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개혁하는 신앙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자유게시판 스크랩 개혁주의 소고 / 박윤선 목사
소금 추천 0 조회 16 13.10.25 10: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개혁주의 소고(박윤선 목사)| 개혁신학
한우리 | 조회 11 |추천 0 | 2011.10.05. 20:59

 

 

 

개혁주의 소고(박윤선 목사)

이 작은 논문은 개혁주의(혹은 칼빈주의)를 전면적으로 생각해 보는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다만 그 특징 몇가지만을 드러내고자 한다.

 

I. 개혁주의가 근본주의와 다른 점

 

근본주의는 제1차 대전후 미국에서 일어난 주의이다. 자유주의가 자라남에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이 초자연주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각 교파에서 서로 내통하며 모이게 되었다. 이것이 근본주의 운동의 출발이다.

우리는 근본주의가 초자연주의가 성경의 교훈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약점들을 가지고 있다. 근본주의가 모든 교리에 대하여 적당한 강조(强調)를 하는가에 대하여는 의문이다. 어떤 신학이 교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균형(均衡)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결함을 가져온다. 성경은 교훈의 건전성과 관련있는 균형을 중대시 한다(딤전1:9, 2:8, 딤후 1:13, 딤전 6:3, 1:10)

 

1. 교리의 균형문제

이 점에 한 가지 예를 들면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구원을 더욱 강조함과 같은 것이다. 이와 반대로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류가(특별히 신자들)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주님을 위하는 것이고(엡1:6,14),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도 주님을 위해야 할 것으로 본다(롬 14:6-9, 고전10:37참조). 개혁주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Gloria Dei)을 표어로 가진다.

 

2. 성경관

근본주의자는 성경을 비교적 단편적으로 보고 체계적으로 깊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 중 어떤 계층에서는 경건주의로 흘러간다. 기독 신자에게 있어서 경건은 중요하나 경건주의는 폐단을 가져온다. 그것은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 좋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경에 없는 생활표준을 세움으로 혹종의 법식주의(法式主義), 심지어 율법주의로 떨어지는 일이 많다. 경건주의로 흐르게 되면, 성경적으로 밝히 정할 수 없는 문제의 건에 대하여 사람의 생각대로 규칙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규칙이 성경처럼 보편성 있는 표준은 될 수 없으니 만큼, 결국은 논쟁을 가져오게 되고 덕을 세우지 못한다. 신자들의 생활을 성화(聖化)시키는 비결은 성령에게 있고, 사람들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규칙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와 다르게 개혁주의는 성경의 어느 부분이든지 그것을 그 전체에 비추어 올바로 깨달은대로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의 경건을 힘쓴다. 이런 것은 경건주의가 아니고 “오직 믿음”(Sola Fidei)생활이다.

 

3. 신구약의 연속성 문제

근본주의에서 깊이 보지 못한 것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連續性) 교리이다. 근본주의자들 중 세대주의자들은 생각하기를 구약 시대의 신자들은 율법에 의하여 구원을 얻고,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는다고 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에 대한 무식이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몰이해(沒理解)는, 그들이 구약과 신약을 계약관계(契約關係)의 것으로 확신있게 보지 못한데서 온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신구약의 연속성을 바로 지적하고 계시의 단일성에서 진리의 확신을 가지도록 한다. 이 중요한 깨달음을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것은 아래와 같이 해설된다.

구약과 신약은 함께 은혜 계약에 속하는 구원 방침의 계시로서 구약은 은혜의 약속에 대한 계약이고, 신약은 그 성취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양자(兩者)는 서로연속성과 통일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은 은혜 계약에 근거한 바 없는 어떤 단편적(斷片的) 예언집(預言潗)이 아니다. 구약 예언들은 은혜 계약에 속한 것들이며 그 밖의 구약 말씀들은 이 계약신(契約神)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질과 행동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은 구약의 성취이다.

