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2 - 세잔 ‘카드놀이…’ 미술품 판매 최고가 2800억원에 팔려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1839~1906)의 작품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사진)’이 역대 미술품 판매 최고가인 2억5000만달러(약 2800억원)에 팔렸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062113055&code=970201
- 'Darkness and Cracks' - 'Abstract Painting'
2012 - 스페인의 화가 안토니 타피에스(Tapies, Antoni) 사망 타피에스 [Tàpies, Antoni, 1923.12.13~2012.2.6] 스페인 화가 타피에스 사망 유럽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추상 표현주의의 거장 안토니 타피에스가 6일(현지시간) 사망했다. 향년 88세. ‘20세기의 마지막 거장’으로 칭송받아온 타피에스는 한동안 건강이 악화돼 고생하다 이날 저녁 고향 바르셀로나에서 숨을 거뒀다고 현지언론이 전했다. 후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스페인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는 타피에스는 1923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1946년부터 작가로 전향했다. 1948년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작가그룹 ‘다우 나루 셀’을 조직한 이후 과묵하고 비극적인 작품세계로 명성을 쌓았다. 찢어진 캔버스, 편지, 실, 낡은 스타킹 등 일상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재료와 글씨와 유사한 느낌을 주는 드로잉을 혼합한 추상작품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2007 - 코카콜라 브랜드 가치 430억달러 세계 1위, 마이크로소프트 2위... ‘세계 최고의 가치를 가진 브랜드’에 코카콜라가 선정됐다고 인도 PTI 통신이 6일 보도했다. 영국 브랜드 가치 평가기관 ‘브랜드 파이낸스’(BF)가 발표한 ‘2006 세계 최고 가치 브랜드’ 보고서에 따르면 코카콜라 브랜드 가치가 430억 달러로 세계 1위에 올랐고, 마이크로소프트(370억 달러)와 시티뱅크(350억 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이 밖에 월마트와 IBM, HSBC, GE, 뱅크 오브 아메리카, 휴렛 패커드, 말보로 등이 세계 10위에 이름을 올렸다. /조선
2003년 2월 6일, 난치병 치료 목적의 체세포 복제를 허용한다고 명시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이 정부안으로 확정됐다. 이는 체세포 복제 허용을 요구해온 의ㆍ과학계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인 것으로, 이로써 2년여간 끌어온 보건복지부와 과학기술부간의 이견이 해소됐다. 새 법안이 과거 복지부 법안과 다른 점은 "난치병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누구도 체세포 복제를 할 수 없다"는 문구를 넣었다는 것이다. 기존 법안은 "체세포 복제를 금지하며 다만 국가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허용할 경우 예외로 한다" 고 규정했었다. 이로 인해 의ㆍ과학계에서는 국가생명윤리자문위원회에 종교단체와 시민단체 대표들도 포함시키도록 되어 있어 이들에게 체세포 복제 허용 여부 판단을 맡긴다는 것은 아예 금지하는 것과 같다고 반발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통 후 복지부와 과기부가 서로 호응하여 새로운 법안이 나오게 됐다. /조선
2002 - 영국의 생화학자, 분자생물학자 막스 페루츠(Perutz, Max) 사망 페루츠 [Perutz, Max Ferdinand, 1914.5.19 ~2002.2.6] 2002 - 헤모글로빈 구조 밝힌 막스 페루츠 사망 20세기 분자생물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막스 페루츠(Max Pertz)가 지난 6일 향년 88세로 생을 마감했다. http://news.dongascience.com/PHP/NewsView.php?kisaid= 20020207200000000007&classcode=0102
1996 - 민자당, 신한국당으로 출범 그동안 `가칭 신한국당`으로만 불려왔던 신한국당이 1996년 2월 6일 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차 전당대회에서 당헌개정을 통해 신한국당으로 공식 출범했다. 대회에서 당명 개명을 추인받고 `역사 바로세우기`와 `안정속의 개혁`을 당의 목적에 추가함으로써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신한국당의 공식출범에는 구 민자당 당명에 함축돼 있던 3당 합당 구도를 청산하고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출발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날의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는 대의원과 참관인 등 1만2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2시간30분동안 진행됐으며 시종 박수와 환호로 일관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조선
- 119신고제도 시행 70주년 기념 (2005.9.30. 발행)
1996 - 내무부, 모든 재난신고 '119'로 일원화 1996년 2월 6일부터 모든 재난사고 신고전화는 `119`만 돌리면 자동 연결되게 됐다. 내무부는 종전까지 가스 사고의 경우 `0019` 구급신고는 `129` 주민불편신고는 `120`으로 신고해야 하는 등 각종 재난에 따른 신고 전화번호가 저마다 달라 비상시 신속한 신고 접수 및 처리에 어려움이 많았던 점을 개선하기 위해 화재 및 구조-구급 신고, 가스 사고 등 각종 재난의 신고 접수를 다이얼 `119`로 일원화했다. 또, 내무부는 이와함께 휴대용 전화기를 통한 신고도 국번없이 `119`만 누르면 가장 가까운 소방관서에서 접수되게 했다. 휴대용 전화기를 통한 신고가 늘어날 것에 대비하여 휴대용 전화 신고 전용회선을 1백47회선에서 3백17회선으로 대폭 증설했다. /조선
- Mir Space Station - Space Shuttle Discovery
1995 - 미국의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와 러시아의 미르호 우주공간에서 도킹 성공 미르호[Mir] 1986년 소련이 발사한 인류 최초의 우주정거장. 러시아어로 '평화'를 뜻하는 미르(Mir)는 과거 냉전시대의 미국과 러시아 간의 우주개발 경쟁의 산물로 태어났지만 오히려 상호협력을 통해 더 큰 과학적 진보가 가능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러시아는 1961년 최초의 유인우주선 '스푸트니크'를 발사해 우주시대의 기원을 열었지만 8년 뒤 미국에 달을 선점당했다. 우주정거장 건설을 통해 이 패배를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운 러시아는 1971년부터 7차례에 걸쳐 소규모 우주정거장 살류트를 발사하였고, 1986년 2월에는 마침내 미르의 20t짜리 중앙 모듈을 우주로 발사했다. 미르에는 1996년 4월까지 생물학실험실·생명지원장치 등이 설치된 모듈 7개가 추가되었다. 이후 미르는 러시아 우주개척의 상징물로 자리잡았다.
