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운
화르륵!
순간 사도경의 손에서 불꽃이 일어나며 순식간에 서신을 집어삼켜
한줌의 재로 만들었다.
"흘흘! 생사구류도라...... 정말 광오한 무공이야. 생사를 결정한
다니. 하나 그 덕분에 나의 행보가 조금 더 수월해지겠구나. 고마운
일이로다."
그의 노안에 순간적으로 빛이 일렁였다 사라졌다. 그의 입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세상을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는 폭설
을 바라보았다
4
적무강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세상이 온통 순백으로 변해 있었
다. 밤새 내린 눈은 간밤의 격전장은 물론 천왕성 전체를 하얗게 물
들였다. 또한 모든 것이 말끔하게 복구된 까닭에 적무강조차 안력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빠르군!"
적무강이 미소를 지었다.
격전이 끝난 후 다른 이들의 기척을 느꼈지만 설마 그 짧은 시간
안에 간밤의 상황을 이렇듯 완벽하게 복구시켜 놓을 줄은 미처 예상
하지 못했다.
"하아~!"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추위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적무강은 몸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추위 때문에 관절이 약간
굳은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이상도 없었다.
'마도육문의 문주 중 셋이나 숨통을 끊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그
어떤 움직임이 있어야 하건만 이토록 조용하다니.....'
적무강은 천왕성 내에서 제일 큰 전각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제아무리 적자생존의 세계라지만 지금 천왕성의 반응은 그의 예상
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만형통이나 곽부종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현재 천왕성의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을 텐데..... 아쉽구나.'
그는 새삼 두 사람의 부재에 따르는 빈 공간을 느꼈다. 그러나 그
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어차피 현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
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자신을 믿고 헤쳐 나가야 한다.'
적무강은 그렇게 마음을 다져 나갔다.
"대협,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때 등 뒤에서 조심스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무강이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처음 보는 여인이 서 있었다.
"어제 이곳에 왔던 여인들은 어찌하고 네가 왔느냐?"
"그분들은 근신 처분을 받아서 당분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가? 알았다."
적무강은 그녀를 따라 탁자로 갔다. 그곳에는 벌써 한 상이 푸짐
하게 차려져 있었다.
오늘 새로 배정된 시비는 어제 적무강의 수발을 들었던 여인들과
는 사뭇 달랐다. 그녀들이 적무강을 유혹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왔다
면 눈앞에 있는 시비는 원래부터 시비의 훈련을 받았는지 적무강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자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덕분에 적무강
은 어제와 달리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침을 먹은 후 적무강은 명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침부터 시작된 명상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계속됐다. 생각 같
아서는 천왕성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었지만 어차피 적으로 온 입장
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요구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천왕성주의 요청이 있을 때까지 마음의 칼날을 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천왕성주의 접견이 허
락되었다.
"성주께서 당신을 모셔 오라고 하셨소이다."
거친 마의를 입고 있는 남자가 적무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는
무척이나 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적무강
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눈동자 속에 숨겨진 은은한
적의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적무강은 남자의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낭혈문의 무인인가?'
"그렇소!"
적무강의 말에 남자가 늑대가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그의 눈에
적무강에 대한 적개심이 표출됐다.
"당신 덕분에 우리는 문주를 잃고 성주 직속으로 편입되었소. 고
맙소! 이 빚은 분명히 갚겠소."
"얼마든지......"
적무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원한과 원한이 맞물리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곳이 무림
이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한 평생 동안 얼마나 더 살업을 쌓아야 할
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동안 그에게 원한을 가진 자를 꼽으라
면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힘이 들 것이다. 그러니 또 하나의 원한이
쌓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남자가 등을 돌렸다. 그때 적무강이 말했다.
"낭혈문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낭혈문주는 이제껏 내가 싸워
온 그 어떤 무인들보다 훌륭했다."
문득 남자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는 그 자세로 잠시 있더니 한
마디를 내뱉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고맙소!"
무엇이 고맙다는 것일까? 그러나 적무강은 의문 대신 묵묵히 그를
따랐다.