신약이 구약의 성취라는 것은, 구원론에 있어서 신약과 구약이 서로 반대된다는 것이 아니고 신약 시대의 구원운동이 구약 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광범하고 부요한 것으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바빙크(Bavink)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항상 더 풍부하게 더 충만하게 나타내신다. 구약 시대에는 종의 생활같던 것이 이제 신약 시대에는 자유요, 비유였던 것이 이제는 참이요, 그림자였던 것이 이제는 빛이요, 한 백성에게만 은혜가 되었던 것이 이제는 모든 백성에게 그러하고, 두려움의 관계가 이제는 사랑의 관계요, 약속 되었던 메시야가 이제는 오시었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III, p. 187).

구약 계시는 결국 계시의 성질에 있어서 신약과 동일하다. 바빙크(Herman Bavink)는 신약과 구약을 사상상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잘못 보는 그릇된 사상 체계들을 역사적으로 지적하였다. 그의 말을 요약적으로 인용하면 이렇다. 곧 재세례파(Anabaptism)는 구약에 복음적 내용이 없다 하였고, 소기노파(Socianism)는 구약을 하나의 계약으로 보면서도 그것은 단지 이 세상의 복을 약속한 정도 뿐이라고 하였으며 루터도 그 초년에는 구약과 신약의 서로 다르기가 율법과 복음과의 차이와 같다고 종종 말하였다. 그러나 후년에 이르러 그 의견을 고치고 구약도 풍부한 복음적 약속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개혁 신학에 이르러 신약과 구약은 결국 동일한 사상을 가진다는 계약 신학이 발달되었다. 계약 신학은 칵세이유스(Coccejus)에게서 발원된 것이 아니고, 실상은 그 원리가 쯔윙글리(Zwwingli)에게서 시작되어 불린저(Bullinger)와 칼빈(Calvin)에게 이르렀으며, 독일과 영국과 화란의 모든 개혁주의 신학자들로 말미암아 연구되었다는 것이다(Idem. pp. 188-190). 계약 사상은 구약과 신약의 사상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은 구약의 계속이니 만큼, 그 신관(神觀)과 기타 사상이 본질적으로는 구약과 같은 것이다. 신약은 구약의 성취로서 존재하니, 구약과 질적(質的)으로 다를 이유가 없다. 신약이 은혜의 계약에 속한 것 만큼 구약도 그러하다. 게할더스 보스 박사(Dr. Geerhardus Vos)는 구약 신정국(神政國)의 율법이 보상주의(報償主義)를 위한 것이 아니며 은혜 계약을 거스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신정국의 율법은 어떤 것이냐? 그것은 은혜관계의 것이 아니고 순전히 보상주의의 것인가? 유대주의자들은 그것을 순 보상주의의 유럽으로 보았다. 그러나 구약의 본 정신이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에 대한 율법의 관계가 은총적인 것임을 네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①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구속(救贖)된 사건(事件))은 율법을 받기 전에 된 일이니, 율법을 지킴이 그 원인이 될 수 없으며, ②가나안 복지를 얻은 이유도 역시 그들이 그 전에 율법을 지킨 까닭이 아니며 ③ 이스라엘이 범죄한 후에 처벌을 당하였으나 영원히 버림을 당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회개할 때에 그 징벌을 해결(解決)하셨으며(회개(悔改)하기만 하면 용서(容恕)받는 법은 은혜로서 되는 것이다. 죄값은 사망이니 은혜의 법이 아니고는 범죄자가 회개하여도 죽을 수밖에 없다.) ④ 율법의 의식적(儀式的) 부분(部分)에는 은혜로 되는 신인관계(神人關係)가 많이 들어있다(Biblical Theology, 1948. Eerdmans Publishing Company pp. 142-145). 제이 리델보스 박사(Dr. J. Ridderbos)도 구약과 신약이 본질에 있어서 같다는 의미에서 여러 가지로 말하였다. 곧, “구약도 피로써 확실히 성립되지만 그리스도는 완전한 제물로 나타나셨다”고 하였다(De Apostolische Kerk. Kampen, 1954, p. 30). 바빙크는 말하기를 “구약 시대에 진리가 벌써 있었고, 아주 감추였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그림자와 표호와 상징과 모형으로 계시되어 왔다. 그것은 이제 충만한 빛으로 나타났는데 곧 그리스도께서 그 계약의 중보자시오, 머리시오, 전내용이신 사실로 나타나심이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ck. III, p. 30).

