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만한 믿음
2024.05.26.(성령강림후제1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4/ 그들이 무리에게 오니,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15/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빠지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아이를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18/ 그리고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그 순간에 나았다. 19/ 그 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께 다가가서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마태 17:14-20)
들어가는 말
제자들은 무리들 앞에서 창피했는지 ‘따로’ 예수님께 다가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19)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20) 언뜻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믿음 없는 세대’를 한탄하신 예수님이, ‘적은 믿음을 가진 제자들’에게 실망하시면서 책망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쓸모없는 믿음에 대한 책망과 한탄의 표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세대의 믿음 없음과 제자들의 적은 믿음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과 ‘믿음이 적은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아이의 아버지처럼 보이는 증거 없이는 아무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나아가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 없이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간질병을 가진 아이에게 바로 그 현장에서 간질을 일으킴으로써 눈에 보이는 증거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이 세대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허구성, 즉 믿음 없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적은 믿음이란 증거나 예수님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어떤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믿음 없음
이제 적은 믿음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본문을 통해 유추해 본다면 적은 믿음은 귀신을 내쫓지 못하는 믿음이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산을 옮길 수도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을 예수님은 왜 구분도 안 되는 방식으로 표현하셨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적은 믿음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애를 써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구분하지 않은 차이 속에서 엄청난 차이를 찾아내려고 애쓰지는 말아야 합니다. 즉, 초신자와 장로, 목사의 믿음에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현실 속에서 이루어내는데 버거운 일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적은 믿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 같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적은 믿음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 그 적은 믿음이 있다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의 크고 적음으로 공과를 측정할 수 있는 행위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적고 많음을 구분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계십니다.
믿음이란 적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있음과 없음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의 많고 적음은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느냐의 판단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큰 교회와 작은 교회를 믿음의 잣대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믿음이 적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며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가요? 우리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남의 믿음은 크다고 포장하면서 우리의 믿음은 늘 적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적은 믿음을 핑계 삼아 ‘제자의 도’를 회피했던 것입니다.
적은 믿음
믿음은 있는 것만으로 어디서나 늘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말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아이를 고칠 수 없었다.’(16, They could not heal him.) 라고 간질병에 시달리는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고발됐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Why couldn't we drive it out?)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적은 믿음이 그 원인이라면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큰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셨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20) 그 적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아 찾아내기도 힘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밖에 안 될지라도, 제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산을 향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You can say to this mountain.) 예수님은 제자들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이루어낼 수 있다’, ‘만들어낼 수 있다’, ‘고칠 수 있다’, ‘옮길 수 있다’ 등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믿음은 ‘병을 고칠 수 있느냐’, 혹은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느냐’ 등으로 측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이나 재력과 같은 그 어떤 ‘힘’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아무리 적은 믿음을 가졌어도 산을 향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옮겨갈 것입니다.’(20, It will move.) 우리가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보잘 것 없는 적은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자랑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누군들 스스로 믿음이 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뿐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우리는 적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모르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너희는 할 수 없었다.’(You could not do.)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 ‘왜 우리는 할 수 없었나요?’(Why could not we do?) 라고 말하면서, 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수 있다’(You can say)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힘으로는 옮기는 것이 불가능한 산을 향해서라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리 겁을 먹고 말하지 않을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은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는 핑계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고 없음의 문제는 믿음의 적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적은 믿음을 가진 우리는 병자를 고칠 수 없으며,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순식간에 멀쩡하게 고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병원에 함께 가달라는 장애인의 요청에 응답하면서 함께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피하는 가출청소년들에게 말을 걸 수 있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귀신들렸다고 멀리하는 대신 그를 위해 손잡고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고 대답해 줄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핑계대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믿음은 가능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변화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이 말씀에서 시작되었듯이 변화는 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이 변화의 시작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말은 믿음의 크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제 말한 대로 이루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20)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말만 하면 되므로 우리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한편, 능력으로서의 가능성은 주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나가는 말
따라서 믿음을 가진 우리가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을 이루는 것은 주님의 몫이므로 이 또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알콜중독인 엄마와 다섯 자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집은 키우는 개들의 배설물과 술병들로 늘 쓰레기 더미였습니다. 아동보호기관은 아이들이 분리해서 보호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가정이 함께 보호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큰 믿음이 아니라, 그들과 사회를 향해 우리가 그들을 도울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는 엄마의 알콜중독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지적장애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포기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적은 믿음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알콜중독인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동보호기관과 관공서 등 문제해결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가정과 기관과 관공서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이지 믿음이란 ‘말할 수 있음’ 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능력이 없다는 핑계로 함께 하는 것을 포기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함께 하기 위해 말을 건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곳에는 ‘산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간 것’과 같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