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암집(默庵集) 서(序)
嘗見朱門諸子。各有著述以羽翼斯道。退陶湖上之門亦然。葢天生一番人。必有先覺者以倡之於前。亦必有後覺者以扶之於後。
일찍이 주자(朱子) 문호의 제자(諸子: 하나의 학설을 이룬 사람들)는 각각 저술(책을 씀)이 있어 그 도(道=유교를 말함)를 보좌하였다. 퇴계(이황)와 호상(이상정)의 문호도 그러하다. 하늘이 한 번 사람을 낼 때에는 반드시 먼저 깨달은 이가 있어 앞에서 창도(唱導)하였고 또한 반드시 뒤에 깨달은 이가 있어 나중에 도왔다.
山傾而鍾應。雲出而雨興。理勢然爾。定齋柳先生卽湖上後先覺也。從遊之彥。遍於國中。時則有若故進士裵公諱克紹。奮起遐服。一躍而從之。先生一見便許以志懇誠篤。退而與門下諸先達遊。磨礲而講明之。若魚川泳而鳥雲飛也。
산이 기울면 종이 응하여 울고 구름이 나타나니 비가 일어나는 것이로다. 자연의 형세(形勢)는 이와 같도다. 정재(定齋) 류선생은 호상의 뒤를 이은 선각자이다. 교유하는 선비들이 나라 안에 두루 존재했다. 그때에 진사 고(故) 배극소 공은 멀고 거친 곳에서 분발하여 단번에 뛰어 일어나서 선생을 따랐다. 선생은 한번 보고는, 그 뜻이 간절하고 정성이 도타와서 즉시 허락하였다. 물러나서는 문하(門下)의 여러 선달(先達)과 교유하고, 열심히 갈고 닦아 (이치를) 강구하여 밝히니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고 새가 구름을 나는 것 같았다.
葢其天資穎拔。志趣溫雅。自時文組繡之日。已知有義理之學。故律身以敬。事親以孝。好善如騶虞之不殺。惡惡如竊脂之不穀。少日塾師鄕交之際。坯墣已成。而定翁特點出得光彩爾。門路旣正。問學旣博。則雖不欲高自標揭。而恥[耿?]以一善成名。雖未嘗出而需世。而其具已在我矣。
그 타고난 자질은 뛰어났고 의지와 취향(趣向)은 온화하였다. 문장을 잘 쓰기 시작한 때부터 이미 성리학을 알아서 스스로를 단속함에 공경(恭敬)으로 하였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孝道)로써 하였으며, 선을 좋아하기를 추우(騶虞: 상상의 동물인데, 생물을 먹지 않는 의로운 동물임) 같이 하였고, 악을 싫어하기를 절지(竊脂: 새 이름, 사람이 먹는 곡식을 먹지 않는 선한 새라고 함) 같이 하였다. 젊어서 글방 선생을 하고 고을의 선비들과 교유할 때, 이미 학문 완성의 토대가 만들어졌으나, 정재 선생(류치명)께서 특별히 선발하여 광채가 빛나게 되었다. 공의 학문의 길은 바르고 넓어서 비록 스스로를 높이 드러내고자 아니하여도 명성(名聲)으로 [빛났?]...고, 비록 세상에 나아가서 등용(登用)이 된 적이 없지만 모든 것을 자기 안에 갖추었다.
柳先生猶以默處加功勉之。公亦揭號以自警。其因材之篤。晦木之勤。葢兩得之矣。公旣不自見於世。而若其錦褧之日章。則所著有九容九思,人性圖,閨門敎訓,詩禮雜著等篇。皆足以見其默而成之之實。至若四禮簡要一部。爲有家日用之常。而亦出於淵源授受之餘。媺矣至矣。
류 선생은 과묵(寡黙)함에 처하여 학업에 더욱 힘썼는데, 공 역시 호(默庵)를 높이 들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제자의 능력에 따라 가르침을 베풂의 독실함과 내면을 살찌우는 근면함을 모두 달성하였다. 공은 스스로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으나 내면에 감춘 미덕(美德)이 드러났으니, 곧 "구용구사(九容九思: 군자가 지녀야할 아홉 가지 태도와 아홉 가지 생각)","인성도(人性圖)","규문교훈(閨門敎訓)",시(詩), 예(禮), 잡저(雜著) 등의 책을 저술한 것이다. [*詩禮雜著가 하나의 책이름인지는 확인요.] 이들 모두가 '과묵하지만 목적을 이룬다'는 말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다. "사례간요(四禮簡要: 관혼상제의 4례를 요약한 책)"는 집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사물의 근원을 이리저리 살핀 다음에 나온 것이다. 지극히 아름답도다.
公之子孝鉉及其門生朴君致祺。抱遺簏而踵余曰集將刊矣。願子之留一言於卷端也。余敬受而閱之。繼而歎曰儒有席上珍。宜其不自棄也。使公得意名塗而無自修之實。渠有血脂踵繭而求其壽傳於世者乎。又孰肯以竆竇一儒而瓚譜於賢達之門者乎。若余謏學。何敢爲佛頭之穢。第以聞公之風已舊。而以托名爲榮。遂不辭而書之。
공의 아들 효현(孝鉉)과 제자 박치기(朴致祺) 군이 공이 남긴 상자를 들고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이제 모아서 간행하려 합니다. 원컨대 선생님의 말씀을 책의 끝에 넣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공손히 받아서 살펴보고, 이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선비의 이 높은 학덕(學德)을 마땅히 스스로 버려서는 안 되고, 이름을 가리고 스스로 닦지 않은[간행하지 않음을 말함] 것의 결실을 공(公)이 맺게 해야 한다. 어찌 피에 지방이 있고 발에 굳은살이 있다고 그 목숨이 세상에 전해짐을 구하지 않으리오? [사소한 어려움이 있어도 세상에 길이 전해야 함을 말함.] 또 누가 능히 하나의 옹색한 선비로서 뛰어난 문호(門戶)에 귀한 계보(系譜)가 될 수 있으리오?
