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읽을수록 아까워지는 책이 있다. 뒤에 남은 분량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영혼을 씻어주는 듯 맑은 가르침이 담긴 책이 그렇다. 라마나 마하라쉬의 『나는 누구인가』가 그렇고, 욘게이 밍규르 린포체의『티베트의 즐거운 지혜』가 그렇고, 청허 휴정의『선가귀감』이 그렇다. 이런 책을 읽을 때면 내가 문자를 깨우쳤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는 감사를 거푸거푸 되풀이한다. 이런 책을 써서 나같이 혼탁한 영혼의 중생에게 감로수같은 깨우침을 준 저자들께 거듭거듭 감사드린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두번째는 자신 있게, 세번째는 밑줄을 그어가며, 네번째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암송하다보면 어느 새 책은 손때가 묻어 나의 것이 된다. 동은 스님의 『무문관 일기』도 그와 같은 책이다.
『무문관 일기』는 동은 스님(삼척 천은사 주지)이 전남 강진 백련사 무문관(無門關) 3.3~6.6㎡(1~2평) 남짓한 방에서 2002년 여름 한철(5~8월)동안 정진한 과정을 쓴 수행 일기다. 무문관은 '문 없는 문의 빗장' 또는 '문이 없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수행자가 방에 들어가고 나면 밖에서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밖에서 열어주기 전에는 나갈 수 없는 '감옥'에 스스로 갇히는 것이다. 그 서슬퍼런 수행의 현장에 들어가서 굳이 수행과정을 글로 남긴 것은 '훗날 수행길에서 힘이 들고 지쳐서 포기하고픈 생각이 들때 이 일기를 펼쳐놓고 다시 한 번 정진의 칼날을 세우는 숫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순전히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작성된 일기였다. 그후 몇 년이 지나 스님의 노트를 우연히 본 사람이 '신비롭고 비밀스럽게만 여겨지는 스님들의 무문관 수행 일상을 일반인들에게 알리면 수행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설득으로 이 책은 세상에 나왔다.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얻었지만 스님은 조금 난감한 생각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일기가 아닌가. 그런 모든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출판을 결심하게 된 마음 바탕에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대중들에게 무문관 수행의 가치를 전해주고 싶은 자비심이 있어서일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다음은 읽으면서 밑줄을 그어놓은 곳이다.
"내가 나에게 두려운 건 답이 틀리는 게 아니고 내 안의 물음이, 삶의 화두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물음이 없는 삶은 살아도 죽은 것."
:틀리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물음이 없는 삶이란다. 틀리지 않으려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주저함이 일시에 사라져 버린다. 감사하고 고마운 문장이다.
"천지의 가장 맑은 기운이 생동하는 새벽. 만물이 고요히 숨죽이고 생명의 찬가를 경청하는 이 시간. 이 신새벽에 길을 나선 한 청년이 있었다."
:그렇게 스님은 간간히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존재의 근원을 풀고자 출가했던 청년의 모습이다. 그 청년은 출가 후 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중생을 향한 자비심을 되새겼고 '의미있는 삶'이 되기 위해 고민했다. 의미있는 삶이란 사람이 '이 거대한 우주의 한 공간에서 그 존재의 일부를 감당하며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마지못한 삶, 순간순간을 의미없이 흘려버리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의 공동선을 지향하며 자신을 돌보지 않고 혼을 불사르는 성직자와 이웃들의 숭고한 삶'이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신새벽의 맑은 기운이, 종소리가 일깨워준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루에 한번쯤은 내 숭고한 영혼을 위해서 배려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자진해서 수행자가 무문관에 들어간 이유일 것이다.
"오늘 놀라운 걸 하나 발견했다. 지금까지는 다관에 차를 넣고 물을 식혀 붓고 나면 바로 뚜껑을 닫아 그 속의 사정을 볼 수가 없었는데, 오늘 우연히 물을 붓고 그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뭉쳐져 있던 찻잎들이 잠에서 깨어나듯 꿈틀꿈틀 움직이며 살아나는 것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무심코 차를 마시다보니 다관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맑고 향기로운 차를 만들기 위해 그 속에서 찻잎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자신의 향을 뿜어내고 있던 것이었다. 차를 마신 행위는 똑같은데 차를 마시며 느낀 감정은 전혀 다르다. 무문관에 들어와 자신의 삶을 찬찬히, 깊이 들여다보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는 놀라움이었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게로 얼마나 많은 경이로움을 놓치고 사는가. 세 걸음만 걸으면 끝나는 좁은 방에서 스님의 감탄과 놀라움은 계속된다. 문 틈으로 들어오는 벌 한 마리를 보고, 후박나무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빗소리에 흥이 올라 믹스커피를 마시며 행복할 때, 하루에 한번씩 문틈으로 들어오는 밥그릇에 치즈나 요플레가 덤으로 끼어 있을 때 스님은 행복했다. 그러면서 왔다갔다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향해 스스로에게 묻는다. '조금 전까지 좋아 날뛰던 철없는 이놈이 무엇인고?'
