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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
공수부대의 잔혹한 활약상 +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나?
2015.10.17. http://blog.naver.com/alsn76/220511169987
해방 광주의 1주일
● 무장투쟁 외에 다른 방법이 있었나?
시민군은 5월 21일 저녁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광주 외곽은 봉쇄되어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고,
전화마저 두절되어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는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백무현, 만화 전두환 1권 p.178)
"광주에서 뭔 사태가 벌어졌다는데..
신문에서는 한 줄도 보도가 안 되고 있으니 당최 알 수가 있나?"
"어제 광주 친척한테서 전화 왔는데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고 난리라는 거야."
"에이 설마, 군인이 시민을 왜 죽여? 유언비어겠지.
김대중이가 유언비어를 조작해서 선동하고 있는 거야!"
"감옥에 있는 김대중이가 언제 밖에 나와 선동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김대중이지!"
"...?"
당시 광주에 거주하고 있던 인류학자 리나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p.140)
리나 루이스
"여기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른 곳에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최정운 교수의 얘기다.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p.159)
최정운
"당시 군부는 언론을 철저히 통제해서, 외부에서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무도
알 수 없었어요. 즉 군부는 관객석을 봉쇄해서 광주에만 제한된 폭력극장을 만들었으니,
관객이 없는 이상 비폭력은 아무런 전술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죠."
최정운
"관객이 없다는 것은, 폭력의 부당함을 호소하고자 하는 광주시민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어요. 그러니 타지역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광주시민들은,
폭력적 대결 외에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겁니다."
왜 광주 항쟁에 북한 침투설, 북한 사주설이 나도는 것일까?
또 왜 김대중은 5.18과 관련해서 사형선고를 언도받았던 것일까? ☞ (참고영상)
전두환
"공수를 투입했는데 왜 사태가 더 커지는 거야?"
허화평
"잘못하면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무조건 사태 확산을 막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전두환
"하지만 지나친 과격진압은 좋지가 않아!
앞으로 새 정부를 수립하려면 대내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이학봉
"현 광주사태를 북괴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몰아가면 어떻겠습니까?
언론에서 그렇게 몰아가고 광주를 봉쇄해 버리면,
일단 불길이 다른 쪽으로 번지는 건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두환
"레드 컴플렉스를 이용하자는 말이지?"
허화평
"하지만 광주 시민들도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학봉
"지금 광주시민들은 김대중이 때문에 들고일어난 게 큽니다.
그러니 아예 김대중이가 이번 폭동의 배후조종을 한 것으로 처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전두환
"읭?"
이학봉
"한 마디로 김대중이를 내란 음모로 엮는 것입니다.
북괴의 지시를 받은 김대중이가 광주의 학생들을 사주해서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는 겁니다."
전두환
"어라?"
이학봉
"또 고정간첩들이 시민을 폭도로 만들고 있다고 하면 국민들이
광주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레 광주를 고립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광주 사태도 해결되고 DJ도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 (참고영상)
전두환
"옳거니! 좋아, 아주 좋아!"
▲ 당시의 기사 : 초반 언론통제에서, 이후 '폭동'을 강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언론에 노출했다
● 5월 22일 : 총을 들자 vs 총을 반납하자
진압군이 물러간 일명 '해방광주'에서는,
공무원·신부·목사 등이 주축이 되어 수습대책위원회(이하 수습위)를 구성했다.
이때 수습위는 전화를 통해 정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했고,
"우리는 사태를 자율적으로 수습할 테니, 군대를 투입하지 말고 과잉진압을 하지 마라."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시민군들에게 총기 반납을 요구했다.
수습위
"오늘 우리의 요구 사항을 전달혔습니다. 정부에서는 무기를 반납하면 구속자를
선별 석방할 것을 약속혔습니다. 그랑게 일단 무기부터 반납하도록 협시다."
하지만 시민군 측에서는 크게 반발했고,
시민군
"무기 반납은 말도 안 되지라.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시민들의 피를 팔아먹는 것이요. 안 그요?"
심지어 총을 목에 들이대며 위협을 가하기도 했었다.
(최영태, 5.12 그리고 역사 p.112)
시민군
"수습위는 무슨 수습위야. 전투본부를 만들어야지. 또 니들이 뭔데 설치냐!"
하지만 중고교 학생들까지 아무렇게나 소총을 들고, 수류탄의 안전핀을 주머니에 달고 다니는 등 위험천만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폭발사고를 우려해 수류탄부터 모두 회수하게 되었고,
(최영태, 5.12 그리고 역사 p.117~118)
결국 수습위의 설득에 못 이겨 소총도 대부분 반납되게 된다.
수습위
"좋았어! 이러면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겠어."