1993 - 미국의 프로 테니스 선수 아서 애쉬(Ashe, Arthur) 사망 애쉬 [Ashe, Jr., Arthur (Robert), 1943.7.10~1993.2.6] 아서 로버트 애시 쥬니어 (Arthur Robert Ashe, Jr., 1943년 7월 10일 ~ 1993년 2월 6일)는 미국의 프로 테니스 선수이다. 그는 총 3개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따내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둬 미국 테니스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US 오픈이 열리는 빌리 진 킹 네셔널 테니스 센터의 센터 코트는 그의 이름을 따 아서 애시 스타디움으로 불린다. 그는 선수 생활 외에 왕성한 사회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
[남산편지 869] 전설적 테니스 챔피언 아서 애쉬 아서 애쉬(Arthur Ashe:1943 – 1993)는 메이저 테니스 대회에서 최초로 우승한 흑인 남성입니다. 1960년대 당시 미국의 버지니아 주에서는 흑인은 테니스를 칠 수 없다고 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경비원의 아들로 태어난 흑인이 챔피언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는 1968년 US오픈, 1970년 호주 오픈에서 우승했고, 1968년과 1975년엔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하여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979년 심장질환으로 테니스 선수에서 은퇴한 후 테니스 코치, 방송해설자, 그리고 흑인들과 빈곤층 어린이를 위한 인권운동가, 자선사업가로 더 활발하게 일했습니다. 1990년 그는 1983년 심장수술 때 받은 수혈로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그로 인해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안 뒤에 이전보다 더 정력적으로 사회활동에 나섰습니다. 집에 앉아 죽음을 생각하기보단 불우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는 게 낫다면서. 애쉬가 불치의 병 에이즈와 싸울 때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애쉬, 왜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렇게 무서운 질병을 주었을까요.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들었을 때 '왜 나지?'라고 절대 묻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죽음에 대해서도 '왜 나지?' 라고 묻지 않겠습니다. 내 고통에 대해서 '왜 나야?' 라고 묻는다면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해서도 '왜 나야' 라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1993년 그가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뉴스 앵커조차 그의 죽음을 전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진정한 미국인의 영웅을 잃었다'고 그를 애도했고 그의 고향인 버지니아 주지사도 '정다운 친구이자 우리가 본받을 거인'을 잃어 참으로 슬프다 말했습니다. 그에 대한 미국사회의 존경은 그의 경기력 때문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인물로 평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싸운 행동가였습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에 “에이즈보다 흑인 됨이 더 고통스럽다. 에이즈는 나의 몸을 죽이지만 인종차별은 정신(soul)을 죽인다"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한 유명한 말입니다. 위대함을 성취하기 위해 당신이 있는 그곳에서 시작하십시오. 당신이 가진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당신이 할 수 있는 그것을 하십시오. (To Achieve Greatness, Start where you are. Use what you have. Do what you can) 애쉬가 테니스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그것으로 만족해했다면 그는 존경을 한 몸에 지닌 정다운 친구이자 본받을 거인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남을 도우려는 자세를 가질 때 그가 참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은 것을 깨닫고 그 일들을 위해 헌신하였을 때 그는 진정한 영웅이 되었다 생각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3-4] 정충영 교수님의 남산편지 08-10-29 08:50 http://www.nsletter.net/bbs/board.php?bo_table=nsletter&wr_id=729&page=2
정권진 [1927~1986.2.6] 정권진은 판소리의 고장 전남 보성에서 판소리 명창인 정응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서 배우고, 20세 이후에는 당시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던 박기채에게 사사 받았다. 30세 무렵부터 판소리 공연을 시작하여 명창의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특히 심청가 공연으로 이름이 높아서, 정권진이 "심청이 임당수에 빠질 제"와 같은 대목을 노래하면, 듣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1970년에는 판소리 심청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문화재 관리국에서 발행된 "한국의 음악" 음반을 통해 심청가를, 그리고 뿌리깊은 나무에서 낸 음반을 통해 적벽가를 감상할 수 있다. (문학사랑 / my.netian.com)
1979 - 파키스탄 최고재판소, 부토 전 수상의 사형판결 확정 역사속 오늘[1979년 2월 6일] 부토 전 파키스탄 수상 사형확정 1979년 오늘! /YTN 2011-02-06 일 (파키스탄의 정치체제는 의회제와 대통령제가 혼합된 연방 공화국체제로 국가의 수반은 대통령이며 총리가 행정부의 수반이 됩니다. 부토는 처음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헌법 개정 이후 총리로 재임중 육군참모총장 모하마드 지아 울 하크의 쿠데타로 실각하였습니다.)
- Alan B. Shepard Jr., 1923~1998 아폴로 14호 선장, 1971년 달에서 인류 최초의 샷~ 1971년 우주선 아폴로 14호의 선장 앨런 셰퍼드는 달 표면에서 6번 아이언으로 두 차례 샷을 했다. 첫 샷은 200야드(약 183m) 넘게 날아갔고 두 번째 샷은 생크가 났다. 한편 당시 영국골프협회(R&A)는 셰퍼드가 지구에 무사 귀환한 직후 보낸 축하전보에서 애교 섞인 문구를 넣어 눈길. “플레이어는 벙커에서 나오기 전에 자신이 만든 움푹 팬 곳이나 발자국을 평평하게 매만져 놓아야 한다(골프룰 에티켓 1장)”며 셰퍼드의 역사적인 달 표면 골프샷의 옥에 티를 지적.