들어온 지 하루 만에 무척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자
신이 머물고 있던 거처를 나서는 적무강의 표정에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겉으로만 봐서는 도저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저잣거리를 지났다. 저잣거리에서는 상인들이 물건을 흥정
하고 값을 매기고 있었다. 단지 그 모습만 본다면 이곳이 마의 총본
산이라는 천왕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적무강은 평범
함 속에 숨겨진 위험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 곳곳에서 그를 노려보
는 눈길이 감지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상
인들이거나 물건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적무강이 보
기엔 그들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적무강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노골적인 적의가 깔려 있었다. 아무
리 좋게 말을 하고, 아무리 포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들 입장에서 적
무강은 침입자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의 손에 마도육문의 문주
가 절반이나 죽었다. 당장 들고 일어서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적무강이 자신을 안내하는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이렇듯 노려보기만 할 뿐 덤비지 않는 것인가? 당신들 입
장에서 나는 철천지원수일 텐데."
그의 말에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짧게 말했다.
"성주님의 명이 있었소."
퉁명스런 그의 말에 적무강은 비로소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가 어떤 그릇인지는 직접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마치 시장의 저잣거리 같은 외곽과 달리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삼엄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무인들의 눈빛도 갈수록 흉
흉해졌고, 무엇보다 삼백 년의 세월 동안 갖은 풍파를 견뎌 온 건물
들이 엄청난 무게를 느껴지게 했다.
적무강에 대한 적의는 갈수록 도를 더해 갔다. 어떤 이는 도저히
보지 못할 것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고, 또 다른 이는 바닥에 침
을 뱉는 것으로 심사가 불편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러나 적무강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는 이미 예상했던
바 였다. 이 정도에 흔들렸다면 홀로 천왕성의 중원 진출을 막겠다
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 속에서 그들은 마침내 천왕성주가
머무는 전각에 도착했다.
전각 주위에는 수십 명의 무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너무나 잘 정련이 되어 있었고, 자세 또한 빈틈이 없
었다. 또한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은 강호에서 절정고수를 보는
듯했다.
"내가 안내해 줄 수 있는 곳은 이곳까지요. 안으로 들어가면 누군
가 나올 것이오."
"음!"
적무강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안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전각 안에 들어서자 어제 적무강을 안내해 온 천왕성의 총관인 서
영우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적무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적무강 역시 대답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
다.
천왕성주가 머무는 전각은 마치 생명이 없는 죽은 마을처럼 고요
했다. 간혹 보이는 시비들이나 무인들은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의 일
에만 열중했다. 황제가 사는 자금성처럼 이곳은 오직 천왕성주만을
위한 공간 같았다. 그를 제외한 다른 삶들은 말없는 인형 같았다.
그러나 그들 이외에도 이 전각에는 많은 사람이 존재했다. 단지 보
이지 않을 뿐이다.
적무강은 서영우의 뒤를 따르는 내내 집요한 감시의 눈길을 느꼈
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시위를 하고 있
었다. 그들 때문에 황량해 보이는 실내가 꽉 차게 느껴질 정도였다.
"후후~!"
적무강이 웃음을 나직이 흘렸다. 그러자 서영우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는 의아하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
러나 적무강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서영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기분 나쁜 표정을 지
을 법도 하건만 그의 얼굴에서는 그런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적무
강은 그의 시지가 무척이나 깊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이 정도의 상
황이 되면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무강은 입가에 떠오른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 상황이 무척 우
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 그리고 서로의 이해득실에 따라 적으로 인
지한 자들끼리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지금 적무강과 천
왕성주의 관계였고 적무강이 웃음을 지우지 않는 이유였다.
서영우는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대전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주님께서는 안에서 적 대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직 두 분
만이 만나실 수 있는 자립니다. 그럼 저는......"
서영우가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적무강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대전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정
두 사람의 키를 합쳐 놓은 것보다도 높은 대전 문. 그것이 이곳이
어디인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적무강은 이제야 자신이 천왕성
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는 잠시 대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
다가 다가가 손에 힘을 줬다. 얼마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대전 문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적무강은 거대한 대전을 향해 힘차게 발을 들여 놓았다.