 

 

II. 개혁주의(改革主義) 주요원리(主要原理)

 

1.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하나님의 경륜(徑輪)과 섭리(攝理)와 의지(意志)의 활동이 주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위기 신학(바르트 주의)과 대조된다. 위기주의(危機主義)에서는 시간-공간 세계에서는 적극성(積極性)있는 또는 상태성(狀態性) 있는 하나님의 계시(啓示)나 섭리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지는 일까지 관계하고 계심을 믿는다. 개혁주의는 초월(超越)세계에서 뿐 아니라 시간 공간 세계도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를 생각한다.

 

2, 성경관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에 관하여 다음의 중요한 속성들을 믿는다.

(1) 성경의 권위(權威)

개혁주의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며 전통 교회의 성경 교리를 그대로 가르친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가 앞서며 기본적인 사실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로마 교회는 말하기를 교회는 시간적으로든지 논리적으로든지 성경보다 앞선다고 하며 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있을 수 없으나 성경은 없어도 교회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이 학설은 성경의 권위가 교회에 의뢰한다고 한다. 그러나 개혁 신학은 이 점을 반대하고 성경의 독자적(獨自的) 신임성(新任性, αυτο πιστια)이란 교리를 말한다. 이 교리는 교회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처음이 되는 권위를 가지는 동시에 모든 인간들의 사상이(특별히 교회의 모든 사상이) 성경의 말씀으로 판단되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동시에 이 교리의의미는 인간의 협력이나 이해(理解)나 증명이나 동의의 원조를 기다릴 필요 없이 독자적으로 진리의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로마 교회는 말하기를 성경이 있기 전에 교회가 있지 않았는가?고 한다. 그러나 성겨이 기록된 문서로 있기 전에 불성문계시(不成文啓示)로 있은 것이 원인이 되어 교회가 일어나게 된 것이 아닌가? 성경의 존재 형태(形態)로 말하면 교회 창립(創立)시대와 교회 대성(大成)시대와의 사이에 차이(差異)가 있으나 그 존재의 원리는 그 어느 때에나 공통된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든지 논리적으로든지 교회보다 성경의 권위가 앞서는 것이다.(엡 2:20)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격을 가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교회를 사용하는 한에서 그렇게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사람의 마음에 발생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만 되어진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신다(렘23:29, 히4:12, 벧전1:23).

칼빈은 특히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는 점에 대하여 그의 기독교강요라는 책에 장문(長文)으로 해설하였으니(제1권7장) 그것이 성령의 증거라고 하는 교리이다. 성령의 증거란 것은, 사람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는 성령의 역사이지 어떠한 새로운 계시를 성경 이외에 기여(寄與)하는 운동이 아니다.

 

(2)성경의 필요성

로마 교회는 교회의 독자적 신임성을 생각하고 교회 자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수 있는 자체적(自體的) 충족성(充足性)을 가졌다고 한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ck, I, 1967, p. 435). 이렇게 로마 교회는 교회의 삶에 대한 성경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는다. 로마 교회만이 그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신비주의(神秘主義)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신비주의적인 기독자들은 성경을 풍유적(諷諭的)으로 해석하여 자기들의 체계에 맞도록 성경을 이용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의 영적 발달에 성경이 참고 되는데, 그 발달의 초급(初級)에서는 성경이 유용하나 그 발달의 높은 단계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영이 성경을 초월하거나 혹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게된다고 하였다.

블란서와 독일에 있어서 중세적 신비주의자들은 성경을 명상(瞑想)이나 입신(入神)에 이르는 사닥다리로 생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낭만주의(浪漫主義) 신학자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는 성경을 교회의 산물(産物)이라고 하여 시대를 따라 새 것이 보완(補完)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 체계들은 교회의 존재와 그 유지를 위하여 성경이 먼저 있어야 할 것과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Chr. Gl. §128-129)

 

(3) 성경의 명백성

로마 교회는 성경을 교중게게 공개(公開)하지 않는 것을 원리로 한다. 그 이유는 그 교회가 생각하는 대로 성경은 오묘하여 일반 신자들이 알 수 없고 또 아는 것이 위험한 줄로 생각한 까닭이다. 법황들 이외에는 성경 해석권이 부여(附與)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떤 학자의 해석이 옳다 할지라도 그것도 법황의 승인을 받지 않고는 누구든지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로마 교회는 교중이 성경을 자유로 읽거나 해석함에 대하여 제한을 둔 것이다(vincentius Lerinensis, Commonitorum, Cap. 3).

