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씨(葛氏)의 유래와 본관
갈씨는 제갈씨(諸葛氏)에서 갈라진 성씨(姓氏)로 알려져 있다. 제갈씨의 시조는
제갈량(諸葛亮)의 아버지인 제갈규(諸葛珪)로 전(傳)하며, 그의 20대손 제갈공순
(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與德王) 때 귀화하여 우리나라 제갈씨의 시초가 되었다.
그후 고려 고종 때에 이르러 제갈홍(諸葛泓)과 제갈형(諸葛瀅) 형제가 복성을
각각 한 자씩 나눠 쓰기로 하여, 형인 홍은 제씨로 아우 형은 갈씨로 분종(分宗)하
였다고 한다.
== 감씨(甘氏)의 유래와 본관
우리나라 감씨의 연원을 알려주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에는 발해 주왕(周王)의 세째 아들 숙대(叔帶)가 감후(甘侯)에
봉해져, 이때부터 감씨성을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관은 회산· 합포· 충주· 거창· 창녕· 부령 등 6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근원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회산 감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다
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회산 감씨의 시조는 고려 공민왕 때의 감규(甘揆)이다. 16세손 철(喆)이 금자광록대
부(金紫光祿大夫)로 회산군에 봉해진 후 본관을 회산으로 고쳤다.
== 강씨(姜氏)의 유래와 본관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 114본이 전한다. 그 중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에는 진주·금천·안동·배천·해미·동복·광주 등 7본의 시조가 확실하게 기록되
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강씨는 대부분 진주 강씨에서 갈라진 것이 확실하다.
오늘날 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을 도시조로 삼는다.
진주 강씨는 다섯 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에서 인헌공파는 파조인 강감찬(姜邯贊)
의 출생지가 금천(衿川)이라고 하여 금천 강씨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씨는 아득한 옛날부터 진양 지방(진주)에서 하씨(河氏)·정씨(鄭氏)와 더불어
'진양3성'으로 일컬어 오는 전통적인 영남의 명문이다.
== 고씨(高氏)의 유래와 본관
고씨의 시조는 고을나(高乙那)인데, 《탐라개국설화(耽羅開國說話)》에서는 그가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솟아나왔다고 전해진다.
본관은 제주(濟州)로 단일화되어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에는
본관을 개성(開城)· 안동(安東)· 장흥(長興)· 횡성(橫城)· 회령(會寧) 등
122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가 제주고씨에서 분적된 것이 확실하다.
고씨는 시조로부터 45세손 자견왕(自堅王)까지 탐라 군주로 세습해 왔다. 46세손
말로(末老)가 고려에 입조하면서 처음으로 본토로 진출하였으며, 그의 아들
유(維)· 강(綱)· 소(紹) 3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고씨는 고려와 조선에 걸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명문의 전통
을 이어왔다.
== 공씨(公氏)의 유래와 본관
공씨의 시원은 중국 노(魯)나라 왕족의 후예인 공윤보(公允輔)가 당나라 18학사의
한 사람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서기 755년(신라 경덕왕 14) 우리나라
에 들어와 김포(金浦)에 뿌리를 내리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자세히 알 수 없으므로 후손들은 조선시대의 공명례(公明禮),
공보언(公普彦), 공의(公義)를 각각 일세조로 하는 벽동파, 문천파, 창원파로 나뉘
어 공윤보가 최초로 뿌리를 내린 김포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 구씨(丘氏)의 유래와 본관
시조 대림(大林)이다. 그는 원래 중국 한나라의 신하였는데, 서기 28년(신라 유리
왕 5) 황락(黃洛)과 함께 교지국(交趾國:현재 베트남 북부)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평해(경북 울진군)에 밀려와 정착하였다. 그후의 일은 전하지 않아 정
확히 알지 못한다.
후손들이 고려 공민왕 때 민부상서를 지낸 선혁(宣赫)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
관을 평해로 삼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국씨(國氏)의 유래와 본관
국씨는 백제의 8개의 큰 성씨 중의 하나로 중국 하비(下邙)에 근원을 두고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의 문헌에 전해
지는 본관으로는 담양(潭陽)· 현풍(玄風)· 영양(英陽)· 금성(金城)· 풍천(豊
川), 그리고 중국의 대명(大明) 등 여섯 본이 있으나 윗대를 살필 자료가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5에는 서기 611년(백제 무왕12) 수(隋)나라에 사신으로 들
어가 조공을 한 국지모(國智牟)가 고구려 정벌의 출병 기일을 물었다는 기록이 보이
며, 고려 태조 원년(大祖元年)에 원외랑(員外郞:상서성의 정6품 벼슬)에 오른 국현
(國鉉)이란 사람이 있었으나, 그 후대가 분명하지 않다.
== 금씨(琴氏)의 유래와 본관
금응(琴應)은 고대 기자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로, 문장과 도학(道學)으로써
명성(名聲)을 떨치고 예악문물과 삼강오상으로 법치(法治)를 도왔다고 한다.
금용식(琴容式:호는 동원군)은 그의 후손으로 고려개국삼한벽상공신(高麗開國三韓壁
上功臣)에 올랐는데, 이가 바로 금씨의 시조이다. 그러나 윗대가 실전되고, 그후 후
대마저 불명확하여 고려 명종 고종 대의 명신으로 이름난 금의(琴儀)를 일세조로 하
여 대를 이어오고 있다.
금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봉화 등 6본까지 기록되어 있으
나, 모두다 봉화금씨(奉化琴氏)인 것으로 전한다.
