찾았다. 박지원・홍대용・박제가・이덕무 등은 승가사에 올라 북한산과 조계를 유람한 일이 있는데 박제가는 그 때의 유력을 장편고시로 기록하기도 했다. 1764년경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영처시고(嬰處詩稿)』권 2「洗劍亭幷序」에「洗劍亭」시를 남겼다. 또한 이가환(李家煥, 1742~1801)과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세검정을 다녀와서 글을 남겼다. 이가환은 1797년(정조 21) 무렵에 세검정에 올랐는데, 비바람이 치고 하늘이 깜깜하다가 야반에 어둠이 걷히고 월색이 고요한 광경을 시로 묘사하기도 했다.*주11) 다산 정약용은 북한산과 세검정을 다녀온 후「자북한회지세검정희위육언」시(詩)와「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를 남기기도 했다. 아울러 겸재 정선의「세검정도(洗劍亭圖)」, 유숙의「세검정도(洗劍亭圖)」등의 그림도 전해지고 있다.
*** 주11) 이가환,『시문초(詩文艸』, (심경호,「조선후기 시사와 동호인 집단의 문화활동」,『민족문화연구』제31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1998년 12월. p 185에서 재인용) ***
이광려는 정종공정왕(定宗恭靖王)의 왕자인 덕천군(德泉君) 厚生의 후손 출신의 소론계(峻小) 실학자로 자는 성재 (聖載), 호는 월암(月巖) 또는 칠탄(七灘)이다. 양명학자 정제두(鄭齊斗)의 학문을 이어받은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일원으로 이광사(李匡師)・신경준(申景濬), 신대우(申大羽), 송재도(宋載道), 홍양호(洪良浩)・박지원(朴趾源)・강세황(姜世晃) 등과 교유했다. 이광려는 열다섯 살 되던 1734년(영조 10) 족형(族兄)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와 정경순(鄭景淳)에게 배웠는데, 당시 이광사는 서울이나 선영이 있는 고양군의 삼휴리(三休里)에서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12)
***주12)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년~1777년, 숙종 31~정조 1)는 30세 때인 1734년(영조 10) 봄에 강화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선영이 있는 고양(高陽)의 삼휴리(三休里)에 거주했다. 아마 1727년(영조 3)에 부친상을 당해 고양(高陽)의 선영에 장사를 지내고, 1733년(영조 9)에 부친의 묘를 장단(長湍)의 송남(松南)으로 이장한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1735년(영조 14)에는 돈의문(敦義門) 밖에 세들어 살다가 이듬해(1736년)에 다시 강화로 들어갔다. 1737년 (영조 13)에 서울의 원교(圓嶠)로 이사한 후 원교산(圓嶠山)의 이름을 따서 호로 삼았다. 원교(圓嶠)는 서대문 밖 반송방(盤松坊) 고마청동(雇馬廳洞, 현재의 중구 의주로 1가, 서대문구 충정로 1가 부근)에 있었는데, 현재의 서대문구 냉천동 뒤산 둥그재(圓嶠, 속칭 금화산) 부근이다. 1861년에 김정호가 발간한『대동여지도』첩의「한성도」에서 반송방(盤松坊)에 원현(圓峴)이라는 고개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광려가 수학할 당시에는 이광사가 원교로 이사를 하기 전이라 ‘원교(圓嶠)’라는 호를 사용하기 전이다. 이광사는 1755년(영조 31) 乙亥獄事로 제주도에 유배를 가기 전까지 원교에서 살았던 것 같다. 이광사의 장남이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다. ***
그의 제자로는 신대우(申大羽)와 유희, 신위 등이 있다. 유희(柳僖 : 1773∼1837)는『언문지(諺文志)』(1824)등의 음운서를 남긴 학자로 유명하다. 이건창(1852~1898)은 「자하시초발(紫霞詩抄跋」에 “자하의 시는 처음에 우리 집안 참봉군으로부터 배웠고 그 뒤 중국에 가서 옹방강을 사사하여 비로소 유소입두를 내세웠다”라 하였다. 바로 이건창이 말한 참봉군이 이광려이다. 자하 신위와 이광려의 관계에 대해서는 뒤에서 백석동 별서가 자하 신위의 소유였다는 설을 검토하면서 다시 한번 살펴볼 것이다.
