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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슨 맛일까? 맛이라는 것이 있긴 한 건가? 쓴맛? 단맛? 신맛? 어느 한 가지 맛이 툭 튀어나오지 않는다. 먹을수록 머리속에 물음표가 늘어난다. 냉면 사발만한 그릇 한가득 있는 밥알과 나물들, 국수 가락이 수저와 함께 한참을 놀더니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한 맛은 먹는 내내 물음표를 배가시켰는데 다 먹은 후에는 뿌듯하다. 든든하다. 갑가지 삶의 용기가 몰려온다. 정글을 헤쳐나간 탐험가의 용기가 이런 것이 아닐까! 밀림을 탐험하다가 열매를 따서 목을 축이고 그 위로 양쯔강의 물줄기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맑은 공기를 담뿍 들이마신 후에 밀려오는 차분한 뿌듯함이다. | |
이름? 이름은 뭐, 굳이 붙이자면…
이 음식은 지난 200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7일)안동 김씨 보백당 종가의 불천위(4대가 지나도 사당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고 자손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신위)제사에서 맛본 ‘메국수 나물 비빔밥’이다. ‘메국수 나물 비빔밥’은 생소한 이름이다. “종부님 이 음식이름이 뭐죠?” “이름? 이름은 뭐, 제사 지내고 난 다음 먹는 음식이지. 굳이 이름 붙이면 ‘메국수 나물 비빔밥’이 맞을려나!” 종부가 지어준 이름이다. 종부는 제사상에 올리는 국수를 ‘메국수’라고 부른다고 한다. ‘메’는 제사 때 신위 앞에 놓는 밥을 말하는데 설날에는 이 메가 떡국이 되기도 하고 추석에는 송편이 되기도 한다.
‘메국수 나물 비빔밥’은 제사상에 올렸던 5가지나물을 밥 위에 얹고 그 위에 고명처럼 메국수를 올려서 함께 비벼먹는 음식이다. “제사 음식에는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안 넣지. 나물들도 모두 참기름과 간장이나 소금으로만 간한 것이고 국수를 비빌 때도 그렇게 하지.” 특별히 한 가지 강한 맛이 튀어나오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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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백당 불천위 제사에 올라가는 시금치 | |
시금치, 도라지, 콩나물, 고사리, 무나물이 잘 비빈 쫄깃한 국수가락과 어울려 입안에서 모시적삼 같은 담백한 춤을 춘다. 국수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7:3으로 섞고 참기름이나 식용유 1숟가락과 물을 넣어 반죽한다. 밀가루를 뿌려가면서 큰 홍두깨로 밀어서 면을 만든다. 콩가루의 고소한 맛이 풍긴다.
종부는 “요즘은 꼭 그렇게 국수를 만들지는 않아! 힘들기도 해서. 예전 시어머니께서는 꼭 그렇게 만드셨지만.” 밤 8시에 제사를 올리고 한참이 지난 후 늦은 밤에 먹는 음식이다. 때를 놓쳐 먹는 음식은 위에 부담이 된다. 하지만 ‘메국수 나물 비빔밥’은 힘들게 지낸 제사의 노고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속도 편하다. 자연의 향취를 담은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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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천위 제사의 풍경은 기록으로 남길 유산
보백당 불천위 제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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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백당 종가는 조선초기 문신인 김계행(1431-1517)의 집안이다. 김계행의 호가 보백당이다. 고려개국공신 삼태사 한 명인 김선평의 후예다. 안동김씨 묵계파의 입향조(어떤 마을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인셈이다. 그는 젊은 날에는 성주향교, 충주향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50세의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올라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날렸다. 낙향해서는 송암폭포 위에 ‘만휴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묵계서원은 1687년(숙종13년)에 창건되었다. 김계행과 응계 옥고(1382~1436:세종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학자)의 위패를 모셨다.
