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있는 마을
나혜경
여기는 조용한 마을입니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없는 곳이죠
다만 뒷집에서 닭을 열 마리쯤 키우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마을은 달라졌죠
새벽 네 시 화장실 가는데 닭이 울며 따라오네요
날이 밝기도 전에 닭으로 시작하는 셈이죠
닭이 울지 않으면 나도 쉬고
닭이 울면 나도 닭장에 근무하는 느낌이죠
한 마리가 울면 화답하듯 같이 울어주는 닭의 세계
창문을 꽁꽁 닫아걸어도 냄새보다 치밀하게 침투하던
훌쩍이는 소리의 기억을 깨우기도 하죠
살을 찢고 들어와 단잠을 깨뜨리는 울음
주인 부부는 그런 닭울음소리를 키우죠 닭장에서 꿈을 꾸죠
애완견 쫑의 똥을 치우듯 닭이 낳은 달걀을 먹어치우죠
깃털을 쓰다듬죠 그리고 닭장 문을 활짝 열죠
버릇없는 닭들은 무례하게 담을 넘고
우리 집 텃밭은 가녀린 발가락에 무참히 짓밟히죠
자지러지게 우는 건 뭐죠 장대를 들고 쫓아가선가
때리기도 전에 담을 넘어가는 닭들에게 묻고 싶어요
울음이 전부인 생을 몰아내는 일이 일과가 되었어요
슬픈 감정만 울음을 불러오는 게 아니잖아요
노여움도 기쁨도 사랑도 극에 달하면 울음이 터져 나오죠
도망치며 우는 울음은 왠지 웃음 같기도 해요
어떤 울음 앞에선 슬픔도 나누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죠
이곳도 조용할 때가 있긴 있어요
단체로 곡을 한 후 울음을 뚝 그칠 때
한 마리가 다시 울고
닭들이 따라 울길 기다리기까지
천지가 고요한 마을입니다
⸺계간 《문예연구》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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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경 / 1964년 전북 김제 출생. 1991년 사화집 『개망초꽃 등허리에 상처난 기다림』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무궁화, 너는 좋겠다』 『담쟁이덩굴의 독법』 『미스김라일락』.
옆으로 걷는 게들처럼
남길순
집을 나간 게들
안간힘으로 되돌아온다
파도는
집게발을 치켜든 게들을 지우고
붉은 발을 들고 돌진하는 거친 게를 다시금
모래 위에 쓸어다 놓고
게는 탈피 중이다
세계를 빠져나가지 못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발버둥이란
이런 것이다
마지막 한 개의 발톱이
발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바다는 주름을 쥐락펴락
수평선은 앉았다 일어섰다 한다
⸺계간 《문학청춘》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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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길순 / 1962년 전남 순천 출생. 순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2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 『분홍의 시작』.