그러나 성경은 일반 신자들이 모를 책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이 책은 ㄴ구나 다 보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딤후 3:15).

개혁주의 교회는 성경의 명백성 교리를 성경적으로 바로 주장한 것이다. 성경에 말하기를 신을 분변(分變)하라고(요일4:1) 하였으니 그것은 교직자에게만 주는 말씀이 아니다. 신약은 로마 교회에서 처럼 교직자만 제사장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모든 신자들이 일반적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장임을 가르친다(벧전2:9). 그러므로 평신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로 볼 권리가 있고 또한 많이 배워서 진리를 분별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 성경의 교훈은 교증이 거짓 선지를 영접(迎接)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요한 2서 끝 참조). 그것도 교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익숙히 알아야 할 것과 또한 진리를 옳게 분변해야 될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4)성경의 충족성

이 교리는 성경의 완전성이라고도 부른다. 로마 교회는 성경이 불완전한 점이 있다는 의미에서 거기에 법황들의 유전을 보충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성경 그것 만으로 우리의 신앙 생활을 교도하기에 언제나 충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셔서 구원을 완성하신 것 만큼 그가 계시자로서 그 계시를 완성하신 것이다. 히 1:1-2에 분명히 신약 계시의 최종성 혹은 완전성을 표시하였다. 그것이 기록되어 성경이 된 것이다.

우리는 위에 말한대로 개혁주의의 성경 교리를 네 가지로 지적하였다. 이제 여기에서 한가지 더 생각하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아는 이유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카이퍼(A. Kuyper)는 말하기를 “사람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그가 거듭나서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니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에는 곤란하다. 이는 마치 소경이 눈을 뜬 후에 말하기를 그가(예수께서) 죄인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거니와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이었다가 지금 보노라 한 것과 같다. 이 일을 누가 신비주의라고 할지라도 무방한 것이다. 신자는 그의 마음에 있는 이와 같은 신비주의에 의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에 자기를 속박시킨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승복(承服)하려고 과학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다. 폐(肺)가 과학에게 물어보고 호흡하는가? 폐는 호흡에 있어서 과학에게 문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카이퍼의 이 말은 성경말씀이 인간의 참된 이지(理知)를 초월하였으나 모순(矛盾)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칼빈(Calvin)도 카이퍼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권위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고 성신의 증거로만 믿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성경의 내용이 이성(理性)에 모순되지 않는 사실도 논하였다(제1권 제7장 5, note 1).

 

3. 개혁주의 인생관

(1) 근본주의는 신자들이 교직자의 중보 없이도 직접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고 바로 믿는다. 그러나 명백한 성경적 지식에 근거하지 못하였으니 만큼 모든 장로들의 평등(parity of elders)이라는 교리를 굳게 지키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 뿐 아니라 교역자나 평신도가 다함께 제사장(벧전 2:9)이라는 성경적 교훈에 대하여 거의 무관심하게 된다. 따라서 근본주의적인 교회는 권위주의로 기울어지기 쉽다. 이렇게 되어가다가 예배당은 성전화되고 교직자들은 구교식으로 특수계급화 되기 쉽다. 이것은 로마교회를 어느정도 모방하는 경향이 있다.

 

(2) 로마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일반 신자 사이에 교회를 두고 신자와 하나님과의 직접교제를 막는 경향(傾向)이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일반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그리스도 외에 아무런 중간체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게 개혁주의는 영웅숭배 사상을 배척한다. 칼빈 자신에게 대하여 제네바에 아무런 비문(碑文)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의 무덤도 초라하게 남아 있다. 이는 개혁주의가 영웅숭배 사상을 이교(異敎)사상(思想)으로 여겨 배척하기 때문이다. 이교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웅숭배주의로 떨어지게 하며, 사람이 사람을 노예화(奴隸化)하는 계급제도가 생기게 한다.

