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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나는 화두(話頭)를 은사(恩師)스님이신 금오(金烏)스님의 지시에 따라서 선학원에서 효봉 스님으로부터 받았다. 그 때, 효봉
스님께서 일러주신 화두(話頭)는 "불불(佛佛)이 불상견(不相見)인데 여사시불(如何是佛)"이다. 굳이 번역을 하자면 "부처와 부처도 서로 알아보지
못 하는데 어떤 것이 부처인가"이다.
화두(話頭)란 글자 그대로 "이야기의 실마리"이다.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이 스승이나 선사
(禪師)를 찾아가서 배움을 청할 때, 이 화두(話頭)가 스승과 제자, 또는 선사와 후학 사이데 묻고 답하는 실마리가 되므로 이같이 말한다. 다시
말하면 화두는 두 사람 사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주제를 원칙으로 해서 공부(수행)를 해야 하므로 화칙(話則)이라고도
한다.
또 화두(話頭)를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공안이란 본래 관공서의 공문(公文)을 말한다. 관공 서의 공문(公文)은 개인의
사문서와 달리 공정하고 권위가 있으므로 화두 또한 권위가 있고 공정한 것이라는 뜻으로 공안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화두 즉 공안은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 을 촉발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과 수단이며, 그 방법과 수단은 부처님과 옛조사(祖師) 들의 언행(言行)과 기연(機緣)에서 나오므로
역시 권위가 있고 공정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안이 성행하게 된 것은 중국 당(唐)나라 말기로부터 송대(宋代)에 걸쳐서라고 한 다.
유조(六祖)혜능(慧能) 이후, 그 때까지는 천재적인 훌륭한 선사들이 속촐해서 선(禪)의 창조적 생명의 불길이 치열하게 타오르고 있었으므로 제자를
교육하기 위한 특별한 수단으 로 공안을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당나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선의 창조적 생명 의 불길이 쇠퇴하자 선의
부흥을 위해서 공안이 제창(提唱)되는데 송(宋)의 승천 도원(承天道源)이 엮은 <전등록(傳燈錄)>에 이르면 이 책에 등장하는
선승(禪僧)이 1천7백 1명이고 이들의 언행과 기연이 1천7백하나이므로 이 때부터 공안의 수를 통틀어서 1천 7백 공안이라 고 말하게
되었다.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창된 공안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전등록과 같 이 현재까지 거쳐간 선사의 언행과
기연을 집성(集成)한 기록이 없으므로 그 숫자는 알 수 없고, 지금도 1천7백의 수치는 공안 전체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같이 많은 공안
중 에는 효봉스님께서 나에게 일러주신 화두와 똑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앞 부분 "부처와 부 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을 제외한 "어떤
것이 부처인가"하는 화두는 더러 있다.
효봉 스님에게서 화두를 받고 산으로 돌아와 참선을 한답시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내
마음에는 "부처와 부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가시가 되어 걸려서 도무지 마음 이 안정이 되지 않았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서양식 교육을 통해서 서양식 사고 방식을 배우고 그에 젖어 있다. 때문에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자기도
모르게 분석적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분석적인 사고방식으로 나의 화두 를 사고(思考)하고 있었다. 도데체 부처도 알아보지 못하는 부처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리 뒤져보고 저리 따져 보지만, 그야말로 화두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마음은 더욱 산란해 지 기만 하였다. 직관적으로 깨달아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선의 방법론을 말로는 기억을 하지 만 실재에 있어서는 불가능했다.
산에 살면서 참선을 하는 것은 마음을
안정하고 수행을 하자는 것인데 마음의 안정은 고사 하고 눈에 들어오는 산도 산란한 마음따라 흔들렸다. 이치로야 산은 부동(不動)이고 나무는
바람따라 움직이는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흔들리는 마음에 비친 산 또한 부동이 아니었 다.