이광려는 1763년(영조 39)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趙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들여오자 재배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실패하는 등 구황작물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고구마 재배는 결국 당시 동래부사였던 강필리(姜必履)에게 자극을 주어 재배에 성공을 하였다.
이광사는 표암 강세황과 교유하며 「贈豹菴姜光之世晃」・「姜光之借軒」・「豹菴宅次主人韻」*주13) 등 많은 시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연암 박지원과는 당색을 초월하여 문장을 토론하며 교유했는데,『과정록(過庭錄)』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주13) 『李參奉集』권2 詩 ***
참봉(參奉) 이광려(李匡呂)는 문장이 빼어나고 인품이 훌륭한 선비다. 아버지께서 평계(平谿)에 거처하실 때다. 하루는 지계공(芝溪公)과 함께 인근 거리를 지나다가 어느 집 사립문 안에 조그만 수레가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만든 솜씨가 자못 정교하여 다가가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그 집 주인이 마루에서 내려와 웃으며 맞이하면서,
"그대는 혹 박연암 아니시오? 나는 이광려외다."
라고 했다.
대청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두 분은 문장에 대해 토론하셨다. 아버지는 이공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평생 독서하셨는데 아는 글자가 몇 자나 되지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이공은 글을 잘 하고 박식한 선비라는 걸 누가 모른단 말야!'
이공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겨우 서른 자 남짓 아는 것 같군요."
좌중의 사람들이 또 한번 깜짝 놀랐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공은 이 한마디 말로 단박에 아버지와 지기(知己)가 되어 이후 자주 찾아왔다. 그리고 새로 지은 시문(詩文)이 있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아버지의 평을 청했다. 또 아버지가 찾아가면 매번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그 철에 나는 과일을 상에 차려 대접하며, "이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예법이지요."라고 하였다. 두 분은 하루종일 담소하고 변론해도 당론(黨論)이 다른 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주14)
『과정록(過庭錄)』에서 박지원이 거처하던 평계(平谿)는 이광려가 살던 평동에 속했거나 평동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광려는 선영이 장단(長湍)의 마근담리(麻根潭里)에 있었기 때문에, 홍제교와 세검정 근처를 자주 왕래했던 것 같다. 또한 이광려는 겸재 정선과도 교유했던 것 같다. 1759년(영조 35) 겸재가 사망하자 그의 만사(挽詞)를 짓기도 했다. 1777년(정조 1)에 스승인 이광사가 작고하자 묘지를 지었으며, 1783년(정조 7)에 64세를 일기로 평동(平洞) 집에서 사망했다. 평동은 西部 盤松坊(城外) 池下契에 속했으며, 지금의 서울 종로구 평동이다. 1861년에 김정호가 발간한『대동여지도』첩의「한성도」에서 돈의문 밖에 있는 평동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4. 백사골 별서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백사골 별서의 주인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우선 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소문대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을 꼽을 수 있다. 둘째로는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나 윤두수의 넷째 아들인 백사(白沙) 윤훤(尹暄, 1573~1627)일 가능성도 있다. 셋째로는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가 유력하다. 넷째로는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 1720~1783)와 교유했던 제4의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추후 문헌조사와 발굴조사에 의해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가능성이 더 높다. 또한 조선시대나 일제시대 초기의 호적이나 토지대장, 분재기 등의 자료가 발굴된다면 좀 더 구체적인 소유관계의 변동을 알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때는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군사지대에 속했고, 도성 밖이라서 일반적인 관심에서 약간 벗어났기 때문에 문헌기록의 공백지대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주15) 게다가 일제시대에는 경성부에 포함되기도 하고 경기도로 이관되기도 하면서 행정구역의 변동이 심했고, 해방 이후에는 청와대와 인접한 군사지역으로 개발제한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가 거의 공개되지 못한 것 같다.
