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1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제주도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됐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뉴세븐원더스(The New7wonders)’ 재단은 12일 오전 4시 홈페이지를 통해 제주도를 비롯한 7개 지역을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010 -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폐막 막내린 G20 ‘환율합의’ 불발 경상수지 가이드라인 논의 일정만 제시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환율전쟁’ 해법과 관련해 결국 실질적인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끝났다. 정상들은 경상수지 불균형을 해소할 구체적 방안을 합의하지 못하고, 내년 상반기에 다시 논의하자는 선에서 회의를 마무리지었다. 12일 발표된 서울 G20 정상회의 정상선언문은 ‘경상수지 가이드라인’과 관련해 “우리는 프레임워크 실무그룹이 국제통화기금(IMF)과 다른 국제기구들의 기술적 지원을 받아 ‘예시적 가이드라인’을 개발할 것을 요청하고,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들은 2011년 상반기 중 그 경과를 논의한다”는 것으로 정리됐다. 또 “예시적 가이드라인에 기반한 첫번째 평가는 프랑스의 의장국 수임기간(2011년) 중 적절한 시기에 착수되고 수행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경주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다소 느슨한 형태의 ‘경상수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자는 데 합의했으나, 이번 정상회의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도출해내지 못하고 결국 내년으로 논의를 미룬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의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가이드라인의 수립과 구체적 추진 일정에 합의한 것은 괄목할 만한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일정과 관련해서도 뚜렷한 시한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번 회의에서 각국 정상간 의견차가 컸음을 시사했다. ‘환율’에 관한 언급도 지난달 열린 경주 재무장관회의 결과에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정상선언문은 “경제 펀더멘털이 반영될 수 있도록, 보다 시장결정적인 환율제도로 이행하고 환율 유연성을 제고하며, 경쟁적인 평가절하를 자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경주회의 합의문에서 추가된 문구는 ‘환율 유연성을 제고한다’는 부분이다. 하지만 ‘환율 유연성 제고’는 이미 지난 6월 캐나다 토론토 정상회의 때도 들어갔던 표현이어서 큰 진전으로 보기는 힘들다. 이밖에 이번 선언문에는 세계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개별 국가들이 앞으로 취할 정책조처들을 담은 ‘서울 액션플랜’과 개발도상국과 저소득 국가들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다년간 행동계획을 담은 ‘서울 개발 컨센서스’가 포함됐다. 또 “과도한 자본흐름이 금융안정에 미치는 영향을 축소시키기 위한 수단을 포함한 거시건전성 정책체계에 대한 추가 작업을 국제통화기금과 국제결제은행(BIS)에 지시했다”고 밝혀 ‘급격한 자본 유출입에 대한 규제’를 정식 의제로 채택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한겨레 2010-11-12 오후 07:04:34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448468.html
2010 -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 '물과 빛의 향연' 아시안게임 개막…16일간의 열전 돌입 '흥미로운 게임과 조화로운 아시아!' 42억 아시아인의 '스포츠 최대 축제인 제16회 아시안게임'이 12일 오후 9시(이하 한국시간) 중국 광저우 주장(珠江)의 인공섬인 하이신사(海心沙)에서 화려한 개회식을 갖고 16일간의 열전에 돌입했다. 이번 대회에는 아시아 45개국, 1만4454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42개 종목에서 476개의 금메달을 놓고 열띤 경쟁을 벌인다. 항구 도시이자 거대한 주장을 끼고 있는 광저우는 역대 아시안게임 최초로 주경기장이 아닌 곳에서 개회식을 열었다. 시내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주장 둔치의 하이신사 광장에서 열린 개회식은 거대한 배 모양을 형상화한 특설무대를 통해 화려한 공연이 시연되며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날 개회식은 2008베이징올림픽 개회식 조연출을 맡았던 천웨이야가 총연출을 맡았다. 공식적인 개회식에 앞서 주장의 3개 부두에서 이번 대회 참가국을 상징하는 건물과 각국 대표 8명이 탄 보트 45대가 차례로 퍼레이드를 펼치면서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한국 선수단에서는 함찬미 김가을 등 수영국가대표 7명과 이들을 인솔하기 위해 대한체육회(KOC) 국제교류팀 직원 1명이 배에 올랐다. 오후 9시. 대회 개막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동시에 광저우타워에서는 성대한 불꽃이 하늘을 수 놓았다. 곧이어 개최국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가 입장하면서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물과 생명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개막 공연은 물과 빛을 이용해 신비감과 웅장함까지 더해져 아시아에 전역에 큰 감동을 선사했다. 특설무대 중앙에 마련된 4개의 대형 스크린을 활용해 남성 무용수를 와이어에 연결해 공중에 띄워 놓은 뒤 밑에서 줄을 조종하며 새와 물고기 등 여러 가지 형상을 표현한 것은 이날 개막행사의 백미였다. 대형스크린 앞의 180명의 남성 무용수들과 밑에서 이들을 조종한 1320명이 밀고당기며 장관을 연출했다. 개막 행사가 모두 끝난 뒤 있은 선수단 공식 입장에서 핸드볼 대표 윤경신을 기수로 내세운 한국 선수단은 주장과 특설무대를 잇는 다리를 건너 16번째로 개회식장에 들어섰다. 본부임원을 포함해 130여명으로 구성된 한국 선수단은 하늘색 상의에 하얀색 하의를 입고 등장, 하이신사 광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1998년 방콕대회부터 계속된 종합 2위 자리를 수성한다는 각오다. 선수단이 목표로 하고 있는 금메달 수는 최대 65개다. 선수단 입장에 이어 원자바오 총리의 개회 선언이 이어졌고, 광저우 타워를 중심으로 한 화려한 불꽃놀이가 다시 한 번 밤하늘을 수놓았다. 관심을 모았던 최종 성화 점화는 광저우가 배출한 세계적인 다이빙 스타 허중이 맡았다. 허중이 성화대 밑에서 폭약에 불을 붙이자 심지를 타고 올라간 불이 성화대를 밝히며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990년 베이징대회 이후 자국에서 두 번째 대회를 개최하는 중국은 대회 참가국 가운데 최대 규모인 972명의 선수단을 파견해 200개 이상의 금메달을 노리고 있다. 【광저우=뉴시스】정세영 기자 niners@newsis.com /한겨레 2010-11-13 오전 12:11:39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448550.html