공중사원
최정란
어린 기도가 흙에 잔뿌리 내릴 때
뿌리 아래 긴 공중이 생길 줄 알았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꽃을 피웁시다
문 없는 출구와 바닥과 아치형 천장, 긴 바람의 건축물
제 발밑에 세워진 줄
꽃은 영원히 모를지라도
누군가 비우는 자리를 빠르게 채우는 것이
공중이라는 것은
시간의 내부를 훑고 가는 바람이라는 것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빈자리를 빈 채로 두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다행입니까
모래밭에 올라와 죽은 고래 뼈 궁륭처럼
내장을 파낸 거대한 짐승처럼
반 원통형 공중이 흙의 빈자리를 채웁니다
흙의 내부가 텅 비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오랫동안 작심하고 기다린 듯
바닥없는 시간의 궁륭
아무도 머물지 않고 빠르게 통과해야 하더라도
뿌리가 움켜쥔 삶의 검은 속살이
시간의 바람에 속절없이 밀려 나가는 공허를 모르더라도
우리의 기도는 꽃 피는 일에
몰입합시다
뿌리를 뒤흔드는 진동에도, 밤낮없이 달리는 차들 행렬에도
향기로운 침묵과 바람의 예배는
벼랑 위의 뿌리를 다시 흙의 경전에 박아 넣을 것입니다
바닥을 뚫고 가는 굴착기 진동에 놀라 떨던 꽃받침도
세상의 진동과 소음에 익숙해지고
뿌리 내릴 깊이가 없어진 뿌리 깊은 검은 바람도
내일 떠나도 미련 없는 삶을 웃으며 견디는 뿌리의 깊이한계선도
무심한 일상이 되겠지만
흙도 공중도 서로의 어둠에 익숙해지자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제 한계를 먼저 설정하고 꽃 피우는 슬픔은 바닥이 없으니
우리는 다만
서로 다른 장르 출신들답게
제각기 간절한 기도로 꽃을 밀어 올립시다
고래의 숨처럼 꽃을 피웁시다
거대한 삶의 바다에서 물 위로 머리를 내밀어 숨을 몰아쉬듯이
꽃을 몰아쉽시다
이따금 분수처럼 쏟아지는 꽃의 불면이
견고한 믿음의 바닥을 꿰뚫고 솟아오르겠지만
꽃의 입구는 당분간 온몸 흔들려도 좋을 것입니다
가시 한 점 남김없이 흔들려도 좋을 것입니다
꽃의 허공을 뚫고 들어오는 신앙심 깊은 차들
묵음으로 속도를 늦출 것입니다
꽃의 십자가에는 아직 가시가 많고
꽃봉오리인 어린 신께서 주무실 시간이므로
대지의 숨구멍으로 드나드는 천사의 날개 고요할 것입니다
바람 위에 떠 있는 이 사원은 어떤 장르일까요
꽃은 어떤 장르로 허공의 진화를 거듭할까요
이 허공에서 꽃은 얼마나 간절한 기도의 사원이 될까요
질문과 질문을 끌고
대지의 들숨과 날숨, 길게 교행할 것입니다
⸺계간 《시산맥》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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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란 / 1961년 경북 상주 출생.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사슴목발 애인』.
겨울 테라코타
유재영
흩어진 바람들이 며칠째 필라멘트처럼 떨고 있다. 지난봄 옮겨 심은 모감주나무는 한 해의 휘어진 부분을 발밑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나는 돌아서서 지구의 모서리를 힘껏 걷어찼다. 여전히 과묵한 테라코타. 골반은 닳아 삐걱대고 빙하의 물은 벌써 시장 경제론 앞에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첫서리가 내리기 전 북쪽으로부터 날아온 수상한 새들이 저마다 큼지막한 날개를 접으며 겨울 경내(境內)로 들어왔다. 올해의 추위는 머지않아 설악을 거쳐 문막에 이를 것이다.
⸻계간 《문학. 선》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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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영 / 1948년 충남 천안 출생. 시인• 북 디자이너. 1973년 박목월 시인에게 시를, 이태극 선생으로부터 시조를 추천 받아 문단에 나옴. 시집『한 방울의 피』『지상의 중심이 되어』『고욤꽃 떨어지는 소리』『와온의 저녁』, 시선집『변성기의 아침』등과 시조집『햇빛 시간』『절반의 고요』『느티나무 비명(碑銘)』등.
연애의 부작용
한선자
오래된 애인들이 내 가방에 살고 있다
다정하거나 비굴한 그들은
뒷골목이나 그늘을 좋아했다
술집을 지나칠 때마다
유혹은 불쑥불쑥 살아나 환절기처럼 힘겨웠다
변신에 능숙한 애인들은
낮에는 낯설게 외면하다가
밤에는 달달하게 부풀어 올랐다
심장은 전파를 타느라
가끔 경련을 일으켰다
아침마다 전파를 차단하는 총알을 장전했다
술집에 가는 날에는
오래된 애인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런 날이면 밤새도록 심장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계간 《문학청춘》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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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자 / 1963년 전북 장수 출생. 2003년 시집『내 작은 섬까지 그가 왔다』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울어라 실컷 울어라』『불발된 연애들』.