***주15) 조선 숙종・영조대에 고승 성능(聖能)이 편찬한『북한지(北漢誌)』와 이를 증보역주하고 관련 역사지리 자료를 모아서 펴낸 김윤우의『북한산 역사지리』(범우사, 1995)에도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
1)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백사 이항복은 1556년(명종 11) 서울의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에서 태어났다. 양생방(養生坊)은 1894년에 동을 행정구역으로 편입했을 때 창동계(倉洞契)의 창동(倉洞), 상동계(尙洞契)의 상동(尙洞), 태평동계(太平洞契)의 태평동(太平洞), 양동(陽洞), 전교(錢橋), 칠간동(七間洞), 관정동(館井洞), 생사동(生祠洞)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에서 이항복이 태어난 곳은 남산의 동쪽 남창동 앞에 있는 쌍회정(雙檜亭)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항복이 이곳에 두 그루의 전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곳은 순조 때 서염순 (徐念淳, 1800~1859)이 정자를 고쳐 짓고 부근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 ‘홍엽정(紅葉亭)’으로 고쳤다. 철종 말에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이 집을 사서 편액을 ‘쌍회정’으로 바꾸고, 높은 바위에 ‘귤산(橘山, 남산이라는 뜻)’이라 새겼다. *주16)
***주16) 심경호,「조선후기 시사와 동호인 집단의 문화활동」,『민족문화연구』제31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1998년 12월. p 114 ***
이항복은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어 처가인 필운대(弼雲臺,인왕산 기슭의 필운동 9번지 현재 배화여고 교정)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역시 후손인 이유원이 ‘필운대’라는 각자와 조상의 자취를 기리는 시를 새겼다. 이항복은 만년에는 노원에 우거하다가 1613년(광해군 5)에 서울 근교의 망우리쪽에 별장인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짓고 살았다. 용산구 한남동 459번지에 있었던 천일정(天一亭)도 이항복의 소유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17) 이곳은 지금 한남대교가 놓여져 있는 곳 부근으로, 천일정은 한국 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주17) 『서울 600년사』, 문화사적편. 건축물. 누정. 천일정 ***
그의 문집인『백사집(白沙集)』에는 부암동 백사골 별서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한 그가 자호로 삼은 백사(白沙)가 가리키는 지명이 어디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177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암미술관 소장「한양도성도」에는 밤섬(栗島, 지금의 여의도와 밤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지도에는 두 섬이 하나로 표현되어 있다)에 백사장(白沙場)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그리고 앞에서 밝혔듯이 홍제천은 ‘모래내’라고 불리던 하천으로 1750년경 제작된「경조오부 북한산성 부도」, 1861년에 김정호가 제작한『대동여지도』첩의 「한성도」와「경조오부도」, 1864년에 김정호가 제작한「수선전도」등 조선 후기의 지도들에는 ‘사천(沙川)’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인왕산과 안산 사이의 고개로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무악재를 사현(沙峴)이라고 불렀다. 사현이라는 명칭은 고개 북쪽 지금의 홍제동 언저리에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현사(沙峴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개성·평양·의주로 가는 의주로(義州路)에 있는 무악재는 국방·교통·통신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시대에 따라 많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 이름들은 무악재(毋岳峴)·모래재(沙峴)·길마재(鞍峴)·추모현(追慕峴)·무학현(無學峴)·모화현(慕華峴)·봉우재 등으로 불리었다. 근래에는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홍제동고개라 하기도 한다. *주18)
***주18) 서울시사편찬위원회,『서울의 고개』, p 212. 이 책에서는 사현이라는 명칭이 사현사에서 유래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모래내(沙川)’이라는 강이름에서 사현이라는 고개 이름과 사현사라는 절 이름이 나오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홍제교가 나오는데, 홍제교 밑을 흐르는 강이 바로 모래내이기 때문이다. ***
1673년에 제작된「조선팔도고금총람도」에는 ‘서산(西山)’으로 표기한 인왕산의 도성 밖 서쪽에 ‘사현(沙峴)’이 나타난다. 1720년대에 제작된「도성도」・「자도성지삼각도」・「도성삼군문분계지도」와 1765년에 제작된「사산금표도」, 그리고 1747년~1764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도성대지도」에는 ‘인왕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도성 밖 서쪽에 역시 ‘사현(沙峴)’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런데 1750년대 제작된「경도오부 북한산성부도」에는 ‘인왕산’의 도성 밖 서쪽에 ‘모화령(慕華嶺)’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고, ‘사천(沙川)’이라는 표기가 있다. 한편 1750년대 제작된「도성도」에는 ‘사천’ 대신 ‘불천(佛川)’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1760년대에 제작된「한양도」(채색필사본, 91.5X80.8cm, 개인소장)에는 돈의문 밖에서 홍제원으로 넘어가는 첫 번째 고개를 사현(沙峴)이라 하고, 두 번째 고개를 모화현(慕華峴)이라고 세분하여 표기하였다.
