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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는 창녕 탐방
-2022년 12월 20일 창녕지역 탐방을 위해 사전 자료를 탑재하니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창녕 영산만년교(昌寧 靈山萬年橋)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영산만년교는 조선 후기에 축조된 무지개 형태의 다리로, 197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다리는 정조 4년(1780)에 석공 백진기(白進己)가 쌓았던 무지개다리(虹 무지개 홍 , 橋 다리 교)로 영원히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만년교’라 이름하였다. 또 남산(南山)인 함박산(咸朴山)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을 건너기 위해 놓은 다리라고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하고, 다리를 놓은 고을 원님의 공덕을 기리고자 ‘원다리’라고도 불렸다.
만년교가 있던 자리에는 본래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 다리는 남쪽에서 영산 고을로 들어오는 중요한 수로인데 홍수 때마다 다리가 떠내려가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1817년(순조 17)에 큰 홍수가 발생하여 무너졌고, 1892년(고종 29) 영산현감 신관조가 석공 김내경(金乃敬)을 시켜 다시 쌓았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였는데 안전 문제가 제기되어 조사해 보았더니, 보수하는 과정에서 둥글둥글한 강가의 돌로 쌓아 불안정한 것으로 밝혀져 축조 당시처럼 비교적 크고 네모난 돌인 무사석(武砂石)으로 교체한 후,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고르게 흙을 깔고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웠다.
만년교 주변에는 1780년 당시 건립 목적, 시주자, 공사 감독자, 석공 등의 이름을 기록한 ‘남천석교서병명(南川石橋序幷銘)’이라 쓴 비석과 ‘만년교’라 쓴 비석 2기가 세워져 있다. 이 중 하나는 13살 난 글씨 신동이 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난간과 장식은 없으나, 자연스럽게 휘어진 노면이 반원형의 홍예(虹霓 : 무지개 홍, 무지개 예)와 조화를 이루며 물에 비친 모습과도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만년교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지닌 홍예교로써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 보성 벌교의 홍교, 여수 흥국사의 홍교 등과 함께 조선 후기 홍예교의 축조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창녕 영산만년교(昌寧靈山 萬年橋)
*창녕 연지(硯池)
예로부터 영산 고을의 영축산은 불덩어리의 형상을 띈 상이라서 고을에 화재가 자주 일어날 수 있으니. '불은 물로 다스린다.'라는 오행설에 의거 화재를 예방하며, 농사에 이로운 치수구(治水口)로 활용하고자 벼루 모양의 못을 만들었다 하여 연지(硯池)라 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가꾸지 않아 못의 구실을 못 하다가 고종 26년(1889) 현감 신관조가 다시 파서 개울물을 끌어들여 하늘의 오성을 본떠 다섯 개의 섬을 만들었다.
삼 년 뒤, 그중 큰 섬에 여섯 기둥과 굽은 난간에 한 칸의 초가 정자를 세우고 중국의 유명한 항주(杭州)의 호수 미정(眉亭)에 비겨 현판을 항미정(抗眉亭)이라고 한 것이 시초라 하였다. 그 후, 1920년에 사각 가와 정자로 개축하였다가, 1971년 다시 육각 정자로 크게 중건하여 오늘날의 향미정이 되었다고 한다. 연지 못 둘레에는 주민들의 헌수로 수양벚나무를 심어 봄에는 분홍색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끌려가 일본에 살면서 무지한 일본인들에게 삶의 도리를 가르친 조선의 유학자 이진영 선생과 아들 이매계 선생을 기리는 현창비(顯彰碑)가 있다.
창녕 연지(硯池)의 항미정(抗眉亭)
*창녕 석빙고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석빙고는 보물 제310호다. 빙실 길이 11m, 너비 3.6m, 홍예(虹霓) 높이 3.7m. 창녕 읍내를 동서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 되게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었다. 남쪽에 입구를 내고 급하지 않은 경사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면 북쪽 구석에 배구공이 있어 물이 개울로 흘러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 밑바닥은 평평한 장방형의 막음 벽은 작은 석재로 수직으로 올렸고, 홍예를 지탱하여 주는 양쪽 벽도 그러한 형식으로 구축되었다.