그러나 22일 밤에 터진 언론의 보도에 수습위와 시민군들은 커다란 배신감을 맛봐야만 했으니,
"지난 18일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광주의 시위가..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발전된 것은, 타 지역의 불순분자와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단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광주에 잠입하여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공공시설 파괴와 방화·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일으킨데 기인한 것이다.
조사 결과, 이번 시위는 김대중이 배후를 조종한 내란음모 사건였음이 드러났다."
"뭣이라? 약탈행위? 우리는 은행에서 10원도 털지 않았어라."
"불순분자? 고정간첩? 말도 안 되는 소리 혀고 자빠졌네."
결국 정부의 이런 발표는 수습위를 허탈하게 만들었고, 정부에 대한 불신감만 가중시키게 되었다.
● 5월 23일 : 주남마을 버스 테러
진압군의 고립 작전으로 차량의 검문검색이 심화됐기 때문에
차량을 탈취하고 시외로 진입하려는 시민군들은 예기치 못한 봉변을 겪어야만 했는데,
21일 저녁 송암동에서는 버스 두 대가 인근 야산에 매복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차량 모두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 광주민중항쟁비망록 p.139)
이때 비명이 멀리 주택가까지 들렸다.
"으아아~!!"
이런 상황은 밤새 계속 벌어졌으니,
"탕탕탕탕..."
"으아아~!!"
총소리가 나면 마을 주민들은 으레 차량이 총에 맞은 것으로 생각했다.
"워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사건 지점에 조심스럽게 나가본 주민들은
도로 양쪽에 있는 논에 20대 청년들로 보이는 시체 9구를 발견하게 되었고,
"시상에!"
잠시 후 계엄군의 차량 한 대가 시신을 모두 싣고 군용 담요를 덮어 은폐한 뒤
산속으로 들어가더니 헬기가 나타나 시체를 실어 나르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 광주민중항쟁비망록 p.139)
5월 23일 광주 주남마을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이 무렵 시체를 넣을 관이
턱없이 부족하자 시민군들은 외부에서라도 관을 가져와야 한다고 요구했고,
이에 수습대책위는 소형버스를 내줬다.
"그럼, 조심해서 댕겨들 오라고.."
그런데 이때 20대 여공이었던 김춘례가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김춘례
"시방 저도 가면 안 되겠나요? 5월 23일, 오늘이 할아버지 제사날이라."
"그럼, 그려."
이때 공장 동료인 여공 하나도 같이 따라가겠다며 나서며,
시민군 5명, 여고생 2명, 여성노동자 2명 등 총 11명이 탑승하게 되었다.
하지만 화순 방면으로 가려면 주남마을을 지나야 했는데,
주남마을 부근을 지날 즈음 갑자기 매복해 있던 군인이 나타났다.
"정지!"
시민군
"시방, 공수 놈들이 숨어있었네."
놀란 운전사는 전속력을 내봤지만, 곧 군인들의 총탄 세례를 받아
"저 새끼들이..!"
"탕탕탕탕!"
100미터도 채 달리지 못하고 도로 옆으로 굴러 엎어져서, 현장에서 8명이 즉사하고,
남자 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여자 1명은 파편에 맞아 경상을 입었다.
진압군들은 시체들을 버스에서 끌어내어 길옆에 눕히고 흙으로 덮었고,
부상자 3명은 주남마을 뒷산으로 데려갔다.
이때 뒷산까지 리어카에 실려 오면서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남자 2명은 연신 살려달라고 절규했으나, 즉결처분 당했고,
"탕탕!"
경상자인 여고생(홍금숙) 1명만이
헬기로 후송되어 유일한 생존자가 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 벌집이 된 차 안에는 무기라고는 M1소총 1정 뿐이었다.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 광주민중항쟁지망록 p.145~148)
● 5월 24일 : 송암동의 인간 사냥
공수부대는 광주를 고립시키기 위해 시 외곽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는데,
5월 24일 광주 남쪽 외곽에서는 장갑차를 앞세워 이동 중이던 공수부대원들이
한 초등학교 앞에서 시민군 수 명을 발견한 일이 있었다.
"저 앞에 폭도다!"
그러자 앞서 가던 공수부대원들이 일제히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고,
"드르르르!"
후미에 이동하던 공수부대원들도 깜짝 놀라며
막무가내로 인근 마을을 행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니,
"탕탕탕!"
이때 송암동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던 아이들 중에
전남중학교 1학년생이던 방광범 군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고,
동산에서 야구 놀이를 하던 효덕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 군이
총알을 10발이나 맞고 온몸이 벌집이 되어 사망한 일이 발생했다.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p.173)
또 무차별한 총격에 의해 집안에 있던 많은 마을 주민들이 부상을 입었고,
목장의 젖소 12마리와 칠면조 2백마리가 모두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어이없는 일은 계속 이어졌다. 도로변에서 트럭 4대를 발견하자,
공수부대원
"저기 폭도들 트럭이다!"