"흘흘! 어서 오시게!"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적무강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천왕성
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작고 초라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도저히 천왕성이라는 거대
세력의 주인이라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디 한적한 시골 마을
의 촌장이나 해야 할 것 같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분명
천왕성의 성주였다. 십자성과 더불어 천하 이세의 하나인......
적무강은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적무강이라고 합니다. 강호 동도들이 도마라는 별호로 불러 주고
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흘흘! 나도 반갑다네. 자네를 직접 보니 오히려 소문이 모자란
감이 있군."
천왕성주 사도경의 눈은 매우 깊고 넓어 도무지 그의 속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그는 천지가 개벽한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
이지 않을 것이다.
사도경은 그 심유한 눈으로 적무강을 바라봤다. 그는 마치 적무강
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모두 꿰뚫어 볼 듯 눈을 빛냈다. 순간 적무
강은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숨겨진 과격한 일면을 엿보았다.
'나의 힘을 가늠하고 있는 건가?'
적무강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힘을 숨기려고 하거나 과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였다.
사도경은 잠시 그렇게 적무강을 바라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흘흘! 내가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 놨군. 자리에 앉으시게나."
"고맙습니다."
그들은 거의 오 장여는 될 것 같은 기다란 탁자의 양쪽 끝에 각자
앉았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거
리였지만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거리였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곧 음식이 나왔다. 기다란 탁자 위에 생전 듣
지도 보지도 못한 요리가 금세 가득 찼다.
"내 자네가 온다기에 주방에 특별히 신경 쓰라고 했네. 괜찮을 걸
세. 이곳의 숙수가 꽤 능력이 있으니까."
"식욕이 동하는군요."
"우선 식사부터 하세나. 난 무척 배가 출출하던 차였네."
"그럼......"
두 사람은 묵묵히 젓가락을 놀렸다. 그들은 분명 적과 적으로 만
났지만 그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
심으로 음식 맛을 음미하며 만찬을 즐겼다.
생선 구이의 뼈가 드러나고, 어린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약술에
절여 구운 고기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러나 시비들이 부지런히 음
식을 나라 접시는 비워질 틈이 없었다.
더 이상 음식이 줄어들지 않자 시비들이 다시 탁자에 놓여 있던 접
시를 밖으로 내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을 하
지 않았다. 그들은 음식을 먹는 데에만 신경을 썼고, 서로에게 그 어
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음식 접시가 모두 깨끗이 치워지고 시비들이 차를 내왔다.
그윽한 차 향기가 실내에 가득 찼다. 두 사람은 말없이 향을 즐기며
차를 들었다. 그렇게 찻잔을 비우고 나서야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천왕성주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적무강을 바라보았다. 그
렇지 않아도 왜소한 그의 몸이 더욱 작아 보였다. 그러나 적무강의
눈에는 그가 오히려 산악처럼 거대하게 확대되어 보였다. 적무강의
눈에 그는 더 이상 초라하고 작은 늙은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 존재
만으로도 실내를 가득 채우는 거악(巨嶽)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흘흘! 자네는 여러모로 특이한 존재이네. 그것 아는가?"
"글쎄요. 제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이제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기에......"
"그런가? 하긴 정작 자신은 모를 수도 있겠군. 그럼 내가 왜 자네
를 천왕성 안으로 들였는지 아시는가?"
사도경이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그런 사도경을 보면서 적무강
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느 정도는.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겠지. 그리 모자란 사람이 아니니까."
사도경이 수긍했다. 이미 서로의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
다. 단지 지금은 확인하는 절차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말하기가 더욱 수월하겠군."
"말하십시오."
"자네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말을 하는 사도경의 몸에선 패도적인 기운이 산악처름 일어나 엄
청난 무게로 적무강을 압박했다. 그의 눈은 마치 횃불처럼 빛나고
있었고, 이제까지 적무강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엄청난 위
압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만약 적무강이 생사구류도의 후삼식을 깨닫기 전이었다면 그의 존
재감에 자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예전과 달랐다.
