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 과정과 창작의 바탕
1. 삼다(三多)의 중요성
시 창작도 글쓰기의 일종이므로 일단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좋은 글이 좋은 글을 낳고,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학경험을 많이 쌓아야 하는데, 문학경험은 반드시 실제 체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작품을 접해 봄으로써 훌륭한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기르고, 지금 쓰고 있는 자기 작품에 대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 삼다(三多)-구양수의 삼다
ㆍ간다(看多)- 다독의 필요성: '읽기'를 통한 자기 지식의 확대, 글 짓는 방법을 참고하고 남의 글을 통해 자극을 많이 받을 필요가 있음.
ㆍ주다(做多)- 다작의 필요성: '쓰기‘의 실제 연습과 경험을 많이 쌓음.
ㆍ상량다(商量多)-다사(多思)의 필요성: ‘쓰기’는 창조적인 사고과정이므로 생각을 많이 가지게 함.
2. 시 창작에 대한 의지와 오감열기
시를 쓰고자 하는 의지가 일단 갖추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시를 잘 쓰는 시인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 즉 의지가 없으면 시를 창작할 수 없다. 이를 다른 말로 오감을 열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바빠서, 주변에 시 창작할 분위기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시 창작에 대한 의지가 없으면 마음과 오감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시 창작에 대한 의지가 있으면 마음과 오감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이렇게 되면 자연 또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모든 곳에서 시의 소재를 발견할 수 있다.
1) 깊고 풍부한 사고(관찰력)
생활 속에서 흔히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말고 애착과 관심을 가지고 환경과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시상에서의 관찰(력)이란 삶 속에서 걷어 올린 절실한 체험, 이상적인 이미지, 강렬한 느낌이나 감정, 불현듯 스쳐오는 영감, 무의식 속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생각, 한순간에 집중적으로 얻어진 통찰 등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사물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시각, 그리고 남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는 것이 시를 쓰는 첫 번째 덕목이다.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그래도 튼튼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보다
-나희덕, 「배추의 마음」 전문
이 시는 우리 주위 주말농장이나 텃밭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직접 가꾸는 배추가 시의 소재다. 보통사람이라면 그냥 배추를 돈벌이수단이나 소일거리의 취미생활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배추를 하나의 생명이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니, 배추와 배추벌레까지 존중받아야할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이 점에서 시인이라는 사람은 보통사람과는 다른 관찰력과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만 가지면 되는 것이지 특별한 관찰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위 시는 배추와 사람 사이의 정서적 교감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농약 없이 키우는 배추가 얼마나 잘 자랄지 걱정이지만 그 마음을 배추가 알았는지 배추는 튼실하게 자라주었다. 그래서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보다’라고 하며 자연물을 인간과 대등한 생명 존재로 보고, 자연물에도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명하였다.
배추를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단지 배추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더 나아가 배추를 갉아먹는 벌레에게까지 나아간다. 농약을 치지 않은 것도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추를 위한 것인데, 배추를 갉아먹는 벌레의 생명까지 걱정하는 생명존중의 사상이 엿보인다. 화자는 ‘배추벌레 한 마리’가 배추포기 속에서 못나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자, 그 마음을 배추가 아는지 ‘배추벌레에게 반을 먹히고도 속은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는 존중받는 하나의 성스러운 개체가 된다. 여기에 우열의 기준과 사고는 있을 수가 없다. 만물이 평등하므로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생명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고는 바로 노자가 주장한 만물일여(萬物一如)적 평등의식이라 할 수 있다. ‘나’라는 개체중심사상에서 벗어나게 되면 만물이 모두 소중한 존재로 다가오며 세상에 사랑하지 않을 대상이 없는 것이다. 인간(화자)과 자연(배추)과 동물(배추벌레)과의 완전한 합일을 보여주는 이 시는 생태학적 상상력의 본원을 보여주고 있다.