다급히 박격포로 트럭 4대를 파괴시키고 수류탄과 크레모아를 투척했는데,
▲ 당시 사용했던 90미리 무반동총
나중에 알고 보니 트럭에는 시민군이 아닌
외곽봉쇄업무를 수행하던 광주보병학교의 군인들이 타고 있었던 게 아닌가!
"헐!"
이 오인사격으로 9명이 사망하고 4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5.18의 군경 사망자 중 1/3이 여기서 발생했다)
공수부대원
"아놔, 이게 뭐야!"
그런데 오인사격을 하고 단단히 화가 난 공수부대원들은
애꿎게도 마을로 내려가 주민들에게 화풀이를 하고자 했으니,
마을을 샅샅이 수색하며 시민군으로 의심되는 청년들을 불러낸 군인들은,
"워매, 우리 아들래미가 뭔 잘못을 혔다고 그란데요?"
공수부대원
"잠깐 몇 마디만 물어보고 돌려보낼 거예요."
청년 3명을 철로 변으로 끌고 가더니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고,
이때 아들을 찾아나서던 주부 1명(박연옥, 61세)이
"아이구, 병철아!"
총소리에 놀라 동네 하수구로 몸을 피해 웅크리고 있다가
공수부대원에게 발각되어 M16 소총으로 난사되어 즉사하고 말았다.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 광주민중항쟁지망록 p.140~143)
이 모든 일은 송암동 한 부락에서 5월 24일 단 하루 동안에 발생한 것들이었다.
"헐!"
● 5월 25일 : 독침사건
수습위의 집요한 무기 회수작업으로 인해
5월 24일에는 모두 4천여 정의 총과 1천 개 이상의 수류탄이 회수되었고,
무장 시민군의 숫자는 수백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25일 오전에는 '독침사건'이 발생해 시민군의 수는 더욱 줄어들어
거의 다 무장 해제되게 된다.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p.213)
독침사건이라니, 대체 어떤 일이길래 그런가? 5월 25일 아침 8시,
21세 장계범이라는 청년이 갑자기 넘어지며 어깨를 움켜쥐었다. ☞ (참고영상)
장계범
"윽! 독침에 맞았다!"
이때 경비 중이던 시민군 한 명이 그의 어깨를 살펴보기 위해 다가섰지만,
장계범
"넌 필요 없어! 정형 나 좀 봐줘."
그러자 정한규(당시 23세)가
장계범의 웃옷을 벗겨 상처부위를 입으로 몇 번 빨아내는 시늉을 하더니
부축하여 대기해 있던 차로 전남대병원으로 급히 실어갔다.
독침사건이 발생하자 도청 안의 분위기는 갑작스레 살벌해졌다.
"헐! 독침이라니.. 여기에 간첩이라도 있나 벼."
그렇지 않아도 수습위와의 갈등과 대치 상황이 장기화될 듯하면서 분위기가 가라앉았던 시민군들이건만, 독침사건으로 더 이상 불안해서 못 있겠다며 상당수가 빠져나가버린 것이다.
"에잇, 목숨 걸고 이짓거리 더 이상 못하겠어!"
"나도 안 해!"
하지만 그렇게 빠져나간 이들은 대부분이 계엄군 측의 정보요원들이었고
사건은 사실, 계엄군 측에서 사전에 계획된 교란작전이었다. ☞ (참고영상)
(황석영, 죽음을 넘어 어둠을 넘어 p.183~184)
전남대병원에 도착해보니 장계범은 이미 달아난 상태였고,
미처 달아나지 못했던 정한규를 붙잡아 시민군들은 이런 사실을 캐낼 수 있었다.
시민군
"아놔!"
한편 24일, 신군부는 주한미군사령부로 전방부대(20사단)의 광주로의 이동을
요청했는데, 뜻밖에도 미국은 이때 너무도 쉽게 승인을 해줬다.
위컴
"전 장군의 뜻이오?"
주영복 (국방장관)
"그렇습니다."
위컴
"그럼 좋습니다. 승인합니다."
당시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역시, 공수부대'만으로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왕이면, 미국의 '승인'을 받은 20사단의 파견을 통해
광주의 무력진압이 '미국의 지지'를 받아 이뤄진 일이라 정치 선전을 할 수 있도록
미리 계산한 일이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p.206)
전두환
"좋아, 아주 좋아!"
● 5월 26일 : 최후통첩
26일, 광주의 수습위는 최규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 진압군 지휘부와 만나고 있는 수습위
"광주사태의 수습을 위해 지금이라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사태 발단의 진실을 정부와 군이 인정을 하고, 시민들에게 사죄를 하고, 만행을 저지른 군인들을 엄중히 처단할 것을 약속해주십시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1권 p.153~154)
그러나 편지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오히려 이날 최규하는 최후의 통첩을 발표하고 말았다.
