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을 쓰는 오늘은, 2018년 3월 2일 금요일 입니다.
1960년 3월 2일 국민핵교 입학 차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교정에 모였었습니다.
기억 하건대, 저학년의 시절에는 아마 100여명의 까까머리와 단발머리 아이들이 하나의 교실에 모여 책상 없는 맨 마룻바닥에 앉아서 여름을 나고, 조개탄 난로 옆에서 추운겨울을 나기도 했었습니다.
나무바닥에 양초를 바르고 아주까리기름도 바르며 광내려고 마루위에서 모두 엎드려서 엉덩이 치켜들고 걸레 잡고서 미끄러지면서 왕복 질주 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평균 나이보다 서너살 더 많기에 다니다 말고 새경(私耕사경-일꾼연봉) 받는 일꾼으로 남의 집 살이를 가기위해 학교에서 안보이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집의 농사일을 거들기 위해서 학교에 못 오는 어린이도 있었고, 그래도 학구열이 있던 어린이는 동생을 업고와서 교실에서 같이 지내었습니다.
어느날에는 국가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한 사방사업(砂防事業)의 일환으로 산마다 나무심기를 했습니다. 농사에 바쁜 엄마 아버지를 대신해 산에 가서 일을 마치면 우유나 강냉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삐죽한 나뭇등걸에 걸려 찢어진 지렁이색 고무신 때문에 울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정부가 가난하던때라, 신작로 자갈길 보수하라 하여 집집마다 배당 받은 15미터 구역에 어른 대신 나가서 자갈 보충 하느라고 새벽 아침에 부역 하던 날도 있었습니다.
점심때 학교에서 나누어주던 국제연합(유엔-UNCTAD)의 구호물자인 강냉이죽을 기다리는 것은 행복이었습니다. 미국원조물자(USOM)인 딱딱한 분유 덩어리 녹인 하얀우유 한 컵도 꿀맛이 있었습니다. 전쟁(1950년)중 휴전(1953년)된지 10여년이 지나가도 궁핍했었습니다. 배가 고팠던 날들이었습니다. 무밥, 고구마밥, 꽁보리밥도 두끼먹기 힘들었습니다.
면천 영탑사, 해미 개심사, 운산 전라산, 운산 식물원을 찾아가는 원족(遠足-소풍)날은 지구가 내것같은 큰 행복의 날이었습니다. 벤또(べんとう)라고 부르던 도시락에는 쌀밥이 있었고 삶은 계란이 곁을 지켰고 찐 고구마와 밤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고깃배를 처음본 것은 정미면의 천의장 옆의 조그만 어항구 였습니다. 바다와 큰 물고기를 처음 보았습니다. 쭈꾸미도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배에 매단 아름드리 대나무도 처음 보았습니다.
가을날 운동회의 최고의 볼거리는, 오재미 던지기와 기마전과 각종 계주 이어달리기 이었나 봅니다. 학생도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도 열심히 달렸습니다. 1등은 노트한권 3등은 열필 하나 받았습니다.
도암산(刀岩山) 이라 불리던 칼배산, 정기를 준다고 동창생 김대영 아버님 이신 김진화 교장 선생님께서 교가에 쓰셨던 이배산(螭背山)은 어린이들에게 눈만 뜨면 늘 보여지던 풍경이 이었습니다.
그러던, 1964년 3월 어느 늦은 봄날 새로운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당시 지리는 잘 모르는지만, 선생님께서는 경기도 시흥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전근을 오셨다 하셨습니다. 본 향이 당진읍 행정리 이고, 본가가 행정리에 있어서 출.퇴근을 하신다 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경기 안산국민학교 59학년도 졸업생도 6학년 담임제자)
아마 어린이들이 생각하는 선생님은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하느님과 동격(?)처럼 존경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시대이었습니다.
아마 결혼을 하셔서 우리와 같은 연배의 아들이 있을 거라 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2녀3남을 두셨고 그중 우리보다 두어 살 어린 김용승이라는 어린이가 큰 아드님 이었습니다.
