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아유타국에서 가락국으로 시집온 허황옥과 김수로왕에 경주김씨는 흉노족?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락국에 시집 온 허황옥은 김해 허씨의 시조이니 런던의 피카딜리
스트리트에서 레스트 스퀘어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도중에 차이나타운이
보이는데, 런던 동쪽 그리니치와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처럼 허씨(許氏) 식당이 있습니다.
런던 그리니치 마을과 노르웨이 베르겐의 허씨식당은 한국인은 아니고... 중국 장가계의
원가계 천하제일교에 있는 조선족 허씨 상회 처럼 중국인들 인데..... 천하제일교
허씨상회에서 꿀차를 대접받으며 들으니 남편은 김해허씨고 부인은 밀양박씨라 합니다.
김해허씨(金海許氏) 의 유래는... AD 42년 김수로(金首露) 왕이 가야국을 건국했다는데,
1281년경에 편찬된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에는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의 공주 허황옥 (許黃玉) 은 상제의 명으로 종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와서는 서기 48년 (신라 유리왕 25년) 에 한반도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김수로 왕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배와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 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도록 하니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니
유천간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자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김수로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 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살 입니다. 본국에
있을때 금년 5월에 부왕이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허황옥이 왕후가 되어 낳은 아들 중에 장남인 태자(거등왕)는 김해김씨가 되었고 두 아들 (혹은
차남)을 특별히 허씨로 삼았으니 김해 허씨로 여기서 양천허씨등이 갈라져 나갔으며
나머지 일곱 왕자는 출가했다는데...... 죽은 후에는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공주 허황옥 일행이 상륙한 곳이 김해 주포촌 이고... 비단 바지를 벗어 산령에게
제사지낸 곳이 능현이며 배에 붉은기를 꽂고 들어온 곳을 기출변이라
불렀는데, 2천년간 낙동강의 홍수 때 떠내려온 토사로 지금은 육지가 되었습니다.
고대에 금관가야 가락국의 수도 김해시는 인도의 아요디아시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아요디아시
가 위치한 우타르프라데시주도 경상남도에 자매결연 및 교류, 협력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아유타야는 원래 드라비다어를 사용하는 타밀족으로 고대 인더스 문명을 세웠던 드라비다족
이 침입자 아리안족에게 밀려났으니 지금은 남인도에 거주하는데.... 인도에서 사용된
고대 언어인 드라비다어 에서는 '가야' 혹은 '가라' 라는 발음이 '물고기' 를 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만리 떨어진 인도에서 어찌 김해사정을 알것이며 안다한들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 인도에서 한반도 까지 올수 있었으랴? 또 아유타(阿踰陀)' 는 '아요디아(Ayodhya)'
를 가리키는 듯 한데, 이 지명은 4세기 이후 굽타왕조시대에 성립한 듯 보이니 그 전에는
'사케타(Saketa)' 라고 불렸고 7세기 현장의 “대당서역기” 에 비로소 '아유타' 지명이 보입니다.
김해는 고대에 철(鐵)을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던 국제무역항으로 평안도의 한사군 낙랑과 황해도
의 대방을 통해 중국 상인들이 드나들었으며... 또 김해는 중국인들이 왜국으로 가던 길목이니,
사천성 보주의 상인들이 양자강을 따라 내려와 하류인 양주에서 교역했다면 국제 무역항
이던 양자강 하류 양주에서는 바다 건너 왕비를 찾는다는 김해의 사정을 들을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김해시의 허황후릉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 (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 이라는 비가 있으니, 왕비의 이름 황옥(黃玉) 은 중국 여자의 이름이며
보주태후(普州太后) 라고 하는데..... 중국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사천성 安岳縣(안악현) 보주(普州) 를 말하니 지금도 “허씨 집성촌” 이 있다고 합니다.
현대 지명으로는 사천성 자양시 안악현 서운향(瑞雲鄕) 인데 안악현은 우리의 시, 군(市,郡) 에
해당되는데 인구는 160만명이고 중경(重慶)과 성도(成都)의 중간에 위치하니, 보주(普州)
는 안악의 고칭(古稱)이고 허씨 집성촌이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보주 땅의 암벽에 "후한
초에 허씨의 딸 황옥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남들보다 나았다" 라는 글귀가 있다고도 합니다.