최규하
"어서 총을 버리고 해산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강경진압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계엄군 측은 거듭 경고했다.
계엄군
"경고합니다. 오늘 중으로 도청을 비우세요!"
하지만 시민군 측은 끝까지 총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으니, 이날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행해졌던 기자회견에서 시민군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 (참고영상)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
"우리는 결사항쟁의 마음을 갖고 계엄군과 맞서 도청을 사수하고 있습니다."
외신기자
"무장상태가 허술한데, 끝까지 싸우겠습니까, 아니면 항복할 겁니까?"
윤상원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겁니다."
외신기자
"당신들은 분명 죽을 텐데, 죽음을 각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윤상원
"우리의 죽음은 저들의 야만성을 증거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이 땅에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왜 끝까지 싸우겠다는 말인가? 말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일간지 볼티모어 선은 당시의 인터뷰를 이렇게 평가했다.
(서울신문, 1998년 9월 10일자 6면)
"시민군은 자신들이 죽을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등학생들을 설득해서
모두 집으로 보낸 장면은 매우 인상 깊었다. 이는 세계 어느 무장조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진정한 투사의 진면목이었다."
그리고 26일 밤, 도청에서는 3만 명의 시위대 중
99%가 집으로 돌아가고, 1%만이 최후까지 남기로 했다.
이들은 그날 밤 진압이 있으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남았던 것이다. 그날 밤은 참으로 처연했다.
● 5월 27일 : 시민군의 최후
5월 27일 0시를 기점으로 광주의 시외통화가 끊기자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곧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시방, 올 것이 올랑가 보요."
그리고 27일 새벽 1시, 탱크를 앞세운 진압군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도움을 호소하는 여성의 애절한 가두 방송이 들려왔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겁에 질린 광주시민들은 아무도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새벽 3시 30분, 시민군 내부에서는 자폭하자는 의견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황석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p.241)
"그냥 콱! 다 디져뿔까?"
그리고 새벽 4시 도청 앞.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시민군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계엄군의 장갑차 위에 장착한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는 가운데
'항복'을 권유하는 계엄군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경고다. 살고 싶으면 항복하라."
그러나 도청 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곧 총성이 울림과 함께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탕탕탕!" "드르르르륵"
자동화기의 콩 볶는 소리가 일시에 들렸고, 수많은 시민군들이 죽어갔다.
"으아아악!"
곧 총알이 떨어진 시민군들은 투항하면 살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항복할 마음으로 두 손을 번쩍 들어봤지만,
처음 항복하겠다고 나선 8명의 투항자들은 전원 사살되고 말았다.
(황석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p.242~243)
얼마나 많은 시민군이 죽은 걸까?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 당시 격렬했던 피격 흔적
다만 시민군 측에서는 500~600명이 도청에 있었다고 했고,
계엄군 진압작전을 지휘했던 장교는 당시 도청에 360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새벽에 도청에서 계엄군에 잡혀간 시민군이 약 200명이었으니,
▲ 도청진압 후 끌려가는 시민군들
사망자는 160~400명 사이가 될 것이다.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p.230)
사망자 중에는 시민군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윤상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 윤상원 (들불야학당 교사)
시체엔 가슴에 총구멍이 하나 있었고, 화염방사기로 까맣게 탄 상태였다.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p.229)
하지만 5월 28일 KBS의 보도는 이러했다.
"어제(5월 27일)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 계엄군과 경찰은 광주를 탈환했다.
2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계엄군측에 항복했으며, 두 명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사살되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1권 p.157)
"헐! 2명?"
그렇다면 5.18의 희생자 수는 총 얼마나 됐을까?
5월 31일 계엄사령부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모두 170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를 그대로 믿는 광주주민은 아무도 없었다.
"144명? 저 발표를 믿으라고? 관이 모자라는 지경이었는데.. "
당시 목사인 아놀드 A.피터슨은 이렇게 말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권 p.161)
피터슨
"항쟁 동안 광주에서 거주했던 한국군 친구가 말하기를,
조사당국자들은 사망자 수를 832명으로 확인했다고 했다."
한편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은 7월 22일 외신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권 p.161)
이희성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2명으로 모두 189명이 사망했어요.
이는 다른 나라와 견주자면 자그마한 사건, 즉 마이애미 폭동 정도의 수준입니다."
어쨌거나 열흘간의 광주항쟁을 마무리 지은 신군부는 주도면밀한 계획과 대담한 실시로
시민의 희생 없이 완수한 사상 유례없는 성공적인 작전이라며 자화자찬을 했고,
작전을 진두지휘한 특전사령관 정호용 등 66명의 장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임철우, 치유되지 않는 5월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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