갑자기 오늘위에 서서 세월을 세어보니, 1960년 입학날짜 기준으로는 59년째 즉 58년의 세월이 지났고, 선생님을 처음 뵌 년도로 보니 54년이 지난 55년째입니다.
우리는 세월에게 가라마라! 오라마라!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밀지도 붙잡지도 않았는데, 그때 대개 1952년, 1953년, 1954년생이었던 어린이들을 이제 반백살(50)을 넘겨다 놓고, 이순(60)도 넘겨다 놓았습니다.
지금 나이에 돌아보니, 각자 저마다의 살아온 여정에 바름(正道) 정도(程度)와 아름다운 추억이 다르게 있었을 것입니다만, 앞으로 우리는 어떤 과정을 더 맞이해야 하는지? 늘 내일의 일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교훈은, 환경이라는 중요성을 알려주었습니다. 누구를 어떤 환경과 인물을 배경으로 하여 성장하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평생 행로가 결정되어진다 여겨집니다.
맹자와 모친의 예를 보면, 처음에는 공동묘지 무덤가에서 본 광경을 흉내 냈었고, 다음 은 시장 저자거리에서는 장터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서 따라 했었고, 다음에는 서당 옆에서 글을 읽으면서 자랐다는 이야기입니다.
1964년, 저희들의 5학년때, 당진읍 사기소리에 소재한 성당국민학교에, 경기도에서 전근 부임 해 오신 분의 존함이 “김 유현 선생님” 이시라 했습니다. 그런데 5학년 담임을 맡으신 어느 선생님의 전근 가게 된 사연으로 김유현 선생님은 우리 5학년 학생들의 담임을 맡으셨다 했습니다.
아마 올해로 김유현 은사님 께서는 80연세가 넘으신 것 같습니다.
(나중에알게된 : 1934년 갑술년 개띠 출생이시니 85세, 함창김씨 35대손)
은사님은 저희들의 5학년과 6학년 연임 담임이셨습니다. 그동안 성당초 1965학년도 은사님의 17회졸업생 제자들은, 각자가 은사님을 간간히 뵙기도 하고 더러는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만나 뵌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현재의 성당초 17회 제자들은 오늘도 은사님의 안부를 접할 수 있음에 행복한 위치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날은 아이들의 재청(再請)에 의해서 연속되던 옛날이야기는 모든 아이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안데르센의 “인어 공주” 이야기에 더러는 눈물을 흘리면서 들었습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장화홍련전” 과 “콩쥐 팥쥐”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도 동네서 듣던 이야기에 많이 각색되어 사실감을 주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느 날 6학년생 우리는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어 철도 “장항선” 의 신례원역이라는 곳에서 기차를 처음 보았고, 처음 탔었습니다. 창덕궁(창경원), 중앙청정부청사, 경복궁, 덕수궁(궁과 석조전안의 국립박물관), 숭례문, 서울역을 보았습니다. 지금의 서울역 앞에 있는 힐튼호텔 자리에 있던 " 삼화여관에서 묶었습니다. 도착날 여관에서 조카와 본제자만 빠져 나와서 일찌기 결혼차 서울로 올라오신 북아현동 누님댁에서 1박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구룡리 삼거리에서 7시 반 출발 하면 면천, 덕산, 삽교, 예산, 온양, 천안, 성환, 평택, 오산, 수원, 안양, 시흥을 거쳐서 서울당산동 지나서 노량진 지나서 한강다리 건너서 남대문옆 다리밑 의 시외버스 정류장 까지는 8시간 걸려서 3시반 정도면 도착 하던 시절 이었습니다.
다음날은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에 있는 서울 중앙방송 KBS(HLKA 710Kcycle)에 견학을 갔는데, 마침 어느 국민학교에서 방송에 출연하기로 했는데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대타로 당진에서 올라온 성당국민학교 어린이 들이 즉석 출연 하게 된 역사도 있었습니다.