길이 끊어진 곳에 멈추어
서 있는 길이 있습니다
서 있는 길과 마주보며 집이
한 채 있습니다 서 있는
길을 보며 집이 앉아 있습니다
지붕에는 날개가 있는 새가
앉습니다 새가 간 뒤에 지붕은
이번에는 오로지 지붕이 됩니다
지붕과 창으로 이어지는 길은
햇빛이고 방으로 이어지는 길은
어둠입니다
허공에서 생긴 새들의 길은
허공의 몸 안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몸 안으로 들어간 길 밖에서
다른 새가 날기도 하고
뜰에서 천천히 지워질 길을
종종종 만들기도 합니다
서 있는 길 뒤에서
흔한 꽃 몇몇이
피다가 멈추고 피다가 멈추며
꽃 질 자리를 감추고 있습니다
감추고 있는 그곳까지
감추어질 길이 있습니다
- 오규원, 「지붕과 창」전문
이 시 또한 우리가사는 집의 지붕과 창을 보고 생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쓴 시다. 너무나도 흔해서 놓치기 쉬운 것들이 시인에게는 오히려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의지와 일반인과 조금만 다른 관찰력만 있으면 누구나 시를 쓸 수는 있다.
이 시에서는 허공이 제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원래 허공은 안과 밖이 없다. 시에서 보듯 지붕과 창, 방과 방 사이에 막힘이 없다. 햇살과 어둠의 차이도 없다. 모든 것은 ‘길’을 통해 허공으로 이어진다. 이런 허공의 이미지는 하늘과 비슷하게 다가온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을 만들어내는 ‘몸’이기도 하다. 여기서 허공은 하나의 살아 있는 실체가 된다. ‘감추고 있는 그곳까지/감추어질 길이’ 있다는 데서 보듯, 생명의 순환체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허공은 단순히 공간적 의미를 벗어난다. 꽃이 핀다는 행위 속에는 이미 꽃이 질 자리를 감추는 행위가 내포되어 있다. 이 감추어진 길은 이미 허공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만물은 허공의 움직임 속에 빚어진 형체일 뿐이고, 생명이 시작되는 것과 마감되는 것은 하나의 길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모든 존재란 계속해서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잠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뿐임을 말해준다.
노자는 무가 유의 존재 근거임을 밝혔다. 무의 쓰임이 있어서 유가 그 유용함이 있다는 것이다. 수레의 바퀴살이 제 용도를 하는 것은 바퀴살의 허공이 있기 때문인데(『도덕경』제 11장), 그것은 집이 집으로서 존재의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집이 안고 있는 허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논리와 같다. 이처럼 이 시에서는 노자가 밝힌 허공의 중요성과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허공은 꽃과 열매와 새를 끌어안고 있으면서 동시에 만들어내는 존재의 근원이 된다. 따라서 노자가 말한 허와 무(또는 공), 즉 허공은 허무주의가 아닌 참존재의 실체를 밝혀주는 근원자인 것이다. 이 시에서 허공은 모든 생명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근원적인 기능, 즉 잠재된 가능성으로서 생명의 전 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허공’에서 ‘꽃’이나 ‘열매’, ‘새’ 등이 생겨난다는 것은 허공이 만들어내는 생명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생명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하나의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2) 필기의 습관- 쓰고 또 쓰기
우리가 사는 주위 환경, 특히 지나쳐버릴 것에 대한 관찰을 하고 나면, 그 다음은 그 관찰 때 느꼈던 영감이나 정조를 재빨리 적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시간이 흐르면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 따라서 필기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거의 모든 시인이나 소설가 즉 문학가들은 메모하는 중독에 걸린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습작으로 메모해두는 노트만 수십 권인 경우가 허다하다.