내부는 옆 벽에서 홍예 4개를 틀었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는 장대석을 걸쳐서 천장으로 삼았으며, 이곳에 배기공을 설치하여 외부에 덮은 봉토를 관통하고 있다. 석빙고 입구 옆에 ‘석빙고비(石氷庫碑)’가 있는데 이 비문에 의하면, 현감 신후서(申侯曙) 등이 영조 18년 (1742)에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창녕 석빙고는 화강석제로 빙실(氷室)의 크기는 길이 11m, 폭 3.6m, 높이 3.7m이다. 창녕교육청 바로 앞 개천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축조물이 곧 석빙고인데, 봉토도 거의 완전하여 겉모양은 큰 고분처럼 보인다. 표면의 높이는 5.4m, 전체 길이는 13m이다. 빙실의 입구는 남쪽에 설치하였는데, 좌우에 장대석(長大石)을 3단씩 쌓아서 벽을 축조하고 그 위에 1매의 장대석을 놓아 미석(楣石 : 도리석))으로 삼았으므로 입구는 방형을 이루고 있다. 내부는 연석(鍊石 : 단단한 돌)으로 4개의 홍예(紅霓)를 틀어 올리고 홍예 사이에는 장대석을 옆으로 건너질러 쌓아 올려서 천장을 구성하였으며, 그 사이의 천장에는 외부로 통하는 공기구멍이 설치되었다. 석빙고의 내·외 각부 구조가 경주나 안동의 석빙고와 같은데 그 규모는 약간 작다.
창녕 석빙고
*창녕 만옥정공원
일명 창녕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작은 공원이다. 면적 1만㎡의 작은 공원이지만 지정문화재와 봄철의 벚꽃 장관으로 유명하다. 약 250년 전에 만옥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만옥정공원이라 하였고, 당시에는 봄마다 명창(名唱) 대회와 그네뛰기 대회가 열렸다고 전해진다. 화왕산으로 가는 등산로가 옆으로 나 있다.
공원 뒤쪽 언덕 위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가 있는데, 창녕까지 신라의 영토를 확장하였을 알리는 비석으로 561년(진흥왕 22)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창녕읍 화왕산록(火旺山麓)에 있던 것을 1914년에 발견되어 이곳으로 옮기고 원래 있었던 곳은 표지석을 세워두었다. 또한, 공원에는 조선 후기의 관아 건물인 창녕 객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퇴천리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창녕척화비(경상남도유형문화재) 등이 있다.
삼층석탑 북쪽에는 한국전쟁 당시 조국 수호의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UN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아군의 반격으로 북진의 기틀을 마련한 이 불후의 공훈을 길이 빛내는 동시에 그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1959년 3월 31일 건립했다고 하는창녕 지구 전승비(UN 전적비)가 함께 있다.
창녕 만옥정공원
*창녕 양파 시배지
양파는 백합목 수선화과 부추속에 속한 식물로, 옛날 이집트 노동자들이 피라미드를 쌓을 때 힘을 기르기 위해 먹었다는 양파는 4천 년 이상 사람의 건강을 챙기며 요리에 이용이 되는 농산물로서 서아시아나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라고 추정된다. 특히 양파는 이름이나 맛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파와 비슷하며, 오래 보관하면 위에서 파의 줄기가 자라기도 하여 서양에서 들어온 파라는 뜻으로 양파(서양의 파)라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파 시배지는 창녕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기상 푸드웰 회장과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형제의 조부인 성낙안 선생이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양파의 가치를 알아보고 가지고 들어와서 부친(성찬영)께 드렸고, 그것을 성찬영 선생이 1909년에 대지면 석 리에서 처음으로 양파 재배에 성공한 것이 우리나라 양파 농사의 시초였다. 성낙안 선생의 맏아들 성재경은 1953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양파를 재배하면서 연구한 결과, 채종에 성공하여 일반 농가에 보리 대신 환금성이 높은 양파를 재배토록 권장해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그래서 창녕이 전국 최고의 양파 주산지로 발돋움하였다. 이로 보아 성씨 고가는 지역의 부호로 가문의 번영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의보감에 자총(紫蔥: 자줏빛 자, 파 총=적양파)의 기록이 나온 것으로 봐서 16세기 후반에서 최소 17세기 초반부터 먹어온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우리나라에는 들어온 것은 20세기 초반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중국의 본초강목에서 말하던 호총(胡蔥 : 흉노족의 파)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양파 하면 창녕과 무안을 꼽을 수 있다. 창녕은 단단하면서도 매콤한 단맛이 강한 양파, 무안은 무르면서도 단맛이 강한 양파로 구분된다. 창녕 양파는 다른 지역의 양파와는 달리 껍질을 까서 그냥 먹어도 그 맛과 향이 입안에 감돈다.