나풀나풀 봄바람이 불고 새들이 노래하는 계절이 되면 묵계서원과 만휴정에는 여행객들이 모인다. 만휴정에서 내려다보는 송암폭포는 소박한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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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세로 생애를 마감한 김계행은 당시로 보자면 장수를 했다. 종부 김정희(79)씨는 “우리 집안이 장수한 어른이 많지. 시어머니도 91세까지 사셨어”라고 말한다. 김씨도 아직까지 책을 젊은 사람들처럼 읽을 정도로 건강하다. 종손 김주현(81. 19대손)씨도 청년 못지않다. 종가는 지금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는데 지금 살고 있는 대구와 안동을 날마다 다닐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불천위제사의 풍경은 신기하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필수품처럼 된 시대, 연애질하는 사진조차 달나라까지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 흰옷을 입은 40여명의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는 풍경은 놀랍다. 마치 조선시대를 옮겨놓은 것 같다.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이나 문화재를 복원하려는 사람들이 보백당 불천위 제사를 자주 찾는다. 이날도 <사단법인 문화를 가꾸는 사람들>의 김기원 팀장이 출동해서 제사의 처음과 끝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기록으로 남기자는 차원입니다. 기록으로 남겨야 후손들도 알 수 있고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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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듯하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오늘날 건강식
종부 김정희씨는 21살에 종손 김주현씨와 결혼했다. 종손이 경북대학교 사범대 4학년 때다. 새색시는 종손의 졸업식날 대학교문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수줍게 서성였다. “궁금하기는 했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지”라고 그날을 웃으면서 회상한다. 세상일에 수줍은 아낙네였다. 종손이 서울에서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곁에 있었다. 휴가라도 나오면 두 사람은 ‘전쟁과 평화’ 같은 영화를 손 꼭 붙잡고 보러갈 정도로 낭만적인 신혼을 보냈다. “종가 시집와서 일이 많았어. 그때는 몰랐지, 얼마나 일이 많은지. 지금도 고개가 설레설레 해”라고 말한다.
교실 8개를 빌려 제사상을 6개나 차린 적도 있었다. 종부는 그때 절을 24번이나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나던 때도 있었다. 32살 넘어 약국을 13년간 운영했는데 “그때는 정말 즐겁웠지,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했지만 오는 사람들 인사하고 지내는 게 좋았어”라고 말한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종손은 30년 넘게 역사 선생님으로 일했고 경상북도 교육감을 두 번 지냈다. 퇴임을 한 후에는 ‘보백당장학문화재단’을 만들어 선조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16년 전 문중사람들을 모아 돈을 모으고 지금까지 장학금을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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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가 끝나고 음복하기 위해 접시에 담은 떡 | |
종부의 손을 거쳐 나오는 떡들은 넉넉한 인심을 담아 두툼하고 쫄깃하다. 경단, 부편, 잡과편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배추전은 싱거운 맛이 매력이다. 싱싱한 배추 잎을 따서 소금물에 잠깐 적셨다가 밀가루와 물을 섞은 것에 배추잎을 적시고 프라이팬에 굽는다. 평상시에도 자주 해먹는다. 진한 맛이 없어서 배추 자체의 아삭아삭한 맛이 더잘 느껴진다. 김주현씨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주로 채소로 음식을 많이 해주셨지요, 다시마나 해산물을 좋아하셔서 그런 요리를 잘 해주셨어요”라고 말한다. 이댁의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는 비결 중에 하나다. 옛 선조들의 무심한 듯하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음식이 오늘날 건강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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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 최고 솜씨요? 수란채죠! 수란채”, “우리 형님이요, 뭐 다 잘하세요. 그 중에서 수란채, 불고기, 모시송편 다 맛나죠!” 딸과 동서들이 한결 같은 소리를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14대 종손 류영하(85)씨의 생신축하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음식에도 DNA가 있다고들 한다. 같은 송편이라도 맛이 천차만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DNA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손맛이 만든다. | |
음식 DNA부터 다른 경주 최부자집 둘째딸
안동 하회마을에 터를 잡은 류성룡 선생의 14대 종부 최소희(83)씨는 그 손맛이 남다르다. 종손 류영하씨와 스무 살에 결혼하기 전까지 그는 경주 최부자집 둘째딸이었다. 최준 선생이 그의 할아버지다. 미식가였던 최준 선생은 맛난 음식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경성 요리집에서 맛난 것 드시면 그 요리사를 집으로 데리고 오셔서 집에서 시연을 했어요. 모두들 따라해 보고 맛도 보고 했어요”라고 최씨는 말한다. 어릴 때부터 그가 경험한 맛 세계가 예사롭지 않다. 류영하씨는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하지 않아 여러 가지 놓고 먹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종부 최씨의 예민한 입맛과 섬세한 손맛이 소박하고 단아한 서애 류성룡댁의 부엌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이름난 종가답게 이 댁에는 손님이 많다.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방문했고 2007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녀갔다. 그때 최씨가 만든 음식이 ‘수란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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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란채에 들어가는 당근 | |
수란채는 최씨가 귀한 손님들이 올 때마다 만드는 건강식이다. 찌고 데친 각종 채소와 문어, 게살 등에 수란(물속에서 반숙 정도로 익힌 달걀)을 얹고 잣즙을 뿌려 먹는 음식이다. 최씨가 만드는 수란채에는 보들보들한 영덕대게 다리살이 들어가고 당근이 꽃모양으로 다시 태어난다.