== 기씨(奇氏)의 유래와 본관
기씨는 행주(幸州)를 하나의 본으로 하고, 기자의 48세손으로 전하는 기우성(奇友
誠)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 후대가 전하지 않아 고려 인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순우(純祐)를 일세조
(一世祖)로 하여 대를 이어오면서, 이름난 무신 윤위(允偉)· 윤숙(允肅)· 홍석(洪
碩) 등과 대학자 대승(大升)·정진(正鎭) 등을 배출하여 이름있는 가문의 명성을 얻
었다.
== 김씨(金氏)의 유래와 본관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성씨이다. 문헌의 기록
을 보면,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623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
考)》에 499본,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는 120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 중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것은 100여 본이다.
김씨는 가락국의 수로왕(首露王) 계통과 신라의 알지(閼智) 계통으로 대별되며, 현
재 전하는 거의 모든 김씨가 이 두 계통 중 어느 한쪽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우선, 가락국 원조로 전해 오는 수로왕에 대한 일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한다. 수로왕의 후손 가운데는 김해김씨와 허씨 및 인천
이씨·함창김씨 등이 있고, 진주김씨·수원김씨·영동김씨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
려졌다.
둘째, 신라의 알지(閼智) 계통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면,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金)으로 했다고 전한다. 알지계는 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오면서 무려 6백여 관향으로 나누어졌으나, 그 중 뚜렷하게 현존하는 본관은 대략
80여 본으로 추정된다.
알지계에서 갈려나간 타성으로는, 안동권씨·강릉왕씨·광산이씨·감천문씨·수성최
씨 등이 있다.
== 나씨(羅氏)의 유래와 본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나씨는 중국 예장(豫章:지금의
강서성 예장도) 축융(祝融)씨에서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그 후 광정공(匡正公)이 주
(周)나라 때 공을 세워 나국(羅國:지금의 방주)에 봉해짐으로써 나씨의 시초가 되었
다.
나씨의 본관은 문헌에 나주(羅州), 금성(錦城), 안정(安定), 군위(軍威), 의성(義
城), 비안(比安), 정산(安山) 등을 포함하여 55본이 전한다. 이 중에서 금성을 제외
한 나머지 본관은 나주에서 갈라진 것으로 보인다
== 남궁씨(南宮氏)의 유래와 본관
남궁씨의 시조는 본래 은(殷)나라 사람으로, 기원전 1l22년경 주(周)나라 무왕(武
王)이 은(殷)나라를 멸망시키자 기자(箕子)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함열남궁씨세보(咸悅南宮氏世譜)》에는 고려 성종 때의 대장군인 남궁원청
(南宮元淸)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원래 감물아현(甘勿阿縣:전북 익산군 함
열읍) 출신이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관향을 함열(咸悅)로 삼았다.
== 대씨(大氏)의 유래와 본관
대씨의 연원은 발해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의 아들 대탁(大鐸)에서 비롯되었다
고 한다.
그는 발해가 망하자 자손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경남 밀양(密陽)에 정착하였다고 전
한다
== 도씨(都氏)의 유래와 본관
도씨는 중국 여양(黎陽) 출신인 도계(都稽)가 한(漢)의 무제(武帝) 때 임채후(臨蔡
侯)에 봉해지고, 도씨 성을 받음으로써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도씨는 연원이 분명치 않으나 멀리 삼국시대에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
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전고대방(典故大方)》등 여러 문헌에는 도
씨의 시조가 도미(都彌)로 기록되어 있다.
《성주도씨족보(星州都氏族譜)》에서는 고려 원종(元宗) 때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
낸 도순(都順)을 일세조로 기록하고 있다.
도씨의 본관은 성주(星州)를 비롯하여 팔거(八거 :칠곡 속현)· 파주(坡州)· 사정
(奢井:수원 지방)· 청주(淸州)· 전주(全州)· 경주(慶州)· 상주(尙州)· 밀양(密
陽) 등 16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에는 성주 도씨 하나만 알려져 있다.
== 돈씨(頓氏)의 유래와 본관
본관은 목천(木川) 하나 뿐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木川)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순응
하지 않고 소란을 자주 피웠으므로 그 지방 사람들에게 돈(豚)· 상(象)· 우(牛)
· 장(獐) 둥 짐승의 이름을 성으로 갖게 했는데, 이들이 뒷날 돈(頓)· 상(尙)· 우
(禹)· 장씨(長氏)로 성씨를 바꾸었다고 한다.
== 마(馬)의 유래와 본관
마씨는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운 마려(馬黎)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씨는 고대 우리나라
의 씨족명(氏族名)을 이천여년 동안 계승해 온 유일한 성씨이다.
《마씨대종보(馬氏大宗譜)》에서는 마한(馬韓)의 마겸(馬謙)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백제가 망하자 백제 부흥을 전개한 마육침(馬陸沈)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그후 고려 문종(文宗) 때의 마점중(馬占中)의 아들 중 현(鉉)을 중심으로 하는 목천
파(木川派)와 혁인(爀仁)을 중심으로 하는 장흥파(長興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 맹씨(孟氏)의 유래와 본관
맹씨는 주나라 시조 희후직(姬后稷)의 22대 노환공(魯桓公)의 아들 경부(慶父)는 처
음엔 중손(仲孫)이라 불렸는데, 그후 맹손(孟孫)으로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맹(孟)
자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맹씨는 맹자(孟子)의 40세손 승훈(承訓)이 서기 888년(신라 진성여왕 2)
당으로부터 유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온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명확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맹자(孟子)의 51세손 의(儀) 때부터이다. 의
(儀)는 고려 충렬왕 때 사람으로 충선왕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신창(新昌)으로 하게 되었다.