무문관(無文關)이라고 하는
선서(禪書) 29칙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육조(六祖) 혜능이 광주 (廣州) 법성사(法性寺)에 이르렀을 때, 인종(印宗)이 열반경을 강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알리 는 번기(幡旗)가 펄럭이고 있었다. 두 스님이 펄럭이는 깃발을 두고서 토론을 하는데 한 스 님은 깃발이 움직인다 하고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면서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다. 육조가 이것을 보고서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인종이 제자들을 이끌고 육조에게서 무상도(無上道)를 들었다 하고 육조는 이 때 비로소 인종에게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때까지 육조 혜능은 행 자(行者)로 있었을 것이고 행자의 머리를 깎고 계급을 일러준 인종은
육조에게서 무상도를 들었으니 육조의 문하생(門下生)이 된 셈이다.
각설하고, 마음이 움직인다고 한 육조의 말은 마음의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도 충격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선사의 어록을 들추어 나의 화두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 보았다. "어떤 것이 부처인가."
하고 묻는 후학에게 어떤 선사는 "진흙으로 빚어서 금을 칠 한 것이다."고 제법 사실적인 답을 하는가하면 운문(雲門)은
"건시궐(똥막대기)이다."하고 동 산(洞山)은 "마삼근麻三斤;삼값이 세 근)이다."해서 동문서답도 이에 미치지 못하는 답을 한
다.
혹은 무엇이 부처입니까." 묻는 대매(大梅)에게 마조(馬祖)는 "즉심즉불(卽心卽佛.마음이 부 처)이다."했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반대로 "비심비불(非心非佛.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하였으니 사량(思量)과 분별(分別)로는 도저히 접근할 길이 없다.
이렇게
몇 달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효봉 스님에게서 전갈이 왔다. 통영 미래사(彌來寺)에 잠간 머물 것이니 와서 그 동안 공부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는 전갈이었다. 생각 같아서 는 피하고 싶었으나 사람이 직접와서 전하였으니 못 들은 척 할 수가 없었다. 내키지 않으 나 가는 길에 진주
의곡사(義谷寺)에 계시는 석정(石鼎) 스님을 만나 지혜를 빌리기로 하고 석정 스님을 찾아갔다. 하룻밤을 자면서 속을 털어놓았더니 석정 스님
말씀이 겪은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하셨다. 실인즉슨 겪은 그대로를 이야기할밖에 다른 길도 없고 또 할 말은 더욱 없는 처지
였다.
미래사에 도착하니 스님께서 반겨주셨다. 다는 그렇지 않겠지만, 화두를 일러주는 예는 많으 나 화두를 받은 수좌가 그 화두를
가지고서 공부를 어떻게 하면 어떠한 진전이 있었는지 점 검하는 일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그것은 공부하는 수좌에게도 원인이 있겠지만 화두를 일
러준 스승이 제자를 불러서 붇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효봉 스님께서는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들르신 기회에 나를 불러
점검을 해주신 것이다. 밤 깊도록 어 줍잖은 나의 수행담을 경청하시고 그에 낱낱이 가르침을 드리우시는 자애에 흠뻑 젖었다. 지금 생각해도
감읍할 뿐이다.
인연의 성숙
위산 영우( 山靈祐)라고 하는 중국의 선사가 있다. 백장
회해(百丈懷海)의 제자이다. 백장 은 선원(禪院)의 생활규칙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다. 백장이 선원의 생활규칙을 만들기까지 선승(禪僧)들은
율사(律寺)의 별원(別院)에서 기거했으며 독자적으로 선사(禪寺)를 갖고 있 지 않았다.
말하자면 율사에 얹혀서 사는 꼴이었다.
그러므로 독자적인 생활규칙은 물론 사원(寺院)의 지위도 특별히 주어진 것이 없고 선승에게 죄과(罪過)가 있어도 그를 다스리는 규범이 없었
다.