석이버섯은 기지개를 편 아이처럼 반듯하고 수란은 보름달처럼 넉넉하게 둥글다. 한 자리 차지한 데친 미나리와 문어도 향긋한 풍미를 자랑한다. 서로 다른 식재료들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착한 맛’을 내고 있다. 숙명여대 식생활문화대학원 심기현 교수는 잣에는 비만을 예방하는 성분이 있고 대게나 문어에는 타우린이 있어 영양적인 면에서 훌륭하다고 말한다. “타우린은 피로회복과 강장효과가 있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조리법도 튀기는 것이 아니라 찌는 방식이어서 좋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저지방 고단백음식이다. | |
술꾼이라면 기억회로에 저장해두고 싶은 맛
종부 최소희 여사가 만든 가양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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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이 들어가는 요리는 예부터 귀한 음식이었다. 종부 최씨는 꼭 국산 잣을 써야 맛나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이들이 만드는 수란채와 달리 미나리 등에 녹말가루를 묻히지 않는다. 수란을 만드는 방법도 조금은 차이가 있다. 국자에 달걀을 얹거나 그릇에 넣어 중탕으로 수란을 뜨지 않고 숟가락 뒤 부분으로 톡톡 쳐서 작은 구멍을 내고 물이 끓으면 천천히 달걀껍질을 깨서 넣는다. 흰자가 넓게 풀어지지 않게 숟가락으로 모으면서 반숙을 한다.
잣즙이 뿌려지는 순간 고소한 바다에 빠진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그 사이로 올라오는 미나리는 씹는 식감이 쫄깃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잘 떠서 드세요. 달걀 터트리지 말고 한 입 먹고, 나머지 먹어요”라고 최씨가 당부한다. 노 전 대통령은 수란채를 먹고 흐뭇하게 “맛있다”고 했다고 최씨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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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향긋한 가양주를 만드는 실력도 최고다. 제사를 지내기 한 달 전부터 빚기 시작하는데 그 맛이 오묘하다. 달지 않은 듯한데 달고, 쓰지 않은 듯한데 쌉싸르하고, 신듯하면서 시지 않은 맛이다. 신선이 조화를 부린 술맛이다. “안동시장님이 최근에도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한 병만 달라고 부탁해서 주었지요”라고 종손이 말한다.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하다. 술꾼이라면 한번쯤 꼭 맛보고 혀의 기억회로에 저장해두고 싶은 달콤한 맛이다. 찹쌀로 죽을 끓이고 누룩을 넣은 후 1차 발효를 시키고 며칠 뒤 고두밥을 넣고 다시 발효시킨다. 이불에 폭 싸서 따끈한 방바닥에 두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성냥불을 켜서 꺼지지 않으면 이불을 걷어 지꺼기를 가라앉히고 용수(술이나 장을 거르는 데 쓰는 싸리나 대오리로 만든 둥글고 긴 통)를 박는다. 제사 때마다 최씨는 이 술로 정성을 기울인다. 불고기 양념으로 만드는 닭다리나 모시 잎을 데쳐 꼭 짜고 쌀가루와 함께 버무려 빚는 모시송편도 담백한 건강식들이다. | |
네살배기 시동생은 부끄럼 많은 형수의 치마폭으로 숨어 들고…
이 댁은 전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종가다.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류성룡 선생이다. 이순신 장군을 천거해서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해쳐나간 조선시대 학자겸 문인이다. 최씨는 “처음에 이 댁으로 시집간다고 결정 났을 때 어머니가 걱정도 많이 하셨어요. 큰 종가라서 잘 해야 할 일들도 많아서 그러셨지요”라고 말하면서 종부로서 일들은 오히려 별로 버겁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음고생은 집안의 대소사보다 신혼 때 했다. 종손 류영하씨는 일제강점기 말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정도로 열혈청년이었다. 종부가 “마음고생 할 일”들이 뒤따랐다. “그 시대 지식인들은 다 그랬지”라고 종손이 회상한다.