거리를 지나가면서도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메모할 수 있도록 항상 필기도구를 가지고 다니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처음엔 조금 불편하지만 익숙해지면 외출 시 필기도구가 없으면 허전함). 굳이 바깥 환경에서만 시의 소재나 제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적어두기도 하고, 그 매체에서 한 좋은 말이나 대사가 있으면 적어두어 시 창작하는데 약간 써 먹으면 된다(전면적으로 인용할 경우에는 인용부호를 써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표절시비에 휩싸일 수 있다). 이렇듯 시를 창작하고자 하는 열의만 있으면 우리 주변은 항상 시의 소재거리가 될 수 있으며 이 소재거리를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드는냐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귀찮아도 필기하는 습관을 몸에 익혀두어야 하며 메모지를 항상 자기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
-영화, 워낭소리를 보고- 자본의, 문명의 이익이 닿지 않는 곳. 인간과 소는 둘이 아니고 하나였다. 늙기는 인간이나 소나 어쩔 수 없는 일... 소에게 막걸리를 먹이고는 소가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노인은...자신의 육체는 더욱 초라하고 늙어서 보기가 민망한데... 같이 늙어가는 둘 사이 인간과 짐승의 경계가 없다. 달콤하고 사악한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늙은 농부, 소 죽는다고 농약을 안 치는 농부, 노부인은 투정이지만 소는 묵묵부답 알고 있는 듯하다. 집도, 몸도, 외양간도 모두 늙어 하나가 되는 것. 평화롭고 한가로운 농촌 들녘. 만신창이가 몸, 우악스럽게 일만 두 존재, 말라비틀어진 몸이 서로를 위로한다. 늙은 농부가 몸이 아파 신음하는 소리에 소가 화답한다. 음메, 음메... 한평생이 서글프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늙은 농부, 늙은 소... 6남매 자식들 다 키워냈지만 자식들은 이제 소를 팔라고 하는데...소는 이를 아는지 늙은 주인을 보고 눈물 한 방울 뿌리는 소! 가야할 길을 준비한다. 소가 업이래! 코뚜레 끊어 없애던 날, 좋은 데 가라고 마지막 말, 마지막 눈물남기는 늙은 농부, 소는 눈을 감지 못하고 떠났다. 소의 주검에 흙을 묻어두고 그 위에 막걸리 한 통 쭉 부어주었다. 소가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술... |
낮은 봉우리 하나 소가 넘어간다
제 할 일 다 하고 넘어가는 봉우리에서
소는 이제야 휴, 휴식을 취한다
수십 년을 우직하게 함께 일한 늙은 농부는
먼저 간 소의 봉우리를
무심히 슬픈 눈으로 보듬어준다.
문명의 이기가 전혀 닿지 않은 곳
농부와 소는 그들만의 거친 힘으로
농사를 짓고 자식들 다 키우고 함께 늙어갔다
우직한 시간들은 만신창이 몸으로 흘렀고
농부는 소의 업이 되고
소는 농부의 업이 되어
둘은 서로를 불쌍히 여겨 하나가 되었다
성한 곳 하나 없는 바싹 마른 몸들
서글픈 한평생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하였는가!
탄식하는 소의 울음 소리
음-메, 음-메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소를 달래며 쓰다듬는 늙은 농부
상실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만
그 상실이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하는 힘
인 게야, 네 마음 다 안다.
낮아도 자기만의 봉우리를 잘 간직한
늙은 소와 늙은 농부는
많지 않은 시간 속에서
깊은 마음을 나누고 긴 이별을 했다
그래도 상실 없는 세상에서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방정민, 「소의 낮은 봉우리」전문
영화, ‘워낭소리’를 보면서 영화관에서 필기해두었던 것을, 그 이후 메모를 보면서 시를 쓴 경우다. 필기의 습관이, 메모의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가 훌륭한지 아닌지, 즉 작품성이 얼마나 있는가의 문제는 차후의 문제이다. 영화 보면서 무슨 메모를 하느냐, 고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메모 습관이 시인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메모 해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영화를 보았던 그 순간의 영감은 없어질 수 있다. 그러나 메모를 해 두면 그 영감이 시인의 무지각적 의식 속에 시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이후 시를 쓰려고 마음과 정신을 집중하면 그 씨앗이 조금씩 부풀어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메모는 이런 시의 종자의 생명력을 보존하는 비망록이라 할 수 있다.
3) 산문으로 내용정리, 모방시 써 보기
시를 어렵다고만 생각하면 절대 발전이 없으니까 일단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일상어를 사용하여 이 일상어를 어떻게 시적 언어로 바꿀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시에 대한 전문적인 공부도 꾸준히 해야 하지만, 시 창작을 처음 하는 사람은 무조건 시가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상어를 시적 언어로 조금씩 바꾸는 연습을 하면 좋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시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고 시가 어렵다는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시 창작의 단계를 밟으면 된다.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만 하지 말고 일단 역으로 시를 산문, 즉 일상어로 바꾸어 보고 다음에 그 시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시를 파악해가는 것이다. 위에서 나왔던 시를 가지고 연습을 해보자. 각 행의 내용을 산문(일상어)으로 바꾸어 보고, 내용을 정리해 보면서 시에 대한 감각을 조금씩 키워보자.
