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자아 인식에서 성찰한 황혼의 시법
--박문순 시집 『황혼에 핀 꽃』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전 부이사장)
1. ‘나를 찾아서’ 떠난 황혼의 화원
현대시의 시정신이나 지향적인 주제의 탐색은 대체로 ‘나’를 중심축에 설정하고 나 자신에 대한 인식과 성찰로 작품을 창작하는 경우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이는 시적 발상이나 이미지의 창출이 바로 자신의 정서와 사유(思惟)의 범주(範疇)가 자신의 내면에서 생성하는 관념의 세계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체험하고 습득한 인생관이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시인들의 작품세계를 관찰해보면 소재와 주제의 연결이 모두 시법에서 요구하는 상황설정이나 전개 그리고 결론적인 주제의 도출로 정점을 히루고 있음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여기 박문순 시인이 상재하는 시집 『황혼에 핀 꽃』에서도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을 엿보게 되는데 그는 작품 전체에 관류(灌流)하는 시법의 원류가 ‘나’를 통해서 발원하고 거기에서 획득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시적 이미지로 재생하고 있음을 공감하게 된다.
그는 작품 「젊은 날의 불꽃」 중에서 ‘반짝이는 물결 / 반사 효과에 매료되어 / 주체 할 수 없는 정열로 / 내 젊음을 아낌없이 태우고 //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으로 / 남은 생애에 /물음표를 찍는다’는 어조로 자아(自我)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인생행로에 대한 개념적인 진솔한 삶의 의미를 진술하고 있어서 그가 창조하고자 하는 시적인 주제가 바로 ‘나’를 찾아나서는 생애의 물음표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날이 새도록 지새운 마지막 밤
어둠의 동면을 깨고
떠나는 여행
네게로 가는 길이 하도 많아
길 한복판에 서서 사방을 둘러 본다
물 흐르듯이 흘러보낸 날들
돌려놓을 수 없는 세월이
후회 반 체념 반으로 나비처럼 날아간다
미지의 세계로
드넓은 하늘만큼 미래를 설계하며
너를 만날 부푼 꿈에 고개를 넘고
골짜기 굽은 길도 바람처럼 날아간다
불타는 정렬의 한때
너를 만난 것이
가장 값진 선물 이었다
--「나를 찾아서」 전문
박문순 시인은 이처럼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나를 찾아서’ 나서는 일은 참으로 가치있는 행보(行步)로 단언하고 있다. 이를 두고 그는 ‘어둠의 동면을 깨고 / 떠나는 여행’이라는 어조로 ‘물 흐르듯이 흘러보낸 날들 / 돌려놓을 수 없는 세월이 / 후회 반 체념 반으로 나비처럼 날아’가고 있어서 그의 사유에는 ‘후회’, ‘체념’ 등의 심적인 성찰의 아쉬움을 전제로 시법을 정리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나’에 대칭하는 이인칭 대명사인 ‘너’를 나로 변신하는 환치(換置)의 화법으로 작품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네게로 가는 길’이나 ‘너를 만날 부푼 꿈’ 그리고 ‘너를 만나 것이’라는 등등의 시적 화자(話者)를 ‘너’로 바꾼 것은 내가 객관적으로 나를 응시(凝視)하면서 관찰하거나 조망(眺望)하는 시법이 나에 대한 심인(尋人)의 공간적인 효율성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국 나를 찾아 확인까지는 다양한 난관이 산재(散在)했지만 그 ‘미지의 세계’나 ‘부푼 꿈들이’ 이제사 ‘가장 값진 선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서 그의 자아를 의식하는 내면세계는 성찰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진실임를 명민(明敏)하게 현시(顯示)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을 고치면
모두가 행복해 지듯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하루의 삶속에서 자기를 성찰하고
사랑 밭을 가꾸워 보라
얼굴 주름살 하나에
자식나이 한 살 늘어가고
은빛 날개 아래 둘러앉아
이야기 꽃 피우는 은혜 가족
희생과 헌신의 반복된 수련
순결한 은을 만들어 내듯이
마음과 생각은 다르지만
빛의 사랑으로 불타는 열정
내 안에 남아 있어서
소박한 삶의 흔적
활활 타오른다
--「황혼에 핀 꽃」 전문
