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천동 고분군 -사적 273호
부산 복천동 일대의 구릉 위에 있는 가야 때 무덤들이다.
복천동 우성베스토피아 아파트 위쪽 마안산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 위에 밀집 분포돼 있다.
이 고분군 위에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집을 짓고 산 덕에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는 달리 거의 도굴이 되지 않았다.
복천동 고분군은 경주지역처럼 화려한 금제 유물은 많지 않지만, 대신 한반도 전체에서 조사된 고분군 가운데 갑옷이 가장 많이 나와, 갑옷의 형태와 변화 연구는 물론 당시 남부지방의 정치 상황과 국제관계를 규명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三國史記』에서 별다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였던 가야국은 복천동 고분군이 발굴된 이후 1980년대 고고학적으로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드러내면서 그 실체에 대한 해답을 조금씩 던져주고 있다.
1995년까지 부산대학교박물관과 부산 시립박물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발굴에서는 조사된 유구 총 130여기, 출토 유물 총 9,000여 점, 그 중 토기류 2,500여 점, 철기금속류 3,200여 점 장신구류 4010여 점, 골각기 등 기타 10여 점, 인골 5구, 말이빨 등 동물 유존체 7점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11호분의 부곽인 10호에서 말머리가리개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나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6세기 이전 부산지역 유일의 지배자 계층 무덤군으로 그 중심 시기는 4, 5세기 이 일대를 거점으로 해서 성장했던 세력집단 지배자들의 공동묘지로 추정된다
구릉에는 지난 1996년 복천박물관 개관과 동시에 문을 연 야외전시관이 있어 이곳에서 조사된 53, 54호 무덤 내부를 직접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유적의 연대는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방무덤의 경우를 보아 대체로 4~6세기에 걸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복천동고분군은 경주의 대형 고총고분(高塚古墳)을 제외하고는 함안의 말이산·도항리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과 더불어 남부지방의 큰 고분군 중의 하나이며, 유물은 경주의 대형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다음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복천고분군은 지난 81년 6월 사적 제273호로 지정됐다.
부산광역시와 동래구에서는 1992년부터 정화사업을 통해 고분군을 사적공원으로 조성하고, 유물전시관 및 야외전시관을 통해 출토유물 및 발굴장면을 전시하고 있다.
발굴
1969년 주택 공사를 하던 중 고분군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가야의 유물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장소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50번지 일원에 위치한 마안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지대였다.
복천동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지난 80년 부산시가 고분군이 위치한 구릉 일대에 대한 주택조성계획을 수립하면서 진행됐다.
구릉의 아래에서 위쪽으로 조성된 이 고분군에 대한 발굴은 1969년 9월 동아대가 1호분을 조사하면서 시작됐다.
이 조사에서 부산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금동관이 출토됐고, 다량의 철정(鐵錠·철덩어리)도 나와 대형 무덤의 존재가 예시됐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 고분군에 대해 6차례의 계획조사와 10여 차례의 긴급조사가 이뤄졌다.
동아대학교·부산대학교 박물관과 부산시립박물관이 수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시킨 결과 1991년까지 총78기에 달하는 유구가 조사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덤은 아직도 땅 밑에 남아있다.
이에 따라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에 걸쳐 복천동고분군 제1차 발굴조사가 실시된 것이다. 발굴조사 결과 이 지역이 대규모의 삼국시대 고분군임이 확인됐으며, 갑주(갑옷과 투구)와 마구 등 많은 철기 자료가 나왔다. 이후 지속적인 발굴이 이뤄져 구릉의 정상부에는 부곽(부장품을 따로 넣어 두는 방)이 있는 대형 무덤이, 그 주변과 경사면에는 중·소형급 무덤들이 산재한 것으로 파악됐다. 따라서 이러한 무덤 배치를 통해 당시의 사회계층 문제를 알 수 있었다.
무덤의 종류
복천고분군은 목곽묘에서 수혈식 석곽묘로, 그리고 횡구식 석실묘로 변화하고 목곽묘와 수혈식 석곽 내에서도 여러 단계의 변화를 보인다"며 "이와 같은 무덤의 변화는 가야지역의 무덤 가운데 가장 뚜렷하기 때문에 가야 무덤의 구조와 변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하나의 지표가 된다.
1)땅속에 시체를 바로 묻는 널무덤 (목곽묘)
2)무덤의 형태는 땅을 파서 넓은 방을 만들고 나무관을 넣은 덧널무덤(토광목곽묘-木槨墓 ), 덧널무덤은 딸린덧널[副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양분되는데, 딸린덧널이 있는 경우 대개 규모가큰 편에 속하며,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은 일(日)자형으로 배치된다.
3)땅속에 네모난 돌로 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 만든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 석곽묘-竪穴式石室墳)
구덩식돌방무덤 역시 딸린덧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딸린덧널이 있는 경우에 으뜸돌방과 딸린덧널의 배치상태는 앞의 덧널무덤과 동일하고 딸린덧널은 나무덧널[木槨]로 이루어지는데 10·11호분과 21·22호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방무덤은 이 유적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대형분일 경우에는 막대한 양의 껴묻거리를 껴묻을 뿐만 아니라 으뜸덧널 혹은 으뜸돌방과 딸린덧널에서 순장이 실시되었던 흔적도 엿보인다.