한편, 다른 자료에 의하면, 한국에서 재배된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으며, 미국 및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모종을 구한말인 1906년 서울 뚝섬에 설치된 ‘원예모범장’에서 처음으로 기른 것이 시초라고 한다. 본격적인 재배는 1909년 창녕군 대지면 석 리에서 이루어졌고, 이후 일제강점기가 되면서부터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재배가 확대되었으나, 한동안은 일본에서 수입해 먹는 양이 더 많았다. 1930년대에는 제주도까지 양파를 재배하게 되었고, 해방 후 국내 최초로 개발된 양파 품종은 1958년 개발된 '대관령 1호'이다.
창녕 양파 시배지
*창녕 성씨 고가(我石軒)
우리나라 3대 명택(名宅)이라고 하면, 강릉의 선교장, 구례의 운조루, 창녕의 아석헌을 꼽는다. 창녕 대지면 석 리는 창녕 성씨 집성촌으로, ‘성씨 고가’는 지난 2004년 7월 1일 자로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제355호로 지정됐으며, 1850년대 아석헌(我石軒) 성규호 선생이 유어면 회룡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150여 년째 성씨 일가들이 세거지다. 이 자리에 성씨 고가의 기틀을 세운 성규호는 ㄷ자의 안채와 한일(一)자의 사랑채를 짓고 '나 또한 돌처럼 살리라'라는 뜻의 아호 아석(我石)을 당호로 삼고 1863년 병자년 기근 때에는 곳간을 열어 이웃에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흔히 창녕 사람들에게 옛날부터 ‘석 동 부잣집’으로 불린 성씨 고가는 외삼문 외에 내삼문이 따로 있으며, 한때 37개 동, 130칸의 대규모의 한옥이라, 집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2,000년대 들어와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대부분 복원했다.
성씨 고택은 크게 본가인 아석헌(차손 낙교의 양자인 유경 댁), 구연정(증 장손인 윤경 댁), 경근당(삼손의 낙안 댁), 석운재(창영의 동생 댁) 등 4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1855년 성규호가 이 집을 최초로 지은 후, 어두운 역사의 격랑을 넘으면서도 오늘날 이렇게 복원되어 건재할 수 있음은 이 집안 특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집안 후손들의 조상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행랑채가 여러 채 있고 내삼문을 들어서면 잘 가꿔진 소나무 사이로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구연정 영역이다. 안채의 누마루 앞엔 S자 형태의 연못을 조성되었다. 이곳 터가 지네의 입에 해당하는 자리라서 지네가 좋아하는 지렁이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누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연못은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 그래서 '반도지(半島池)'라 한다.
안채 바로 앞 큰 바위에 '석문동(石門洞)'이란 글귀가 음각되어 있는데, 석 동 또는 석 리의 지명 유래와 무관치 않다. 외부와 통하는 대문 쪽 입구와 마당에는 몇 개의 돌확(돌로 만든 절구)이 눈에 띈다. 남자용 돌확은 동글고, 여자용 돌확은 복숭아 모양으로 패여 있다. 이는 눈과 귀와 입을 씻어 마음의 청정함을 유지하라는 의미와 함께 청결한 신체 관리를 위한 실용성의 의미도 겸비하고 있다고 한다.
집 안 뒤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있는데, 대나무 숲길이 끝날 즈음에 경근당(敬勤堂)이 자리 잡고 있다. 성기상 푸드웰 회장과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형제의 생가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정면 6칸의 안채는 시멘트를 사용했고 대청마루 등에 유리 창문을 달아 근대에서 현대로의 변천상을 반영하고 있다. 경건당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석운재(石雲齋)가 자리하고 있으며 석운재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아석헌(我石軒)이 위치한다. 아석헌과 석운재 경계의 담 밑에 세월을 증언하듯 곧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이 집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성기학 회장은 2,000년대 초반 성씨 고가를 수리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고택들의 구조물을 사들여 그 부재들로 최대한 옛 모습을 복원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성씨 고가는 예로부터 지역의 부호로 가문의 번영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의 사회사업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특히 개화기 때 몽매한 지역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은 아직 근대적인 학교가 없던 시절 지역민들에게는 하나의 빛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이 가문의 가훈이나 법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성규호의 장남 성찬영 슬하에는 낙문, 낙교, 낙안, 삼 형제가 있었다. 둘째인 낙교는 후손이 없자 낙문의 둘째 아들인 유경을 양자로 맞아 대를 잇게 했다. 그의 손자 낙안과 낙성, 증손 재경도 조부의 뜻을 좇아 호를 석민, 석운, 우석이라 하여 같은 길을 걸었다. 장손 낙문은 가산을 크게 일으켜 가택을 중심으로 반경 6㎞의 넓은 전답을 경영했다. 가문의 법도도 엄격했다. 적선을 가훈으로, 근검과 청렴을 가풍으로 삼았다.