우리나라의 강 주변의 지명 중에는 모래 또는 백사와 관련된 지명이 어느 지역에나 많기 때문에 서울의 이러한 지명들이 이항복의 호인 ‘백사’와 관련성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백사별집(白沙別集)』제4권 잡기에 1601년(신축년) 1월 11일에 아름다운 꿈을 꾼 기록인 '記夢'이 실려있는데, 윤두수의 별서와 관련한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기몽(記夢)의 전문 번역은 다음과 같다.
꿈을 기록하다(記夢)
신축년 정월 11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마치 공사(公事)로 인하여 비를 맞으면서 어디를 가는 듯하였다.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두 사람이고 도보로 따르는 자가 또 4, 5인쯤 되었다. 어느 한 지경을 찾아 들어가니, 산천(山川)이 기이하고 탁 트였으며, 길 옆의 한 언덕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새 정자가 높직하게 서 있었는데, 지나는 길이라 올라가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곧장 막다른 협곡(峽谷)에 다다르니, 협곡 안에는 마치 불사(佛寺)와 같은 큰 집이 있고 그 곁에는 민가(民家)들이 죽 열지어 있었다. 인하여 그 큰 집에 들어가서는 마치 무슨 일을 한 듯하나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하겠다. 여기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다시 아까 지나갔던 언덕에 이르니, 그 언덕 밑은 편평하게 탁 트인 광장(廣場)이 되었고 그 위에는 백사(白沙)가 죽 펼쳐져 있는데, 그 주위가 수천 보쯤 되어 보였다. 또 백위(百圍)쯤 되는 큰 나무 다섯 그루가 광장 가운데 늘어서 있는데, 일산(日傘)과 같은 소나무 가지가 은은하게 빛을 가렸다.
마침내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서 비로소 새 정자에 올라가 보니, 정결하고 산뜻하여 자못 별천지와 같았다. 그 안에는 서실(書室)이 있는데, 가로로 난 복도(複道)에는 모두 새로 백악(白堊)을 발랐고 아직 단청(丹靑)은 입히지 않았다. 그 밖의 낭무(廊廡) 여러 칸은 아직 공사(工事)를 끝내지 못하여 다만 기둥을 세우고 기와만 이었을 뿐이었다.
인하여 형세를 두루 살펴보니, 사방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한가운데에 큰 들판이 펼쳐 있고, 세 개의 석봉(石峯)이 들 가운데 우뚝 일어나서 그 형세는 마치 나계(螺髻)와 같았다. 이것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가서 중간에 꺾어졌다가 다시 뾰족하게 일어나서 언덕이 되었는데, 언덕의 높이는 겨우 두어 길쯤 되었고 정자는 바로 그 언덕 위에 있었다.
이 언덕의 오른쪽으로는 넓고 편평한 비옥한 들판에 수전(水田)이 크게 펼쳐 있어 향기로운 벼에 이삭이 패서 한창 바람에 흔들려 춤을 추는 푸른 벼가 백경(百頃)으로 헤아릴 만하였다. 정북향에 위치한 여러 산들은 한군데에 빽빽히 모여 뛰어오를 듯 허공에 솟아 있으며, 동학(洞壑)은 깊고 험하여 은은하게 산천의 무성한 기운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정자 앞에는 멀리 산봉우리가 열지어 서서 동천(洞天)을 둘로 만들었다. 이 두 동천에서 나오는 물은 마치 흰 규룡(虯龍)이 구불구불 굼틀거리며 가는 것과 같은데, 한 가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또 한 가닥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두 가닥이 이 정자 밑에서 서로 합하여 돌아나가서 한 물줄기가 되었다. 이 물은 넓이가 수백 보쯤 되고 깊이는 사람의 어깨에 차는데, 깨끗한 모래가 밑바닥에 쫙 깔려 있어 맑기가 마치 능화경(菱花鏡)과도 같아서 오가는 물고기들이 마치 공중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시냇가에는 흰 돌이 넓고 편평하게 깔려 있어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낚시터를 이루었고, 현(玄) 자의 형세로 흐르는 시냇물은 이 정자의 삼면(三面)을 빙둘러 안고 돌아서 남쪽의 먼 들판으로 내려갔다.