== 모씨(毛氏)의 유래와 본관
모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중국의 광주(廣州)와 공산(公山:
공주)·서산(瑞山)· 김해(金海) 등이 기록되어 있으나 시조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모씨 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
장하지만, 오늘날 모씨와의 관련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중국 성씨 가운데 모씨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중국의 모씨가 우리나라에 들
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 문씨(文氏)의 유래와 본관
문씨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의 문
헌에 남평(南平), 단성(丹城), 영산(靈山), 보령(保寧), 감천(甘泉:안동속현), 정선
(旌善), 결성(結城), 개령(開寧), 강릉(江陵) 등을 포함하여 156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감천(甘泉)과 정선(旌善)을 제의한 본관은 모두가 남평(南平)에
서 유래한 것이다.
남평 문씨는 신라 자비왕 때의 다성(多省)이 문씨의 성을 받아 시조가 되었으며,
감천 문씨의 시조 문원길(文原吉)은 본래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그의 선조
중 한사람이 중국에 들어갔다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문씨의 성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정선 문씨의 시조 문임간(文林幹:일명 문작)은 본래 전씨(全氏)였는데, 역시
중국에서 문명(文名)을 날림으로써 문씨의 성을 받았다고 한다.
== 민씨(閔氏)의 유래와 본관
민씨는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민가둔(閔哥屯)이라는 곳에서 연원한다.
공자(孔子)의 10제자중 하나인 민자건(閔子騫)의 후손 민칭도(閔稱道)가 사신으로
들어와 여흥(驪興:여주)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다.
민씨는 본이 여흥(驪興) 하나 뿐으로 고려 때부터 이름있는 가문으로 알려졌다
== 박씨(朴氏)의 유래와 본관
박씨는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한 시조로 한다.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등의 기록에 의하면, 박(瓢)과 같
은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박(朴)으로 하고 명왕(明王)·성왕(聖王) 혹은 철인(
哲人)·현지자(賢智者)라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칭했다.
박씨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과 일성왕의 대에서 크게 갈라졌다. 박씨의 본관
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증보문헌비고(輛文獻備考)》, 《박씨선원대
보朴氏璿源大譜)》등에 무려 300본 이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중 중시조가
분명하고 후손이 현존하는 본관은 70여 본으로 추정된다.
== 반씨(潘氏)의 유래와 본관
반씨는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인 계손(季孫)이 반(潘) 땅에 봉해지
면서 시작된 성씨라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다.
《반씨대동보(潘氏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시조 부(阜:본명은 서)는 계손의 9세손
이며, 거제(巨濟)를 본으로 하였다. 그 뒤 기성(岐城)· 남평(南平)·광주(光州)·
결성(結城) 등으로 본이 나뉘어 졌다고 한다.
== 방씨(方氏)의 유래와 본관
방씨는 본래 중국 하남성(河南省) 출신인 방지(方智)가 사신으로 신라에 왔다가 정
착하면서 생긴 성씨이다.
《온양방씨대동보(溫陽方氏大同譜)》에 의하면 방지(方智) 이후의 일은 전하지 않
아 고려 태조 때의 운(雲)을 일세조로 하였으며, 운의 거처였던 온양(溫陽)을 본으
로 하였다.
온양방씨는 한때 판서공파(判書公派)· 간의공파(諫議公派)· 안렴사공파(安廉使公
派)·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
公派)· 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로 나뉘어 졌으나 안렴사공파와 상락부원군파
는 대가 끊어졌다고 한다.
== 방씨(房氏)의 유래와 본관
방씨는 본래 중국 요(堯)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방읍(房邑)의 후(候)에 봉해지면
서 생긴 성씨이다.
우리나라의 방씨는 고구려에 정착한 당나라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의 7세손 방
계홍(房季弘)을 시조로 삼고, 그가 살았던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삼았다.
방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남양(南陽)·용성(龍城)·수원(水
原)을 비롯하여 23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수원방씨의 시조인 정유(貞
儒)가 계홍(季弘)의 손자이므로 근원은 남양방씨인 것이 확실하다.
== 배씨(裵氏)의 유래와 본관
배씨는 사로(斯盧:서라벌)의 육촌(六村) 중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祗陀)
를 시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자료가 전하지 않아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
을 중시조로 모신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나 《중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의 기록에 따르
면, 배씨는 현경(玄慶)의 증손 사혁(斯革:가락군)에게 아들 4형제가 있어 맏아들 원
룡(元龍)은 분성(盆城), 둘째 천룡(天龍)은 성산(星山), 세째 운룡(雲龍)은 달성(達
城), 네째 오룡(五龍) 은 흥해(興海)로 나뉘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 백씨(白氏)의 유래와 본관
백씨는 《제왕전승성원도(帝王傳承姓源圖)》에 의하면 황제(黃帝)의 후손인 백을병
(白乙丙)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백씨는 백을병(白乙丙)의 먼 후손인 백우경(白宇經)이 780년 신라로 건
너와 정착한 것이 시초이다. 그후의 일은 전하지 않아 자세하지 않아 신라 때의 백
창직(白昌稷)을 일세조로 하고,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수성(隨城)의 수령을 지낸
백천장(白天藏)으로부터 본관을 수원으로 하였다.
백씨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184본이 전하며, 《증보문헌비고(增補
文獻備考)》에는 157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수원백씨에 뿌리를 둔 것이다.
== 변씨(邊氏)의 유래와 본관
변씨는 고대 중국의 황제 헌원씨(軒轅氏)에서 시작되었으며, 감숙성(甘肅省) 롱서
(朧西)에 살았던 변앙(邊印)의 후손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
어 있다.