[묵암공은 훌륭해서 학문의 계보를 잇는 사람으로 평가받을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나 같이 적게 배운 자가 어찌 감히 부처님 머리의 오점이 되랴마는, 공에 대해서 일찍부터 듣고 있었으므로 이름을 기탁하는 것이 영광이라서 드디어 사양하지 않고 서문을 썼다.
壬寅暮春 全義李種杞
임인년(1902) 늦봄 전의 이종기 삼가 씀
빨간 표시를 한 글씨는 이상해 보이는데 원문(이미지)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耿을 恥로 잘 못 읽은 것이거나 원래 잘못 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 글은 용어를 많이 써서 쉽게 읽히지 않아서 제대로 읽은 것인지 의심되는 부분이 종종 있었습니다.
[2012. 2. 6. 翰軠]
배극소(裵克紹 ; 1819∼1871)
자는 내휴(乃休), 호는 묵암(默庵),분성군의 20세,
아버지 상관(相觀) 과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 장남으로 하양의 樂山에서 출생.
정학으로 부친에게 학문을 배우고 성장하여 처음에는 직재(直齋)김익동(金翊東) 에게 배웠으며, 후에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 되었다. 응와(凝窩)이원조(李源祚) 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1850년(철종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그 명성이 자자 하였다. 1855년 스승 유치명이 지도(智島)에 유배 되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스승을 찾아가 모시면서 제자의 도리를 다하였다. 한동안 그곳에서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 하였으며.이후 과거와 관직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을 깊이 연마하여 학문(學文) 과 행의(行誼) 로 사우(師友) 들로 부터 깊은 추앙을 받았으며 효성 또한 뛰어
서 사림들이 탄복하였다. 공께서는 문장과 시에 능하였으며 특히 예설(禮說)에 밝았다. 당대의 명사들인 이돈우(李敦宇),이만각(李晩慤) 등 영남의 많은 선비들과 교류 하였다. 사후에 동문과 후배 사림들에의해 문집이 간행 되었다.
저서에는 묵암문집 3권,상제의집록(공저), 사례간요(四禮簡要) 일부(一部)와
개몽자학(開蒙字學) 이천자(二千字),만제록(輓祭錄)이 전 한다.
배위(配位)는 창녕조씨
(昌寧曺氏) 선국(善國)의 女이며 슬하에 2男1女를 두었다.
묘소는 경북 경산시 진량읍 대원리에 모셔졌다.
이종기(李種杞)
1837년(헌종 3)∼1902년(고종 39).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기여(器汝), 호는 만구(晩求)‧다원거사(茶園居士).
조부는 진사(進士) 이재선(李在翧)이고, 부친은 이현용(李鉉容)이며, 생부는 이능용(李能容)이다.
그는 3, 4세 때까지 말도 못하고 걸음마도 못할 정도로 어눌했지만 글 읽는 소리를 따라 기어서 사랑(舍廊)에 나가 유심히 듣는 관심을 보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5세 때에 비로소 말문이 터졌으며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는데, 7세 때에 《십구사(十九史)》를 스스로 해석했을 정도로 비범했다. 그러나 생부가 그의 너무 조숙함을 크게 염려해 도리어 10세까지 학업을 중단시켰다. 12∼13세에는 경사(經史)와 《당송팔대(唐宋八代)》 등의 서적들에 통달하였고, 14세 때에는 회연서당(檜淵書堂) 강회에 출입하여 날카로운 질문과 토론으로 당시의 노장(老壯)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해 향시(鄕試)가 열리자 생부가 장인인 박이탄(朴履坦)이 향시에 관계함을 기회로 청탁하자 그는 “임금을 섬기려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일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향시에 나갔다고 한다. 또 향시 중에 남보다 먼저 작성하고 끝마무리를 하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감독관이 그 이유를 그에게 묻자 그는 주위를 돌아보며 “윗사람보다 먼저 쓸 수 없다”고 겸양의 미덕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문망과 덕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져서 금오랑(金吾郞)의 벼슬을 내렸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가학(家學)을 통해 심화시켰으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과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학문을 사사(師事) 받았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기설(理氣說)을 수용하고, 이(理)와 기(氣)에 치우친 이론의 획일화에 반발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그의 이기(理氣)에 대한 이론은 〈사칠기발이승지변(四七氣發理乘之辨)〉, 〈이기선후주종편전설(理氣先後主從偏全說)〉 등의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또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다산면(茶山面) 상곡(上谷) 마을에 서락서당(書洛書堂)을 만들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중 유명한 제자로는 안효제(安孝濟), 허채(許埰), 이병희(李炳憙), 조용섭(曺龍燮), 김병린(金柄璘) 등이 있다. 저서로는 《만구집(晩求集)》있는데, 원집 10책과 속집(續集) 4책과 부록(附錄)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명정보출처: 한국역대인물
첫댓글 번역해 주신 한님 선생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묵암집 서문 잘 보았습니다.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