그리고 설혹 기세에서 진다고 해도 굴할 남자가 아니었다.
적무강이 마찬가지로 기세를 피워 올리며 거침없이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천왕성의 중원 진출을 막는 것입니다.'
"자네가 나서는 이유는?"
"굳이 천왕성이 중원으로 나오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흘흘! 십자성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네."
"마찬가지입니다. 십자성 때문에 천왕성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몸에서 피어난 기세가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맞부딪쳤다.
파파팟!
두 사람 사이의 탁자가 마치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갔다. 뿐만 아니
라 실내에 있는 집기들조차 그들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나
갔다.
구구궁!
두 사람의 부딪침이 도를 더해 가자 단단한 바위를 깎아 만든 전
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무강도, 사도경도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이것은 기선 싸움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차후에도 밀린다.
두 사람의 뇌리에는 그런 계산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서로의 힘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
투둑!
두 사람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튀어나왔다. 미증유의 거력이 부딪
치면서 마치 그들이 있는 전각 자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
다. 그 진동이 절정에 달했다 싶은 찰나, 마치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멈췄다.
순간 천왕성주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흘흘흘! 명불허전이군. 그 젊은 나이에 나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공력이라니. 정말 대단해."
그는 마치 손자의 대견한 모습을 보는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적무
강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말
했다.
"그러나 자네가 아무리 강하다 하나 혼자에 불과할 뿐, 세상에 독
불장군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만일 천왕성의 정예를 움직
였다면 자네는 종국에는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누일 수밖에 없을 거네.
그런데도 내가 자네의 독대를 허락하고, 또한 마도육문의 문주들을
죽인 죄를 묻지 않는 것은 자네와 내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지."
"서로 간의 필요라......"
"흘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나를 넘게. 나를 넘는 순간 천
왕성은 십자성에 대한 진군을 멈출 걸세."
"조건은?"
"역시 젊은이답게 눈치가 빠르군. 흘흘! 나에게 도전할 자격을 얻
기 위해서는 한 남자를 넘어서야 하네. 그렇다면 자네는 천왕성의
무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에게 도전할 수 있을 거네. 어떤가?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천왕성주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적무강은 그가 말
하는 것을 묵묵히 들었다.
5
서녕(西寧)은 청해성의 성도로 중원의 다른 지역이나 마을과는 비
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고원에 위치했다. 고원지대에 살다 보니
이곳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폐활량이 많고 근육이 잘 발
달되어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고수가 나왔다. 그러나 지역적
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정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흠이라
면 흠이었다. 때문에 서녕의 무인들은 중원의 무인들에게 어떤 열등
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서녕으로 올라오는 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그렇기에 청해성의 성
도이면서도 그렇게 중원과 교류가 많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관도를 따라 서녕에 들어서는 인물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험한
관로를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올라옴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험난한 관도를 혼자 통과했다는 말과 일맥상통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큰 남자였다. 수염이 덥
수룩한 데다 장비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인상과 눈빛에 박력이 있었
다.
그는 다름 아닌 용추였다. 그는 산동성 제갈가에서 자신의 원한을
갚은 후 이곳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사천 리가 넘는 길을
하루에 단 한 시진만 자며 말을 달려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나마 그
가 타고 온 말은 서녕의 초입에서 탈진해 쓰러졌다. 그렇기에 말을
버려두고 그 혼자서 서녕에 들어선 것이다.
'주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 용추가 곧 주군의 곁으로 가겠습
니다. 천하를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고 계시다니......'
용추에게 있어 적무강은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준 은인이었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을 때 그는 맹세했다. 자신의 원한을 풀면 반
드시 그를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그런 자신이 주인으로 인정한 남자
는 지금 천왕성을 상대로 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은 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의 곁에서 그를 돕고 싶었다.
'내일이면 청해호에 도착할 것이다. 그 전까지 정확한 위치를 알
아내야 한다.'
