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만난 건 작년 4월 갓 호스피스 교육을 마치고 대학병원에 입실해서였다. 어린 세 아이의 엄마이자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이제 겨우 33살의 나이에 그녀는 치유가 거의 불가능한 흉선암이란 힘든 병마와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거듭되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로 머리카락은 한 톨 남김없이 빠져있었지만 남달리 씩씩하고 밝은 그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스님의 독경소리와 병실 침대옆 불교 관련 서적들을 보니 그녀는 불교에 관심을 많이 가진 것 같았다.
종교를 가져서일까? 일반적으로 거듭되는 방사선치료로 속이 메시꺼워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도 없지만 그녀는 남달리 의연한 자세로 한마디 불평도 없이 묵묵히 병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도 함께 부르고 그녀의 몸을 깨끗하게 씻겨주며 조금씩 그녀는 마음을 내게 주었고 나도 그런 그녀에게 남다른 사랑과 정을 느꼈다.
집에서의 통원 치료를 위해 그녀가 병원을 잠시 떠나 집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로 전화를 주고 받으면서 나는 점점 더 그녀가 나의 친동생처럼 예쁘고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그녀의 건강상태가 좋아지고 나의 차로 그녀와 을숙도랑 동해안으로 가벼운 드라이브도 다녔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드라이버를 해 본적이 없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난 즐거움과 더불어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호스피스와 환자의 관계를 떠나 그녀는 점점 더 나에게 마음을 열고 나는 그녀로부터 33살의 어린 여인이 겪기 힘든 삶의 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산꼭대기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어린 3아이와 살고 있는 그녀의 좁디 좁은 집을 방문하면서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힘든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그녀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골돌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일찍 아버지를 읽고 어머니 밑에서 가난의 밑바닥을 경험하며 살아온 그녀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어렵지만 서로의 사랑속에 이제야 그나마 제대로 살아가려는 그녀에게 암이란 병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병마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차마 놓기 힘든 세상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있지만 이제 갓3살이 된 어린 딸과의 이별과 그 딸에게 남은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힘들어한다. 누가 애를 돌보아 줄 것이며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온 남편과의 관계도 정리를 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녀에게 느꼈던 남다른 평온함과 여유도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겪으면서 저절로 체득된 것이리라.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어 죽어가지만 죽음앞에는 집착과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이 몇번의 생애를 자나면서도 겪지 못할 시련과 어려움을 어린 나이에 겪으며 살아왔다. 그러한 삶이 비록 그녀를 그 순간 순간 힘들게 하였지만 지금 죽음을 대하는 그녀의 의연한 태도에서 나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통해서 참된 지혜를 발견한 현인의 모습을 본다.
요즘 그녀의 병이 점점 더 악화되어가고 있다. 암이 여러곳으로 전이되어 다리는 마비로 인해 움직일 수도 없고 감각이 둔해져 대,소변도 본인의 의지대로 제대로 보지를 못한다. 목도 많이 부어 호흡도 곤란하고 면역이 떨어져 폐렴이라는 합병증까지 왔다.
어린 세 아이를 돌보느라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그녀의 남편이 죽어가는 아내를 간호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 힘든 투병의 마지막 순간에 이른 아내를 위해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내미는 따뜻한 손길... 작은 것 하나 하나에도 아내를 배려 하려는 남편의 말속에서 진정한 사랑이 느껴진다...
힘들어하고 지친 환자들이나 가족들을 만나면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한 감사.
나에게 주어진 건강함,
나의 작은 힘이나마 나눌 수록 행복함을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한 감사등등
그동안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한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걸 깨닫는다.
책이나 말로선 느낄 수 없는 만남과 체험으로서만 느낄 수 있는 이 느낌들이 나의 삶을 얼마나 의미 있고 보람되게 만드는지, 이제 시간이 흐르면 그녀는 내 곁을 떠나지만 그녀가 내게 남겨준 보이지 않는 이 느낌과 함께 그녀는 영원히 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현재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있는 집사람의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첫댓글 사랑을 나누면서 사랑 안에서 마지막을 정리하는 모습이 아름답군요. 뜻하지 않게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기보단 작은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서며 죽음이라는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복된 일이라 여겨집니다. 환자나 가족들 모두 넘치는 은총 속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내 자신을 겸허하게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