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의 조건, 이 두 가지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하나, 찬 바람에도 불구하고 떠나오길 잘했다 싶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것. 둘, 따뜻하게 몸과 마음을 녹일 만한 장소가 있을 것. 더불어 다가오는 새해의 소망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조용한 암자라도 있다면, 12월 여행지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 경남 거창이 그렇다.
계곡에 마음 씻고…
▲수승대 거북바위와 구연교.
거창의 대표적인 관광지 위천면 황산리 수승대(搜勝臺)는 매년 여름 열리는 거창국제연극제의 무대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다. 물놀이도 즐기고 연극 공연도 관람할 수 있어 연극제가 열릴 무렵이면 전국 각지에서 피서객들이 몰려든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찾은 수승대. 떠들썩했던 여름철과는 달리 사람들의 발길은 뜸하고 풍경은 쓸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수승대 계곡의 맑은 물이야 계절이 따로 있으랴. 바닥의 돌 하나하나가 다 비칠 정도로 투명한 연둣빛 물. 계곡물은 그 청아함 때문에 더 차가워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자니 뼛속까지 시려올 정도다.
◀ 월성계곡 사선대. 요수정(樂水亭)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면,수승대의 명물 거북바위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해서 구연교를 건넜다. 12월 30일까지 계속될 예정인 보수공사 작업 때문에 요수정은 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 솔숲을 따라 조금 내려가자 거북바위가 고개를 내민다. 쭉 내뺀 목이며 나무로 뒤덮인 불룩한 등이 영락 없는 거북의 형상이다.
높이 10m의 거북바위에는 이름 남기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명이나 시 구절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데,붉게 씌여진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는 글자도 찾아볼 수 있다. 수승대의 옛 이름은 '수송대(愁送臺)'. 백제의 국력이 쇠퇴해 멸망할 무렵 신라로 파견하는 사신을 이곳에서 송별하며,돌아오지 못함을 걱정하며 보냈다 하여 '수송대'라 이름 붙여졌다 한다. 이후 1543년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던 요수(樂水) 신권 선생에게 보낸 시를 통해 이곳의 이름을 수승대로 바꿀 것을 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세월을 한참 건너뛴 2000년대의 수승대. 여름에는 연극 공연을 덤으로 즐길 수 있다면,겨울에는 눈썰매를 타는 즐거움이 있다. 수승대 사계절썰매장의 눈썰매가 오는 23일 개장을 준비 중이다.
수승대 상류 북상면 월성계곡도 빼놓지 말고 들러 보자. 커다란 바위 네 개가 척척 걸쳐진 사선대(四仙臺) 주변 풍광은 '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려오는 길에는 강선대(降仙臺) 앞 허브 카페에 들러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몸을 녹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온천서 피로 풀고…
▲가조온천 노천탕과 참숯굴 찜질방의 불 때는 모습.
따끈한 차 한잔 정도로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면,아예 뜨끈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가 보는 건 어떨까. 가조면 일부리 가조온천은 강알칼리성 온천수로 물이 매끄럽기로 유명하다.
가조온천관광지는 현재 부지 조성사업이 완공되지 않아 시설이 많지 않다. 백두산 천지온천 한 곳이 개장하여 대중 온천으로 영업 중이다.
겨울비를 맞으며 온천욕을 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 노천탕을 찾았다. 차가운 빗물과 시원한 공기가 상쾌하다. 친구들과 함께 온천욕을 즐기던 성순옥(52·여·거창군 거창읍)씨는 "물이 좋아서 얼굴이 아주 매끈매끈하다"며 기자에게 만져보라고 얼굴을 내민다.
마리면 율리에 있는 참숯굴 찜질방도 후끈한 겨울 여행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가볼만하다. 참나무를 태워 구운 숯으로 달군 황토굴. 구경 삼아 잠깐 들어갔다가 나오고 싶지가 않았다. 겨울비에 눅눅해진 몸을 뉘고 낮잠 한숨 청하면 딱 좋을 것 같은 기분. 찜질방 대표 박소창씨의 말에 따르면 "최고 1천200도 온도까지 숯을 굽는데,한번 불을 때면 황토벽에 스며든 열이 보름은 간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찜질방에서 도시에서 보던 것처럼 현대적인 시설을 기대하면 안 된다. 가건물 형식으로 지어진 입구부터 옛 공장터에 지어진 황토굴,불을 땔 때마다 떼었다 붙였다 하는 격식 없는 나무 문짝까지 찜질방의 외관이나 시설은 투박하기 짝이 없다.