천왕성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지만 이미 적무강의 행적은 중원에
샅샅이 알려져 있었다. 그가 청해호까지 간 것은 이미 이곳에 들어서
기 전에 확인했다. 그러나 정확히 청해호 어디에서 사라진 것인지는
알지 못한 용추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서녕의 중심가에 들어서자 바깥에서 바라본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
습이 펼쳐졌다. 대로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호사스런 술집들과 청루
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이라서 많은
청루들이 문을 열지 않았지만 그래도 간간이 보이는 동기들이나 여인
들이 이곳이 어떤 성향을 가진 거리인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용추는 청루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객잔만을 살폈다.
그는 이제까지 강호 경험으로 어떤 곳에서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용추는 고급 객잔은 외면하고 누구나 출입이 용이하고 쉽게 드나
들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장사가 잘되는 곳을 물
색했다.
'저기가 좋겠군.'
그의 눈에 송방객잔이라고 쓰인 현판과 함께 꽤 많은 사람이 부지
런히 들락날락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곳은 이제까지 용추가 찾
던 조건과 정확히 부합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객잔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쇼."
십대 초반의 점소이가 그를 맞았다. 용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
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층 구석으로 향했다. 그가 앉은 곳 주위에
는 제법 힘을 쓰는 듯한 인상의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들
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그들은 혼자서 자신들의 옆자리 쪽에 자
리를 잡은 용추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신경을 끄고 다시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용추가 점소이에게 주문했다.
"우선 오리 구이 한 마리 내오고, 화주 한 병을 가져오도록."
"알겠습니다."
점소이는 잠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화주가 담긴 술병을 들고 올
라왔다.
용추는 화주를 병째 들이켰다. 목구멍에 마치 불에 덴 듯 화끈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용추는 그 느낌마저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이미 여러 날 동안 관도를 달렸기에 그의 목에는 먼지가 많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렇게 화주를 마시자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가
는 느낌이었다.
화주를 들이키며 안주가 나오길 기다리던 중 그의 귀에 사내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글쎄! 그 미친놈이 기어코 천왕성으로 쳐들어갔다더군."
"그뿐인가? 벌써 그의 손에 마도육문의 문주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 아닌가? 그놈이 천왕성을 거덜 내기로 작정한 모양이군. 빌어먹을
놈의 새끼!"
"크으~! 도마이니 검마인지 하는 새끼가 내 앞에 있었다면 당장 목
을 비틀어 버렸을 텐데, 정말 아쉽군."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사내들의 입에서는 너무나 자연스
럽게 흘러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기세가 워낙 흉흉한 까닭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음식을 먹으며 그들
의 눈치만 살폈다.
용추는 잠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적무강에 대한 악의적인 이야기를 생산해 내고 있었다. 적
무강과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렇게 험악한 이야기를 하는 것
은 쉽지 않을 것이다.
"흐흐~!"
자신도 모르게 용추의 입에서 살벌한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러나 사내들은 그런 용추의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신들끼리의
이야기에 열중했다.
"내가 지부 소속이 아니라면 벌써 그 새끼를 아작 냈을 거여."
"흐흐흐! 하여간 도마라는 인간 때문에 각 지부에 비상이 걸려서
이 고생을 한 게 아닌가?"
"누가 아니래? 아니 본성에서는 어째서 그따위 놈을 아직도 가만히
두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니까. 하여간 높은 자리에
있는 먹물들이 문제야."
그들은 천왕성의 서녕지부 소속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연이은
경계와 야근으로 한시도 쉬지 못하고 있다가 어제 저녁에 겨우 경계
령이 해제되면서 오늘에야 지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적무강과 천왕성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술안주 삼
아 신나게 떠들어댔다. 바로 옆에서 사신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도 모르고 말이다.
벌컥!
용추는 다시 화주를 들이켰다. 입가를 따라 화주가 흘러내렸다. 마
침내 술병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
내들을 향해 다가갔다.
"뭐야?"
"어이, 너?"
자신들의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용추의 출현에 사내들이 게슴
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마치 고
슴도치 같은 수염 사이로 보이는 흰 이빨뿐이었다. 그들은 용추의 이
빨이 꼭 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순간!