<전등록(傳燈錄 6권)> 백장회해전에 보면 백장이 선문의식(禪門儀式)을 지었다 했는데 백장 고청규(百丈古淸規) 또는
백장총림청규(百丈叢林淸規)가 그것이다. '총림청규'라고 하는 말 이 시사하듯이 백장의 청규는 선종(禪宗)을 하나의 교단으로 독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 그 청규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백장이후, 백장의 청규를 이어받아서 만들어진 선원 청규(禪苑淸規) 등에서 그 중요한 내용을
알 수가 있다.
<전등록>에 의하면 이 같은 백장의 법을 이은 선사(禪師)는 30인이나 되고 그 중 13인의 기록이
보이는데 그 필두(筆頭)에 위산 영우가 있다. 이것은 위산 영우가 백장 회해의 법을 이은 문인(門人)중, 제 1인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실제로
선종(禪宗)을 독립시킨 백장의 교 단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대표자로 위산 영우는 손꼽히고 있으며, 그는 그의 제자 앙산 혜적 (仰山慧寂)과 함께
위앙종( 仰宗)이라고 하는 선종 오가(五家) 중 최초의 종파를 세웠다.
위산 영우는 15세 때, 생가(生家)가 있는 향리(鄕里)의
율사(律師)인 건선사(建善寺)에서 출 가하여 법상 율사(法常律師)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영우는 그 때 받은 승명(僧名)이다. 19세(혹은
20세) 때, 항주(抗州)의 용흥사(龍興寺)에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그는 대소 승(大小乘)의 경전과 율장(律藏)을 배웠다.
조당집(祖堂集)은 이 때, 영우가 "소승은 대충 보고 대성은 정밀하게 읽었다." 고 함으로써 영우가 대승에 대해서 특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23세 때의 어느 날, 영우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하고 심오하나 끝내는 내 마음이 안정 할
곳이 아니다."라고 탄식하고 교학(敎學)을 버렸다. 교학을 버린 그는 천태산 (天台山)으로 지자 대사(智者大師)의 유적을 찾아
나섰다.
그 도중에서 한 은인(隱人)을 만났는데 그가 영우의 손을 잡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하면서 마흔 말이 "그대의 여생(餘生)은
인연을 따라 나이가 들수록 훌륭하게 될 것이다. 륵담( 潭)을 만나면 머물고 위산( 山)을 만나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륵담은 마조 도일(馬祖道一)이 입적(入寂)한 곳이고, 백장 회해는 마조 도일에게 사사(師事) 하였으므로 륵담은 백장 회해가
이어받은 마조 도일의 법의 근원을 뜻한다. 따라서 륵담은 만나는 것은 백장회해를 만나는 것이다. 위산은 영우가 제자 앙산 혜적과 함께 법을 크게
떨친곳이다.
이 말을 한 은인은 한산과 습득으로 잘 알려진 한산자(寒山子)였다. 영우가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렀을 때,
습득(拾得)이 영우 한 사람만을 떠받들고 기뻐하므로 주지가 편애하는 것을 꾸짖었다. 그러자 습득이 "이 사람은 1천 5백인의 선지식으로서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 뒤, 강서(江西)지방을 유력(遊歷)한 영우는 백장 회해를 만 나 깊은 선지(禪智)를 체득하고 백장 회해의 곁에
머물러 따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중에 영우가 백장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백장이 "거기 누가 있느냐?" 물었다. "영우
입니다." "화로 안에 불이 있느냐?"
화로의 재를 부젓가락으로 뒤적거린 영우가 "없습니다."하였다. 그러자 백장이 일어나
부젓 가락으로 재속을 뒤척여 작은 불씨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 보이면서 "없다고 했는 데 이것은 무엇인가?" 힐문(詰問)하였다. 순간
영우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백 장에게 사례(謝禮)하고 자기가 깨달은 견해를 이야기하였다.
