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진뫼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 건너에 미루나무 한그루 하늘높이 솟아있다.
우리마을에서 제일 높이 솟아있는 이 나무에는 큰집 작은집 산까치 두 형제들이 사이 좋게 둥지를 틀고 오순도순 위 아래층 살고있다.
미루나무 한그루 서 있는 위쪽으로 서 너 발 간격씩 뿌리가 뽑혀 한쪽이 들린 채 밑동 잘려나간 미루나무가 세 그루 더 있다.
미루나무 네 그루는 남자 형제 네 명을 기리는 나무로 내 바로 위 형이 심었다.
우리집 형제는 모두 6남3녀의 자식이 태어나 자랐는데 살아남은 자식은 4남2녀다.
그 중 셋째 형은 세 살 때, 넷째 형은 대학교 3학년 때, 둘째 누나는 다섯 살 때 죽었다.
강변에 지금 유일하게 서 있는 이 미루나무 한그루는 75년 봄 나보다 두 살 더 먹은 내 바로 위에 형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고향마을에서 부모님 농사를 도와주고 있을 때 식목일 행사로 정부에서 미루나무 묘목을 각 마을마다 나누어 주며 심어라고 했는데 그 때 강변에 형이 심었던 나무다.
형은 남자형제 네 명이 살았다는 것을 기린다며 별 뜻 없이 이 미루나무를 심었겠지만 그 사연을 접한 부모님은 모르긴 해도 서운해 하셨을 것이다.
‘어릴 때 죽었으면 몰라도 대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 죽은 자식과 살아있는 여자 형제 둘은 너그 형제가 아니가디 네 나무만 조르륵 심었냐. 호적에 올라있는 자식 숫자만큼 일곱 나무를 조르르 심어불제 그랬다냐. 행이는 나무가 부족헝게 네 나낭구만 심었겄제.’
형은 미루나무 네 그루를 심을 때 묘목심기 울력 나온 마을 사람들 눈치를 봐가며 분명 몰래 숨겨두었다가 울력이 다 끝난 뒤 이 미루나무를 혼자 심었을 것이다.
형은 네 형제간 부모님께서 일구어 가꾼 밤나무 밭 아래서 항상 나무처럼 곧고 푸르게 살기를 바라며 마음으로 이 미루나무는 심었을 것이다.
미루나무 네 그루는 고향마을 강변에 푸른 잎사귀 내밀고 떨구며 객지 나간 네 형제의 안부를 물으며 하늘을 향해 곧게도 자랐다.
98년 봄, 내가 폐가로 방치된 고향 집을 사서 돌아가기 두 해전 고향마을 강변에 근데군데 심어져 있던 많은 미루나무들을 베어서 진뫼마을 동네 운영자금으로 쓴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집 밤나무 밭 아래 강변에 심어진 많은 미루나무들과 함께 형이 심은 미루나무 네 그루도 함께 베어져 나갈 운명이어서 그 해 가을 고향에 달려가 형이 심어놓은 네 그루 미루나무에 다른 나무와 구별이 되도록 나는 특별히 표시를 했다.
벌목하는 사람들 눈에 확 띄도록 하기 위해서, 또 비바람에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형이 심어놓은 미루나무 네 그루에 검정 비닐을 묶어 네 형제가 서 있음을 표시해 두었다.
그리고 큰아버지께 “저건네 포푸라 네 나무는 우리 형제간들을 표시한 나무이니 동네에서 포푸라 벨 때 절대 못 베게 좀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저 포푸라 베어서 담뱃값이나 하자”고 했지만 네 형제들을 표시하는 나무이니 절대 베면 안 된다고 말렸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글먼 내가 죽더라도 주위에 포푸라 벼불 때 니가 절대로 못 비게 히야헌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고향에 자주 가지 못하는 나는 그 역할을 큰아버지께 부탁을 드렸던 것이다.
어느날 고향에 가보니 강변에 푸르게 서 있던 미루나무들 다 베어지고 텅 빈 강변엔 네 그루만 쓸쓸히 남아 검정비닐 휘감고 강바람에 비닐 조각들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포…푸…라…네…낭…구…마…을…앞…에…나…란…히…서…있…다.
미루나무를 심었던 내 바로 위 형은 지금 서울에 산다.
형이 고향에 어쩌다 한번씩 내려오면 “내가 저 포푸라 심었는디 지금도 강변에 서 있구나” 하며 미루나무를 바라보며 형수님과 조카들에게 늘 자랑을 해댄다.