[어제의 오늘]1971년 인류 최초의 월상 골프 ㆍ비거리 짧았지만 ‘굿샷’ 2006년 11월23일. 러시아 우주비행사 미하일 튜린은 북서태평양 220마일 상공 국제우주정거장에서 6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날렸다. 그는 우주복 냉각장치 때문에 예정된 티오프 시간에 무려 77분이나 늦었다. 또 우주선 밖 사다리에 발을 걸친 채 한 손으로 샷을 날렸으니 ‘생크’가 날 수밖에…. 여하튼 튜린은 역사상 최장타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무중력 상태를 훨훨 난 공은 대기권에 진입해 타 버릴 때까지 지구를 48바퀴(약 200만㎞)를 돈다고 전망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러시아 측은 2년간 16억㎞를 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튜린이 첫번째 우주골퍼는 아니다. 이기환 선임기자 /경향신문 2009-02-05 17:48: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2051748075&code=100100&s_code=ap005
1967년 2월 6일 미국 공군기가 남북베트남 경계지점 비무장지대 삼림지역에 대량의 고엽제(枯葉劑)를 살포했다. ‘오렌지작전’ 또는 ‘고엽작전’이라 불리우는 이 작전은 비행기와 헬리콥터에서 대량의 화학약품을 투하해 남베트남 정글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이들 삼림지대를 거점으로 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부대 발견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Philippines 5 Piso (1986, Banknote)
1964 - 필리핀의 독립운동 지도자 아기날도(Aguinaldo, Emilio) 사망 아기날도 [Aguinaldo, Emilio, 1869.3.23~1964.2.6] 필리핀의 독립운동 지도자. 처음엔 스페인, 뒤에는 미국에 대항해 싸웠다. 중국인과 타갈로그인 사이에서 태어나 마닐라의 성(聖)토마스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896년 8월 카비테 시장이었고 당시 스페인에 대항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혁명조직 카티푸난의 지역 책임자이기도 했다. 1897년 12월 그는 스페인 총독과 비아크나바토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의해 스페인이 자유주의적 개혁을 하는 대신 아기날도는 스페인으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필리핀을 영구히 떠나기로 했다. 그는 홍콩과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 미국 영사관과 미군 사령관 조지 듀이가 파견한 대표들과 만나 필리핀으로 돌아가 스페인과 싸우는 미군을 돕기로 했다. 1898년 5월 19일 그는 필리핀으로 귀국하여 스페인과의 투쟁 재개를 선언했다. 1898년 6월 12일 독립을 선언한 필리핀인들은 과도정부를 수립했고 아기날도가 그 수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혁명의회가 소집되어 필리핀 독립을 인준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1898년 12월 10일 파리조약에 의거해 필리핀을 괌·푸에르토리코와 더불어 미국에 양도해버렸다. 필리핀과 미국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1899년 1월 23일 말로로스 헌법이 만들어졌다. 필리핀 의회와 아기날도가 승인한 이 헌법에 의해 필리핀 공화국이 선포되고 과도정부의 수반이었던 아기날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2월 4일 밤 마닐라 외곽에서는 미국인과 필리핀인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필리핀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히 싸웠지만 이튿날 아침 필리핀의 완전한 패배로 전투는 종결되었다. 전투가 계속되던 중에 아기날도는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미국은 즉시 필리핀에 증원군을 파견했다. 필리핀 정부는 북쪽으로 피해 1899년 11월에는 파괴적인 양상의 게릴라전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3년간의 전투로 값비싼 희생을 치른 뒤 필리핀인의 봉기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1901년 3월 23일 프레더릭 펀스턴 장군의 과감한 작전으로 루손 북부 팔라난의 비밀사령부에서 아기날도는 체포되었다. 그는 미국에 대해 충성을 맹세했으며 미국으로부터 연금을 받기로 하고 은퇴했다. 1935년 독립의 준비단계로 필리핀 연방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결과는 완전한 패배였다. 그후 1941년 일본이 필리핀을 침략하기까지 그는 공직에 나서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그를 반미(反美)의 도구로 이용했다. 일본인들은 아기날도로 하여금 연설을 하고 여러 조약에 서명하게 했으며 꽃 같은 필리핀 젊은이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코레지도르에 상륙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라디오 방송을 시키기도 했다. 미군들이 돌아오자 일본에 협조했던 사람들과 함께 그도 체포되어 빌리비드 형무소에 몇 개월 간 수용되었다가 대통령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그의 명예를 지켜준다는 표시로 1950년 엘피디오 기리노 대통령은 아기날도를 국가 원로회 의원으로 임명했다. 말년에 그가 주로 관심을 쏟았던 문제는 재향군인, 필리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 미국과의 관계개선 등이었다. /브리태니커
역사속 오늘[1962년 2월 6일] 남대문 중수 공사 조선 태조 때 세워진 우리나라 국보 제1호 남대문! /YTN 2011-02-06 일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2050019339358&s_mcd=0422&s_hcd=
1952 -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즉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1952년 2월 6일 즉위했다. 1926년 윈저왕가 조지6세의 장녀로 런던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2세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다. 1947년 에든버러공 필립과 결혼해 이듬해 큰아들 찰스를 낳았다. 부왕 조지6세가 급서한 이날 여왕은 부왕이 지병으로 취소한 호주와 뉴질랜드 등을 남편과 함께 방문중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첫 방문국인 케냐에서 아버지의 부음과 그 자신의 왕위계승 소식을 들어야했다. 대관식은 이듬해 6월 2일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거행됐다. 이로써 엘리자베스 2세는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로 이뤄진 연합왕국(영국)과 여러 자치령들의 왕일 뿐만 아니라, 옛 대영제국에 속했던 독립국들의 결합체인 코먼웰스(영연방)의 수장으로 등극했다. /조선