2007 - 김연아,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스케이팅 시니어그랑프리 3차대회 금메달 수상 [김연아 수상 내역](2007~2009) 2009 - 국제빙상연맹(ISU) 피겨 그랑프리 시리즈 1차 대회 1위 2009 - 국제빙상연맹(ISU) 세계피겨선수권대회 1위 2009 - 국제빙상연맹 4대륙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부문 1위 2008 -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2위 2008 -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3차 대회 1위 2008 -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 1위 2008 - 국제빙상경기연맹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부문 3위 2008 - 국제빙상경기연맹 세계피겨선수권대회 프리스케이팅 1위 2007 -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1위 2007 -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제5차 대회 1위 2007 -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제3차 대회 1위 2007 -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동메달 2007 - 제88회 전국동계체육대회 피겨스케이팅 여자고등부 싱글 금메달 http://people.nate.com/people/info/ki/my/kimyah/
APEC, 8일간의 대장정 돌입 21개 회원국 최고위 실무자들 참석, 외교통상 합동 각료와 정상회의 논의 의제 조율 아시아 태평양 지역 21개국 정상이 참여하는 부산 APEC 정상회의가 12일 오전 고위관리회의를 시작으로 8일간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부산=CBS정치부 감일근 기자 stephano@cbs.co.kr /노컷뉴스 2005-11-12 12:03
2001 - 홈런왕 맥과이어 명예로운 은퇴 "구단이 내게 줄 연봉에 어울리는 플레이를 할 능력이 없다. 계약 연장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부상까지 숨기는 황금 만능의 세태에 홈런왕은 기꺼이 명예로운 퇴진을 선택했다. `빅맥` 마크 맥과이어(38·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2001년 11월 12일 끝내 방망이를 놓았다. 맥과이어는 지난 2001년 1월 구단과 2년간 3000만달러를 받기로 합의, 2002년 시즌 연봉 1500만달러가 보장돼 있었다. 그러나 소속 팀 카디널스가 자신과 같은 1루수로서 올 FA시장 최대어인 제이슨 지암비(애슬레틱스)를 영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은퇴를 결정했다. 맥과이어는 1997년 카디널스로 이적하기 전까지 약 2년간 지암비와 한솥밥을 먹으며 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지암비는 맥과이어의 도움으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1루수로 성장했다. 맥과이어는 지난 1998년 70개의 홈런을 때려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하며 세계적인 스타로 군림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백인 슬러거. 하지만 지난 2년간 무릎 및 허리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올 시즌이 끝난 뒤 은퇴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돌았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187, 29홈런, 64타점. 특히 포스트시즌에는 4게임에서 11타수 1안타로 극심한 부진을 보였다. 맥과이어는 1986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 역대 5위인 통산 58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조선
미국의 아메리칸 에어라인(AA) 소속 에어버스-300 여객기(587편)가 2001년 11월 12일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을 향해 이륙한 지 3분 만인 오전 9시17분 뉴욕시 퀸스 지역 주택가에 추락했다. 사고기에는 승객 251과 승무원 9명 등 260명이 탑승해 있었으며, 사고기가 추락한 주택가에선 건물 4채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화염에 휩싸였다. 승객들 가운데 150명은 도미니카 국민인 것으로 밝혀졌다. 탑승객 251명과 승무원 9명 전원이 사망했다. 미 부시 행정부는 이날 오전 뉴욕에서 아메리칸 에어라인(AA) 587편이 추락하자, 추가 테러의 가능성으로 최고 경계 태세에 즉각 돌입했다. 그러나 추락 비행기의 블랙박스를 회수해 조사를 한 결과 사고원인은 기체 결함으로 밝혀졌다. /조선
1994 - 미국의 단거리 육상선수 윌마 루돌프(Rudolph, Wilma) 사망 루돌프 [Rudolph, Wilma Glodean, 1940.6.23~1994.11.12] 미국의 단거리 육상선수. 올림픽 육상종목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딴 미국 최초의 여자선수이다. 루돌프는 어린시절에 병을 얻어, 11세가 될 때까지 왼쪽 다리에 브레이스(보조기)를 대지 않고는 걷지 못했다. 그러나 남들과 당당히 겨루겠다는 결심으로 테네시 주에 있는 클라크스빌 고등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농구선수 겸 단거리 육상선수가 되었다. 루돌프는 1957∼61년까지 내슈빌에 있는 테네시주립대학교에 다녔다. 16세가 되던 해인 1956년에 멜버른 올림픽 대회에 400m 릴레이 주자로 참가하여 동메달을 땄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200m 달리기에서 22초 90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로마 올림픽 대회에서는 100m 달리기에서 11초 20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땄고, 200m 달리기와 400m 릴레이에서도 금메달을 따서 3관왕이 되었다. 이 릴레이 팀은 44초 40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는데, 1961년 루돌프가 마지막 주자로 뛰었던 또 다른 미국 팀이 44초 30으로 기록을 단축시켰다. 루돌프는 아마추어 경기연맹(AAu)이 주최한 100야드 단거리 선수권대회에서 1959∼62년까지 4년 연속우승을 차지했다. 1961년에 그해의 가장 뛰어난 아마추어 선수로 뽑혀 제임스 E. 설리번 상(賞)을 받았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1960년대에 시카고의 데일리 시장 청소년재단에서 부총재로 일하면서 여자 육상 팀을 육성했으며, 그후에는 미국 전역에서 달리기를 장려했다. /브리태니커
- Gary Cooper & Anna Sten