신경 정신과에서 살아남기
이장욱
날씨는 화창하고 신경정신과에는 고객이 많지만 나는 무언가가 나의 잘못인 것 같았다.
창밖은 저렇게 완고한데 나는 여기 앉아 책이나 읽어도 되나.
고개를 들어 구름이나 멀거니 바라봐도 되나.
저기 저 무책임한 알라딘 램프를
나는 나를 죄인의 위치에 놓는 버릇이 있어요. 모든 죄인은 스스로를 구름으로 만들어요. 피아노가 되었다가 낙타가 되었다가 사자가 되어 먼 곳으로 흘러가요. 이곳에서 나가고 싶습니다만
나는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나의 불면과 나의 환각과 나의 약물치료조차도 유신시대를 기준으로
식민지 시대의 산물로서
드디어
위화도 회군까지
한 마리의 토끼는 어떻게 역사적인가. 낙타의 영혼은 어디까지 구성되는가. 알라딘 램프에서는 또 무엇이 튀어나오나. 무슨 소원을 어떻게 빌어야 당신에게 닿나.
저는 매일 기도를 합니다만, 사랑과 증오의 끝에는 늘 선생님이 있잖아요. 언제나 고객이 많은 선생님,
달나라에서 오신 선생님,
토끼 같은 선생님,
귀여워서 뼈를 토막 내고 싶은,
낙타가 낙타를 용서할 수 없고
사자가 사자를 구원할 수 없고
창밖의 구름은 피아노를 치면서 폭풍이 되어갔네.
리듬은 알레그로
거기서 바라보니까 좋아? 책상 너머에서
천국에서
이 문장 바깥에서?
곧 램프의 정령이 튀어나와 우아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램프의 정령은 마법사였다가
회계사였다가
압록강에 홀로 남은 고려의 병사였다가
나는 스툴에 앉은 채 정면을 노려보았다.
나는 고백을 하지도 않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창밖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유리창이 박살나고 드디어 낙타와 사자와 독립군들이 난입하고
우리의 피가 사방으로 튈 때까지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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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등.
태모필(胎毛筆)
박분필
진한 먹물에 붓을 찍습니다 생명선이 살아있어
차람차람 붓끝이 차진 태붓
떨리는 듯 곧은 선을 긋습니다
태 안에서 그리고 태어나서 다시 백일을
더 자란 딸애의 머리카락에서 따스한 울림이
고물고물 기어 나와 그의 심장에 닿습니다 그렇게
사군자를 쳤고 좋은 글귀 뽑아 열두 폭 병풍
준비해 두었는데
시집을 안 가겠다 물러서지 않는 딸
30여 년 걸어놓았던 실고리가 삭아 걸지조차 못하는
붓만 같습니다
한때 붉은 발가락이었고 말랑말랑한 마디였고
솜털이었던 저 닮은 손주라도 안고 온다면야 명주실로
짱짱한 고리를 만들어 붓걸이에 걸어둘 것인데
책상 서랍 구석으로 밀어내 버린
침묵 한 자루
근 삼 년 만에 그가 다시 붓을 잡습니다
젖배 곯은 아기가 젖을 빨듯
물 타지 않은 진한 먹물을 빨아들이는 붓
그가 탱탱해진 붓을 어르고 달래는 일은 침묵에 빠진
자신을 구출해 내는 일
입 성근 잣나무 한 그루 일으켜 세웁니다 그 아래
쌓기도 하고 흩기도 했던 한 생의 명암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의 호흡들이 골고루
피 발라진 오두막 한 채
지난한 한 생을 떠받친 서까래가
그저 고요히 달빛을 뿜어냅니다
⸺계간 《문학청춘》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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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분필 / 1951년 경남 울산 출생. 성균관대학교 유교경전학과 졸업. 2006년 ‘시와시학사’에서 시집을 출간하며 문단 활동 시작. 시집 『창포 잎에 바람이 흔들릴 때』『산고양이를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