그 옛날 최씨가 종택 ‘충효당’에 처음 왔을 때 풍경은 마치 오래된 한국영화 한편을 보는 듯하다. “시동생이 네 살이었어요. 시어머니와도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마치 친자매처럼 지냈어요. 12살 차이였죠.” 어린 시동생은 부끄러움 많은 형수의 치마폭으로 자주 숨어들었다. 큰 누이처럼 키웠다. 시어머니 박필술씨는 종손이 10살 때 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종손의 아버지와 결혼한 분이었다. <명가의 내훈>이라는 책을 낼 정도로 총명하고 현명한 분이었다고 사람들은 회상한다. 종손은 한국전쟁을 겪고 난후에 성균관대학교 생물학과를 다시 들어가서 석사까지 마치고 서울에서 생물교사로 일했다. 종부는 4남매를 키우면서 서울살림을 했다. 류영하씨는 아버지가 1971년 돌아가시자 이듬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종가를 지키기 위해 고향 안동으로 내려왔다. 그는 종택 ‘충효당’을 지키면서 지금까지 사람들과 소통하는 종가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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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폭발하며 잃은 큰딸, 손님으로 북적대며 고통 치유
충효당에 가족들이 모이면 언제나 화기애애하다. 둘째며느리 문상원(52)씨는 “제사가 많기는 하지만 축제여요. 다들 모여서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고 웃음이 끊이지 않죠”라고 말한다. 이렇게 북적북적 사람들이 자주 모이게 된 데는 가풍의 영향도 있지만 고통을 치유하려는 의지도 있었다.
종손 부부는 큰딸가족을 대한항공기(KAL) 폭파 사건(1987년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공중폭파된 사건) 때 잃었다. 미국 코넬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갔던 사위가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탄 비행기가 KAL기였다.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집안에도 신이 던져주는 삶의 고통이 있었다. “전날 이상한 꿈을 꾸었지요. 딸이 같이 미국가자 고 하는 거예요, 나는 여권이 없다, 하고 가져와야겠다 했는데 꿈이 깼어요”라고 종부는 말한다. 종손과 종부는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한다. 고택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것으로 긴 고통의 세월을 이겨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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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안채를 찾은 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 |
반짝반짝 봄볕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충효당’은 전국에서 찾아온 이들로 북적인다. 두 사람은 부드러운 미소로 이곳을 찾은 이 누구라도 물 한잔 대접하면서 얘기를 나눈다. 방학 중에 우연히 이곳을 찾은 대학생 한선미씨는 “추운데 들어와요, 궁금한 거 다 얘기해줄테니”라고 따스하게 맞아주는 종부의 손에 이끌려 ‘손녀딸’이라도 된 듯 귀한 대접을 받는다. 한씨가 종부에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종부가 한마디한다. “사람에겐 무엇이든 다 중요하지” 단아한 두 사람의 풍모가 우아한 고택과 어우러져 따스하기 그지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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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럽다. 달그락 달그락. 5평도 안 되는 작은 부엌에 아낙네들이 5명이나 모여 있다. 쪼그리고 앉은 폼이 천상 요가하는 인도인이다. 한복을 곱게 여며 입은 아낙도 있다. 대장이다. “고기 한동가리 가죠 온나”, “김은 어찔까”, “계름하겨 달라고.” 부엌 바닥에는 요술램프에서 나온 지니가 주인님을 위해 차린 듯한 산해진미들이 쫙~ 깔려 있다. 부엌에 들어선 이들은 모두 까치발로 총총걸음이다. 스르륵, 부엌문이 열리자 굵고 정겨운 소리가 들린다. “숙아, 다 됐나?” ‘안동 장씨 경당 종택’ 종손 장성진(72)씨가 아내 권순(71)씨에게 하는 말이다. ‘숙’은 딸의 이름이다. | |
돈전은 이란성 쌍둥이…우엉조림은 샤프펜슬 심만큼 가늘어
새해 1월1일, 경당 종택은 시끄럽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친지들이 종손에게 새해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인사도 인사지만 속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 장씨의 재종숙인 장기철(70)씨는 “종부 음식은 감미롭지. 첫날 그 맛난 것으로 시작하면 최고로 기분좋지”라고 말한다.