1993 - 러시아 출신의 배우 안나 스텐(Sten, Anna) 사망 스텐 [Sten, Anna, 1908.12.3~1993.11.12] Anna Sten-Mini Biography Born in Russia to a Ukrainian father and a Swedish mother, Anna Sten studied at the Russian Film Academy and joined the Moscow Art Theater. Strikingly beautiful, she went on to appear in a number of Russian silent films, but it was in the German film Der Mörder Dimitri Karamasoff (1931) that Anna gained notice. Samuel Goldwyn saw a picture of Anna in the paper and rushed to view the film. After the first reel he sent word to sign her, hoping to develop her into a star of the magnitude of Greta Garbo or Marlene Dietrich. His agent did sign Anna to a contract but forgot to mention the fact that Anna didn't speak a word of English, which made her appearance in sound pictures questionable. She spent a year studying English every day and working out makeup and acting. Goldwyn publicity called her "The Passionate Peasant" and sold her image to papers all over America. However, her first picture, Nana (1934), even though almost completely rewritten and reshot from the original, didn't bring audiences into the theaters. While Anna was looked great, the script and picture were average. Her second film, We Live Again (1934), marginally better suited to her style, also died within weeks at the box office. After her third film for Goldwyn, The Wedding Night (1935), also flopped, she and Goldwyn parted company after it became known around Hollywood as "Goldwyn's Last Sten." Anna made a few more movies, but by the end of the decade she was forgotten. http://www.imdb.com/name/nm0826479/bio
[오늘의 역사]인천국제공항 기공식 1992년 오늘 인천국제공항 기공식이 열렸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9.11.11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7011
[오늘의 역사] 아키히토(明仁), 일본 제125대 왕에 즉위 아키히토(明仁) 일본 국왕의 즉위식이 1990년 11월 12일 궁성에서 거행됐다. 히로히토 선왕(先王) 즉위 이래 62년 만에 거행된 즉위식은 오전 9시부터 1시간 30분동안 아키히토 왕 내외를 비롯, 가이후 총리 등 3부 요인 50여명이 현소의 신당에 있는 3종의 신기 중 으뜸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거울 앞에서 즉위 사실을 보고하는 왕실행사로부터 시작됐다. 1989년 히로히토 전왕(前王)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연호를 헤이세이(平成)로 고친 바 있는 아키히토 일왕은 이로써 명실공히 일본 제125대 왕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됐다. 일본은 66개국의 국가원수와 17개국의 왕족, 18개국의 부통령, 19개국의 총리, 32개국의 장관이 즉위식에 참석하자, 국가원수 2명과 22명의 왕족, 17명의 총리가 참석했던 1953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대관식과 비교하며 만족해했다. 아키히토는 히로히토의 장남으로 칭호는 쓰구노미야이다. 1952년 가쿠슈인 고등과를 졸업하고, 이 해에 왕세자가 되었다. 1956년 가쿠슈인대학 정경학부를 수료하고, 1959년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이날 도쿄에서는 일본 경찰 3만7천명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주일 미 총사관저, 군사기지 및 기차역 등 시내 25개소에서 폭탄테러 및 화재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약 10만명의 좌익 노조원들이 즉위를 반대하는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조선
- Welcome to Korea (공중전화카드)
1987 - 평화민주당 창당대회(총재 김대중) [책갈피 속의 오늘]1987년 DJ 평화민주당 창당 “우리는 어떤 훼방이나 탄압이나 왜곡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국민의 힘, 국민의 힘찬 함성만을 믿으며 끝까지 싸워 이기고 성취할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 패한 뒤 야당 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자 그는 평화민주당 총재직을 일시 사퇴했다. 그러나 이듬해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되면서 다시 총재로 전면에 나섰다. 그의 대권 재도전은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을 만들어 정국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3당 합당’에 막혔다.
(발췌) [우주 왕복선의 대활약] 우주 왕복선에 의한 두 번째 우주 수리 임무는 디스커버리호에게 맡겨졌습니다. 1984년 챌린저호에서 발사됐으나 실패한 2 대의 위성을 회수하는 것이었죠. 우주에서 수리할 수 없어 아예 화물칸에 넣어 지구로 가져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임무가 성공하면 인공 위성을 재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셈이었죠. 1984년 11월 디스커버리호의 우주인 앨런은 MMU를 타고 고장난 위성 중 하나를 겨우 붙잡아 화물칸으로 가져오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엔 우주인 가드너가 나머지 위성을 붙잡아 화물칸에 고정시켰습니다. 회수되어 지구로 돌아온 인공 위성 중 1 대는 새로운 주인을 만나 1990년 다시 우주로 발사되었습니다. 하지만 MMU를 이용한 우주 수리 임무는 이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간이형 로켓 가방을 메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우주 유영의 꿈이 잠시 동안만 이뤄진 것이죠. 1986년 챌린저호의 공중 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안전을 이유로 MMU를 이용한 우주 유영이 금지됐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주인들은 우주선과 연결된 생명줄을 몸에 묶고 우주 유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과거 MMU와 비슷한 세이퍼라는 장치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것은 생명줄이 끊어질 경우 우주선에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상용 장비일 뿐입니다. 정홍철ㆍ스페이스스쿨 대표(www.spaceschool.co.kr) /소년한국일보 2007-11-18 15:36 http://kids.hankooki.com/lpage/edu/200711/kd2007111815362577380.htm
레이건 대통령 한국 방문(1983)
1982 - 폴란드 바웬사 석방
미국이 개발한 우주 왕복선 콜롬비아호! 우주와 지구를 몇 번이고 오갈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우주 왕복선이다.