그것을 다 듣고 난 백장이,
"그러한 깨달음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열반경>에 '불성을 보고자 하면 마땅히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시절인연 이 성숙하면 미혹(迷惑)이 홀연 깨달음이 되고 잊었던 것도 기억이 홀연 되살아 난다. 거기 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구명(究明)하게 되는 것이다. 결코 남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제다가존자(提多迦尊者.什法藏의 第5祖)가 '깨달으면 깨닫지
않은 것과 다르 지 않다. 깨닫는 마음도 없고 깨달을 대상도 없다'고 한 것이다. 허망이라든가 범성(凡聖) 따위의 마음이란 없다. 본래의
심법(心法, 마음과 사물)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너는 지금 그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잃지 않도록 잘 지키고 지니기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왜 이 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미래사에서 밤이 깊도록 효봉 스님의 가르침을 받을 때, 스님께서 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백장이 영우에게 한 바로 이 말씀을 들려 주셨기 때 문이다. 그 때,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여기 쓴 글과 똑같지는 않다. 기억이
희미하므로 전등 록에 있는 것을 옮겨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 때, 효봉 스님은 또 시절인연의 성숙에 관한 사례로 위산 영우화
향엄(香嚴)선사의 이야 기도 하셨다. 향엄이 처음 위산의 도량에 왔을 때, 수많은 젊은 선승들이 좌선하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 로 ' 이
젊은 선승들은 아무런 학문도 없을 것이다.
교리를 충분히 배운 다음에 참선을 해도 해야 할 것인데 교리도 배우지 않고 좌선을 하는
것을 보면 머리들이 나쁜 모양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향엄에게 어느 날, 위산 영우가 말하기를 "너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총명 하고 박학(博學)하다. 그러나 나는 네가 책에서 배운 것에는 관심이 없다. 네가 갓 태어났을 때의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너의 천성(天性)에
대해서 한 마디 해 보아라"하였다.
이에 향엄이 대학자답게 인간의 천성에 대해서 웅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영우가 " 잠깐
기다리게, 갓 태어난 어린애가 그런 것을 알고 있었는가. 그것은 태어난 뒤에 자라서 배우고 익힌 쓸모 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진짜
네 천성을 말해 보라."하였다. 향엄이 무어라 한 마디 하면 이내 "그것은 눈으로 본 것이다."하고 "그것은 귀로 들은 것." "그것은
책에 쓰여 있는것."하면서 향엄을 궁지로 몰아 부쳤다. 드디어 향엄이 어찌할줄을 몰라 "아무쪼록 저를 위해서 가르쳐
주십시오."하였다. 그러자 위산 영우. "내가 설하는 것은 내 말이지 너와는 관계가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 였다.
향엄이
자기 방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그가 배운 책을 꺼내 아무리 살펴보아도 영우가 요구 한 것을 한 마디도 찾을 수 없었다. 망연자실한 향엄, 여기에서
비로소 '그림의 떡은 배를 불리지 못한다..'고 깨닫고 책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리고 "이승에서 불법(佛法)을 배우는 것 은 단념하자. 한낱
범승(凡僧)으로 살자. 더 이상 엄격한 구도생활로 마음을 괴롭힐 일이 아 니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울며 위산을 떠나 남양
혜충(南陽慧忠)이 살던 무당산(武當山)에 들어가 초암 을 짓고 그 주위에 대나무를 심고서 그 대나무와 멋해 살면서 좌선에 힘썼다. 그러는 어느
날, 길을 쓸고 있는데, 비 끝에 튕겨나간 돌이 대나무에 맞아 '타-ㅇ'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향엄은 활연히
대오(大悟)하였다. 이에 향엄은 곧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고 멀리 위산을 향하여 예배하고 말하였다. "대위산의 대화상님, 그 때 저에게 한 말씀
해 주셨으면 오늘의 이 기쁨은 도저히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님의 은혜는 부모의 은 혜보다 훨씬 더 합니다." 하였다.