종부가 만든 호박전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달걀노른자만 입힌 것은 노란색 호박전, 흰자위만 입힌 것은 흰색 호박전이 된다. “돈전 예쁘지?” 돈전? 납작하게 자른 호박 모양이 동전을 닮아서 ‘돈전’이라고 부른다. 우엉조림은 샤프펜슬 심만큼 가늘게 잘려 차분하게 접시에 앉아 있다. 육회는 두 가지 색이 어우러져 눈을 확 잡아끈다. 짙은 녹색의 미나리와 빨간 육고기. “우리 집안은 육회에 꼭 미나리를 넣지.” 장성진씨의 누이 후진(74)씨가 정겨운 미소로 일러준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미나리향이 혼례를 치르는 누이의 입술처럼 붉은 고기조각에 배여 있다. 후각이 입안의 세포를 깨우고 미각이 급하게 흥분한다. 맑고 넉넉한 명태찌개는 소금기 없는 담백한 바다 같다. 북어를 두들겨 만든 고운 가루를 참기름으로 버무린 ‘보푸라기’도 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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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종택 손님 맞이상. 경당종택은 새해에 정갈한 음식으로 손님을 맞는다. | |
권씨는 바쁘게 ‘팥잎국’을 끓인다. 팥잎국은 종손 장씨가 가장 좋아하는 국이다. 이름은 낯설지만 친근한 식재료다. 팥의 잎이다. 보기에는 맑은 시래기국 같지만 맛은 완전 딴판이다.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비할 데 없다. 장성진씨는 12년 전 갑상선암에 걸렸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해였다.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해 넉달 만에 생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종부의 지극정성이 그의 마음을 돌렸다. 종부는 그가 좋아하는 팥잎국을 정성스럽게 식탁에 올렸다고 한다. “종손이 좋아해서 자주 해주었지요. 지금까지도 자주 해먹어요. 다른 집에선 이제 안 먹는 음식이지요.”라고 말한다.
팥잎국은 말린 팥잎을 살짝 삶아 콩가루에 묻힌 후 다시마와 멸치로 우린 물에 넣고 끊인 국이다.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숙명여대 한국음식연구원 연구원 심기현씨는 “일반적으로 말린 채소는 성분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고 식이섬유도 풍부하다”고 말한다. 콩가루의 영양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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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 선생의 아버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경당 종택은 경당 장흥효(1564~1634. 조선 중기 학자) 선생의 종가다. 장흥효 선생은 최초의 한글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 선생의 아버지이다. 장계향 선생의 친정이 되는 셈이다. 장흥효 선생은 벼슬길을 멀리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후학 양성에 전념한 학자이다. 안동 장씨의 시조는 태사 충헌공 장정필 선생이다. 장정필 선생은 신라 진성여왕 6년(892년)에 당나라에서 아버지를 따라 신라로 넘어왔고, 고려 태조 13년에 김선평, 권행 등과 군사를 일으켜 견훤군을 격파했다고 한다. 고려 태조는 그 공을 높이 사 ‘태사’라는 벼슬을 주고 안동을 ‘식읍’(나라에서 공신이나 왕족에게 내리던 토지와 가호)으로 하사했다. 종손 장성진씨는 장정필 선생의 37대손이자 장흥효 선생의 11대손이다.