배추의 마음 -나희덕- | 산문(일상어) | 내용 정리 |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 배추가 내 마음을 아는 걸까. 해로운 농약을 쓰지 않아 잘 자랄지 고민하며 배추농사가 헛일일 것이라 걱정했는데, 그래도 배추농사 짓는 나는 행복해. 너희가 잘 자라면 기쁠 것이야. | 농약 없이 키우는 배추가 하도 자라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배추가 잘 자라주기를 기대한다. |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그래도 튼튼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보다 | 배추를 수확하기 전에 잘 자라라고 배추포기를 묶어주면서 보니 걱정한 것과 반대로 의외로 배추 속이 꽉 찼다. 그러나 그 속에 배추벌레가 한 마리 있다. 그런데 왠일인지 벌레가 불쌍해보였고 벌레에게 제 몸을 먹히는 배추가 순결해보이기까지 하였다. | 걱정과 달리 배추는 잘 자라주었고 속이 차다. 그러나 역시 벌레가 배추를 파먹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다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배추벌레도 수중한 생명이고 배추도 순결하며 내 옷에 뭍은 풀물도 자랑스럽다. |
이렇게 단계를 밟아서 시를 써보면 시가 어렵지 않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다음, 시 ‘배추의 마음’을 통해 일단 모방시를 써보자. ( )를 메워보자.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창작시를 써 보면 시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훨씬 시가 쉽게 느껴질 것이다. ⇒ 창작시 쓰기.
(예) 나무의 마음 나무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찬바람 불어 낙엽 지니 하도 외롭고 쓸쓸하여 겨울을 어찌 나나 하였더니 산새도 날아오고, 눈도 내려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 줄게. -내가 너를 포근히 감싸 줄게. | ( ) |
3. 시적 사고의 훈련
식물의 씨앗이 그저 커가는 것이 아니듯 시도 제대로 싹트고 자라려면 시인의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시인은 어느 한 부분만을 신에게서 받거나 천성으로 타고나므로 그 나머지는 시인 자신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발레리의 말을 시의 싹을 틔우고 줄기와 잎으로 자라나게 하는 과정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의 바탕이 되는 것은 평소에 시적 사고를 지속적으로 거듭하는 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틈나는 대로 시를 생각하는 그 일이 바로 그러한 노력의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때때로 전날의 노트를 펼쳐 거기 적힌 그 시의 씨앗을 자신의 상상력의 거울에 비추어보면 상상력이 만들어낸 새로운 그 무엇이 그 씨앗에 추가되게 된다.
이미지즘 시에서 이미지의 응축과 확산을 생명으로 하고 있는 시상전개의 구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구체적인 작품분석을 통하여 시상 전개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자.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로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 김광균, 「추일서정」 전문
이 시는 제목 자체가 암시하듯 가을날 낮에 느끼는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노래한 시이다. 그런데 이 시가 이전의 한국시와는 다른 점은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 혹은 감상적 정조의 직접적인 표출이 자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인의 감상적 정조가 작품의 선명한 이미지 구조와 이 이미지 구조에 바탕을 둔 치밀한 상상력과 결합한 데서 가능하다. 이 시가 당대의 문단에서 나름대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미지를 조작하는 시인의 새로운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낙엽’과 ‘망명정부의 지폐’, ‘길’과 ‘구겨진 넥타이’, ‘공장의 지붕’과 ‘흰 이빨’, ‘구름’과 ‘세로판지’의 결합들이 빚어내는 이 시의 전체적인 이미저리가 당대에는 가히 획기적으로 신선했을 것이다. 김광균은 사물들을 시적 대상으로 끌어들일 때 김기림보다 훨씬 정의(情意)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물을 정의적으로 대하는 것과 냉정하게 대하는 것이 시인됨을 구분 짓는 결정적 준거가 되지는 않지만, 통상적 관념으로 우리는 시인됨의 자질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로 감성적 태도를 꼽고 있음이 사실이다.(한계전, 51~52)
특히 시상전개에 있어서 시적 사고는 무수한 체험들과 상상력이 가장 큰 힘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부분이다. 과거의 체험들이 또는 앞으로 겪게 될 체험들이 적당한 햇빛과 물, 바람이 되어 시의 씨앗들에 싹을 틔우게 하고 성장하게 하며, 상상력은 여러 체험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면서 질서를 부여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만들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적 사고란 상상력을 펼치면서 시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 보는 일이라 할 수 있다.(이광수, 『현대시 창작강설』, 부산대시문학회, 15~17)