영국왕 조지6세가 1952년 2월 6일 사망했다. 56세였다. 그는 조지5세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형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 부인과의 극적인 사랑으로 제위를 포기함에 따라 1936년 즉위했다. 조지6세가 사망하자 딸인 엘리자베스2세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1945 - 자메이카의 가수, 작곡가 밥 말리(Marley, Bob) 출생 말리 [Marley, Robert Nesta "Bob", 1945.2.6~1981.5.11] 밥 말리(Robert Nesta "Bob" Marley, OM, 1945년 2월 6일~1981년 5월 11일)는 자메이카의 싱어송라이터이다. 레게 음악의 가장 대표적인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생애 본명은 로버트 네스타 말리이고, 1945년 2월 6일에 자메이카의 세인트 앤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첫 녹음을 시작하였고, 1963년에 버니 리빙스턴과 피터 토시를 포함한 "웨일러스"라는 그룹을 결성하였다. 그는 이 그룹의 리드 기타리스트였고, 결국 리트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1968년에 그는 라스타파리안으로 개종하였다. 그의 음악은 그의 신앙이 강하게 나타나있다. 밥 말리의 명성은 1972년에 영국의 레코드사들과 계약을 맺은 후에 전세계로 번져나갔다. 말리는 세계의 정치적 대항의 메시지에 레게 음악을 퍼뜨렸다. 밥 말리의 대표곡으로는 에릭 클랩튼이 불러 널리 알려진〈I Shot the Sheriff〉, 그를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만들어준〈No Woman, No Cry〉등이 있다. 정치적 대항에 관한 곡으로는 〈Exodus〉, 〈Zimbabwe〉, 〈Rebel Music〉등이다. 그의 기념비적 앨범인《Legend》(1984)는 전 세계적으로 1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가장 많이 팔린 레게 음악 음반이기도 하다. 밥 말리는 1981년 4월 자메이카 최고의 훈장인 자메이카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그해 5월 11일에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199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위키백과
트뤼포 [Truffaut, Francois, 1932.2.6~1984.10.21] 트뤼포는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이다. 새로운 감수성과 전통적 형식의 변화를 통해 '작가주의 영화'를 강력히 주장하는 도발적인 글을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ema>에 발표함으로써 작가주의적 비평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비평적 입장을 토대로 1950년대말 누벨 바그를 이끌었다. 영화의 표현양식은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감독의 감수성을 자유롭게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누벨 바그의 미학이었다. 누벨 바그의 신호탄이 된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1959)는 트뤼포의 소년시절의 체험을 연상시키는 반자전적 장편영화로, 트뤼포는 이 영화로 1959년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영화를 사랑하는 첫번째 단계는 영화를 반복해 보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는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것이고, 세번째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
- 프랑수아 트뤼포
시엔푸에고스 [Cienfuegos (Gorriarán), Camilo, 1932.2.6~1959.10.28] Camilo Cienfuegos Gorriarán (February 6, 1932 - October 28, 1959) was a Cuban revolutionary born in Calabazar de Sagua. He was active in underground activities against the Cuban President Fulgencio Batista an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Cuban Revolution. Along with Fidel Castro, Che Guevara and Raúl Castro, he was one of the main leaders of the revolution. http://www.kerala.com/wiki-Camilo_Cienfuegos
피델 카스트로 혁명군의 장군이었던 시엔푸에고스는 혁명군의 승리 이후 1년이 채 안된 1959년 10월 28일 그가 탔던 비행기와 함께 바다 위에서 사라졌다. 비행기와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쿠바 군인들은 매년 10월 28일 그를 기리며 바다에 꽃을 던진다. 로이터/동아닷컴 2008-10-30 http://photo.donga.com/usr/photopro/phnview.php?cgubun= 200306130004&cpage=154&photo_idxno=114051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아십니까? 미국을 등에 업은 바티스타 군사독재 정권을 몰아낸 쿠바 혁명의 네 영웅을 꼽는다면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 그리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피스보트가 쿠바에 도착한 지난달 28일은 마침 시엔쿠에고스가 1959년 비행기 추락사고를 유명을 달리한 지 36년째 되는 기일이었다. 쿠바에서는 볼리비아군에게 게바라가 체포된 10월8일부터 이날까지 20일 동안을 추모기간으로 정해 놓고, 시대를 앞서 살다 요절해 간 두 사람의 넋을 기리고 있다. 게바라의 유명세에 가려 나라 밖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쿠바 안에선 시엔푸에고스를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날렵한 베레모를 쓴 채 언제나 심각한 표정인 게바라의 초상과 달리 밀집모자를 쓴 시엔푸에고스의 초상은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논쟁적이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게바라와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동지였다고 전해진다. 혁명 직후 대중 연설을 하던 카스트로가 고개를 돌려 연단에 있던 시엔푸에고스에게 “카밀로,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잘 알려져 있다. 카스트로의 투옥과 이어진 국외추방의 도화선이 된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시엔푸에고스는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근거지로 한 쿠바 혁명 과정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이른바 ‘혁명군 제2대’를 이끌며 투쟁을 주도했다. 혁명 뒤 숨지긴 전까지 10개월 남짓 기간 동안에는 토지개혁을 주도하는 한편, 군의 최전선에서 신생 혁명을 무너뜨리려는 ‘반혁명 세력’ 소탕작전을 지휘했다. 시엔푸에고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선 논란이 분분하다. 