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푸집/하 린
밀착된 온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바깥
마음이 틀어지지 않게 자세를 유지합니다
무언가 새어나가는 느낌을 감내합니다
오직 두려운 건 기포가 생기는 일
틀을 구성할 수 없다는 염려마저 지웁니다
아침의 참견이나
저녁의 충고에
신경 쓰지 않고
모월 모일까지 껴안습니다
이젠 끝까지 눈을 뜨지 않는 태도만 남깁니다
당신들이 등 뒤 무의식을 추론하고
내가 나의 안부를 묻습니다
태양도 달도 없는 암흑 속에서
발견이 태어나도록 내버려 둡니다
쉬운 인간
하류 인간
부끄러운 인간
뻔한 주석이 탄생할 것입니다
나의 슬픔은 마침내 화석이 될 수 있을까요
아, 그런데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숨이 막힙니다
3일 만에 1.5평 고시텔을 빠져나왔는데도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알몸을 들킨 나의 슬픔이
배고픈 나의 슬픔이
치욕을 허겁지겁 삼킵니다
악플/하 린
입을 열두 개나 가진 악담은
오늘 아침에도 따분했다
자음과 모음을 우적우적 씹어먹고
서로의 생각을 파먹으며 과장되게 몸짓만을 부풀렸다
은밀한 건 좋지만 내밀한 건 싫다고 토로했다
매번 불구의 날들을 확인하고도 명랑하다니
누군가 자신을 추궁하는 건 용서했지만
모른 척하는 건 못 견뎌했다
악담이 번식시킨 레퀴엠의 시간
가시를 잔뜩 품은 다짐이 목구멍을 관통할 때,
타인과 타인 사이
도피와 회피의 차이가 분명해졌다
어둠의 결심보다 빛의 변심이 흔해졌고
말들은 스스로 질식하는 꿈을 꾸곤 했다
어느 순간 음지에서 피는 꽃이 진실을 토했다
그런데도 악담은 고압선 위 까마귀처럼 무탈했다
독주를 마신 이야기 속 주인공이
별들과 서러움을 교환하며 비굴을 감행했다
악담은 껄껄껄 웃었다
이제 막 떨어지고 있는 눈물의 온도를 재빨리 회수했다
붉은 욕조 / 하 린
우울한 기호들로 거품이 부풀어 오른다
물의 촉수가 엄마의 흐릿한 정신을 찌른다
금이 간 손목 사이에서 핀 붉은 장미
뚝뚝 젖가슴 사이로 흘러
물의 신전을 맴돈다
욕조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본다
물고기 입을 엄마가 꼬맨다
여자는 지느러미가 날씬하기만 하면 돼
그런데 엄마는 왜 지느러미가 뚱뚱해
욕조 안에 있던 타인들의 햇살이 출렁인다
엄마의 몸은 우울 덩어리야
바늘로 콕 찌르면 고여 있던 고름이
갈비뼈 사이로 쏟아질 것 같아
애야 아빠는 끝내 화장을 지우지 않는단다
구름처럼 영혼이 둥둥 떠다닌다고 믿는 건
무거운 물고기들의 변명일 뿐이다
엄마 내가 죽을 때까지 엄마의 물고기가 될게요
얘야 어서 마개를 뽑아라
아빠는 인간동물이고 난 인간식물이고 넌 동물인간이란다
아웃사이더 / 하 린
네가 만든 구름의 시청률은 바닥이야
너는 먼지 쌓인 금지곡이고
만질수록 단단해지는 고독의 뼈는 없어
그냥 너는 독방이야
살갗이 드러난 전선처럼
한 순간을 노리는 무모한 사춘기는 지났어
노을의 낭만적인 알리바이 따윈 기대하지 마
저녁의 구질구질한 변명 속에
어둠이 끈적끈적한 혀를 내밀 뿐이야
뾰족한 통신탑 꼭대기에 달의 엉덩이가 걸려
달빛이 치즈처럼 흘러내리는
배고픈 밤은 항상 오고 마는 거야
너는 거세된 고양이가 되어
생선 내장처럼 던져진 도시로 출근만 하면 돼
옥탑방을 나와 누추한 골목길을 구기며
촌스럽게 작아진 학교를 지나
24시간 문을 여는 패스트푸드점으로 알바를 먹으러 가면 돼
너는 절대 태양의 젖은 손바닥 따윈 보려고 하지 마
자동차가 시속 100킬로로 늙어가는 것을 바라보다
불면증 걸린 인간들이 유령이 되어
진열된 상품을 간택하는 마임만 즐기면 돼
너는 바코드가 찍힌 방부제야
움직일 수 없는 성기를 가진 마네킹처럼 유리문 안을 견디면 돼
밤마다 바나나를 깐다 / 하 린
아침까지 두면 맛이 다 간다 후딱 처묵어라
리어카에서 몸을 팔다 온 바나나
물오르다 못해 짓물렀다
깐다
밥은 바나나 밤은 바나나 밥 대신 먹는 바나나는 외로워
한 입씩 잘린다
밤은 바나나 밥은 바나나 밥 대신 먹은 바나나는 예뻐
익을 대로 익은 미소가 고인다
골목 입구 허름한 불빛 아래서
어머니는 밤마다 호객 행위를 한다
늦게 귀가하는 아비나 어미에게
유통기간이 짧은 노래를 판다
바나나는 밤마다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아이들에게로 간다
허기지게 간다
산동네에선 꿈이 자꾸 미끄러진다
[ 하린(河潾) 시린 약력 ]
*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시 당선. .
* 계간《열린시학》편집장.
*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 수상 첫 시집으로 청마문학상 신인상(2011)을, 두 번째 시집으로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2015)을, 세 번째 시집으로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6년엔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 중앙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계간 ≪열린시학≫ 부주간. ‘시클창작특강반’을 10년째 운영
첫댓글 붉은 욕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