인도계 이주민 중에 중국에서 고위직에 오른 인물 중에는 당시 한나라의 황제 선제(재위
BC74년 ~ BC48년) 의 왕비가 된 공애황후 허씨(평군)가 있었다고 하는데.... 선제의
장인 평은후 허광한도 쓰촨성 출신으로 허황옥 역시 그의 일족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습니다.
대장군 곽광은 BC 74년 유하를 폐하고 선제를 황제로 옹립하니 아내 허씨(평군)는 공애황후가
되어 아들 원제를 낳았으며.... 두 번째 출산중에 곽광의 부인은 순우연을 매수해 허씨를
독살하고 자기 딸인 곽성군을 황후로 만들었지만 세월이 흘러 허씨의 아들 원제는 황제가 됩니다.
원제는 왕씨를 황후로 맞았는데 이 효원 황후의 친정 조카가 왕망으로 친정 오빠
왕봉을 극진하게 병구완한 왕망을 신임해 황제에게 추천하니, 왕망은 항문랑을
거쳐 대사마가 되고 딸(효평황후 왕씨) 을 평제에게 시집보내 국구가 되었습니다.
평제가 자신의 외가 위씨들이 박살난 것에 불만을 가지자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2살
유영을 황제로 올렸다가 서기 8년에 황제에 오르니 신(新) 나라인데 안으로 몇가지
개혁을 하면서 밖으로는 흉노를 홀대하니...... 서기 9년에 삭방으로 쳐들어오자
왕망은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했으나 대군을 동원하고도 소득이 없습니다.
왕망은 고구려의 군사들을 징발해 호(胡 흉노)를 치려했으니 가고자 하지 않는지라 강제로 다그쳐
파견하니 변방에서 달아나 도둑이된지라 요서 대윤 '전담' 을 보내 공격하였는데 살해 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 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 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 죄는
'추(騶)' 에게 있지 않습니다.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큰 죄를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간곡한 엄우의 진언을 '왕망' 이 듣지 않고 공격하라 하니 '우' 가 '구려후 추' 를 꾀어
만나길 약속해 '추 '가 이르자 베고 머리를 '장안' 으로 보내었다. '망' 이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 의 이름을 '하구려(下句麗)' 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한' '광무제' 팔년 '고구려왕' 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자 다시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 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爲寇盜. <遼西> 大尹 <田譚>遣擊之,
爲所殺. 州郡縣歸咎于<句麗侯>< > <嚴尤>奏言: [<貊>人犯法, 罪不起于, 且宜安慰, 今猥被之大罪,
恐其遂反.] <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期<句麗侯>< >至而斬之, 傳送其首詣<長安>. <莽>大悅,
布告天下 更名<高句麗>爲<下句麗>. 當此時爲侯國 <漢><光武帝>八年 <高句麗王>遣使朝貢 始見稱王.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죽은 사람은 왕이 아닌 “고구려 장수 연비” 라고 나옵니다. 십년전 백두산
과 용정 가는길에 집안현에 들러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및 장군총을 보고 환도산성에 올랐다가
국내성 유적을 지나 집안박물관에 들렀더니 고구려를 “하구려” 로 표현한게 눈에 거슬리던게 떠오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서기 14년에는 秋八月, 王命鳥校勘 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髙句麗縣 縣屬玄免校勘郡. “가을 8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마리(摩離) 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군대를 내어 보내 한(漢)의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 을 습격하여 차지하였다.”라고 나옵니다.
왕망과 같은 시대에 허씨 황후의 아들인 원제의 후궁에 왕소군(王昭君)이 있었으니
흉노와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서
연지가 되었고 ... 선우가 죽으니 호한야의 아들인 복주류약제 선우의 처가
되는데 서시, 양귀비, 초선과 함께 고 대 중국 4대 미녀들 중 1명으로 손꼽힙니다.
왕소군은 오랑캐 땅에서 죽게되는데 그녀는 "소군원" 이라는 시에서 노래하니 그 시구 중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라는 구절은 흉노 땅의 봄을
맞이했음에도 고향 땅의 봄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데 묘는 소군묘(昭君墓) 혹은 청총(靑塚) 이라고 부르며 혹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지은 시 '소군원(昭君怨, 왕소군의 원망)' 이라는 시라고도 합니다.