심지어 그를 반공주의자로 분류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의 부친과 형이 유명한 급진 좌파 활동가였던 것으로 미뤄 이는 카스트로가 시엔푸에고스를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그가 스탈린식 교조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란 점에는 상당수 역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는 혁명 뒤 카스트로가 이끄는 국가평의회의 교조적 행태에 유감을 표시하며 공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가 반역죄로 몰린 혁명동지 우베르 마토스의 투옥을 끝까지 반대했었다. 마토스는 이후 20년 간 카스트로의 감옥에서 투옥생활을 한 뒤 현재 미국에서 반 카스트로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혁명이 성공한 지 10개월 만에 시엔푸에고스가 숨졌을 때 게바라는 “카밀로와 같은 인물은 숨을 거둔 뒤에도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다”며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영혼은 인민들이 명하기 전까지 영원히 그들 곁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헌사한 바 있다. 매년 10월8일 추모기간이 시작되는 날 쿠바 전국의 소년단원은 “체 게바라 같은 삶을 살겠노라”는 엄숙한 다짐을 한다. 반면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숨진 10월28일엔 수많은 이들이 강이나 바닷가를 찾아 꽃 한 송이를 물 위에 띄우며 그의 넋을 기린다. 시엔푸에고스의 주검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 http://www.hani.co.kr/kisa/section-004003000/2005/11/004003000200511151326700.html
1922 - 교황 비오 11세(Pius XI), 259대 로마 교황 취임 교황 비오 11세(라틴어:Pius PP. XI, 이탈리아어:Papa Pio XI)는 제259대 교황(재위: 1922년 2월 6일 - 1939년 2월 10일)이다. 세속명은 아킬레 암브로지오 다미아노 라티(이탈리아어:Achille Ambrogio Damiano Ratti)이다. 위엄 있고 집중적이며 학구적인 동시에 활동적인 교황으로서 선교, 외교, 내부 쇄신, 적응 등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교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생애 1857년 5월 31일 이탈리아밀라노 근처 데시오에서 견직물 공장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성직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서 1879년 사제로 서품된 후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철학, 신학, 교회법의 박사 학위를 받고 밀라노 대신학교의 교수와 암브로시오 도서관원이 되었다. 1907년에는 도서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고문서학의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다. 1911년부터 1918년까지 바티칸 도서관에서 일하였다. 처음에는 부관장으로, 1914년 이후에는 관장으로 일하였다. 1918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명령을 받아 교황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폴란드에 교황 순시관으로 파견되었다. 1919년 6월에는 정식 교황청의 사절이 되었다. 그 해 10월 28일 레판토의 명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폴란드와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안에서 교회와 국가의 여러 현황들을 접하고 그 국가들 사이에 일어나는 경쟁과 국경 분쟁의 어려운 점들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 후 1921년 6월 13일 밀라노의 교구장과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베네딕토 15세의 선종 후 제14차 투표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비오 11세는 원래 학자 출신이라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였다. 그레고리오 대학교를 증설하여 성서학원과 동방학원을 겸하게 하고 그 대학교에 교회사와 선교학과를 신설하였다. 교회 학문을 일반 대학교 수준으로 높여 통일되고 종합적인 수준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1925년에는 기독교 고고학 학원을 세웠고 바티칸 도서관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많은 가톨릭 계열 대학교들을 신설하게 하였다. 바티칸 방송국과 바티칸 천문대를 신설하고 교회 음악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70년 이래 문제였던 로마 문제가 그의 치세 때에 타결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2년 반 동안 협상을 통해 1929년 2월 11일 라테란 조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27개 조항으로 된 협정과 45개 항으로 된 정교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조약 체결로써 교황은 오랜 감금 생활에서 해방되어 바티칸 시국에서나마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1926년 최초로 중화민국 주교들을 서임하였다. /위키백과 - Gustav Klimt - 'Woman', detail of Fresco, Palais Stoclet, Brussel
- 'The Kiss' - 'The Kiss', detail
- 'Adele Block- Bauer I', Abstract - 'Mada Primavesi', detail
- 'Judith I'
1918 -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Klimt, Gustav) 사망 클림트 [Klimt, Gustav, 1862.7.14~1918.2.6] 오스트리아의 화가, 빈 분리파의 창시자. 빈 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1883년 벽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실을 열었다. 빈 시립극장(1888)과 미술사 박물관의 계단에 그린 벽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 작품은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아카데미 회화를 보여준다. 1897년 클림트의 성숙한 양식이 출현했으며, 그는 아르 누보 계열의 고도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며 전통적인 미술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화가들의 단체인 빈 분리파를 창설했다. 그뒤 곧 빈대학교 강당의 천장에 3점의 우의적인 벽화를 그렸지만 선정적인 상징적 표현과 염세주의가 상당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이 벽화들은 거절당했다. 