3년 2개월 간 태양계 여행을 계속해 온 무인혹성탐사선 `보이저1호(Voyager 1)`가 1980년 11월 12일 토성에 12만4천2백km까지 접근, 근접촬영에 성공했다.
- 中國(China) 100圓(Yuan) (1990. Banknpte) (朱德, 劉少奇, 周恩來, 毛澤東)
1969 - 중국의 전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 사망 류사오치 [劉少奇(유소기), 1898.11.24~1969.11.12] 중국 전 국가주석 유소기 사망 유소기 전 중국 국가 주석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의 학대에 시달리다 1969년 11월 12일 후난성(湖南省)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였다. 유소기의 시신은 '유위황'이라는 가명에 '무직'의 노인으로 화장됐다.
1968년 11월 朴대통령은 모래 바람이 부는 포항제철 건설 현장을 처음으로 시찰했다. 헬리콥터가 내렸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 바깥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朴泰俊 사장이 뛰어가서 바깥에서 문을 열어 모시고 나와 보고를 했다. 보고를 하는 동안 朴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여보게, 이거 어디 되겠나?』 자료등록일자 2003/05/15 /박정희대통령 인터넷기념관 /http://www.516.co.kr/board/view.asp?idx=5511&cPage=2&catecode=BJ&cates=M
[포항제철(POSCO) 연혁] 1968-11-12 박정희 대통령 포철현장 방문(13차례 방문 중 첫번째) 1969-01-15 제철연수원 현판식 1970-04-01 포항종합제철소 1기 착공식 1970-06-23 중후판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0-09-19 열연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2-10-03 첫 열연제춤 출하, 박태준 사장 첫 제품에 "피와 땀의 결정" 휘호 1973-06-08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 1973-06-09 용광로(1고로) 쇳물 출선 시작 1973-07-03 1기 설비 종합준공식 http://museum.posco.co.kr/museum
코마네치 [Comaneci, Nadia Elena, 1961.11.12~ ] 코마네치는 올림픽 대회 체조부문에서 최초로 10점 만점을 획득한 루마니아의 체조선수이다. 체조 국가대표 선수단의 코치인 벨라 카롤리의 눈에 띄어 6세 때부터 체조를 시작한 그녀는 1972년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경기인 공산주의 국가연합 청소년 체조선수권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땄으며, 그후 1973, 1974년 대회에서도 전 부문에서 우승을 기록했다. 1976년 미국 뉴욕 시에서 개최된 아메리카 컵 대회에서 여자 체조선수로서는 최초로 이단평행봉에서 2회전 뒤로공중돌기를 하면서 착지하는 고난도의 기술을 성공시키며 우승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에서 7차례의 만점을 기록했고, 평균대와 이단평행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4위에 그치는 부진함을 보였고, 1979년에는 손이 감염되어 대부분의 시합에 출전하지 못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에 출전해 평균대에서 다시 우승을 차지했고 마루운동에서는 소련의 넬리 킴과 동점을 기록하면서 공동우승했다. 1976년의 올림픽 대회 이후 루마니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화려한 인기를 누렸지만 1984년 선수생활을 그만둔 후 199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브리태니커
"고된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이 나만의 비법이고 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 나디아 코마네치
▼닉슨 美 副大統領 着韓▼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60000000018/3//20031109/7999560/1 경국사(慶國寺)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貞陵洞) 삼각산(三角山) 동쪽 기슭에 있는 절.) 1950년대에는 이승만대통령이 절에 들렀다가 보경스님의 인격과 태도에 감화되어 이후 몇 차례나 더 오고 갔습니다. 1953년 11월에는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자, 한국문화의 참모습이 이곳 경국사에 있다고 여겼는지 그를 절에 안내하기도 하였습니다. 후일 닉슨은 자기의 회고록에서 경국사에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방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혔습니다.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GgMT&articleno= 5538727&categoryId=161367#ajax_history_home
1948 - 도쿄 군사재판, 전범 7명에게 교수형 선고 1948년 11월 12일 흔히 동경재판이라 불리는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 도조 히데키 등 전범 7명이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군사재판에는 도조를 포함한 28명이 A급 전범자로 기소됐으나 재판부는 심리 도중에 사망한 마쓰오카 요스케와 나가노 오사미, 그리고 정신병증세를 보인 오카와 슈메이를 빼고 나머지 25명에 대해 전원 유죄를 인정했다. 도조를 포함한 7명에게는 교수형을, 16명에게는 종신형을, 한명에게는 금고 20년을, 또 다른 한 명에게는 금고 7년의 형을 선고했다. 일왕 히로히토는 기소되지 않았다. 이날 교수형 선고를 받은 도조 히데키는 동경에서 태어나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관동군 헌병사령관, 육군차관, 육군대신 등을 역임한 뒤 1941년 10월 총리대신이 되었다. 1943년에는 문부-상공-군수 대신을 겸임했고 1944년에는 참모총장까지 겸임했다. /조선 일본 전범자들 유죄 선고
8·15해방 후 공백기간의 질서유지의 일익을 담당하며 안재홍 등을 비롯한 건국동맹원들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7일 제1차 부서 결정을 완료하는 동시에 '치안확보,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랑의 일원화, 교통·통신·금융 및 식량대책의 강구' 등을 건국준비위원회의 설립 목적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6일 미군의 남한 진주를 앞두고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계열과 연대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부주석이 되었다. 10월 1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경위에 관한 〈매일신보〉 기자의 질문에 응답한 답변내용을 보면, "북한의 소련군처럼 남한의 미군도 행정일체를 조선인에게 넘겨줄 가능성이 있다"라는 희망적 관측을 가졌으나, 조선인민공화국은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승인 거부로 실패하고 말았다. 11월 12일에는 건국동맹세력을 모체로 고려국민동맹·인민동지회·일오회(一五會) 등의 단체를 흡수하여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취임했다. 1946년 2월에 결성한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 참가하여 의장단에 선출된 이후 3월초에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여 6월 6일 남조선민주의원을 대표한 김규식과 원세훈, 민전을 대표한 허헌 등과 함께 제1차 회합을 가졌고, 14일 제2차 회합에서 좌우합작 3원칙을 발표했다. /브리태니커