그날 어린이 프로그램 중 “누가? 누가? 잘하나?” 에 출연해서 꾀꼬리 팀과 장다리 팀으로 나뉘어서 노래 경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학교 대표로 나가서 노래 한 학생이 남자는 양인목군 여자는 성낙희양 였었는데 결선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영광의 순간들이었던 추억 이었습니다. 혹시 그 당시 출연 했던 프로그램 방송을 다시 들을 수 있으려나??
지금이야 “당진 과 서산”이라는 지명을 모두 알겠지만, 방송국 아저씨들이 어디에서 온 학생들이냐고 물어서 "당진 성당국민핵교 유!" 라고 하면 당진이 어디야? 강진아냐? 하면서 전라남도 강진만 알던 시절이었습니다.
제자가 은사님을 얘기 하거나 평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지만, 조금 감히 결례를 하며 글로 표현 한다면…….
은사님은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 하셨습니다. 죽은 교육은 없겠지만, 산교육을 하신다 하여 모든 면에서 적극적 이셨습니다. 은사님은 실물 교육차원에서 실제로 태극기를 액자태극기 대신 교실 중앙에 거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다행히 풍금을 치실줄 아시는 은사님을 만나게 되어서 많은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더러는 냇가에도 가서 물고기 피라미, 구구리, 중괴기, 붕어, 고동, 가재도 만났었습니다.
어느날은 교실의 교탁 뒤에 있는 마루탁자에 누워서 계셨습니다. 심한 감기 몸살에도 불구 하시고 "내 새끼들 다른 선생님께 부탁 하거나 자습 시킬 수 없다"! 하여 머리를 싸매시고 계셔서 어린 학생들이 어쩔줄 몰라 하던 때도 몇 번 있었습니다.
이글을 쓰는 제자의 이야기에 해당되어 쑥스럽지만, 부족했던 학생을 위해, 다른 학년 졸업식 때보다도 공부 우등수상자 수를 늘려서 수상케 하는 열정도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에 쓰기는 좀 뭐하나, 이글을 쓰는 본 제자는 아마 다른 생각이 많았던지 환경이 그랬던지 공부는 그저 그랬었으나, 중학교 에서는 조금 잘할 수 있어서 졸업 후 서울로 유학 가서는 공부 우등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 초등학교 재학 시 주셨던 은사님의 관심과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은사님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회사인 HDEC에 20여년 넘게 몸 담아서 전세계 20여개국을 돌며 살며 근무 할 수 있었고, 몇 몇 다른 친구들도 그렇겠지만 현재도 열심히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 뒤, 초등학교 졸업 후 은사님을 각자 찾아뵙고 하던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지금도 계속 그런 위치를 유지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본 제자는 몇 번의 공개적으로 은사님을 모셔서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군입대 후 휴가 시에도 뵙고서 어느 초등학교에선가 사진 촬영을 같이한 사진도 있습니다. 어느 날은 결혼식에 주례를 부탁 하였으나 "교장도 아닌 평교사가 어떻게 자네 결혼 주례를 할 수 있냐!" 고 사양 하시던 사연도 있었습니다. 해외 근무 시 휴가 와서도 간간히 찾아 뵈었습니다.
김유현 은사님! 안녕 하세요? 라고
우선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만 적절치 않은 인사 같습니다.
몇 년 동안 안부를 직접 못 드리는 시절이 되어 있던 차에, 간간히 옥섭양과 종국군을 통해서 간간히 은사님 안부를 듣곤 했습니다만, 때로는 멀리 강원도 어디에 계신다 하여 안부를 직접 못 드리는 경우가 지속되었음에 죄송함을 말씀드립니다.
2017년도말 2018년도초 몇 개월 사이에 은사님의 주변 신변 변화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늦게 전해 들었습니다만, 무슨 어떤 적절한 인사를 드려야 할지 면목 없는 경황 입니다.