4. 유일한 방법은 없다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유일한 방법이 있을까?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두루 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각자에 있어 어떤 유일한 방법은 있을 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상당한 기간 동안 각자가 몸소 겪은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지을 것인가?’ 하는 이 거창한 문제를 말하는 것부터가 어찌 보면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시 창작의 유일한 방법은 없다. 있어서도 안 되지만. 다만 앞서 언급한 것을 정리하면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습작을 해보면서 시의 감각을 익히는 일이다. 그리고 스터디나 시 창작 수업을 들으면서 문학에 대한 이해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문학에 대해 자주 이야기도 나누고 특히 시에 대해 질문과 토론을 통해 시를 더 잘 이해하고, 남과 다른 나의 시 창작법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는 시의 좋고 나쁨은 판별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자기 시의 호오(好惡)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독서를 자주하고 문학에 대한 공부를 조금씩 깊이 있게 하면서 시에 대한 시각을 넓히면 좋다. 시도 결국 인문학이므로 문학 외에 역사나 철학을 공부하게 되면 시 창작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한국시의 계보를 공부하면서, 즉 한국현대시론이나 한국현대시사를 공부하게 되면 자기나름대로 시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게 된다. 어떻게 시가 발전해 왔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현재 어떤 시를 써야 하는지 감이 잡히는 것이다.
지식과 체험을 쌓아 가는 동안에 제각기 나름대로의 이해와 방법을 얻을 수밖에 없지만, 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일 것은 고맙게 받아들이는 마음의 준비가 꼭 있어야 한다. 엘리어트가 ‘개성으로부터의 도망’이라는 유일한 말을 했지만, 너무 자기 개성과 자기 소견만을 언제까지나 외고집하는 것은 시를 폭넓게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것임을 물론이다. 그렇다고 시인으로서의 자기의 입장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입장은 입장대로 가지고 남의 입장도 생각해 가면서 시를 다양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쉼 없는 노력과 넓은 도량이 치밀하고 풍부한 이해를 마련해 줄 것이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너무 바삐 서두르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이해가 안 되더라도 교양이 더 쌓이게 되면 나중에는 이해가 된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면 언젠간 반드시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김춘수, 『시의 이해와 작법』, 자유지성사, 110~113)
5. 시 다듬기
시를 한 번 쓰고 나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천재의 시인이라 할지라도 퇴고의 과정은 거치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도 절차탁마(대학이나 논어(시경)에 나오는 말로서 갈고 닦아야 학문이 완성된다는 말)해야 하거니와 시 또한 다르지 않다. 다듬고 또 다듬어야 좋은 시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 다듬기 과정, 즉 퇴고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구상의 단계에서 의도하였던 주제나 이미지, 운율 등의 시적 장치가 적절히 표현되었는가를 살펴서 미흡한 면을 첨가시키거나 삭제할 것.
둘째, 시상의 전개가 통일적이고 긴밀하게 짜여 있는가? 특히 행과 연의 구성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봄으로써 적절하게 재구성할 것.
셋째, 군더더기의 표현이나 모호하고 난해한 표현 등이 시적 감흥을 감소시키지 않나 살펴서 경제적인 표현을 할 것. 특히 시는 압축된 언어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 생명이므로 난삽하고 다변적인 표현은 되도록 멀리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참고*
맑은 감성(감성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무한한 창조성의 바탕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개인마다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고유성이며, 끊임없이 사물과 부딪쳐서 다양한 새로움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열정(시 창작에 대한 타오르는 불꽃같은 열정이 있어야 한다), 장인정신, 정신집중등이 시를 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