종부 권순 선생은 25살에 26살이었던 종손과 결혼을 했다. 조용하고 단아한 종부는 마음에 작은 한이 있다. 혼례를 치르던 날, 25살 처녀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이가 신랑이었다. 이날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옷을 입는 날이다. 평생 단 한번이다. 하지만 권순 선생은 알록달록한 색동옷을 입지 못했다. 흰옷을 입고 절을 올리고 혼례를 치렀다. 종손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신랑은 군대 가버렸지. 시어머니 빈소가 집안에 있어서 3년간 조석을 올리고 곡소리도 했지. 3년간 흰옷만 입었다니까.” 종손은 “나 때문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며 지긋한 시선으로 종부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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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난 밤늦은 귀가 때면 문지방에 물 살짝 부어 얼게
경당종택 들머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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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 장성진 선생은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지만 3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후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시 대구시청 공무원시험을 치르고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종가를 지켜야 한다는 부친의 뜻 때문에 사회생활도 오래 하지는 못했다. 부친은 종손에게 알리지도 않고 덜컹 대구시청에 사표를 냈다.
종손은 31살이 되는 해에 고향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종손의 방황이 시작했다. 완고한 아버지와 젊은 열기가 충만했던 아들은 반목했다. 그 사이에서 종부는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를 모시고 시누이 세 명과 살았다. 마음씀씀이가 착하다고 소문난 ‘선한’ 종부는 남편이 겨울날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문지방에 살짝 물을 부어 얼게 하고, 대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삐걱’ 소리라도 나는 날이면 늦게 들어오는 아들에게 시아버지는 불호령을 내렸다. | |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에서 마음 졸이던 그에게 빛이 들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40여년 전 아버님이 정남향으로 있는 집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선조의) 묘 자리를 옮겼지. 그때부터 부자관계가 좋아지더라고.” 조금씩 마음을 잡은 종손은 농사도 짓고 종가를 알리고 지키는 일을 했다. 덜컥 갑상선암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강한 의지와 종부의 정성으로 이겨냈다. “나무와 꽃을 심고 담배, 술은 전혀 안 하고 뒷산 조깅을 했지. 마음을 비우고 살았어.”종손은 지금도 약을 계속 먹고 있지만 병은 거의 완치되었다고 말한다. “모두 아내 덕이죠.” | |
동동주는 술같지 않은 술…한과는 미술품
종부의 음식솜씨는 유명하다. 친정이 종가였기에 어릴 때부터 ‘배운 가락’이 있는데다 시집와선 시누이들에게 장씨 종가의 맛을 배웠다. 안동문화해설사 김호태씨는 “장씨 집안 음식솜씨는 안동에서도 유명합니다. 종부의 안동국시는 서울에서도 맛보려고 내려올 정도죠. 마치 장계향 선생이 돌아온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종부가 해주는 안동국시는 국수 가락을 신문지에 올려놓으면 훤히 글자가 비칠 정도로 얇다.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으면 사탕처럼 사르르 녹는다. 5살 아이가 누울 수 있는 정도로 큰 도마에 긴 방망이로 양팔을 벌려 반죽덩어리를 미는 모습은 진풍경이다.
새해를 맞아 이 댁을 찾은 손님들은 국수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종부가 마지막으로 내오는 동동주와 한과, 묵나물로 넉넉하게 배를 채운다. 종부가 집에서 담근 동동주는 술 같지 않다. 벌컥벌컥 들이켜도 그저 단 음료수를 마시는 듯하고 한과는 그 모양이 칸딘스키의 미술품처럼 세련되고 그윽하다. 묵나물은 또 어떤가! 안동국시처럼 부드럽다. 따끈한 종가의 온돌방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맛과 합쳐져 ‘마음의 평화’가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행복감이 밀려온다. 손님들은 길을 나서면서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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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종택한과.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종부의 한과 | |
종손은 지금 ‘고택 체험’를 운영하고 있다. 전화로 신청하면 이 댁에서 자고 종부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최근에 종부는 몸이 좋지 않다. 종손의 누이들도 음식솜씨가 뛰어나서 종부를 도와 음식을 만든다. | |
퍼온 자료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