스님은 원래 몸이 약한 분이었다. 책 속에는 다리를 다쳐 절을 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특이체질이라 약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수행자의 위태로움이 여러 차례 담겨 있다. 그런 분이 한 평 남짓한 좁은 무문관에서 움직이다 선반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상처를 방치하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다. 결국 무문관을 나와 병원에 며칠 입원한 후 다시 무문관으로 들어간다.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굳이 그 독방으로 자진해서 들어가는가.
"스님들이 그렇게 고행을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끊임없이 나고 죽고 하는 이 윤회의 사슬을 벗고 해탈하여 대자유의 몸이 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상구보리요, 그 깨달음으로 중생들을 널리 교화하여 모든 중생들조차도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인도하는 것이 하화중생이니 이것이 바로 불교 존재의 근본 목적이다"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 자처해서 독방안에 갇힌 이유가. '상구보리 하화중생'를 향한 구도심이 수행자의 본분이자 마지막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감옥은 '창살 안으로 남이 억지로 밀어 넣으면 형벌이 되고, 스스로 갇히기를 원하면 해탈을 향한 구도행이 된다. 이 책에는 강제로 형벌을 받는 죄수와 스스로 독방 감옥에 갇힌 수행자의 차이에 대해 상세히 기술해놓았다. 감옥이나 무문관이나 갇혀있다는 조건은 똑같은데 그 곳에 있는 사람의 마음 상태는 전혀 다르다. 본문이 조금 길지만 사람의 마음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지 배울 수 있으니 인용해보겠다.
동은 스님의 무문 별장 혹은 무문 감옥:방 크기까지 적혀 있다.
"여기는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무문 별장! 새벽엔 마당까지 속살을 드러내는 안개 위로 매미 소리에 잠이 깨고 감미롭게 불어오는 바람에 후박나무 잎들이 춤을 추는 것을 감상한다. 특히 밝아오는 새벽을 지그시 바라보며 내면의 나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일은 이 별장 최고의 백미다. 아침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저 아래 백련 한정식집에서 여기까지 '혜안'이란 배달의 기수(?)가 따끈따끈한 밥을 지게에 메고 배달해주기 때문이다. 창밖의 절경들을 내다보며 먹는 그 한정식의 맛이라니...... 빈 그릇 수거도 염려 없다. 문 앞에 두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져간다. 가끔 맛난 반찬이라도 배달되면 그날은 실컷 먹고 공부도 하지 않고 뒹굴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눈치 볼 사람도 전혀 없다. 그야말로 태평성세 자유독립 만세다. 그러다가 슬슬 배가 고파지면 먹고 싶은 만큼 챙겨 먹으면 되고, 점시 식사 후엔 맛있는 과일까지 디저트로 룸서비스 해준다. 주로 오렌지 한 개와 수박 한 조각인데 가끔 포도 한 송이, 자두도 올라온다. 주방장이 신심나면 치즈나 요플레가 덤으로 끼이기도 한다. 오후에는 유리창 너머 바다도 보다, 만덕 호수도 보다, 후박나무 숲도 보다, 마당에 잡초가 살랑이며 유혹하는 것도 보다가 결국에는 화두를 본다. 새소리에 달콤한 낮잠이라도 생각나면 그냥 한숨 자고, 아니면 그윽한 녹차라도 한잔 마시면 기운이 상쾌해진다. 더울 때 샤워를 열두번 해도 뭐라 할 사람 없고, 홀랑 벗고 춤을 춰도 구경할 사람 없다. 저녁에 울리는 백련 한정식집 종소리는 또 얼마나 아름다우며, 밤에 마당에 쌓이는 달빛은 어찌나 푸른지 모른다. 아! 무문 별장이여.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아 참! 밖에서 문이 잠겨 있는 것만 빼고......)