새해 소망 기원까지…
▲안개에 휩싸인 금봉암 대웅전과 남상면 '신비의 돌'
계곡의 수려한 풍광으로 눈을 즐겁게 하고 온천욕과 참숯굴 찜질로 피로를 푼 다음에는,차분히 올 한 해를 돌아보며 새해를 계획하는 여유를 가져보면 좋겠다.
고제면 봉산리 금봉암과 남상면 무촌리 '신비의 돌'은 거창군이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통해 '소망여행'이라는 테마로 추천하고 있는 곳들이다.
삼봉산 자락의 금봉암은 나한도량으로,영험한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경남 문화유산해설사 박순 씨는 "1800년께 조그마한 토굴 암자로 창건돼 1967년 해인사 말사가 되었다"고 암자의 내력을 알려준다. 산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더욱 고즈넉한 금봉암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 올라가는 데만도 20여분이 걸린다.
암자로 올라가는 길가에서 불자와 등산객들이 쌓아놓은 수많은 돌탑들을 만날 수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저 돌들 속에 스며있는 걸까. 하늘에라도 가 닿으려는 듯 차곡차곡 쌓여진 소망의 탑들이 정겹다.
'신비의 돌'은 남상면사무소 인근 명성농원에 가면 볼 수 있다. 약돌,고추돌,여의주돌 세 가지로 각각 병마,자녀,가정가사와 관련된 고민을 풀어준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3배를 올린 후 간절히 소원을 빌면 돌이 들어 올려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돌이 가벼운 탓일까,기자의 기도가 가벼운 탓일까. 너무도 쉽게 돌이 번쩍 들린다.
지난 2003년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하는데,그 효험은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다. 가슴에 품은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직접 가서 시험해 보시길. 문의 거창군청 문화관광과 055-940-3183.
글·사진=이자영기자 2young@busanilbo.com
자연과 예술의 만남… 한결고운갤러리
▲월성계곡에 있는 한결고운갤러리.
월성계곡에 가면 자연과 예술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북상면 창선리 한결고운갤러리. 거창여고 교장으로 정년 퇴임한 조각가 정무길(64)씨가 지난해 3월 문을 열었다.
"거창국제연극제가 성공을 거둔 데는 수승대라는 열린 공간, 즉 자연의 힘이 컸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이 갤러리도 월성계곡이라는 자연이 있어서 한결 더 고와지고, 자연도 갤러리라는 예술공간이 있어서 한결 더 고와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결고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결','고운'이라는 이름은 또한 자신의 손자·손녀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갤러리는 3층 통유리 건물로 월성계곡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창가에 탁자와 의자가 있어 차를 마시며 작품을 감상하는 동시에, 계곡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거창에서 나고 거창에서 교직생활을 했다는 거창 토박이 정씨. 40여년 간 정씨가 작업해 온 조각 작품들도 거창의 자연을 닮아 소박하고 따뜻하다. 손을 맞잡거나 볼을 맞댄 인물들의 표정들이 하나 같이 천진난만해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월성계곡에 흐르는 물처럼, 모난 데 없이 절제된 곡선의 미를 그의 작품에서 만나보는 건 어떨까. 입장료 무료. 055-943-2077. 이자영기자 2young@
▲거창여행 안내도
#찾아가는 길
부산 → 남해고속도로 → 진주IC → 대전·통영고속도로 대전 방향으로 간다. 함양IC에서 올림픽고속도로 대구 방향으로 가다가 거창IC로 빠진다. 총 2시간30분 정도 소요된다. 수승대는 마리면을 거쳐 위천면 방향으로 가면 된다. 거창IC에서 차로 20분 거리. 가조온천은 가조IC에서 내려 거창읍 방면으로 10분 정도 간다.
#먹을 거리
거창은 한우가 유명하다. 거창읍내에 원동갈비찜(055-942-1850),감악산한우촌(055-942-6870) 등의 식당이 있다. 추어탕이나 어탕국수는 거창추어탕(055-943-0302),구구식당(055-942-7496)에서 맛볼 수 있다. 수승대 근처 수승대관광식당(055-941-1120)에서는 촌닭백숙, 국밥, 비빔밥 등을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