저희 제자들도 나이를 먹었지만, 몇 명의 사례를 제외 하고는 배우자와의 이별을 겪지 못하였기에 더욱 그러 한가 봅니다.
늦게나마 지면을 빌어서 소천하신 사모님(고박재희)의 좋은 곳으로 임하심을 기원 합니다. 그리고 작별을 감내 하시는 자녀분들에게도 마음이 같으랴마는 아픔을 같이 하는 위로를 드립니다. 그리고 자애 하시던 사모님을 잃으신 은사님에게는 이제 님사랑을 내려놓으시고 건강한 나날을 지니시길 다시 기원 합니다. 은사님!.
이제 저희들도 머리가 희끗한 장년의 세월을 겪다보니 조금씩은 철이 들어 가나 봅니다.
각자의 세월에 희로애락에서 맞이했던 느낌과 각오도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생각 하건대 아직도 우리는 바름(正道)으로 살아야 하나봅니다.
김유현 은사님! 이제
다음에 적힌 제자이자 등단시인 오옥섭 양의 시와 함께
근자(近者) 제자의 소회(所懷)를 대신 하려 합니다.
그곳으로 마실 가고 싶은 날
시를 지은이 등단시인 오옥섭. 2017 12월 발표
송화가루 사방에 흩날리고
보리싹 푸르게 일어서면
아버지 안마당 샘물 퍼 올려
벼씨앗 담그시던 거기
사정없이 쏟아지던 폭우 그치고
저녁노을 곱게 물든 날
눅눅한 마당에 밀짚방석 펴고
쑥대궁 모깃불에 재채기 하며
문종이 부채로
여름밤 식혀 주던 어머니
외할머니 그리워 은하수 바라보며
반달노래 구슬프게 부르시던 마당
하얀 쪽배 서쪽나라 가기도 전에 잠들던
내 생애 마지막 호사였던 요람
가을빛에 열매들 토실해 지고
달빛 아래 추석준비 새벽이슬 내리고
땡감담은 항아리 아랫목에 차지하고
떫은맛 가난도 같이 달게 우려지던 안방
시린 바람 문틈으로 새어들면
어머니 화롯불 옆에서
목화씨 빼내기 손톱 다 닳고
살얼음 뜬 동치미에
찐 고구마 호호 불며 먹던 그곳에
둥지 튼 흔적위에 진한 젖내음
아침 햇살 같은 사랑이 묻어있는 거기
싸늘한 바람 가슴 시리게 하는 날
유산으로 받은 그리움 한 짐 지고
그곳으로 마실 가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쓰고 오고 싶다.
....
이상 성당초등학교 17회 친우들
돈호, 옥섭, 효순, 효숙, 태숙, 종국, 필호,
선만, 정용, 순례, 순자, 대교, 중식, 광열
상호, 기철, 대영, 완수, 승진 과 함께
제자 김기억이 써서 올립니다.
은사님 곁에 있어 주셔서 행복 합니다. 건강하시길 기원 합니다.
2018년 3월 24일 토요일 오후 읽어(朗讀) 드림
그림 충남 당진 성당초등학교(사기소리 소재) 65학년도 17회(66년1월) 졸업생(평균66세) 일동과 2018 03 24일 토 김유현 담임 은사님(85세)과 시간을 인천 대공원 근처에서 같이하다.
대전김용석, 서울이돈호, 정효숙, 김효순, 김유현은사님, 시인 오옥섭, 종교인 오필호, 김기억
친구들과 은사님의 허락하에 cafe 에 글을 올립니다. by k o kim 서울 홍대입구에서
첫댓글 선배님
옛추억 그대로 그림책을 읽어 보는듯합니다
지나간 그시절을 펼쳐주시니어 접하게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덕분에 새록새록 주변환경과 시즌에 걸 맞는 표현 문구가 정겹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오옥섭님의 시 문맥도 고향 냄새가 물씬 풍기니 너무 좋습니다
아~~그리운 고향이 너무 좋습니다~~~
감 사 합니다 읽어 주셔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