그러나 《변씨세보(邊氏世譜)》에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의 '촌락성
일변(村落姓一邊)'이란 기록을 토대로 하여 신라 시대에서부터 황주(黃州)에 정착
해 온 호족의 후예로 적고 있으며, 또한 일설에는 신라의 고승 균여대사(均如大師)
의 아버지인 변환성(邊煥性)이 서기 672년(신라 문무왕 12) 당나라의 외교관으로 활
약하고 만년에 황주(黃州) 둔대엽촌(遁臺葉村)에 살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변씨의 본관은 황주(黃州)·장연(長淵)·원주(原州)를 비롯하여 가사(加思:문경)·
전주(全州) 등 무려 84본까지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 복씨(卜氏)의 유래와 본관
복씨는 당나라 학사(學士)로서 신라 말에 오계(五季)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
어와 면천(沔川:충남 당진)에 정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복씨의 본관은 면천·홍주(洪州)· 오천(烏川:경북 연일)·연주(延州:강원도 영윌)
·평산(平山)·구성(龜城) 등 10본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면천을 제외한 나머
지 관향은 자세하지 않다.
면천 복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
統譜)》와 《고려사(高麗史)》 등의 문헌에 의하면 그는 면천 출신으로 고려 태조
를 도와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과 더불어 사공신(四功臣)
이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복지겸을 시조로 하고 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 부씨(夫氏)의 유래와 본관
부씨는 <탐라개국설화(耽羅開國說話)>에 나오는 부을나(夫乙那)를 시조로 하고 있
다.
삼성혈전설(三姓穴傳說)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 탐라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
穴)에서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났는데, 이들이 곧 부을나(夫乙那)· 고을나(高乙
那)· 양을나(良乙那)이다. 이로부터 탐라의 부씨(夫氏)· 고씨(高氏)· 양씨(良氏)
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전하지 않아 정확하게 밝힐 수 없고, 조선초에 교위(校尉)
와 별장(別將)을 지낸 언경(彦景)을 일세조로 하여 대를 이어왔다.
== 사공씨(司空氏)의 유래와 본관
사공씨는 중국 진(晋)나라 가신(賈辛)이란 사람이 사공(司空)이란 벼슬을 지내고,
그 벼슬이름을 성으로 삼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효령사공씨세보(孝令司空氏世譜)》에 의하면, 시조는 사공도(司空圖)인데, 그는 당
나라 희종(僖宗)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897년(신라 효공왕 원년) 동료
(同僚) 7학사(七學士)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 신라의 최치원(崔致遠)과 교유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전하는 문헌이 없기 때문에 자세히 밝힐 수 없어서, 후손들은 고려 충숙왕
(忠肅王)때 판의시사(判儀寺事)에 올라 효령군(孝令君)에 봉해진 사공중상(司空仲
常)을 일세조로 하고 관향을 효령(孝令)으로 삼았다.
== 서씨(徐氏)의 유래와 본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기자(箕子)의 40세손 준(準)이 난을 피하
여 서아성(徐阿城:경기도 이천)에 옮겨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지명을 따서 성을 서씨
(徐氏)라 하였다고 전한다.
신라의 개국공신으로 아성대장군(阿城大將軍)에 오른 서두나(徐豆羅)의 후손 서신일
(徐坤逸)이 이천 서씨의 시조이다.
그후 달성(達城)·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
當)· 대구(大丘) 등으로 나뉘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 부여 서씨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
여융(扶餘降)으로, 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당 고종으로부터 서씨 성을
받았다고 하며, 그 후손 서존(徐存)이 중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서씨의 대부분은 이천 서씨이고, 역사상 빼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집안은 대구 서
씨이다.
== 석씨(昔氏)의 유래와 본관
석씨의 시조는 신라 제4대 왕인 석탈해(昔脫解)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탈해왕의 탄생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처음 탈해를 태운 궤가 바다를 통해서 올 때 까치가 울면서 따랐기 때문에 까치작
(鵲)자에서 새조(鳥)를 떼어버린 석(昔)자를 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포장한 궤에
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후손들이 본관을 월성(月城)으로 하고, 고려 때 시랑(侍郞)을 지낸 재흥(載
興)을 일세조로 하였다.
== 선우씨(鮮于氏)의 유래와 본관
선우씨는 멀리 기자(箕子) 때부터 시작되었다. 기자의 맏아들 송(松)이 장혜왕(莊惠
王)으로 즉위하면서 아우인 중(仲)을 우산국(于山國)에 봉하여 나라를 세우게 하였
으므로 조선(朝鮮)의 선(鮮)자와 우산(于山)의 우(于)자를 따서 선우씨(鮮于氏)의
성을 삼았다고 한다.
선우씨는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에 기자조선 48대 왕위와 마한 9대 왕
위를 이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자의 48대손 량(諒)이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가 나라이름을 황룡(黃
龍)이라 하고 l0대를 지냈다.
량의 l0세손 병(柄)에 이르러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그후 서
민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고증할 문헌이 없어 자세히 밝힐 수는 없다.
고려 문종(文宗) 때 중서주서(中書注書:종7품)를 지낸 선우정(鮮于靖)을 일세조로
하고 있다.
== 설씨(薛氏)의 유래와 본관
시조 거백(居伯)은 당시 진한(辰韓) 땅이었던 지금의 경북 월성군 천북면(川北面)
일대의 명호산(明浩山) 고야촌(高耶村)을 다스리던 촌장이었다.
서기 9년(신라 유리왕 9년) 습비부(習比部)로 개칭되면서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각각 성을 받은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 소씨(蘇氏)의 유래와 본관
소씨는 동구이(東九夷) 중의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에 도읍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蘇)를 심어 성을 소(蘇), 이름
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의 61세손인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길림성)의 하백에 봉해졌고,
소풍(蘇豊)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기원전 209년에 진한(辰韓)을 건국하였다.