1933 - 히틀러 지지율, 국가사회주의당(나치) 92%의 지지 [오늘의 경제소사/ 11월 12일] <1548> 히틀러 지지율 575만명.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 수다. 그 뿐이랴. 유럽과 아프리카 전선에서만 연합국의 민관 5,611만명이 죽었다. 누구의 책임일까. 히틀러? 기대대로 히틀러는 경제를 살리는 것 같았다. 경기부양책을 실시해 세계가 대공황에 허덕이던 1936년께 완전고용을 달성할 정도였으니까. 운은 거기까지였다. 1937년부터 성장이 주춤거려 1차 대전 전보다 약간 나은 수준에 머물렀다.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1/e2009111117540697490.htm
켈리 [Kelly, Grace, 1929.11.12~1982.9.14] 미국의 영화배우·탤런트. 품위 있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11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뒤, 1956년 할리우드를 떠나 모나코의 레이니에 공과 결혼했다.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극작가인 조지 켈리가 삼촌이었음) 사립학교를 거쳐 1947년 뉴욕 시의 미국 극예술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1949년 7월 하계 간이극장에서 첫무대에 올랐으며, 같은 해 11월 브로드웨이의 연기생활을 시작했고 텔레비전에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 전성기였던 6년 동안(1951~56) 〈14시간 Fourteen Hours〉(1951)으로 영화에 처음 출연했으며, 〈하이 눈 High Noon〉(1952)에서 게리 쿠퍼의 퀘이커교도 아내 역으로, 〈모감보 Mogambo〉(1953)에서 클라크 게이블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다. 〈시골 소녀 The Country Girl〉(1954)에서는 빙 크로즈비의 촌스러운 아내 역으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연기를 보인 영화는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다이얼 M을 돌려라 Dial M for Murder〉(1954)·〈이창(裏窓) Rear Window〉(1954)·〈도둑 잡기 To Catch a Thief〉(1955)등이다. 켈리는 히치콕 작품의 완벽한 여주인공이었으며, 그가 표현했듯이 '성적인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영화 〈백조 The Swan〉(1956)·〈상류사회 High Society〉(1956)에 출연한 뒤 레이니에 공과 결혼하여 모나코의 왕비가 되었다. 이 부부는 캐롤라인 공주, 앨버트 왕자, 스테파니 공주 등 3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가정에 충실했다. 딸 스테파니를 태우고 프랑스 코트다쥐르 지역 캅다이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자동차가 13.7m 아래로 추락해 죽었다. /브리태니커
1918 -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수립 체코슬로바키아-역사 원래 이 나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독립할 때 "보헤미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할 계획이었으나, 1918년 11월 12일, 군주제를 폐하고 제국 국호도 폐함으로써 공화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일어나기 몇달 전인 1939년에는 나치 독일에 불법 점령을 당했다. 1941년 12월에 나치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바가 있어서 연합국이라 봐야 옳다. 1968년에는 프라하에서 소련군이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강제로 막아 전 세계의 비난이 가중되기도 하였다. 이를 프라하의 봄이라 부른다. 1989년 당시 슬로바키아에게 평화로운 완전 자치를 주었고, 1993년에 평화롭게 분리되었다. /위키백과
바르트 [Barthes, Roland Gérard, 1915.11.12~1980.3.25] [책갈피 속의 오늘]1915년 佛롤랑 바르트 출생 문학을 사랑하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사회당 당수는 1980년 2월 점심 때 파리 시내에서 파티를 열었다. 대통령이 되기 바로 전 해였다.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11120161
스코트 [Scott, Robert Falcon, 1868~1912] 데번포트 출생. 1882년 해군에 입대하였으며, 1901∼1904년 디스커버리호(號)를 타고 남극탐험을 지휘하였다. 이때 킹 에드워드 7세 랜드를 발견하여 남한(南限) 도달기록인 남위 82도 17분을 기록하였다. 1910년 테라 노바호(號)에 의한 제2차 남극탐험에 나서서 1912년 1월 18일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남극점은 1911년 12월 14일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도달하였기 때문에 첫 정복의 웅도(雄圖)는 깨어졌다. 그와 4명의 동행자는 귀로에 악천후로 조난, 식량부족과 동상으로 전원 비명의 최후를 마쳤다. 그의 유해와 일기(마지막 일자는 3월 29일) 등은 1912년 11월 12일 발견되었다. 마지막까지 용기를 잃지 않고 영국신사다운 최후를 마친 것이 알려져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저서로는 《탐험항해기》(2권, 1905) 《스콧, 최후의 원정》(1913)이 있다. /naver