4)무덤의 구조는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 석실묘-橫口式石室墳]
앞트기식돌방무덤은 숫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이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의 물질문화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5)이외 분류가 어려운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들이 있다.
무덤에서는 새로운 무덤양식을 발견하여 무덤의 변천과 흐름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출토유물
이 무덤들에는 도굴되지 않은 큰 무덤이 많아 2000점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류
이형토기류-마두식 각배(말머리 모양 뿔잔, 보물 제 598호), 오리 모양 토기, 등잔 모양 토기, 신발 모양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마두식 각배(馬頭式 角杯)-보물 598호
일반토기류-특히 굽다리접시[高杯]류가 많이 발굴되며 이외에 단지[壺], 목단지[長頸壺], 바리모양[鉢形]·통형(筒形)·화로형[爐形]의 그릇받침[器臺]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굽다리접시(고배), 목항아리(장경호), 토제등잔을 비롯한 토기류는 4∼5세기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적인 토기들이다.
외래토기-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까지의 함안토기와 왜계토기, 그리고 5세기 후반대의 창녕토기 등이 조사돼 부산지역과 이들 지역 간의 교류관계도 알 수 있다
신라계토기-5세기 전반 이후부터 이 지역의 전통적인 토기와 함께 신라토기가 섞여 나온다.
시기가 늦을수록 신라계 토기의 양이 많아지고 있어 부산지역이 신라의 지배로 편입되는 과정을 토기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있다.
금속류 철제 갑옷·투구류도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복천동 고분군의 유물 양상 중 특징은 많은 철제 유물이다.
철제 유물은 무구류와 갑주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한반도 출토 고대 갑옷 연구 및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에 상당히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장신구류- 금동관(金銅冠)·금귀걸이[金製耳飾]·유리구슬·곱은옥[曲玉]
2)농공구류-쇠도끼[鐵斧]·쇠손칼[鐵製刀子]·쇠끌[鐵鑿]·쇠삽날·쇠낫[鐵鎌] 등의 농공구류
3)갑주류(甲胄類)-쇠살촉[鐵鏃]·화살통·쇠투겁창[鐵鉾]·대도·삼지창(三枝槍) 등의 무기류, 판갑옷[板甲]·비늘갑옷[札甲]·투구[胄] 등
4호 무덤에서 나온 단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갑옷이다.
11호에서 출토된 괘갑은 부속장식까지 완전하게 갖춘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런 완제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다.
4)마구류-말머리가리개[馬胄]·안장꾸미개[鞍金具]·발걸이[鐙子]·재갈[
]·말띠드리개[杏葉]·청동제말방울[靑銅製馬鈴]·띠고리[鉸具] 등
11호분의 부곽인 10호 무덤에서 발견된 말갖춤(마구)는 완전히 갖추어진 실전용으로 처음 발견되었다.
이러한 갑옷·투구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다,
특히 10호분 출토의 말머리 가리개는 당시 한반도의 첫 출토품이었다.
4세기 대 낙동강 하류역인 복천동고분군과 대성동고분군에서 나오는 이러한 갑주와 마구들은 이 무렵 금관가야의 실태를 해명하는 데 뿐만 아니라, 영남지역 여러 집단 간의 역학관계를 규명하는 데 제1급 자료이다.
5)제기의식류- 청동제칠두령(靑銅製七頭鈴)·미늘쇠[有刺利器]·덩이쇠[鐵鋌] 등
△유자이기(有刺利器·미늘쇠)
네모난 철판 가장자리에 미늘 같은 뽀족한 날이 여러 개 달려 있는 철기다. 기마병을 말에서 끌어내리는 무기로 보기도 하지만, 특정집단의 정신적 상징물 같은 의기(儀器)로 보는 학자가 많다. 중국 일본에도 없고, 한반도에서도 영남지역에서만 확인되는 극히 지역적인 유물이다.
김영민 울산대 박물관 학예사는 '가야지역 유자이기의 성격과 의미'라는 주제 발표에서 3세기 후반에 등장해 6세기까지 있었던 유자이기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신라권역에 주로 매장됐던 유자이기는 처음 등장하던 3세기 후반, 소형 무덤에서 주로 발견되며 삼한시대를 지나면서 몰락했던 사제집단들의 주술적 의기 성격이 강했다. 4세기에 들면서 유자이기는 부산의 복천동 고분군에서 발견되는데, 이때는 대외적으로 집단의 권위를 표현하는 유물이었다는 것. 5세기 함안과 합천 지역에서는 새 장식을 한 화려한 유자이기(사진)가 대형 무덤에 부장되지만, 다른 가야 세력권에선 부장품 중 하나로 상징적 의미가 약화됐다. 가야 세력마다 제각각의 정신세계를 향유하고 있었다는 게 김 학예사의 결론이다.
유자이기(미늘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