콰지끈!
용추가 들고 있던 화주 병으로 한 사내의 머리를 가차 없이 내리
쳤다. 그러자 병이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나갔다.
"끄으으~!"
영문도 모르고 병에 얻어맞은 사내가 눈을 까뒤집으며 혼절했다.
그러자 남은 사내 둘이 급히 무기를 꺼내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는 뭐냐? 곰 같은 놈."
"감히 청해성에서 천왕성의 무인을 상하게 하다니. 네놈이 더 이
상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들은 술 취한 눈으로 용추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용추은 심드렁
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지부로 나를 안내해 주어야겠다."
"뭐?"
남자들이 의문을 표했다. 그러나 용추는 대답 대신 히죽 웃음만
지었다. 그에 남자들의 전신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
랐다.
콰ㅡ앙!
천왕성의 서녕지부의 정문이 마치 벽력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그와 함께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이 떡이 되어 바닥을 나뒹
굴었다.
댕댕댕!
"뭐냐?"
"무슨 일이냐?"
비상종이 울리면서 안에서 수많은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정문에서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모
습을 드러낸 남자는 바로 용추였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 객잔에서
만났던 천왕성의 무인들이 잡혀 있었다.
퉁퉁 붓고 깨진 그들의 얼굴에는 용추에 대한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고맙다, 이곳까지 안내해 주어서 말이야.'
우당탕!
용추가 싱긋 웃으며 그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요란한 소리로
보아 뼈마디 몇 개는 부러졌을 것이다.
용추가 자신을 노려보는 서녕지부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끝내자구.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거든. 우선 우리 주군의 일
부터 말이야."
뚜두둑!
그의 전신에서 마치 콩 볶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
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끼이익!
대전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문을 통해 적무강이 나타났다.
그는 들어갈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때문에
그의 얼굴을 통해 그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
다.
이번엔 안내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적무강은 망설이지 않
고 밖을 향해 나갔다. 복도에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제야
어둠속에서 서영우가 나타났다. 그는 묘한 눈으로 적무강이 사라진
방향을 보더니 곧 대전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창가에 서 있는 사도경의 모습이 보였다. 서영우
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로 다가섰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하오리까?"
"계획대로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서영우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사도경의 눈빛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눈에 밖으로 걸어가
는 적무강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중어거렸다.
"흘흘! 아깝구나! 만약 이곳에서 태어났으면 내 뒤를 이어 훌륭한
후계자가 되었을 텐데......"
그의 음성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빛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목소
리와 달리 그의 눈동자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광검문주에게 알리도록..... 두 마리의 호랑이
가 맞붙으면 어찌 될 것인지 진정 궁금하구나."
그의 마지막 말소리는 너무나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서
영우는 분명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이행하겠습니다."
패천문의 문주나 낭혈문, 그리고 밀종문의 문주를 죽인 것 따위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들 따위야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 죽
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광검문주는 달랐다. 아니 광검문 자체는
그에게도 심각한 위협이었다.
단지 백 몀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문파가 무슨 문제일까 하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다른 문파와 확연히 구별됐다. 백 명의 절
정고수, 그 하나하나가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뇌정문의 절대고수들
에 그리 뒤지지 않는 데다 다른 문파와 달리 하나로 완벽하게 단결
해 자신의 영향력이 파고들 여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문파들이 모두 자신의 명에 따라 십자성의 정벌에 나설 때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주인인 한검우가 명령을 내리지 않
았기 때문이다. 한검우는 단지 자신의 동생을 보내 생색만 냈을 뿐이
었다. 더구나 그들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러 서열 일위인 뇌정문의
무인들에게조차 절대 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여러모로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자들이었다.
'흘흘~! 가만두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이로다. 이번 기회에 아
예 나에게 완벽히 복종시켜야 한다. 그것이 안 된다면......'
순간 그의 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넘실거리다 사라졌다.
그가 원하는 것은 완벽한 복종와 지배였다. 그 이외의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