漢道初全盛 한나라 비로소 번성하여
朝廷足武臣 조정에는 무신들 넘쳐나건만
何須薄命妾 어찌 하필 박명한 아녀자인고
辛苦遠和親 괴로워라 멀고도 먼 화친 길
掩涕辭丹鳳 눈물을 삼키며 궁궐을 작별하고
銜悲向白龍 슬픔을 머금은 채 흉노 땅으로 향하네
單于浪驚喜 선우는 놀라 그저 기뻐하지만
無復舊時容 예전의 낯빛을 다시 찾을 길은 없구나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히 허리띠가 헐렁해지는데
非是爲腰身 이는 가는 허리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네
원제때 허씨들은 출세가도를 달리는데 또 다른 이야기로 김병모 교수는 후한서에
나오는 기사에, 촉(사천성) 땅에서 서기 47년에 남만인들이 봉기했는데, 그
지도자의 이름이 허성(許聖)으로 이 반란 사건의 여파로 다음해인 서기 48년
에, 사천성 안악현 보주에서 허황옥 일행이 강을 따라 내려왔을 것으로 본답니다.
그래도 김해 황후릉 납릉정문에 조각된 쌍어문(雙魚文) 과 신도시 이수에 태양문등 인도
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아유타의 왕족으로 기원전 1세기에 쿠산족의 침입등 어떤
이유로 인도 아유타국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서는.... 양자강 중류 보주(普州) 에 정착한
왕족의 후손이 무역상 편으로 처녀를 “공주 ”라고 이름 붙여 시집 보냈던 것이 아닐까요?
오라버니 장유화상(長遊和尙) 만 남겨두고 공주를 호송해 온 상인들은 배 가득 쌀
과 철 및 베를 싣고 제 나라로 돌아 갔다지 않습니까! 그러니 김해 구산동의
허황후릉에는 한국에는 나지않는 돌(빈 배의 흘수선을 맟춘 용도?) 파사 석탑
과 함께 비석이 “보주태후(普州太后)” 라고 씌여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십수년 전에 “신라 왕족 경주김씨는 흉노족이다” 라는 책 을 읽고는 반신반의 했었는 데,
그 이후에 KBS 방송에서 "태종무열왕비 및 문무대왕의 비문" 과 중국측 자료 에다가
대당고김씨 부인묘명(大唐故金氏 夫人墓銘) 을 근거로 한무제로 부터 김씨성과
투후(秺侯) 에 봉해진 "흉노 왕자 김일제 (金日磾) 의 후손" 이라고 특집을 방송 했습니다.
" 조상의 이름은 일제(김일제)이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시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발탁해 시중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7대에 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 되고
한(漢)나라에 난리가 나자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흉노의 묵특 선우는 서기 202년에 한고조 유방이 급히 진군하느라 보병인 후진과 격리되어 버린
10만 대군을 평성 백등산에서 포위하고는 공격하려다가 뇌물을 받고는 퇴로를 열어 주었는
데,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게 매년 비단과 무명, 쌀에다가 공주 까지 바쳐가며 평화를 유지합니다.
태종무열왕비와 문무왕비를 세우던 당시의 신라인들은 흉노 투후(김일제)의 후손 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비에 새겼으나.... 고려말부터 조선조에서 유학이 국교로 자리잡고 성현을
낳은 중국을 우르러며 오랑캐를 멸시하면서 조선에서는 이런 사실은 잊혀졌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몇 년전에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는 중국 “서안의 비림(碑林)” 박물관에 있는, 864년 당나라
에서 사망한 신라 여성의 묘지명 인.... “대당 고김씨 부인 묘명” 에서
그 조상을 흉노 출신 투후 김일제 ( 金日磾 ) 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한나라 곽거병이 흉노를 공격해 휴도왕(休屠王)을 포로로 잡자 왕자 김일제(金日磾) 가 투항
하는데, 흉노족은 예로 부터 황금을 좋아해서 금인(金人)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한무제는 금(金), 다시말해 김씨(金氏) 성을 하사하니 중국 최초로 김씨가 된 인물입니다.