석민 성낙안과 사촌 석운 성낙성(성찬영 동생의 아들)은 사회사업에 치중했다. 1920년 고가 앞 신작로 건너편에 신식학교(지양강습소)를 지어 교육에 열중했다. 성씨 고가 맞은편의 도로 옆에는 지금도 ‘지양강습소 공적비’가 있다. 이 비석은 1920년 일제강점기 때 당시 성씨 고가의 주인인 성낙안 선생이 사재를 털어 근대교육기관인 ‘지양강습소’를 설립해 후학을 가르친 것을 기념해서 세운 비석이다. 당시 지양강습소는 부녀자에게도 개방하여 세 명의 교사가 아홉 과목을 가르치며, 1924년까지 운영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고 지금은 ‘대지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지역민을 위한 이러한 선행은 증손 우석 성재경에게 이어져 1942년 면장 재임 시 춘궁기에 나라에서 주는 것이니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받으라며 곳간을 열어 어려운 면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53년 우리나라에 양파를 본격적으로 보급하면서 양파 씨받기와 재배기술을 확보하여 새마을 운동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경화회라는 농민회를 조직하여 양파를 특작물로 하여 농가소득을 올리는 데 이바지했고, 1981년 별세하기 전에 그가 운영하던 협성농산주식을 경화회 조합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우석 성재경의 맏아들 성기상은 아버지의 협성농산을 물러받아 지금의 푸드웰 회장이 되었고, 둘째인 성기학 회장은 생전 아버지의 뜻과 활동을 마음에 새겨 경화회 회관을 새로 지어 군민에게 기부하였으며, 조상들의 혼이 서려 있는 창녕 성씨 고택을 학회나 세미나 장소로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영원문화센터’를 설립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강좌를 열어 지역민들에게 무료로 배움터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민족주의자였던 우석 성재경은 ’적선지가(積善之家)’로 성씨 집안의 기반을 다진 분이다. 그러나 집안 일부 가족이 좌익 활동을 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 빨갱이 집안’으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바로 성재경의 4촌 성유경(낙교의 양자)이 좌익성향의 인테리로 남로당이었다. 6.25 와중에 아들 일기와 두 딸 혜랑과 혜림 등 가족을 데리고 월북했다. ‘김정일의 여자’로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성혜림이 바로 이 사람이다. 성혜림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방학 때면 할아버지 집인 성씨 고가를 찾아와 마을 또래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성혜림이 평양예 술학교 졸업 후, 월북 작가 리기영의 장남 리평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지만, 뛰어난 미모와 빼어난 연기로 인민 여배우로서 활동하다가 김정일의 눈에 든 것이 비극의 실마리가 되었다.
1967년 김정일은 기혼자인 성혜림과 동거하면서도 김일성 주석의 허락을 받지 못한 채 김정남을 낳았고, 바깥 활동의 제약과 폐쇄된 생활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결국 언니 혜랑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나야 했다. 혜림의 곁을 지키던 언니 혜랑은 영국과 프랑스로 이주했고, 조카 이한영(혜랑의 아들)은 한국으로 탈북하였으나, 1997년 2월에 경기 성남 아파트에서 간첩에게 암살 당했으며. 혜림은 신경쇠약과 심장병으로 투병 끝에 2,002년 5월에 숨지고, 아들 김정남도 2017년 2월에 말레이시아 국제공항에서 독살되었다.
창녕 성씨 고택
*우포늪
경남 창녕군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 즉, 3개 면에 걸쳐있는 총면적 둘레는 7.5㎞에 전체면적은 2,314,060m²(약 70만 평)로 우리나라 최대의 내륙습지인 우포늪 권역은 2011년 천연기념물 제524호 '창녕 우포늪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창녕 늪지로는 이곳 우포늪(70만 평)을 비롯하여 목포늪(16만 평,), 사지늪(10만 평), 쪽지벌(4만 평)으로 이루어졌으며, 우포늪이 형성되는 것은 오래 잡아도 신생대 마지막 빙하기 시절 때 홍수가 나면 낙동강의 물이 우포로 역류하고 평상시에도 배수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이 일대는 물이 고여있는 늪이 됐다.