:여기까지가 무문관에 대한 예찬이다. 똑 같은 장소를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여기는 강진만이 문살 사이로 조각나 보이는, 사방이 꽉 막힌 '무문감옥!' 잠도 못 자게 새벽 네시에 기상 종을 쳐대고, 새가 노래하든, 안개가 감옥을 뒤덮든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지독하게 고독한 독감방. 아침에 한 번 가로세로 30센티미터의 구멍으로 사육사가 밥을 넣어주면 기다렸다는 듯이 쪼르르 달려가 살기 위해 열심히 입으로 퍼 넣는다. 그것도 점심과 저녁은 식은 밥이다. 반찬 세 가지는 메뉴도 잘 바뀌지 않고 늘 그저 그렇다. 한여름 푹푹 찌는 날씨에도 문도 열지 못하고 창까지 없으니, 그냥 옷이라도 훌훌 벗고 더위를 식혀야 살아서 나갈 수 있다. 그나마 석 달의 유기수이니 망정이지 무기수라면 끔찍할 정도다. 바람이 불어도 그냥 '부는가 보다', 비가 와도 '아,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가 보다'로 만족해야지 내가 직접 느낄 수는 없다. 여기서는 철저하게 고독과 친해지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다. 사람도 볼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고, 아파도 혼자 견뎌내야 하고, 슬픔도 혼자 바라봐야 한다. 감방에는 창이라도 있지만, 이곳에는 창문도 없다. 그냥 밖에서 자물통 채워진 굳게 닫힌 문만 있을 뿐이다. 만약 불이라도 난다면 문을 부숴야 나갈 수 있다. 가끔 사육사가 잘 크고 있나 하고 슬며시 살펴보고 가기도 한다. 사회 감방처럼 점호라도 있으면 덜 힘들 거다. 그러나 늘 자신과의 점호다. 이곳에 석 달 독방형을 받은 유기수는 다섯 명이다. 다들 잘 견뎌내고 있는 듯하다. 문이 아닌 문살 밖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게 유혹을 해도 이곳은 그 모든 것과 차단되어 있다. 어찌 보면 조금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이곳에서의 독방형을 자청하지 않았나 싶다. 아! 무문 감옥, 이보다 더 지독할 순 없다.(아 참! 부처되는 지름길이 여기니 그 어마어마한 담보만 빼고......)
:우리는 지금 현실이라는 공간을 별장으로 쓰는가, 감옥으로 쓰는가. 우리는 지금 현재라는 시간을 극락으로 사는가, 지옥으로 사는가. 우리는 현생이라는 인생을 자유인으로 사는가, 죄인으로 사는가...많은 생각을 들게 한 글이라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항상 내가 처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두 행복해하며 사는 듯한 남들의 삶을 보며 비교하고 마음 상해한다...그러나 삶은 저 멀리 보이는 불빛도 별장도 아니고, 당장 내가 부대끼며 살아내야 하는 '바로 이 공간, 이 시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어쩜 이리도 감사함이 많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무문관은 세 걸음만 걸으면 방이 끝나는 좁은 공간이다. 그 답답한 공간에서 석달을 견디면서 글 곳곳에는 좁은 공간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오히려 셀 수 없이 많을 정도의 관계와 인연과 주변의 사물에 대해 감사하고 감탄하고 감동하는 글이 책 전편에 가득하다. 가사를 걸어둔 횟대와 향과 단주와 책상과 의자와 문고리와 주전자와 베개와 이불 등 평소 우리가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는 '고마운 물건들'에 대한 묘사가 감동적이다. 사람이 많아 가져야 행복하다는 세간의 속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후 마치 청량한 대숲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운을 느꼈던 것은 수행자의 마음의 향기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람이, 빗소리가, 노을이, 보름달이, 하늘이, 새벽 종소리가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우리가 무관심하기 때문에 모르고 살았던 아름다움의 세계가 얼마나 많았던가. 무문관에서 누릴 수 있는 '무문관 팔경'을 읽고 나면 '지금 이대로가 바로 불국토'라고 했던 어느 선사의 가르침이 절절히 와 닿는다. 모처럼 하늘이 맑게 개인 날. 스님은 "삶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대낀 내 지친 영혼을 오늘은 푸른 하늘에 내다 말리고 싶다'고 적어 놓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영혼을 헹구고 싶었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죽어야 한다."
:이 구절은 스님이 예전 금산사에서 무비스님의 강의를 들었을 때를 회상하며 적어 놓은 것이다. 읽는 내내 가슴을 떨리게 한 구절이다. 아마도 내가 지금 삶에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을 누군가 앞장서서 가는 모습을 볼 때의 경외심일 지도 모른다. 스님은 석달 동안의 무문관 수행이 끝나갈 즈음 모든 선사들이 맛보았던 깊은 선열(禪悅)을 체험한다. 그 기쁨의 세계가 어떠한 지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며 가장 좋은 소득이 될 것이다.
동은스님이 그려서 무문관에 모셔놓은 미소불:나도 이런 미소를 닮고 싶다.
첫댓글 견도님. 책주문합니다. 30일 월정사에서 3,000배 할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