그 후 여러 대 후인 660년(태종무열왕 7) 3윌 3일에 알천(閼川)이 진주(晋州)로 낙
향, 경(慶)으로 이름을 고쳐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시조가 되었다.
== 손씨(孫氏)의 유래와 본관
손씨는 신라 사로(斯盧)의 대수촌장인 구례마(俱禮馬)가 서기 32년 유리왕으로부터
손씨 성을 받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문헌에 기록된 본관은 경주를 비롯하여 밀양(密陽)· 평해(平海)· 청주(淸州)· 안
동(安東)·나주(羅州) 등이 있다. 그러나 안동을 제외한 모든 손씨는 구례마의 후
손 손순(孫順)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안동 손씨의 시조인 응(凝)은 본래 순씨(荀氏)였는데 고려 8대 현종(顯宗)의 휘가
순(詢)이라 음이 같아서 손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 신씨(申氏)의 유래와 본관
신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에 171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평산(平山)· 고령(高靈)· 아주(鵝洲)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신씨는 고려의 명장 신숭겸(申崇謙:초명은 능산)을 시조로 하는 평산 신씨와 신라
귀족의 후예인 신성용(申成用)을 시조로 하는 고령 신씨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편 아주신씨는 《아주신씨본원록(鵝洲申氏本源錄)》에 의하면 익휴(益休)를 시조
로 기록하고 있다.
== 신씨(辛氏)의 유래와 본관
신씨의 조상은 중국 용서성(朧西省) 출신인 신시랑(辛侍郞)이 당나라 천보년간(天寶
年間:742∼755)에 사신으로 신라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 것으로 전하나 확증할 자료
는 없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씨의 본관을 60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영산
(靈山)과 영월(寧越)을 제외한 본관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영산 신씨의 시조는 고려 인종 때의 신경(辛鏡)으로, 자신이 살았던 중국 강서성 대
유현(大庾縣)과 산세가 비슷한 창녕(昌寧)의 영취산(靈鷲山)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것
이 우리나라 신씨의 시초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에서 영월 신씨로 나누어지게 되었
다
== 변씨(卞氏)의 유래와 본관
변씨는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 숙진(叔振)이 변읍(卞邑)의 군(君)
이 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변씨족보(卞氏族譜)》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변씨는 숙진(叔振)의 후손인
원(源)이 당나라에서 신라에 건너와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의 일은 전하지 않
아 자세히 살필 수가 없고, 고려 때 팔계(八溪:초계)군이 되었던 정실(庭實)을 시조
로 하고 초계(草溪)를 본관으로 삼았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등의 문헌에는 변씨의 본관을 44본까지 기록하고 있
으나. 현재는 초계와 정실의 증손인 고적(高迪)에 의해 나누어진 밀양(密陽) 등이
주류를 이룬다
== 아씨(阿氏)의 유래와 본관
아씨는 진(晋)나라 안제(安帝) 때 사람인 아부간(阿簿干)의 후손으로 전하며, 《삼
국유사(三國遺事)》 등의 역사서에 아비지(阿非知), 아직기(阿直岐) 등의 이름이 등
장하는데 그들의 성씨가 아(阿)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 안씨(安氏)의 유래와 본관
우리나라 안씨의 도시조(都始祖)는 당(唐)나라 출신으로 신라 애장왕(哀莊王:신라
40대왕, 재위 기간;800∼809) 때 우리나라로 들어온 안원(安瑗)이라고 하며, 그의
본래 성은 이씨(李氏)였는데 그의 아들 3형제가 서기 864년(신라 경문왕 4)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안씨의 성을 받았다고 한다.
맏아들 방준(邦俊:죽산군에 봉해짐)의 8세손 영의(令儀)를 시조로 하는 죽산안씨(竹
山安氏)와 둘째아들 방걸(邦傑:광주군에 봉해짐)을 시조로 하는 광주안씨(廣州安氏)
에서 순흥안씨(順興安氏:시조는 자미)·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시조는 원형)· 탐
진안씨(耽津安氏:시조는 원란) 등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 양씨(梁氏)의 유래와 본관
양씨는 모두가 탐라국 삼성혈(三姓穴) 설화의 양을나(良乙那)를 단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양씨대동보(梁氏大同譜)》에 의하면, 374년 양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로 신라
에 들어가 조공하게 된 때부터 양(良)을 양(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순(洵)이 682년(신라 신문왕 2)에 신라에 들어가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짐으
로 후손들이 본관을 제주로 하였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우량(友諒)이 남원
부백(南原府白)에 봉해졌으므로 제주에서 갈라져 남원으로 한 남원양씨(南原梁氏)
가 시작되었다.
== 여씨(呂氏)의 유래와 본관
여씨는 주나라의 무왕이 전설적 현인인 망(望:강태공)을 여(呂)에 봉하고 호를 여상
(呂尙)이라 하여 시작되었다. 그의 후손인 불위(不韋)의 아들 영(榮)이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제이다.
우리나라 여씨의 시조는 증손 몽(夢)의 후손인 당나라 희종 때의 어매(御梅)인데,
그는 877년(신라 헌강왕 3년) 신라에 건너와 경북 성주군(星州郡) 벽면(碧面)에
정착하였다.
《함양여씨족보(咸陽呂氏族譜)》와 《성산여씨족보(星山呂氏族譜)》에 의하면 어매에
서부터 함양과 성산을 각각의 본으로 삼았으나, 모두 하나의 조상에서 시작한 같은
혈족이다.