미카엘리데스 [Michaelides, Solon, 1905.11.12~1979.9.9] Solon Michaelides (1905–1979) was a Cypriot composer, teacher and musicologist. He taught himself the guitar as a schoolkid. He was appointed guitar teacher in the Cypriot Conservatory, where he learned piano. He studied in the UK and France. After his studies he spend the next two decades in Limassol. He created a choir that survives today as Aris choir, with which he presented opera (Dido and Aeneas) and oratorio classics as well as choral works. He was a music teacher at Lanitio school. He moved to Salonika in the 1950s, where he continued teaching and created a symphony orchestra that was nationalised in the 1960s and is still active today. He wrote extensively, including books on the harmony of modern music, Cypriot music, modern Greek music and his Encyclopaedia of Ancient Greek Music. He composed several works for choir, orchestra and solo such as the archaic suite, Eleftheria etc. His archive was left to the municipality of Limassol where he spent his most creative years. There is a dedicated museum-archive building housing the archive next to the municipal conservatoire. Works by Michaelides have been recorded by Greek symphony orchestras. There is also a dedicated cd which is a live recording his works in concert with a combined choir of members of Aris and Foni tis Kerynias choirs, and the Cyprus symphony orchestra http://en.wikipedia.org/wiki/Solon_Michaelides
1900 - 경인철도 개통식 철도 개통식 경인선 완전 개통을 축하하는 개통식은 1899년 11월 12일 정오에 서울의 서소문 밖 남대문 정거장에서 열렸다. 이날 개업식에는 국내외 귀빈 5백여 명이 참석했다. 이재순을 비롯한 조선인 고관대작,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 주한청국공사 서수붕(徐壽朋),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등이었다. 경인철도합자회사 사장 시부자와 에이치(澁澤榮一)의 식사는 한국어와 영어로, 민병석의 축사는 일본어로 통역되었다. 하야시 공사가 조선황제를 위해 만세를 삼창했다. 이어 박제순 외교대신이 일본천황을 위해, 시부자와 사장은 내빈의 건강을 위해, 미국공사 알렌은 경인철도회사의 융창(隆昌)을 위해 각각 만세삼창을 선창했다. 시부자와는 이날 개업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철도 개통식) /Daum 문화원형 백과사전
[경인선 철도 연혁](자료 정리) 1910.00.00 - 총독부 철도국에 경영권 이관 1906.00.00 - 통감부 철도국에서 경영권 매수 1903.11.01 - 경부철도회사에서 경영권을 매수 합병 1900.11.12 - 경인선 철도 전구간 개업식(남대문) 1900.07.08 - 경인선 철도 전구간 개통(남대문-제물포) 1900.07.05 - 한강철교 준공 1900.05.26 - 한강 이북 공사 착수 1899.09.18 - 한국 최초로 철도 개통(노량진-제물포, 33.2km)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임시 영업 개시) 1899.06.19 - 철도 건설 열차 운행 1899.06.10 - 궤도 부설 시작 1899.04.23 - 경인선 철도 두번째 기공식(인천) 1898.12.17 - 일본, 모스와 경인철도양도계약(京仁鐵道讓渡契約) 체결 1897.03.29 - 경인선 철도 기공식(인천 우각리)(우각현牛角峴) 1897.03.22 - 미국의 철도회사와 합작으로 공사를 시작 1896.03.29 - (고종 33) 미국인 모스(Morse, J. R.)에게 철도 부설권 특허
1889 - 미국의 언론인 드윗 월리스(Wallace, DeWitt) 출생 월리스 [Wallace, Dewitt, 1889.11.12~1981.3.30] 월리스 부부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배포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Reader's Digest>를 창간·발행했다. 1922년 2월 제1호가 출판되었다. 발행부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1922년의 1,500부에서 1929년에는 20만 부로 증가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전세계적으로 17개 국어로 번역되어 41판 3,000만 여 부를 발행했다. 드윗은 1921~65년에 편집자로, 그리고 1921~73년에 회장으로 일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11년 동안 다른 잡지들로부터 요약한 기사나 발췌한 기사들만을 실었으나, 1933년부터는 이따금 독자적인 고유 기사들을 싣기 시작했으며, 1934년에는 시사서적의 요약판을 싣기도 했다. 1940년 외국어판이 발행되기 시작했으며, 증가되는 유통비용으로 인한 수지균형을 맞추기 위해 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비록 비평가들로부터는 진부하고 보수적인 발행자라고 평가받았으나 월리스 부부는 긍정적인 논조를 추구하려고 했으며, 다양한 주제의 기사들을 실었다.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킨 이 잡지의 성공으로 그들은 크나큰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부부는 특히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저택과 토지의 복구, 이집트에 있는 아부 심벨 사원의 보존 등과 같은 많은 자선적인 공공문화사업을 적극 후원했다. 1972년에 월리스 부부는 자유훈장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미국 영예전당의 사업가 부문에 선출되었다. /브리태니커
쑨원[孫文, 1866.11.12~1925.3.12]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중국의 정치가 쑨원(손문)이 1866년 오늘 광동성 향산현 부근의 취형촌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오늘의 역사 /대천초등학교 3학년 1반 http://iam0101.new21.net/zbxe/?mid=study_history&category=2444&document_srl=3084
1857 - 우루과이의 제2대 대통령 마누엘 오리베(Oribe, Manuel) 사망 오리베 [Oribe, Manuel Ceferino, 1792.8.27~1857.11.12] 우루과이의 제2대 대통령(1835~38). 시스플라티네 전쟁(1825~28)에서 우루과이의 독립을 위해 훌륭하게 싸운 33명의 전설적 민족주의자들인 '트레인타 이 트레스 오리엔탈레스'의 한 사람이다. 그가 우루과이 초대 대통령 호세 프룩투오소 리베라와 동맹을 맺었다고는 해도 결국 그들의 야망은 깨져버리고 말았다. 대통령이 된 오리베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초대 대통령이었던 리베라가 지배하고 있던 변방지역에까지 확대하려고 했다. 오리베가 이처럼 리베라의 권력에 도전하고 또 리베라의 재임기간중에 있었던 재정의 부실경영에 대해 비난을 하자, 분노한 리베라는 1836년 반란을 일으켜 결국 1838년 10월 오리베를 사임하게 만들었다. 그후 오리베는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여,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로부터 군사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1842년 아르헨티나 군대를 이끌고 리베라 군대와 싸워 승리한 그는 우루과이로 돌아와서 9년 동안(1843~51) 몬테비데오를 포위했다. 