후기의 벽화인 〈베토벤 프리체 Beethoven Frieze〉(1902,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와 브뤼셀의 스토클레 저택의 식당에 그려진 벽화들(1909~11)은 정확한 선묘, 평면적·장식적인 양식의 색채, 금박을 대담하고 자유롭게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클림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는 〈입맞춤 The Kiss〉(1908, 오스트리아 미술관)이 있고, 〈프리차 리들러 부인 Frau Fritza Riedler〉(1906, 오스트리아 미술관)·〈아델레 블로흐바우어 부인 Frau Adele BlochBauer〉(1907, 오스트리아 미술관)과 같이 빈의 상류층 부인들을 그린 일련의 초상화가 있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인물 주변의 그림자를 생략하고 평면적이고 구성이 매우 화려한 장식들로 인물을 에워쌈으로써 건강하고 육감적인 피부를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1913 - 영국 태생의 고고학자, 고생물학자 메리 리키(Leakey, Mary) 출생 리키 [Leakey, Mary Douglas, 1913.2.6~1996.12.9] 영국 태생의 고고학자·고생물학자.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화석 몇 점을 발견했고, 그의 남편인 저명한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는 이 발견을 해석하고 널리 알렸다(→ 색인 : 자연인류학). 소녀시절 그림에 타고난 재질을 보였으며 고고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정규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영국 데번 헴버리의 신석기 유적 발굴에 참가했을 무렵에는 석기나 다른 고고학 유물을 그대로 복제한 듯한 훌륭한 그림솜씨를 갖추었다. 1933년 루이스 리키를 만나 1936년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그뒤 30년 동안 남편과 함께 일하면서 케냐에서 많은 선사유적 발굴을 관장했다. 1947년 유인원과 초기인류의 공동조상으로서 유인원과 비슷한 약 2,500만 년 전의 프로콘술 아프리카누스(Proconsul africanus) 두개골을 발견했다. 1959년에는 루이스 리키가 진잔트로푸스(Zinjanthropus)라고 명명한 고인류 두개골을 올두바이 협곡에서 발견했는데, 이것은 현재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한 종류로 여겨지고 있다. 1978년 올두바이 협곡 남쪽에서 발견한 래톨라이 유적에서는 약 350만 년 전 고인류가 화산재 위에 남긴 발자국 몇 쌍을 발견했다. 발자국을 남긴 주인공이 직립보행했음을 말해주는 이 발견으로 인류의 직립보행 시점은 종래 학계가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저서로는 〈올두바이 협곡:고인류에 대한 나의 추적 Olduvai Gorge:My Search for Early Man〉(1979)과 자전적 수기 〈과거를 밝히며 Disclosing the Past〉(1984)가 있다. /브리태니커
레이건 [Reagan, Ronald (Wilson), 1911.2.6~2004.6.5] [역사 속의 인물] 항공모함에 이름 붙은 대통령, 레이건 “미국이란 나라는 조그만 꿈을 가지기에는 너무 크다.” 미국인들이 레이건 미국 대통령을 통해 본 것은 용기 있고, 기운차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1911년 오늘 태어난 레이건은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나이인 70세의 나이로 취임했다. 그는 고령에도 절대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를 재건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강한 미국을 만들었다.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Great Communicator`위대한 설득자)로 불리면서 항상 웃는 얼굴과 세련된 제스처로 지지자를 양산해왔다. 미국에서 부동의 1위인 16대 대통령 링컨 다음으로 인기가 있는 대통령으로 뽑힐 정도다. 미국인들은 1998년 그의 87번째 생일날에 워싱턴국립공항을 레이건 워싱턴국립공항으로 이름을 바꿨고 2001년에는 새 항공모함의 이름을 ‘USS 로널드 레이건호’로 명명했다. 이뿐만 아니라 신시내티 주 고속도로, 캘리포니아 주 법원 청사, 조지아 주 거리명 등에도 그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최근에는 러시모어산 ‘큰 바위 얼굴’에 추가해야 할 인물을 놓고 오바마 대통령과 경쟁하기도 했다. 1994년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10년 후인 2004년 93세로 타계했다.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 드문 한국에서 그가 부럽게 느껴진다. 배성훈 편집2부장 /매일신문 2013년 02월 0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123&yy=2013
고무우카 [Gomułka, Władysław, 1905.2.6~1982.9.1] 1905년 2월 6일 크로스노에서 출생했다.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6세 때부터 노동운동에 참가하였다. 1926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1905 - 체코의 배우, 소설가 얀 베리흐(Werich, Jan) 출생 베리흐 [Werich, Jan, 1905.2.6~1980.10.31] 얀 베리흐 (Jan Werich; 1905년 2월 6일 ~ 1980년 10월 31일)는 체코의 배우이자 작가이다. 세계 대전 사이의 연극 아방가르드와 전후 체코 연극계의 대표 인물이다. 영화 마르틴 프리치 감독과 몇몇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들은 매우 반파시스트적이고 친사회주의적인 것들이었다. 얀 베리흐의 전후 영화 작품은 당시 체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 문학 작품 /위키백과
1903 - 칠레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 아라우(Arrau, Claudio) 출생 아라우 [Arrau, Claudio, 1903.2.6~1991.6.9] 치얀 출생. 파오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5세 때 산티아고에서 첫 무대를, 7세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데뷔하였다. 그뒤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독일로 유학, 베를린의 슈테른음악학교에서 수학하고 다시 M.크라우제에게 사사(1910∼1915)하여 기량을 닦았다. 1914년 11세의 나이로 베를린에서도 데뷔하고 2년 후에 이바하상을 받아 피아노 독주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924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활약하고 27년에는 제네바국제콩쿠르에서 피아노 1등상을 받아 더 한층 명성을 떨쳤다.1941년부터 미국에 영구 정착했으며, 1979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레퍼토리를 가졌으며 뛰어난 기교와 지적이고 개성적인 이해를 특기로 하였다. /네이버