== 연씨(連氏)의 유래와 본관
시조는 고려 태조 때 인물인 연주(連珠)로 전한다.
이보다 앞서 신라 제10대 내해왕(奈解王) 때 이벌찬(伊伐飡) 진(珍) 장군이 백제와
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하는데, 오늘날의 연씨와
연관이 있는지는 상세히 알 수가 없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나 호적상으로는 나주(羅州)로 쓰기도 한다.
== 연씨(燕氏)의 유래와 본관
연씨는 본래 백제 8대성의 하나로 전하는 성인데, 이들 8대성은 백제의 멸망과 함
께 소멸되고 오늘날 남아 있는 성은 연(燕)· 국(國)· 진(眞)씨 뿐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성왕(聖王) 때의 연실(燕實) 등 여러 사람의 연씨가 나오
지만 시조 및 연원은 알 수 없다.
본관은 문헌에 정평(定平) 외에 영평(永平)· 전주(全州)· 평주(平州:평산의 다른
이름)· 곡산(谷山)· 덕원(德原) 등이 나타나 있으며,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에서 26가구에 1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염씨(廉氏)의 유래와 본관
염씨는 중국 교목세가(喬木世家:여러 대를 현달한 지위에 있어 자기 집안의 운영을
그 나라의 운영과 함께 하는 집안)의 후손 형명이 당나라 후기에 신라에 들어와 봉
성(峰城:파주의 옛 지명)에 자리잡은 것이 우리나라의 처음이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고려 후기의 인물인 제신(悌臣)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을 처
음에 봉성으로 하였다가 곡성(曲城)으로 바꾸었다.
곡성현이 서원(瑞原)으로 바뀌면서 다시 서원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조선 연산군
때 와서 서원이 다시 파주(坡州)로 바뀜에 따라 현재의 파주염씨가 되었다.
== 옥씨(玉氏)의 유래와 본관
옥씨는 중국에 들어온 성씨로, 당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중의 한 사람인 진
서(眞瑞)가 신라에서 의춘(宜春:의령의 별칭) 군(君)에 봉해져 의령(宜寧)에 정착하
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의 문헌이 전하지 않아 후손들이 고려 때 인물인 은종(恩宗)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의령으로 하였다.
== 온씨(溫氏)의 유래와 본관
온씨는 중국 주나라 성왕(成王)의 아우로 당에 봉해진 숙우(叔虞)의 12세손 소후(昭
侯)가 그의 아우 사(師)를 온(溫)에 봉하고 평원(平原)에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온
씨의 성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온씨는 삼국시대 때 한 국가인 고구려의 평강공주와 혼인하여 평원왕의 부
마가 된 온달(溫達)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온씨의 본관은 서원(西原:청주의 별호)
· 온양(溫陽)· 전주(全州)· 나주(羅州)· 금구(金溝)· 경주(慶州) 등 11본이 있
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하게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는다.
== 왕씨(王氏)의 유래와 본관
우리나라 왕씨는 중국 태원왕씨(太原王氏)에서 갈라진 성씨라고 보며, 개성(開城)·
제남(濟南)을 비롯하여 22본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는 본관은, 고려왕조를 주도해 온 개성 왕씨와 본래의 성이 박
씨였으나 태조 왕건에게 왕씨의 성을 받은 제남 왕씨가 있다.
== 위씨(魏氏)의 유래와 본관
위씨는 중국 주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당나
라 관서 홍농 사람인 경(鏡)이 신라 태종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한 것이 우리나
라 위씨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신라에서 회주(懷州:장흥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이 전하지 않아 신라말의 창주(菖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신라 왕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했을 때 당나라 태종이 파견한 8
학사(八學士:위· 방· 홍· 기· 목· 은· 갈· 봉)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
에 들어왔다고도 한다
== 유씨(柳氏)의 유래와 본관
유씨의 시조는 중국 고대의 제왕인 황제(黃帝)의 후예 유색(柳穡:본명 유승색)이다.
본관은 문헌에 149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문화(文化) 유씨를 비롯하여 서산(瑞山)
· 풍산(豊山)· 선산(善山)· 고홍(高興)· 진주(晋州) 등 10본 미만이 현재 전하
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두 문화유씨 시조 유차달(柳車達)의 9대에서 갈라졌다는 것이 보통이다.
고려 태조 때의 유차달은 본래 유주(儒州:현 황해도 신차군 문화면) 지방 사람이었
는데, 당시 태조 왕건이 궁지에 몰렸을 때 수레에 군량을 싣고와 도와주었으므로 차
달(車達:초명은해)이란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 유씨(兪氏)의 유래와 본관
유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계(杞溪)· 창원(昌原)· 인동
(仁同)· 장사(長沙:무장의 별호)· 고령(高靈)· 무안(務安)· 천녕(川寧)· 강진
(康津) 등을 비롯하여 105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신라 때의 유삼재(兪三宰)
를 시조로 하고 있다.
== 유씨(庾氏)의 유래와 본관
유씨는 본래 중국에서 나타난 성씨로, 한나라 말에서 진나라 초기에 살았던 유순유
(庾荀悠)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건너와 정착하여 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후손인 검필(黔弼)이 황해도 평주(平州:평산의 옛 지명)에서 살았기 때
문에 후손들이 검필(黔弼)을 시조로 하고 그가 살았던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하였
다.
검필의 5세손 녹숭(祿崇)이 고려 문종 때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면서, 그
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무송을 본관으로 하여 평산에서 갈라지게 되었다.