(3) 자유주의 신학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차별을 주장하는 듯 하지만, 그 사상체계가 하나님의 주권을 제대로 주장하지 않은 처지인 것 만큼 사람과 사람과의 무차별을 참되이 성럽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참된 조화(調和)있는 자유의 세계를 강력히 실현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하나님의 주권 중심으로 취급한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다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실과 다 함께 멸망받아 마땅한 죄인인 사실을 성경대로 분명히 믿는다.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남을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게 하며 똑같은 동등의 인간으로 생각하게 된다. 동시에 여기서는 그 동등인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설계도 무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설계란 것은 이렇다. 곧,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재능과 기회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재능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서로 봉사할 책임이 있다는 것과 또는 그러한 책임봉사자에게 합당한 존경을 지불하여야 할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사회는 강력하고 엄위(嚴威)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조화(調和)있고 질서있는 자유세계를 가진다.

 

4. 개혁주의와 과학

근본주의 교회지도자들이 모두 다 과학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과학발달이 가인의 자손들 중에서 되었으니 만큼(창4:16-22) 과학을 장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에는 가인의 자손들이 그만큼 과학 발달을 가지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근본주의 교계에는 반지식주의의 경향도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기독교는 과학을 무시하지 않는다. 왜 그런고 하면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신 후에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을 정복(征服)하라고(창1:28) 하였기 때문이다. 화란에서 무서운 종교전쟁이 있었던 사실은 역사가 전하는 바인데 그것은 신교 세력과 스페인의 구교 세력과의 충돌이었다. 화란은 개혁주의의 진리를 세우기 위하여 불행하게 많은 피를 흘리기까지 전쟁한 일이 있었다. 화란은 전쟁하고 승리한 직후에 어떠한 무력보다 과학발달을 위하여 힘쓴 결과로 레이던 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화란에서 망원경과 현미경과 한난계(寒暖計)가 발명된 것이다. 진정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에 과학이 발달되는 원인을 몇 가지 말할 수 있다.

 

(1) 과학자유를 믿는 까닭

누구든지 그 어떠한 부자연스러운 제재로서 과학 행위를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중세(中世)대(對)에 있어서 교권(敎權)이 순전한 과학 행위를 압제(壓制)하는데 이른 것은 일대 유감인 것이다. 정치의 권세나 혹은 탈선된 교권이 이런 은총(恩寵)영역(領域)을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법(理法)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어떤 과학들의 주장에 비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순연한 과학적 이론만으로만 방지되어야 할 것이다. 순전한 과학과 진정한 종교는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 왜 그런고 하면 진정한 종교를 제시한신 하나님이 과학의 모든 이법들을 자연계에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과학의 모든 이법들을 자연계에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과학이 진정한 종교를 이치 있게 무시할 수 없다. 과학도 그 연구 행위에 있어서 신념(信念)을 기초하고 진행하는 점에 있어서는 종교와 일반이다. 어떠한 과학 행위든지 그 연구의 기초는 신념인 것이다. 예를 들면 사색(思索)의 터가 되는 근본 개념(槪念)들(예컨대 아프다는 것, 무겁다는 것, 달다는 것, 맑다는 것 등)은 증명할 수 업시 믿을 수밖에 없는 직관적(直觀的) 진리이다. 과학은 그 어떠한 종류든지 이런 신념에 기초를 가지고 쌓아 나가는 것이다. 그런고로 과학과 참된 종교는 서로 충돌되는 것이 아니다.

 

(2) 하나님의 살아계신 인격을 믿는 까닭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자는, 전 우주 만물이 한 분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통일 되었다고 믿게 된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인격을 믿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만사 만물은 일정성이 없고 모두가 다 불규칙적이고 불확실한 것이고 우연적인 것일 수 있으니 그렇다면 그 세계는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믿어질 거서이다. 그런 때에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대로 시간마다 생각을 달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세계에는 아무런 체계(體系)있는 지식이 없을 것이다. 살아계신 인격적 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사물들의 통일성과 견고성과 질서에 대한 신앙만이 과학을 장려하게 되는 것이다.