480여 종의 식물, 62종의 조류, 28종의 어류, 55종의 곤충류가 서식하고 있다. 때문에 ’람사르 협약(습지와 습지의 자원을 보전하기 위한 국제 환경 협약)‘에 의해 보호받는 대표적인 습지이며, 우리나라에서 얼마 안 되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후보다. 각종 야생동물과 식물의 서식처를 제공하는 생태학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곳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늪지에는 수많은 물풀이 머리를 내밀고 있어서 생태박물관을 보는 것 같으며 호소성 배후습지인 우포늪은 우기나 홍수 때의 과다한 수분을 습지토양 속에 저장하였다가 건기에 지속해서 주변에 공급하여 지형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수문학적 가치를 지니는 자연환경 보전지역이며, 생태자원, 관광자원으로서도 탁월한 경제성을 지닌 지역으로 평가된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천연기념물로 이미 지정되었고, 광복 후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자, '창녕 백조도래지'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1년 후인 1973년에 철새 감소를 이유로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면서 우포늪 주변의 사몰포, 용호 등과 같은 습지들이 농지로 개간되기 시작했고,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 정부 간의 갈등도 본격화되었다.
1997년 환경부 고시로 생태 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고, 1998년에는 람사르 협약에 등록하여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2011년에는 '창녕 우포늪 천연보호구역'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524호로 재지정되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 후보에 포함되어 있다.
창녕 우포늪
*망우당 곽재우 장군 묘소
장군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남 의령 출신이다. 예안현감을 지낸 곽위(郭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곽지번(郭之藩)이고,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이요,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남명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동강 김구옹(金宇顒)이 손위 동서이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에 분명히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하루 만에 과거 급제가 무효가 된 것이다. 정시(庭試)의 시험 문제는 '당태종교사전정론(唐太宗敎射殿庭論 : 당나라 태종이 궐에서 활쏘기를 가르친 일에 대해 논하라.)'이 문제였다. 곽재우는 시제를 보자마자 일필휘지로 답을 써 내려갔다. 문무를 겸비하며 평소 자신의 가치관이 뚜렷했기에 누구보다도 일찍 답안을 제출할 수 있었다. 해가 질 무렵에 2등 합격자로 공시되었으나, 다음날 일이 틀어지고만 것이다. 선조는 '임금이 문무를 겸해야 한다.'라고 적어낸 곽재우의 답안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당 태종의 치세인 정관의 치는 당 태종이 문무를 겸비해 된 것이라 하면서, 조선의 임금도 마땅히 문무를 겸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무예를 익히지 못한 과인을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선조는 쉽게 노기를 삭히지 못했다. 곽재우의 답안은 '자격지심과 문약한 선조임금의 심기'를 거슬렀다. '시휘(時諱 : 그 시대에 맞지 아니하는 말이나 행동)'에 휘말리며 합격은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창의(倡義 :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킴)해 왜적과 맞선 최소의 의병장이다. 그 공으로 형조정랑, 절충장군(折衝將軍), 성주 목사,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그 뒤, 1597년 명나라와 일본 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종2품)로 출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 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 문제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 갔으나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에서 선산 부사,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어도 나가지 않았고, 함경도 관찰사,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바꾸어 발령내었으나, 역시 병을 핑계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유배 가는 영창대군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가 광해군 9년(1617) 4월 10일 창녕군 길곡면 창암리에서 66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치었다. 스스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밝은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위장 전술과 매복 작전으로 급습을 가하는 등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평생에 신의가 아니면 실천하지 않았고, 의리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보다 현실 정치로 실망과 좌절의 전철이었지만, 임진 4 충신(고경명, 김천일, 조헌, 곽재우)과 임란 3 의병장(정인홍, 김 면, 곽재우)으로 그 명성은 우뚝 높이 솟았다.
장군은 뛰어난 필체에 시문에도 능했다. 지나치게 평범한 묘지는 달성 구지면 구지산에 있다. “나의 장례를 예법에 따라 치르지 말고 흙만 겨우 덮일 정도로만 묻으며 묘비도 세우지 말라.”는 그의 유지 때문이다. 죽은 후, 사우(祠宇)에 ‘예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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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답사지의 자세한 자료 작성에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해박한 지식과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미비한 탑재 자료를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혹한에 건강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