동생이 고향 집을 사서 주말이면 진뫼마을에 돌아오자 미루나무를 심었던 형도 고향에 자주 찾아와 “이제는 고향에 얼굴을 두르고 우리집으로 쏙 들어갈 수 있어서 좋다”며 뜰방에 놓인 흰 고무신을 신고는 강변 미루나무 아래로 찾아가는 발길이 잦다.
섬진강변에 그림자 드리우고 네 그루 사이 좋게 서로 그늘이 되어주던 미루나무 네 그루도 3년 전 가을, 엄청난 태풍이 불어와 서로 헤어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어느날 앞산에 소나무를 벌목해 파는 나무 장사꾼이 우리 밤나무 밭 아래 심어진 미루나무 옆쪽으로 땅 주인 허락도 없이 산길을 내면서 땅을 뒤집어 까 놓았다.
그 해 여름 집중 호우시 새로 생긴 산길을 따라 높은 곳에서부터 흙탕물들이 골을 이루며 모래 자갈들을 동반하여 떠 내려왔는데 불행하게도 단단한 기반 위에 뿌리를 박고 서 있던 미루나무 주위로 모래 자갈들이 쌓이면서 키 큰 미루나무는 지반이 흔들렸다.
그 해 가을 상점 간판들이 다 떨어져 나갈 정도의 어마어마한 태풍이 휘몰아쳐 왔는데 폭우를 동반한 태풍은 지반이 약한 미루나무 세 그루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만 뿌리가 뽑힌 채 쓰러지고 말았다.
네 그루 미루나무중 마지막에 줄에 서 있던 나무만이 땅 위에 모래와 자갈들이 쌓이지 않고 풀 뿌리들이 단단하게 땅을 감싸안고 있어서 모진 태풍에 잘 견뎠고 지금 유일하게 마을 앞 강변에 한그루 서 있는 것이다.
고향 집으로 달려가는 주말에 마을 입구의 큰 정자나무쯤 도착하면 아이들이 강 건너 우리 밤나무 밭 아래 쪽에 한그루 서 있는 미루나무를 발견하면 “아빠, 아빠가 고향에 자주 오니 아마 저 키 큰 나무가 반가워서 지금도 저렇게 씩씩하게 서 있나 봐요” 하며 나에게 말을 건넨다.
쓰러진 세 그루 미루나무는 누운 각도도 제 각각 그 모습을 다르게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 눈에는 고향 집에 자주 찾아오는 큰 아빠들 순서대로 비스듬하게 쓰러져 누워 있다고 말을 건네서 내가 웃기도 했다.
쓰러진 세 그루 미루나무가 혹 기력을 회복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라는 생각에서 일년을 기다렸는데 잎은 피는데 도저히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작년 가을 버섯이나 재배 해 볼까 해서 미루나무 세 그루 베어다 우리집 마당에 갔다 놓았다.
버섯재배는 너무 어렵고 하여 지금은 마당 한쪽에 미루나무를 쌓아 두고 있는데 가끔씩 맛있는 자연사 버섯이 올라와 내 입맛을 돋구기도 한다.
작년 여름 미루나무를 심었던 내 바로 위 형이 고향 집으로 휴가를 왔었다.
형은 미루나무 한그루 서 있는 강변으로 나가더니 해가 뒷산으로 넘어갈 때까지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 그늘을 따라 자리를 옮겨 다니며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을 맞이한 미루나무는 무슨 말을 건네길래 그토록 형을 하루종일 나무 그늘아래 붙들어 놓고 있었을까?
진뫼마을 강변에 우뚝 솟아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서 있는 미루나무가 오래도록 고향마을을 푸르게 지키며 서 있을 수 있도록 모래 자갈들이 제발 미루나무 뿌리 주위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루나무 가지에 사이 좋게 위 아래층 집을 짓고 사는 두 산까치 형제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지 않고 봄이 오면 봄소식 전하고, 꽃피면 꽃 소식 전하고, 봄이 지나가면 봄날이 간다고 조잘댔으면 좋겠다.
미루나무 연두색으로 몸단장 끝내고 그늘로 아이들 부르는 날이면 나도 미루나무 그늘에 달려가 풀피리를 아이들에게 불러 주리라.
릴리리야 릴리리야, 강물이 흘러간다.
릴리리야 릴리리야, 세월도 강 따라 흘러간다.
<진뫼마을 주말 명예이장 김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