후일 "흉노의 후예 김씨" 들은 AD 8년에 한나라 황제 유영에게서 선양을 받아 신(新)나라
를 세운 외척 왕망(王莽)의 이종사촌으로 함께 영화를 누리다가.... 유수등이 반란
을 일으켜 서기 23년에 후한(後漢, 동한) 을 세우자 지은 죄가 있으니 후환이
두려워 도주하는데 그중에 신라로 간 사람이 김알지 이고 김해로 간 사람이 수로왕 이라?
그런데 흉노족의 후예 "김수로는 중국 신(新)나라에서 허씨들과 교유" 관계가 있었으니 후한
의 핍박을 피해 동쪽으로 망명해 김해에서 자리를 잡자.... 허씨 중에 일부가 보주(普州)
로 피한 것을 알고는 중국 보주에 연락해서 김해로 데려와 배필로 맞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김씨의 선조인 흉노 김일제는 “금인(金人)” 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고 경주 김씨 김알지
는 계림의 소나무에 걸린 “금괘” 에서 나왔으며 김수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합”에서 나왔으니 모두 “금(金)” 과 관련이 있으므로 금씨 (김씨 金氏) 가 된 것이라?
가락국 김수로도 하늘 에서 내려왔다는데 김알지와 김수로가 "금괘나 금합" 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람들이 저 두 사람의 고향이나 아비, 어미등 그“출생의 근본을 모른다” 는 뜻
이니, 곧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하여 김수로 그도 흉노족 이라 주장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석탈해는 멀리 한반도 남쪽에서 수로가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같은 흉노족의 동료 인 “석탈해” 가 수로의 지위를 뺏으러 바다를 건너 왔다가 실패
했던 것이니? 이에 석탈해 는 울산으로 달아나 지방 호족과 결탁한후, 경주로
올라가 세력을 과시하여 신라 왕족 “박씨의 사위”가 되어서는 결국에는 박씨들
로 부터 신라 왕위를 빼앗아 차지 하는 것과 별반 다를바 없는 이야기가 아닌지요?
흉노족 이란 곧“오랑캐” 이니 후일 유학(儒學)이 자리 잡은 고려시대 이후에 우리 조상
들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명나라 가 오랑캐인 여진족들이 세운 청나라에
망하자 이에 "우리가 중국" 이라고 생각하여.... 소중화(小中華) 를 자처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랑캐 란 중국인이 이웃의 남의 민족을 칭하는 말 이니...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 동이(東夷) 가 곧 그들인데..... 우리 민족이라고도 하는 동이(東夷) 는
원래는 한반도가 아닌 화북과 산동 반도 및 강소성등 중국의 동부에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동이족 치우(蚩尤) 가 중화 민족인 황제(黃帝) 에게 패배하니 대부분은 화하족에 동화되어 버리고
그 일부가 중국 동부 지방에서 도망쳐서 만주와 한반도로 밀려나게 된 것이 아니던가요?
또 화하족인 하나라의 동쪽 산동성과 화북성에 있던 상(은) 나라를 동이족이라는데, 저 상나라가
하나라를 이어 중국이 되니 동이족이 중국 영토에 한족으로 동화되어버리니... 그 후로 동이
(東夷)란 말은 중국 동부가 아닌 동쪽인 만주와 한반도로 그 범위가 변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 송나라를 멸망시킨 만주 북부 흑룡강의 여진족 금나라도 그 시조 아골타의 6대조 가 평안도에서
이주한 경주 김씨 김함보라 후일 여진족들이 나라를 세웠을 때 성씨인 김(金) 으로 금(金) 나라 라....
*** 수정 : 금의 색깔은 백(白)인데 완안부 부족의 색깔 또한 백이다. 이로부터 국호를 대금이라 했다!
금(金)나라가 몽골족에게 망하고 명나라 시대에 여진족의 다른 이름 만주족이 세우는 후금 청(淸) 나라는
金(김) 씨의 만주어 “아이신줘러” 는 한자로 "애신각라 (愛新覺羅)" 라 이를 황족의 성씨 로 삼았습니다.
*** 수정 : 아이신줘러에서 아이신(Aisin, 愛新)은 무쿤(穆昆: 가족 공동체) 이요, 줘러(Gioro, 覺羅) 는
하라(哈拉: 씨족 공동체, 성씨) 이며 또는 장백산 신화에서 퍼쿤이 낳은 아이에게 지어주었다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