참으로
각고의 수행 끝에 시절인연이 성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경수좌(斷莖首座) 글/
박경훈/역경위원, 법보신문 주필
나는 효봉 스님께서 미래사(彌來寺)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들으면 되도록 미래사로 스님을 뵈러 갔다.
화두를 일러주신 스님이므로 화두를 들고 공부한 그동안의 이런 저런 말씀을 드 리기 위해서 찾아뵙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스님의 사람 대하시는 품이
포근하여 그에 끌려 서 자주 뵙고 싶어했다.
어느 해던가, 미래사로 스님을 뵈러 갔을 때였다. 월간 「자유문학」에 설창수 씨가 쓴
'단경수좌(斷莖首座)'라고 하는 시가 실렸다. 지금 그 시를 기억하지는 못하나 기억하는 내용은 어느 젊은 스님이 성욕을 끊기 위해서
남근(男根)을 잘랐는데 수행인으로서의 그 용기는 달마(達磨) 대사를 찾아간 혜가(慧可) 스 님이 구법(求法)의 굳은 결의를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팔을 자른 것과 비교하여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다고 찬탄하는 시였다.
이 단경수좌에 관해서 그 무렵, 내가 들은
이야기는 대충 이러했다. 남해 보리암에 공부를 대단히 열심히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매주 토요일이면 스님에게 연정(戀情)을 품은 어느 젊 은
여교사가 찾아와 묵어갔다고 한다. 보리암은 우리나라에 있는 관음도량(觀音道場) 세 곳 중 한 곳이어서 기도하는 신도가 끊이지 않는 절이다.
처음에 스님은 여교사를 대하기를 기 도하러 오는 수많은 여느 신도와 같이 대했다.
그러나 자주 만나게 되는 사이에 여교사의 품은
연정을 느끼게 되고 여교사의 연정이 깊 어질수록 스님에게도 무게가 더해져서 공부에 장애가 되고, 스님 생각에 여교사가 스님을 스님으로서가 아니라
남성의 한 사람으로서 사랑할진대는 남성의 상징인 남근을 잘라 없애 버리면 화근이 없어지리라 해서 남근을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미래사에 갔을 때, 이 사건은 자연히 화제가 되었다. 동석한 수좌들은 효봉 스님에게 서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지 여쭙게 되었다. 좌중에
나이가 많은 스님 가운데는 가 상하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젊은 스님 중에는 도리어 수행의 의지가 약해서 저지른 자해 (自害)라고 비난하는 이가
있고, 어떤 스님은 불구가 어찌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걱 정하기도 하였다.
그 때, 효봉 스님께서 혜외(慧嵬) 선사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혜외 선사는 399년 법현(法顯 340~420)과 함께 인도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났다고 「양
고승전(梁高僧傳)」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달마 대사를 초조(初祖)로 하는 중국의 선종 이 시작하기 훨씬 전의 선사이다. 달마 대사가
520년에 중국의 광주(廣州)에 왔다고 하는 설 을 기준으로 하면 혜외 선사는 달마로부터 무려 120년 전의 인물이다. 흔히 달마 대사가 처
음으로 중국에 선(禪)을 가져와 달마 대사로부터 선이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달마 대사 이전에 이미 중국에는 많은
선사들이 있었고 혜외 선사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계행(戒行)이 청정한 혜외 선사는 생애의 대부분을 심산유곡에 초암(草庵)을 짓고
숨어살 면서 오로지 선수행(禪修行)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눈이 내 리는 어느 날, 한 여인이 선사의 초암을
찾아와 하루 밤 재워주기를 청하였다. 여인의 용모 는 단정하고 입은 옷은 깨끗하였으며 자태는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요즘 말로 표현해서 매 력
만점에다 섹시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은 스스로 자기를 천녀(天女)라고 소개하였다. 그리 고 선사에게 "스님은 대단히 덕이 크신 분입니다. 때문에
하늘은 저를 보내서 스님을 위무 (慰撫)해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여인은 갖은 교태와 말로써 선사를 유혹하였다.