이러한 내분으로 우루과이는 오리베와 리베라가 각각 이끄는 블랑코(백색당)와 콜로라도(적색당)라는 2개의 경쟁적 파벌로 분열되었다. 보수적인 시골 사람들을 대변하는 블랑코당과 진보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콜로라도당은 우루과이의 양대 정당으로서 오늘날까지 우루과이의 정치를 이끌어오고 있다. 오리베가 귀국하여 블랑코당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게 될까 우려한 콜로라도당은 오리베로 하여금 1853~55년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하도록 강제했다. 1857년 오리베가 죽은 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개입으로 더욱 복잡해진 내전이 8년 이상이나 계속되다가 결국에는 콜로라도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그후 거의 1세기 동안을 통치했다. /브리태니커
본명은 Mathieu Basile.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노동운동가이자 초기 지도자. 급진성향을 띤 언론인으로 출발했으며 1877년 최초의 현대적인 사회주의 잡지로 손꼽히는 〈에갈리테 L'Egalité〉를 창간했다. 1880년 K. 마르크스와 그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와 함께 프랑스 노동운동의 사회주의 강령에 대해 협의했다. 1880년 전국노동회의에서 채택된 이 강령은 노동자들에게 "의회에서 계급투쟁을 이끌어갈" 의지가 단호한 대표, 바꾸어 말하면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굽히지 않고 싸울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압력집단의 경제적·정치적 행동을 통해 노동권익을 얻어내야 한다고 보던 현실적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게드의 입장을 반대했다. 이들은 적극성을 띤 단체협상과 파업을 옹호했고, 노동자들은 정당소속과는 관계없이 진보적인 후보 개인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작(多作)에 박력있는 연설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 게드는 1893년부터 하원에 진출했으며 1914~15년까지는 무임소장관을 지냈다. /브리태니커
레일리 [Rayleigh, John William Strutt, 1842.11.12~1919.6.30] 에식스의 맬던 출생. 1861년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 1865년 졸업했다. 1870년 논문 〈공명(共鳴)의 이론에 대하여〉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음향학에 대한 연구의 시초가 되었다. 1871년 색의 연구에서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으로부터 레일리산란(散亂)의 법칙을 도출해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광학 연구를 하게 되었다. 1871년 이집트여행 중 고전적인 명저 《음의 이론 Theory of Sound》을 쓰기 시작했고, 귀국한 뒤에는 유체역학(流體力學) 실험을 하여 그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1877년 《음의 이론》 2권을 펴냈다. 1879년 맥스웰의 후임으로 캐번디시연구소장, 실험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나, 5년 후 고향으로 돌아가 실험·연구에 몰두했다. 1887년 J.틴들의 후임으로 왕립과학연구소장, 1905∼1908년 왕립학회장을 거쳐, 1908년 케임브리지대학 명예총장이 되었다. 초기 연구는 광학 및 진동계(振動系)에 관한 수리적인 것이었으나, 후에는 물리학 거의 전반에 걸친 이론적·실험적 연구로 나아가, 음향학·파동론·색채론·전기역학·전자기학·빛의 산란·유체역학·기체의 밀도와 점성, 모세관현상·탄성·사진술 등을 연구했다. 또한, 전기저항·전류·기전력(起電力)에 대한 표준측정을 하였다. 또 물의 성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문제에서 출발하여 수소·산소에 이어서 질소의 질량을 측정하는 과정 중 1894년 W.램지와 함께 아르곤을 발견, 그 공로로 190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후년에는 전자기(電磁氣)에 관한 여러 문제를 다루어 복사(輻射)에 관한 레일리진스의 공식을 유도했다. /naver
- Auguste Rodin - 'Rodin's Burghers, Calais'
- 'Age of Bronze' - 'The Cathedral'
- 'Cambodian Dancer' - 'St. John the Baptist'
- 'The Thinker' - 'Sarmiento Statue' - 'The Kiss' 로댕 [Rodin, Auguste, 1840.11.12~1917.11.17] [어제의 오늘]1840년 서양 근대 조각의 시조 오귀스트 로댕 출생 ㆍ‘지옥의 문’ 끝내 미완으로 남겨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가로 유명한 오귀스트 로댕이 1840년 오늘 탄생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14살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하며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지만 작가의 길에 들어선 건 한참 후다. 3년 동안 국립미술전문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다가 낙방했고, 20살 무렵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30대 후반에 발표한 ‘청동시대’라는 작품이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비로소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41살이던 188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장식미술관의 현관 장식품 창작을 의뢰받으면서 드디어 인생의 역작을 만들게 된다. 주제는 로댕이 직접 정했다. ‘지옥의 문’. 높이 7.57m, 너비 4m의 대작으로 186명의 인물이 지옥의 벌을 받고 몸부림치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중세의 시인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로댕의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이 문에 등장하는 조각상 중 하나로, 문 위 가로대에 걸터앉은 중심적인 인물이다. 모델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나돌지만 인간의 처절한 최후를 내려다보는 시인 단테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송현숙 기자 song@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1-11 20:37:2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11112037235&code=100100&s_code=ap005