나는 평생 구경한 것 가운데 일찍이 이러한 경계(境界)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자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오음(梧陰)의 별서(別墅)라고 하였다. 이윽고 윤 수찬(尹修撰)이 나와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상공(相公)이 안에 계신다.”고 하였다. 나는 이때 문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우연히 “도원의 골 안에는 일천 이랑이 펼쳐 있고, 녹야의 정원에는 여덟 용이 깃들었도다[桃源洞裏開千畝 綠野庭中有八龍].”라는 시(詩) 한 구절을 얻었는데, 시를 미처 더 이어 짓지 못한 채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꿈을 깨었다. 문창은 이미 훤해졌는데, 그 시원하던 기분은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 있고, 모발(毛髮)에는 서늘한 풍로(風露)의 기가 있었다. 마침내 일어나서 그 경치를 마음속으로 더듬어 찾아서 화공(畵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이 시를 붙여 쓰려다가 갑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 ‘도원(桃源)의 뛰어난 경치에다 천묘(千畝)의 부(富)를 얻고 녹야(綠野)의 한적함을 누리며 팔룡(八龍)의 복을 소유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지극한 소원이다. 다행히 내가 이런 기이한 꿈을 꾸었으니, 왜 굳이 오음(梧陰)에게 양여(讓與)하고 스스로 곁에서 구경이나 하는 냉객(冷客)이 된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푸줏간을 지나면서 고기 씹는 시늉이나 내는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니 비밀에 붙여 남에게 말하지 않고 인하여 스스로 취하는 것이 낫겠다.’ 하고, 그 정자를 ‘필운별서(弼雲別墅)’라 고치고 절대로 윤씨(尹氏) 집 사람들에게 천기(天機)를 누설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기록하다.
이달 27일 밤 꿈에 재차 이 별서에서 오음과 함께 평소와 같이 즐겁게 희학질하며 노닐었는데, 산천의 뛰어난 경치는 지난번의 꿈과 같았으나, 다만 정사(亭舍)의 체제(體制)가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하늘이 오음에게 내려준 곳을 내가 사사로이 훔칠 수 없으므로, 인하여 ‘오음별서(梧陰別墅)’로 복호(復號)시켰다. -오음의 성명은 윤두수(尹斗壽)이다. *주19)
오음 윤두수*주20)는 1533년(중종 28) 한성부(漢城府) 돈의문(敦義門) 밖 반송방(盤松坊) 차자리(車子里)에서 출생하였다. 반송방 차자리계(車子里契)에는 아현(阿峴). 형제정(兄弟井)이 속해 있었다. 아현은 현재 마포구 아현동이 되었고, 형제정은 현재 중구 중림동에 속한다.*주21)
*** 주20)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의 후손인 해평 윤씨(海平尹氏) 오음공파(梧陰公派)는 조선조의 권문세도가의 하나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구한말 군부・법무대신을 지낸 윤웅렬(尹雄烈), 안성군수와 육군참장을 지낸 윤영렬(尹英烈) 형제, 윤웅렬의 아들인 윤치호(尹致昊), 윤영렬은 아들인 윤치영(尹致暎) 등이 그의 후손들이다. ***
***주21)『오음선생유고병연보』, 해평윤씨대종중, 1973의 연보에서는 차자리가 지금의 미근동이라고 했고,『서울 600년사』, 인물, 조선중기, 문신, 윤두수 항목에서는 차자리가 지금의 중림동이라고 추정했다. ***
14세때 오음리(梧陰里) 언덕에 아버지를 장례지내고 청파(靑坡)의 집으로 돌아왔다. 20세 때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에게 배웠는데, 성수침은 당시 장단(長湍)의 선영과 가까운 파산(坡山)에 거주했다. 33세 때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과 만났다.
1591년(선조 24)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간의 분쟁인 건저(建儲)문제*주22) 로 탄핵을 받아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기용되어 어영대장 · 우의정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고, 다음 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후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고 물러나 남파(南坡)에 살았다.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학도암 밑의 납대울에서도 살았으며, 그의 후손인 윤응렬의 집이 부암동 348번지에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백석동 별서가 그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梧陰遺稿』 卷一에「遊三角山」이라는 시와『백사별집(白沙別集)』제4권 잡기에「記夢」의 기록이 전한다.