1895 - 미국의 프로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Ruth, Babe) 출생 루스 [Ruth, Babe, 1895.2.6~1948.8.16] [어제의 오늘]1895년 미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 출생 ㆍ‘밤비노의 저주’ 유행어 탄생 주인공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를 27번 우승한 뉴욕 양키스가 명문구단으로 자리잡은 것은 1920년 베이브 루스를 영입한 이후부터다. 양키스는 1921년 아메리칸 리그 첫 우승에 이어, 2년 뒤 월드시리즈 첫 우승을 거둔다. 베이브 루스의 본명은 조지 허먼 루스. 1895년 2월6일 독일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문제 청소년들이 다니는 성 매리 공업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1914년 19살의 나이에 잭 던이 소유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하면서 ‘어린아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해 좌완투수로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한 그는 4년 뒤 투수로서 18승을 거두는 동시에 11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에 올랐고, 이듬해엔 타자로 전향해 29개의 홈런을 때려 다시 홈런왕을 차지한다. 보스턴 구단주는 루스를 12만5000달러라는 헐값에 양키스로 넘긴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이후 86년간 월드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없었기에 ‘밤비노(루스의 또 다른 별명)의 저주’라는 말이 유행했다. 루스는 양키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첫 해, 보란 듯이 54개의 홈런을 때렸다. 임소정 기자 /경향신문 2010-02-05 17:47: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2051747265&code=100100&s_code=ap005
- (1885년 배재학당 설립 75년) 1960.8.3.발행 아펜젤러 [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2.6~1902.6.11] 펜실베이니아주(州) 손더튼 출생. 원래는 장로교 신자였는데, 1876년 감리교로 옮겼다. 1882년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거쳐 뉴저지주 매디슨의 드류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1884년(고종 21) 미국감리교 선교회에서 한국 선교사 임명을 받고 갓 결혼한 아내 D.엘라와 함께 1885년 초 한국에 와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1887년 한국 성경번역부가 생기자 H.G.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 국역사업에 참여,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I ·II)의 번역을 마쳤다. 한편 1895년 월간잡지 《한국휘보:The Korean Repository》를 복간, 그 편집을 맡았다. 그는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1902년(광무 6) 목포(木浦)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익사하였다. 마포구 양화진외인묘지에 묻혔다. /네이버
1840년 2월 6일 영국은 뉴질랜드 노스 섬의 오클랜드 지역에 사는 마오리족과 와이탕기 조약(The Treaty of Waitangi)을 맺었다. 영국이 마오리족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며 토지를 독점 매입할 수 있다는 불평등 조약을 근거로 뉴질랜드 전체를 합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마오리 전쟁이 시작되었고, 마오리 민족주의를 고취시킨 마오리 왕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가장 열정적으로 싸운 마오리족은 하우하우교 전사들이었다. 결국 이 조약에서 토지판매 조항이 폐지되었고 1862년에는 원주민 토지법이 통과되었다. 1960년 이래 뉴질랜드는 2월 6일을 와이탕기의 날로 지정해 경축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1820 - 미국 해방노예 이주 시작 [책갈피 속의 오늘]1820년 美해방노예 이주 시작 옷가지와 음식 보따리를 짊어진 흑인 86명이 미국 뉴욕의 부두에서 승선 순서를 기다렸다. 난생 처음 가보는 아프리카. 미국의 흑인 노예 중 처음으로 조상의 땅으로 되돌아간다. 배에 오르는 순간 농장의 고된 노역도, 백인들의 천시와 학대도 사라진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206/8541890/1
- Sir Stamford Raffles Statue - Singapore River
[책갈피 속의 오늘]1819년 英, 싱가포르 할양 조약 옛날 옛적 말레이반도 끝에 있는 섬마을 테마섹(자바어로 ‘바다 마을’이라는 뜻)에 세상을 쓸어버릴 듯한 폭풍이 몰아쳤다.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했다. 인어(머메이드)와 사자(라이언)의 모습을 띤 상상의 동물이자 싱가포르의 상징물인 ‘머라이언’에 얽힌 전설. 싱가포르라는 이름도 13세기 스리위자야 왕국의 왕자가 이곳에서 낯선 동물을 보고 ‘싱가푸라(singa-pura·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1804 - 영국의 신학자, 철학자,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Priestley, Joseph) 사망 프리스틀리 [Priestley, Joseph, 1733.3.13~1804.2.6] 영국의 신학자, 철학자, 화학자. 리즈 근교의 필드헤드 출생. 19세 때 다벤트리의 비국교파(非國敎派) 신학교에 입학하여 광범한 신학적 지식을 얻고, 1755년 니덤마켓의 독립파 교회와 난드위치 교회 등의 목사, 1761년 워링턴의 비국교파 신학교에서 문학교수로 있었다. 신학자로서는 유니테리언의 입장에서 삼위일체와 그리스도교의 신성(神性)을 부정하였다. 자연권의 도그마를 부정하고, 사회의 다수 성원의 상호이익이라는 공리주의적 원리에 기초를 두어 J.벤담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767∼1772년 리즈의 목사, 1772∼1780년 셀번경(卿)의 도서실 관리인, 1780∼1791년 버밍엄의 목사로 있었는데, 그곳에서 프랑스혁명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폭도들의 방화에 의해 집과 서적 ·원고 등이 불태워지자 1794년 미국에 이민하여 펜실베이니아주 노섬벌랜드에 정착하였다. 한편, 런던에서 B.프랭클린을 만나 그의 영향으로 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1767년에 《전기의 역사: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Electricity》를 저술하였다. 1772년 탄산가스를 이용하여 소다수를 발명하고, 뒤이어 기체를 물 또는 수은 위에서 포집(捕集)하는 장치를 고안하였으며, 일산화이질소 ·암모니아 ·염화수소 ·이산화황 ·플루오르화규소 등을 발견하였다. 또한 식물의 호흡(1779), 동화작용(1781) 등도 연구하였다. 그 밖의 주요저서에 《그리스도 교회사:A General Histroy of the Christian Church》(4권, 1790∼1802) 《Notes on All the Book of Scripture》(4권, 1803∼1704) 《Essay on the First Principles of Government》(1768) 등이 있다. /네이버
1788 - 매사추세츠 주가 미국의 6번째 주가 되었다. [합중국 가입 : 1788년 2월 6일 (6번째)] 매사추세츠 주(The Commonwealth of Massachusetts)는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에 있는 주이다. 주도는 보스턴이다. 동쪽으로 대서양과 접하고 북쪽으로 버몬트 주와 뉴햄프셔 주, 남쪽으로 로드아일랜드 주와 코네티컷 주, 서쪽으로 뉴욕 주와 접한다. 어원은 나바호어인 "메싸츄세추"에서 나왔다고 한다. /위키백과