- 'Prince Igor', by Borodin 보로딘 [Borodin, Aleksandr (Porfiryevich), 1833.11.12~1887.2.27] 1833년 11월11일(12일로 정정)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르 보로딘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887년 몰(沒). 음악사에서 보로딘은 19세기 러시아 국민음악파 5인조의 일원으로 기억된다. 국민음악파는 서유럽 음악이 압도하던당대 러시아에서 국민 음악의 확립을 목표로 음악 창작에 민족적 색채를짙게 들여오고 민요의 수집과 편곡에 힘쓰던 혁신적 예술가 집단을 가리킨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3-11-10 16:5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3&oid=038&aid=0000206405
- Elizabeth Stanton, Carrie C. Catt, Lucretia Mott
1815 - 미국의 여성운동가 엘리자베스 스탠턴(Stanton, Elizabeth) 출생 스탠턴 [Stanton, Elizabeth Cady, 1815.11.12~1902.10.26] 결혼 전 성(姓)은 Cady. 미국의 여권운동 지도자. 1848년에 미국 최초로 여성 참정권에 대한 요구를 체계적으로 공식화하고 조직적인 운동을 벌였다. 아버지는 미국 하원의원으로 나중에 뉴욕 대법원 판사가 된 다니엘 케이디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법률을 공부하는 동안 여성들이 얼마나 차별적인 법률 밑에서 살고 있는가를 깨닫고, 여성평등권을 쟁취하기로 결심했다. 1840년에 변호사이자 노예제 폐지론자인 헨리 브루스터 스탠턴과 결혼했다. 1848년에 그녀는 청원서를 유포하여 뉴욕 주 의회가 결혼한 여성에게도 재산권을 부여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1848년 7월 19~20일에는 루크리샤 모트와 함께 뉴욕 주 세니카폴스에서, 그후 며칠 동안은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미국 최초의 여권 집회를 주도했다. 이 집회를 위해 스탠턴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작성했고 집회에서는 이 결의안이 모두 채택되었다. 모트는 반대했지만 여성참정권을 요구하는 결의안도 채택되었다. 1850년에 스탠턴은 역시 유명한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수전 B. 앤소니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앤소니는 여권운동의 실무를 맡았고, 스탠턴은 글 쓰는 일을 맡았다. 그들은 여권 신문인 〈레벌루션 Revolution〉(1868~70)을 편집했으며, 마틸다 조슬린 게이지와 함께 〈여성참정권의 역사 The History of Woman Suffrage〉(6권, 1881~1922) 가운데 처음 3권을 편집했다. 스탠턴은 〈80여 년, 1815~97 Eighty Years and More 1815~1897〉(1898)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남겼다. /브리태니커
- Gerhard von Scharnhorst and Mikhail Kutuzov
샤른호르스트 [Scharnhorst, Gerhard Johann David von, 1755.11.12~1813.6.28] 프로이센의 장군. 그는 근대적 일반참모 체계를 개발했으며, 또다른 군사조직개혁가인 아우구스트 폰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축소체계'(Krümpersystem)를 고안했다. 이 체계에 따르면 신병을 빨리 훈련시켜 예비군으로 보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을 훈련시킬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틸지트 평화조약(1807)에서 프로이센의 상비군 병력을 4만 2,000명 이내로 유지하도록 강요했는데, 축소체계는 이 조항을 지키면서도 훈련받은 장병의 실제 수효를 늘려주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후 군비제한을 당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정책을 시행했다. 샤른호르스트는 하노버 지역 육군 장교(1778 임관)로 1790년대에 벨기에에서 프랑스 혁명군과 싸울 때 두각을 나타냈다. 1801년 그는 매우 이례적인 방식으로 프로이센군에 지원했다. 즉 프로이센 국왕에게 자신을 중령으로 임관하고 귀족으로 신분을 올려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프로이센군의 개편권을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신청서에 3편의 군사논문을 동봉했다. 놀랍게도 그의 요구는 수락되었다. 1804년 귀족에 봉해지고 그가 제시한 조건은 모두 수락되었다. 그는 베를린의 군사학교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에게 배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후에 전략에 관한 유명한 저서를 썼다. 1806년의 나폴레옹 원정 때 그는 예나 전투 후 게브하르트 폰 블뤼허와 함께 포로로 잡혔지만 포로교환으로 곧 석방되었다.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적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직업적인 소규모의 장기복무 용병보다 징집된 시민군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징병제도를 실시하려면 반드시 정치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틸지트 평화조약이 체결된 뒤 군대개혁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프로이센 국왕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곧 그의 활동을 의심하여 그가 제안한 많은 개혁안을 취소하도록 프로이센 왕에게 강요했다. 1811~12년 프로이센이 러시아에 맞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자, 샤른호르스트는 무기한 휴가를 떠났다. 1813년 다시 군대로 돌아와 블뤼허 휘하에서 참모장이 되었다. 그는 튀첸 전투(5. 2)에서 부상을 입고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그후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협상하기 위해 프라하로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브리태니커
1746 - 프랑스의 물리학자 자크 샤를(Charles, Jacques) 출생 샤를 [Charles, Jacques-Alexandre-César, 1746.11.12~1823.4.7] [오늘속으로(11월12일)] 샤를 1746년 11월12일 프랑스의 물리학자 샤를이 태어났다. 1823년 몰(歿). 샤를은 소르본 대학과 파리 공예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며 주로 기체의 성질을 연구했다. 물리학사에서 샤를은 기체의 부피와 온도의 관계에 대한샤를의 법칙으로 유명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38&aid=0000109348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