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이흥근
아내 친구 부부와 같이 문수산에 갔다. 강화에 가는 차가 많아 도로가 막힌다. 날씨는 춥지만, 미세먼지는 없고 따뜻한 햇볕이 몸을 녹인다. 문수산 둘레길을 갔다. 지난번에는 강이 얼지 않았는데 얼음이 얼었다. 산 중턱에 앉아서 매실차와 사과, 초콜릿, 도라지즙, 생고구마가 맛있다.
정상에서 북한 개성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롭다. 걸으며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니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돌아가신 장인이 멀리 보이는 개성에서 6.25 사변 때 피난을 나오셨다.
한번 이곳에 와서 개성을 보며 눈물을 흘리시고 같이 오지 못한 종친들을 생각하며 감회에 젖었다.
장인은 문수산에서 보이는 개성에서 집을 새로 건축하고 인삼을 재배하고 종친이 개성에 있다고 한다. 피난을 나와 종친이 없어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여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원래 기녀는 아니다. 동네 총각이 좋아하여 상사병에 걸려 죽었다.
상여가 황진이 집을 지나면서 움직이지 않아 황진이의 겉옷을 벗어줌으로써 상여가 움직여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기녀가 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양반 억제로 아버지는 양반인데 어머니가 기녀가 되어 양반이 못 되었다고 한다.
서경덕 선생은 벼슬은 없지만, 성리학의 양대 산맥인 주기학파와 주리학파로 실용 학문을 중시한 주기학파의 선구자다. 서경덕과 황진이는 영원한 선생과 아름다운 제 자 사이었다고 한다.
황진이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선전관 이시종이 송도를 지나다가 냇가에서 말을 쉬게 하려고 멈췄다. 잠시 누워서 한가하게 하늘을 바라보다 노래 한 가락을 뽑았다.
황진이가 바람결에 노랫소리를 듣고 놀라며 “이는 평범한 시골 남자가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분명히 명창의 곡조인데 서울의 풍류객 이시종이 이곳에 놀러왔나 보구나! 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이시종이다. 황진이는 그가 풍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육년 간의 동거를 제의했다. 얼마 뒤에 황진이는 재산을 챙겨 서울의 이시종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시부모에게는 첩며느리로서 정실부인에게는 소실로서 시댁 식구들에게 정성을 다했다. 삼 년 동안 생활비는 자신이 모두 부담했다. 그 뒤에는 이시종이 삼 년 동안 송도로 옮겨가서 황진이의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약속한 기간이 끝나자 황진이는 마땅히 헤어지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서 깨끗이 돌아 섰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지만, 사랑하는 마음마저 떠나보내지는 못했다 그녀는 임이 떠난 빈자리에 스며드는 그리움을 읊어 편지 대신 보냈다. “ 동짓날 긴긴밤의 한가운데를 베어내어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정든 임이 오 시는 날 밤에 굽이굽이 펴리라” 그리움이 어린다.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이 한양에서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친구들에게 “나는 삼십일만 같이 살면 쉬이 헤어질 수 있으며 조금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먼저 소세양이 황진이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溜 석류나무 류) 보냈는데 큰선비가 왔으니 어찌 놀음이 없겠는가, 라는 뜻이다. 이 편지를 본 황진이는 漁(고기 잡을 어)높은 기생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로 재치 있게 편지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꿈같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너무나 짧기만 했던 삼십 일이 지나고 둘이 헤어지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를 지어주자 소세양이 감동하여 며칠을 더 머물렀다고 한다.
그때 남긴 시가 “ 아 아, 내가 한일이야 그리워할 줄을 몰랐던가 있으라고 말했더라면 갔으랴마는 제가 구태여 보내고 나서 그리워하는 내 마음 나도 모르겠구나” 그녀는 말년에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을 유람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했다. 황진이의 유언에 따라 개성 근처에 있는 장단에 묻어 주었다. 건너 송학산이 보이고 개성이 보인다.
송도 삼절하면. 박연폭포와 황진이, 화담 서경덕 선생이라 한다.
황진이는 죽을 때 유언으로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 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임제가 평안감사로 부임할 때 황진이 무덤 앞에서 술잔을 부으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느냐/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혀나니/잔 잡아 권할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이 시를 읊고 파직이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황진이는 젊은 시절에 수많은 화재를 남겼다. 미와 지혜를 겸비한 유명한 기녀였다.
오늘은 하늘이 맑아 더 선명하게 보인다. 따뜻한 햇볕이 얼굴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고인이 된 장인을 생각하며 발길을 돌린다.
점심은 풍무리 중국집에서 해물 칼국수를 먹었다. 국물이 시원하다. 가족, 자녀 이야기를 하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올해도 가족의 건강과 소망이 이루워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