== 은씨(殷氏)의 유래와 본관
은씨는 중국 당나라에서 서기 850년(신라 문성왕 12) 우리나라에 들어온 은홍열(殷
洪悅)이 시초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덕양(德陽:행주의 옛 지명)에 정착하였으므로, 후손들이 홍열
을 시조로 하고 행주(幸州)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태인(泰仁)· 명곡(椧谷:성주의 속명)·
행주 등 9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행주 은씨 하나만 전한다.
== 이씨(李氏)의 유래와 본관
이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546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
備考)》에 451본, 《전고대방(典故大方)》에 109본, 《국조방목(國朝榜目)》에 103
본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중 시조가 뚜렷하게 밝혀져 전하고 있는 본관은 100
여 본으로 추정된다.
이씨는 신라의 육촌(六村)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급양부)의 촌장 알평(謁平:표
암공)을 시조로 하는 경주(慶州) 이씨, 한(翰)을 시조로 하는 전주(全州) 이씨, 중
국 한문제(漢文帝) 때 사람인 반(槃)의 24대손 황을 시조로 하는 고성(固城) 이씨,
원나라 출신으로 조선시대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진 이지란(李之蘭:본명은 퉁두란)
을 시조로 하는 청해(靑海) 이씨 등으로 구별된다.
== 인씨(印氏)의 유래와 본관
인씨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로, 《좌씨전(左氏傳)》과 《계고집성(稽古集成)》에
는 중국 정나라 자장(子張)의 아들 단(段)이 할아버지 자인(子印)의 이름에서 인
(印)을 가져와 성을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인씨는 단의 후손 서(瑞)가 진나라에서 297년(신라 유례왕 14)에 사신으
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정착하면서 그 시초를 이룬다.
그 후 33세손 빈이 고려 인종 때 교수(喬樹:교동의 옛 지명)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
이 본관을 교동(喬洞)으로 하였다
== 임씨(林氏)의 유래와 본관
임씨는 은나라 최후의 왕인 주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죽은 비간(比干)의 아들 견(堅)
이 장림산(長林山)에 은거하면서 성을 임(林)으로 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임씨의 시조로 알려진 임팔급(林八及)이 당나라 문종 때 우리나라에 들어
와 팽성(彭城:평택의 옛 지명) 용주방(龍珠坊)에 살면서부터 평택 임씨가 시작되었
고, 고려 때의 사람 임비(林庇)로부터 나주 임씨가 시작되었다.
그 후 부안(扶安)· 익산(益山)· 은진(恩津)· 진천(鎭川)· 안동(安東)· 예천(醴
泉)· 순창(淳昌)· 장흥(長興)· 옥야(沃野)· 안의(安義)· 울진(蔚珍) 등으로 갈
라지게 되었다
== 장씨(張氏)의 유래와 본관
장씨의 본관은 문헌에 4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30본 미만으로 추정된
다. 그중에서 덕수장씨(德水張氏)와 절강장씨(浙江張氏)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씨
는 도시조(都始祖)인 장정필(張貞弼)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안동장씨세보(安東張氏世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등에 의하면 장정
필은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고려 태조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덕수장씨는 뿌리를 회회계(回回系)에 두고 있으며, 《덕수장씨족보(德水張氏族
譜)》 와 《고려사(高麗史)》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 때 덕성부원군(德城府院
君)에 봉해지고 덕수현(德水縣)에 살게된 원나라 사람 장경(張卿:일명 장백창)을 시
조로 하고 있다
== 전씨(全氏)의 유래와 본관
전씨의 시조는 백제의 개국공신 전섭(全 )이다. 《전씨대동보(全氏大同譜)》에 의하
면, 그는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옮길 때 온조를 따른 9명의 신하 중의 한 명으로,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십제공신(十濟功臣)》의 한
사람이 되어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문헌에는
전씨의 본관이 193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18본 정도가 전한다.
== 전씨(田氏)의 유래와 본관
전씨의 본관은 문헌에 159본까지 기록되고 있으나,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영광(靈
光) 전씨로서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전종회(田宗會)이다.
== 정씨(丁氏)의 유래와 본관
우리나라 정씨는, 본래 중국 당나라 사람인 정덕성(丁德盛)이 853년(신라 문성왕
15)에 우리나라 압해도(押海島)에 유배되어 살면서부터 그 시초가 되었다.
정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에 무려 70여 본이 기록되어 있
다.
== 정씨(鄭氏)의 유래와 본관
정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247본, 《동국만성보(東國萬姓
譜)》에 35본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정씨의 본관은 30본 미만이다.
정씨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육촌(六村) 중 취산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가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에 본피부(本彼部)로 바뀌어 불리면서 정씨의 성을 하사받아, 서산(瑞山)과 낭야
정씨를 제외한 모든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제갈씨(諸葛氏)의 유래와 본관
제갈씨는 중국 낭야 갈백의 후손으로 전한다.
《남양제갈씨세보(南陽諸葛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제갈규(諸葛珪)는 《삼국지(三
國志)》에 등장하는 유명한 제갈량(諸葛亮:제갈공명)의 아버지다. 제갈규의 20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우리나라에 건너왔는데, 이가 바로 우리나라
제갈씨의 시초가 된다
== 조씨(曺氏)의 유래와 본관
조씨는 10여 본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창녕(昌寧) 조씨의 갈래라
고 알려져 있다.
창녕 조씨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 조계룡(曺繼龍)를 그 시조로 삼는다
== 주씨(周氏)의 유래와 본관
고대 중국 헌원(軒轅)의 후예인 무왕이 기원전 1134년 주나라를 세워 다스렸고, 그
의 37대손 난왕 때 진나라에 멸망하였다. 이에 후손들은 나라이름인 주(周)를 성으
로 삼았는데, 이것이 주씨의 시초이다.