***주22) 서인이었던 좌의정 정철(鄭澈)은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부제학(副提學) 이성중(李誠中), 대사간(大司諫) 이해수(李海壽) 등과 함께 후궁 소생이 많기 때문에 미리 왕세자를 책봉하여야 한다고 건저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려고 하다가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에게 탄핵을 당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철에게 원한을 품었던 동인이 서인에 대한 보복수단으로 건저문제를 이용했다. 이황의 문인이었던 정두수는 당색은 서인이었다. 1578년(선조 11)에도 대사간으로 있던 이산해는 윤두수를 탄핵하여 파직시킨 일이 있다. ***
윤훤(尹暄)은 윤두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으로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해평 윤씨(海平尹氏) 백사공파(白沙公派)의 파조이다. 부친인 윤두수가 성수침에게 배웠고, 윤훤이 성수침의 아들 성혼에게 배운 것으로 미루어 두 집안 사이에는 깊은 교유가 있었던 것 같다. 윤헌의 호는 공교롭게도 이항복과 같은 ‘백사(白沙)’인데, 만일 백석동의 옛 지명이 백사골이라면 별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그러나 윤훤 문집인『백사집(白沙集)』에는 별서와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백석동의 옛 지명이 백사골이라고 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상태이다.
3) 자하(紫霞) 신위(申緯)
자하 신위는 1769년(영조 45)에 서울 서부(西部) 인달방(仁達坊) 장흥고계(長興庫契) 장흥동(長興洞)에서 태어났다. 장흥동은 현재 종로구 적선동과 내자동에 걸쳐 있었다. 어린 시절을 경기도 시흥의 자하동(紫霞洞)의 자하산 별장에서 보냈으므로 자하(紫霞)를 호로 삼았다. 자하산 별장은 현재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캠퍼스 뒤편 관악산에 있었다. 현재 과천시 중앙동 산 14-1 일대의 관악산 계곡에는 자하 신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紫霞洞門' '白雲山人 紫霞洞天' '丹霞詩境' 3개의 글씨가 남아 있다.
이건창의「자하시초발(紫霞詩抄跋」의 기록에서 자하 신위가 월암 이광려에게 시를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이광려의 제자였던 신대우(1735~1809년)는 자하의 종숙이다. 신대우는 원교 이광사의 아들 이영익의 동서다. 또한 자하 신위의 장인은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인데, 조윤형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의 스승인 백하 윤순(白下 尹淳)의 사위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신위와 이광려는 당색도 같은 소론계였고 집안끼리도 교유가 있었던 것 같다. 신위는 조선후기 시, 서, 화 삼절로 유명한데 그림은 표암 강세황에게 배웠다.
신위는 항상 관악산 자하동에서 기거하였지만 북한산 계곡에도 별장이 있어 그곳에서도 기거했다고 한다. 자하의 북한산 별장이 ‘백석동 별서’라는 주장*주24)이 있지만, 아직까지 그 주장의 사실 여부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다. 도성에서 백석동으로 넘어가는 창의문(彰義門)을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자하문 근처에 신위의 별장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신위의 북한산 별장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겸재 정선이 1751년(영조 27)경 그린『장동팔경첩』(간송미술관 소장)에 ‘자하동’ 그림이 전한다. 최완수는 자하동은 지금 종로구 청운동 3, 4 및 15번지 일대의 창의문 아래 북악산 기슭을 일컫던 동네이름이라면서 자하동은 한자로는 ‘붉은 노을 속에 잠긴 마을’이라는 환상적인 뜻이지만 사실 순 우리말 ‘잣동’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25) 성곽이 산마루를 따라 쌓이니 성(城)의 의미가 그대로 산마루와 공통되어 산루를 뜻하는 ‘재’ 혹은 ‘자’가 그대로 성(城)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주24) 최완수,『겸재의 한양진경』, 동아일보사, 2004. p 99 ***
자하는 벼슬길에서 물러난 1820년에는 18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정약용(1762~1836년), 정학연 부자와 교유하였고, 이학규(1770~1834년), 추사 김정희(1786~1856년) 등과 창수하기도 하였다. 자하는 1845년에 자신이 태어났던 자택인 서울 장흥방(長興洞)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흥방(長興洞)의 지명은 내자동과 적선동 경계 부근에 장흥고(長興庫)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장흥고는 조선 초에 남부 호현방(好賢坊, 지금의 충무로1가·회현동1가·남대문로3가 접경지대)에 두었다가 나중에 현재의 위치인 서부 인달방(仁達坊)으로 옮겼다.
*** 미완성 원고입니다. 문화재청의 발굴보고서 등 추후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면 내용이 바뀔 가능성이 높습니다. (2004년 12월 4일, 글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