그러나
선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비록 여인과 살을 섞지는 않을지라도 추운 겨울밤을 초암에서 지내도록 허락할 만도 한데 여인을 받아들이지 않은 선사는
여인에게 "나의 마음 은 죽은 재(灰)와 같다. 아름다운 여인의 뜨거운 몸을 가지고 나를 시험해도 소용이 없다." 고 말하였다. 도저히 선사를
유혹해야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여인은 초암을 떠나면서 "바닷물이 다 마르고 수미산(須彌山)이 넘어진다 해도 저 스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으리라." 고 찬탄하였다. 이것이 『양고승전』에 전하는 혜외 선사의 모습이다.
효봉 스님은 혜외 선사의 이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신
다음, 혜외 선사가 여인을 받아들이 지 않고 거절한 것은 수행의 경지가 얕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뒷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파 계(破戒)한
선승(禪僧)이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일 수도 있으니 공부하는 사 람은 경계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한편, 혜외 선사의 경우와는
반대로 여인을 받아들인 설화가 우리나라에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신라 때 관음 정진을 하는 두 사람의 도반(道伴)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산 위와 아래 에 초암을 짓고서 선정(禪定)을 닦았는데 먼저 깨달은 사람이 그때까지 깨닫지 못한 도반을 제도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어느 날, 눈비가 몰아치는 추운 밤, 한 젊은 여인이 산 아래에 있는 초암을 찾아와 재워 달라고 청하였다. 산아래 초암의
스님은 여인을 받아들이면 그 동안 생사를 걸고 쌓은 수행 이 보람 없이 무너진다 생각하고 추위에 떨며 간청하는 여인을 초암 밖으로
내쫓았다.
내쫓긴 여인은 산을 올라 산 위에 있는 초암에 이르러 하루 밤 재워달라고 청하였다. 산 위 초암의 암주(庵主)는 아무 말
없이 여인을 받아 들였다. 단칸인 초암 안으로 들어선 여인 은 암주에게 목욕을 하고 싶으니 물을 데워달라고 청했다. 암주는 말없이 물을 데워 큰
통 에 담아서 방안에 들여 주었다. 훨훨 옷을 벗은 여인은 알몸이 되어 통 속에 들어앉아 몸을 씻겨달라고 하였다. 암주는 이번에도 말없이 여인이
시키는 대로 여인의 몸을 씻어 주었다. 마치 마른 고목을 만지듯이 젊은 여인의 몸을 씻었다. 어느 순간, 여인은 서방(西方)을 향하 여 사라지고
통 속의 물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날이 새자 아래 도반은 생각했다. 간 밤 산 위로 올라간 여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여인이 산 위의 초암에서 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산 위의 도반은 틀림없이 파계하 였을 것이다. 내가 가서 확인하고 그 잘못을 깨우쳐 주리라
생각하고서 의기양양 산 위의 초암으로 갔다. 가까이 가니 초암이 빛나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초암 안으로 들어가니 찬란한 빛은 방안의
목욕통에서 나오고 있었고 초암의 주인은 서방을 향해 합장하고 앉아서 삼매에 들어 있었다. 아뿔싸, 산아래 도반은 간밤의 여인이 관음 보살이었음을
그제서야 깨 달았다.
효봉 스님은 선수행을 하는 사람 중에 계율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많고 그것을 도리어 자랑삼는 풍토가 확산되어
가는 것을 그 때 이미 걱정하셨다. 아름다운 여인의 뜨거운 육체를 고목을 만지듯이 만질 수 있고 여인의 몸을 씻어주면서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사람만이 여인을 받아들이지 않은 혜외 선사의 수행의 경지가 미숙하 다 할 수 있고 단경수좌의 단경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사 람이라면 결코 혜외 선사나 단경수좌를 가볍게 보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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