키슈폴루디 [Kisfaludy Karoly, 1788.2.6~1830.11.21] 헝가리에서 처음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 희곡을 썼다. 16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군대에 들어가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했다. 1811년 빈에서 그림을 그리며 근근이 살아가던 중 사극 〈헝가리의 타타르족 A Tatarok Mag yarorszagon〉을 썼다. 이 희곡은 8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마침내 한 지방 소도시의 극단에 의해 공연되었다. 이 극단은 페슈트에서 이 작품을 여러 번 무대에 올려 단번에 키슈폴루디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는 비극 〈이레네 Irene〉(1820)와 희극 〈구혼자 A Kerk〉(1817)를 꼽는다. 헝가리 문학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했던 페렌츠 코진치의 활동이 뜸해짐에 따라 그가 점차로 이 공백을 메웠으며, 1822년에는 문학연보 〈오우로라 Aurora〉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이후 헝가리 낭만주의 세대인 요제프 보이조, 미하이 뵈뢰슈모르티, 페렌츠 쾰체이에게 지면을 제공했다. /브리태니커
포스콜로 [Foscolo, Ugo, 1778.2.6~1827.9.10] 이오니아해의 섬 잔테 출생. 청년시절을 베네치아에서 지내며 고전학(古典學)을 공부하였다. 처음에는 나폴레옹을 해방자라고 믿고 심취하였으나, 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에게 할양당하는 것을 본 후는 나폴레옹에게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1815년 스위스로 갔다가 다시 런던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죽었다. 1871년에 그의 유골이 피렌체의 산타크로체교회로 옮겨졌다.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시기의 낭만주의적 색채가 강한 대표작 《야코포 오르티스의 마지막 편지 Ultima lettere di Jacopo Ortis》(1802)는 서한문 형식의 연애소설이고, 《분묘(墳墓)》는 나폴레옹의 분묘양식 통일화에 반대하여 애국적 열정을 피력한 작품이다. /네이버
1685 - 영국의 왕 찰스 2세(Charles II) 사망 찰스 2세 [Charles II, 1630.5.29~1685.2.6] 영국 스튜어트왕조의 제3대 왕(재위 1660∼1685). O.크롬웰이 사망하고 호민관 정치가 붕괴하자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실현하였다. 가톨릭 부활을 위한 전제정치를 펼쳤고 의회는 심사율 ·인신보호법을 제정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본문 찰스 1세의 아들. 청교도혁명 중인 1646년에 국왕파의 패배로 프랑스로 피신하였다. 1650년에 스코틀랜드의 반(反)공화국 반란에 호응하여 그곳으로 가서, 이듬해 스코틀랜드 왕으로서 대관하였으나, 공화국군에게 패배하여 다시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그 후 독일 ·네덜란드 등지를 전전하였다. O.크롬웰이 사망하고 1660년에 호민관(護民官) 정치가 붕괴하자, 멍크의 교섭을 받고 브레다선언을 발표한 뒤에 귀국하여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실현하였다. 그는 임종할 때까지 자신이 가톨릭교도임을 숨기고 있었지만, 기회만 있으면 가톨릭을 옹호하고 부활시키려는 야심이 표면화하여 이것이 전제정치화하였다. 즉, 그의 치세 초기에는 측근자인 클래런던의 지도에 따른 《클래런던 법전》에 따라 비(非)국교도를 탄압하였다. 1670년에는 가톨릭국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도버조약을 체결, 군사비를 담당하는 대가로 프로테스탄트국가인 네덜란드와의 개전을 약속하였으며, 1672년에는 신앙자유 선언을 발표하여 가톨릭의 부활을 꾀하였고, 또한 두 차례나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렀다(제2 ·3차 영국 네덜란드 전쟁). 이와 같은 가톨릭적인 전제정치에 대하여 의회도 심사율(審査律, 1673) ·인신보호법(人身保護法)으로 대항하였고, 또한 1680년에는 가톨릭교도인 왕의 아우 요크 공작(후의 제임스 2세)을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왕위배제 법안을 상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의 만년의 4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의회와의 대립을 심화시킴으로써 명예혁명의 한 요인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왕의 만년에는, 의회에 청원자당(請願者黨)과 기탄자당(忌憚者黨)의 두 당파가 생겨, 후에 이것이 각각 휘그당과 토리당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그의 치세에는 혁명기의 청교도에 대한 반동으로 상류사회에는 프랑스류의 화려한 풍조가 팽만하였던 점 등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앤 [Anne, Queen, 1665.2.6~1714.8.1] 스튜어트왕가 최후의 영국 여왕(재위 1702∼1714). 런던 출생. 제임스 2세의 차녀이다. 신교도로 양육되어 1683년 덴마크의 왕자 게오르(1653~1708)와 결혼하였다. 1688년 명예혁명에 즈음해서는 부왕의 곁을 떠나 형부(뒤의 윌리엄 3세) 편에 섰다. 이듬해 권리장전(權利章典)에 의하여 윌리엄 부부에게 사자(嗣子)가 없을 경우 그 계승자로 정해졌고, 1702년 윌리엄 3세가 죽자 즉위하였다. 말버러 공비(公妃)와는 어릴 때부터 절친하여, 즉위 뒤 말버러 공작은 둘도 없는 권세가가 되었다. 당시 유럽은 에스파냐계승전쟁의 와중에 있어 말버러 공작은 대륙 각지로 전전하며 빛나는 승리를 얻음으로써, 1713년의 위트레흐트조약에서 영국은 유리한 조건을 얻어냈다. 또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합병이 성립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었다. 특히 토리당과 휘그당에 의한 의회정치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녀 자신은 토리편이라 하였지만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이 확립되고, 내각책임제가 발달하였다. 다섯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기 때문에, 죽은 뒤에는 조지 1세가 즉위하여 하노버왕조가 성립하였다. /네이버
비에이라 [Vieira, Antonio, 1608.2.6~1697.7.18]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했으며 그의 설교문·서한·공문서 등은 17세기의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6세 때 부모와 함께 브라질로 이주해 바이아에 있는 예수회대학에서 공부한 후 1623년 예수회에 가입했으며 1635년 성직을 받았다. 그는 곧 브라질에서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이 브라질을 침공하자(1630~54) 이에 맞서 여러 종족들에게 무기를 들고 포르투갈 진영에 가담하도록 권고한 그의 설교는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새로운 혼혈족을 형성하게 된 신비한 비결을 나타낸 최초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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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