우리나라 주씨의 시조는 서기 786년(신라 원성왕 2) 당나라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귀화한 주이이다. 그는 신라에서 관직을 지낸 인물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문헌에서
는 주씨의 본관을 38본(本)까지 기록하고 있다
== 진씨(眞氏)의 유래와 본관
진씨는 원래 백제 8대 성의 하나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는 백제 고이왕
때의 인물로 가(可), 동성왕 때의 로(老), 삼근왕 때의 남(男), 아신왕 때의 무
(武), 근초고왕 때의 정(淨) 등이 높은 벼슬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
라 신라에서도 신문왕 때에 공(功)과 복(福)이 각각 대아찬과 상대등을 지낸 것으
로 기록에 나타난다
== 차씨(車氏)의 유래와 본관
차씨는 중국 고대 제왕인 황제의 후예이며, 그의 후손 중 한 사람이 우리 나라에 들
어와 평양의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한 것이 차씨의 시초가 되었다 한다.
정착한 곳의 산이름인 일토(一土)를 본떠 왕(王)씨로 성을 바꾸었으며, 그 후손 왕
몽(王蒙)이 정치적 화를 피하기 위해 전(田), 신(申), 차(車) 순으로 성을 바꾸었다
고 한다
== 채씨(蔡氏)의 유래와 본관
채씨의 선대는 고대 중국 고신씨(高辛氏)의 아들 계(契)의 후손이 은나라가 멸망
하자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전한다.
일설에는 신라 내물왕의 부마(駙馬)인 채보한(蔡輔漢)의 후손이라고 전하는 문헌도
있다
== 최씨(崔氏)의 유래와 본관
최씨는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이다. 최씨는
특유의 기개·신념·절조 등으로 ‘최고집’혹은 ‘최씨 앉은 자리에는 풀도 안난
다’등 많은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최씨의 원조는 사로국 육촌(六村) 중의 하나인 돌산고허촌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
(蘇伐都利)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최씨는 387본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43본이다.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에는 소벌도리의 24세손인 최치원의 윗대에
서 분파된 본관으로 개성, 삭녕, 동주, 전주가 있고, 최치원의 후대에서는 함양, 청
주,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해주, 진
주, 탐진, 전주 등으로 분파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최씨가 소
벌도리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를 원조로 하는 후예임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 태씨(太氏)의 유래와 본관
태씨는 고대 주나라 태전(太顚)의 후예라고 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 대조영
(大祚榮)의 10세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가 망하자 서기 934년 고려로 망명하여,
태조가 그를 예우하고 태씨의 성을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씨(太氏)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
考)》등의 문헌에 23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하씨(河氏)의 유래와 본관
하씨는 삼한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 없다.
진양(晉陽 ; 진주)을 본관으로 하는 성으로서, 고려시대에 영남과 호남에 주로 정착
하였다.
문헌에는 본관이 81본까지 전하기도 한다.
== 한씨(韓氏)의 유래와 본관
한씨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시대에 연원을 두고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기자(箕子)의 후손 우량(友諒)이 마한에
서 상당(上黨) 한씨의 근원을 이룬 것으로 전하며, 《청주한씨족보(淸州韓氏族譜)》
에는 준왕(準王:기자의 40대손으로 전함)의 후대인 원왕의 아들 우량(友諒)은 마한
에서 상당 한씨가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우리나라 한씨는 우량(友諒)외 후손 란(蘭)이 청주 방정리(淸州方井里)에서 살
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상당 또는 서원(西原)으로 하였다
== 함씨(咸氏)의 유래와 본관
《함씨세보(咸氏世譜)》에 의하면 함씨의 시조 함혁(咸赫)은 삼한 초기 한강(漢江)
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이 나라를 형성할 때, 용문산 서록(龍門山西麓)에 성을 쌓고
살았던 촌장으로 함왕주악(咸王周鍔)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함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등의 문헌에 66본까지 기록되어 있다
== 허씨(許氏)의 유래와 본관
허씨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妃)인 허황옥(許黃玉)에 연원을 두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허왕비는 아유타다국의 공주로서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이했다고 한
다. 이 때 허왕후의 두 아들에게 허씨를 주어 그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허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 71본까지 기록되어 있
다
== 호씨(扈氏)의 유래와 본관
호씨는 고려 창업의 공신인 호의(扈義)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호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둥의 문헌에 34본까지 기록하고 있다
== 홍씨(洪氏)의 유래와 본관
홍씨는 중국 돈황의 공공씨(共工氏) 후손이 공(共)자에다 수(水)자를 붙여 처음으
로 홍씨가 생겼다고 한다.
우리나라 홍씨의 역사는 당나라 태종 때 사람인 홍천하(洪天河)가 고구려 영류왕(榮
留王)의 요청에 의해 고구려에 들어온 것이 시초가 된다.
== 황씨(黃氏)의 유래와 본관
황씨는 중국 강하 백익(伯益)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황씨에 대해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서기 28년 후한 사람인
황락(黃洛)이 표류를 하다가 신라 평해(平海)에 도착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
다고 기록되어 있다.
== 황보씨(皇甫氏)의 유래와 본관
황보씨는 중국 안정(安定)에서 시작된 성씨로서, 신라 말에 당나라로부터 건너온 황
보경(皇甫鏡)이 우리나라 황보씨의 시원을 이루었다.
《영천황보씨세보(永川皇甫氏世譜)》에 의하면 황보경의 증손 능장(能長)이 고려 태
조 때 공을 세워 영천부원군(永川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영천으로 하게 되
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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