 

(3) 과학의 영역(領域)을 인정하는 까닭

계시 종교와 과학은 서로 충돌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중세대에 종교인들이 과학을 무시한 일이 있었다. 다만 개혁시대에 이르러서 칼빈은 계시 종교를 바로 앎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도 바로 보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출발점으로 하여 창조의 원리를 바로 깨닫는데 이르렀다. 의의 태양은 성경이 증거하는 것인데, 곧, 그(예수)의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이 감추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론적(救援論的) 종교로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구원 문제를 해결한 좋은 결과는 영혼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영혼과 함께 지으신 만물에게도 나타난다. 진정한 신자는 영원을 보는 빛으로 시간 세계도 본다. 영원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자연만물(自然萬物))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도 창조하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영원과 시간을 이원론적(二元論的)으로 대립(對立)시킬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은 개인 관계의 것만 아니고 우주구원의 의의(意義)를 가진 것이다(마19:28, 롬8:21). 개혁주의는 과학을 중요시 한다. 일례를 들면, 16세기에 제네바가 염병으로 인하여 곤란을 당할 때에 칼빈은 그 병자들에게 신령한 양식을 공급하는 동시에 과학적으로 많은 위생적 봉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암스텔담의 전도자 피터폴라싱스는 유명한 설교가인 동시에 지리학(地理學)에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였었다. 그러므로 그 때에 많은 선부(船夫)들이 그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영원적인 것만을 고조하지 않고 시간적인 것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적당하게 존중시(尊重視)하여 불신자보다 더욱 과학적이어야 될 것을 역설한다.

 

5. 개혁주의와 보통은혜

근본주의는 하나님의 보통은혜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근본주의는 기독자로서 진출할 활동분야를 많이 제한시킨다. 이것이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신자는 그 어디서든지 적극성 있게 일하며 정복해 나아가야 되지 않겠는가? 인류의 모든 생활분야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아닌가? 우리는 죄악 이외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그것들을 성화시키는데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사상이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사랑을 특수 은총에서(그리스도의 구원)만 발견하지 않고 보통 은혜(자연계)에서도 발견한다. 보통은혜라는 것은 신자나 불신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은총이다. 카이퍼(Abraham Kuyper)는 보통은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곧 “은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둘 다 인간의 전적부패(全的腐敗)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은혜 가운데 하나는 특수 은혜요, 다른 하나는 보통 은혜이다. 특수 은혜는 영원한 구원관계의 은혜인데 예를 들면 중생의 은혜이다. 중생과 보통 은혜는 서로 다르니 중생은 인격을 정화시키며 죄의 뿌리를 제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보통 은혜는 그러한 변화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다만 인간의 죄성(罪性)을 어느정도 제어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인류사회는 그 부패한 가운데서라도 어느정도 질서와 정의가 보존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카이퍼는 다시 보통은혜의 적극적 방면을 보여 주었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있는 재능(才能)을 어느 정도 발휘(發揮)하도록 보존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은혜도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는 덕이다. 사람들이 그 지은 죄대로 그냥 두면 아주 감절(減絶)되고 말 것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의 죄세(罪勢)를 제재하시며 또한 그들의 창조된 재능과 같은 것들을 보존하여 주시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2장 16절에 말하기를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사(恩賜)들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그것은 인류(택한 자든지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든지)가 공통적으로 받은 재능이다.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교통하시는 특수은혜는 그들을 성화(聖化)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또 다른 방면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시키는 성령의 역사도 있다”(의역(意譯))라고 하였다. (시104:31, 145:9, 36:7, 147:9, 히 6:4-5, 고전3:1-2참조. 창6:3, 시81:11-12, 행7:42, 롬1:24,26,28, 살후2:6-7 비교)

칼빈은 또 다시 기독교강요 제3권 제3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우리는 종종 어느 시대에 있어서든지 단순한 천품(天品)에서부터 유덕(有德)하게 살려고 힘쓴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이 덕행(德行)이라고 하는 것이 그 근본에는 그릇된 요소를 가졌으나 어느 정도로 취할만한 좋은 것이 있음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다”고. 여기 칼빈이 말한 “취할만한 좋은 것”은 보통은혜를 가리킨다. 이 보통은혜가 인간에게 영적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영적 구원에 도움이 될만한 것은 인간의 성품에 전연 없다. 그 방면은 전적으로 부패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보통은혜로 불신자들에게도 덕행이 발견된다고 하여 우리는 인류가 영적으로 전적 부패했다는 성경적 사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