박문순 시인은 이 시집의 표제시(標題詩)인 「황혼에 핀 꽃」에서 살필 수 있듯이 그의 순수한 정감적인 인생론적인 묘사로써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고 있다. 그는 우선 상황설정에서 ‘하루의 삶속에서 자기를 성찰하고 / 사랑 밭을 가꾸워 보라’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제하고 ‘희생과 헌신의 반복된 수련 / 순결한 은을 만들어’ 낸다는 명징(明澄)한 진실을 발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내면에는 인생의 가치관적인 심연(深淵)의 철학이 지적으로 분사하고 있어서 그가 추구하거나 구현하려는 자아의 지향점은 바로 이 ‘황혼’이라는 시간성에서 ‘내 안에 남아 있어서 / 소박한 삶의 흔적’으로 현실적인 실제의 삶과 고고(孤高)한 정신적인 세계가 상호 화해하면서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나를 짓눌렀던 그때 그 순간들 / 마지막 종을 울릴 때 / 베일에 싸인 순결한 영혼의 뜰에서 / 마음의 눈을 뜬다 / 내가 있던 모든 곳에 눈길이 멈춰졌다(「영혼의 뜰에서」 중에서)’거나 ‘황혼에 / 찬바람 맞으며 홀로 가는 나그네 되었지만 / 등 굽고 야윈 몸에 지팡이가 동행하니 / 든든하고 정말 행복 하구나(「나 이렇게 살아요」 중에서)’ 그리고 ‘떠도는 구름 저편 하늘가에 / 내 마음 눈꽃같이 달아놓아 / 오늘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 아스라이 피어 젖는다(「내 가슴에 핀 꽃」 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나’를 철저하게 인식하면서 황혼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2. 삶의 현장에서 감응한 인생행로
박문순 시인이 감응하는 또 하나의 몰입은 삶의 현장에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접하는 실재(實在)의 생활(real life)에서 다양한 형상(形狀)들을 수긍하거나 감내(堪耐)하면서 창출한 시법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바로 그가 ‘높고 낮은 자리 따라 변하는 사회 / 어둔 밤 가고 밝은 아침 / 하루하루 반복되는 정답 없는 삶에 / 오늘도 인생을 건다(「정답 없는 이생」 중에서)’는 범상치 않은 결심에서 그는 다변적인 현실에서 새로운 인생행로의 발견을 위해서 비장한 메시지를 띄우고 있는 것이다.
사유의 은빛 숲 고요 속에
내 몸이 지녀온 피돌기 느껴보자
거침없이 얽어 놓은 실오라기
세월 속 아픈 것들 뭉쳐
어디에서 멍들고 막히는가
꽃들이 다 떠나간 꽃길을 덜컹이는
숨 가쁜 내리막길에
노을이 만발하여 타고 있다
내 마음은 울고 웃는 지난날의 흥얼거림
나이가 들어갈수록 바래지는 영혼의 갈망
목까지 차오른 외로움을 한 입 물고
삶을 다시 그린다
얄팍하게 구겨진 바람 앞에 갈대처럼
수시로 바뀌는 은빛 숲에서
갖가지 환상을 끌고 가서
흰 구름 꽃바람 취한 꿈을 키운다
--「은빛 숲에 타는 노을」 전문
박문순 시인은 지금까지 ‘나’라는 하나의 개체에서 탐색한 존재론적인 의미가 시적으로 관류했다면 이제 그는 실재의 현장에서 분출하는 음율(音律)에 심취해 있다. 이는 그가 탐구하려는 시정신인 인본주의(humanism)의 성취를 위한 하나의 기원이며 여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유의 은빛 숲’과 ‘노을’의 대칭은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하고 있다. 고요한 숲 속에서는 ‘거침없이 얽어 놓은 실오라기 / 세월 속 아픈 것들 뭉쳐’서 ‘내 몸이 지녀온 피돌기’가 느껴지고 ‘꽃들이 다 떠나간 꽃길을 덜컹이는 / 숨 가쁜 내리막길에 / 노을이 만발하여 타고 있다’는 어조는 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바래지는 영혼의 갈망’을 절감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다시 그에게서 ‘노을‘의 이미지는 ’황혼‘이라는 시간성과 동일한 행로에서 적시하는 메시지는 그가 다시 그려보는 삶의 현장에서의 어쩔 수 없이 긍정하고 수용하는 인생의 숙명으로써의 결론으로 ’갖가지 환상을 끌고 가서 / 흰 구름 꽃바람 취한 꿈을 키운다‘는 화해의 시법을 현현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공감을 화대되고 있는 것이다.
소요산 가는 마지막 전철
떠밀려 살아가는 지친 몸과 마음
그저 입에 마스크를 쓰고 졸고 있다
삶의 경쟁의 사연들로 적막을 끌고 가던
굳어있는 표정들이 고개 든다
문이 열리자 화들짝 어깨가 떨리고
시간을 계산 한다
온종일 북적이던 지하철 역사에
고요가 흐른다
차별의 삶이 현장에서
길게 줄을 서서 올라가던 에스컬레이터
숨 가쁜 샐러리맨의 하루
오늘밤 잠자리에서나 풀리려나
--「마지막 전철」 전문
여기서도 박문순 시인은 ‘삶의 현장에서’ 감지하는 ‘삶의 경쟁’에 많은 사유를 할애하고 있다. 어쩌면 복잡다단한 현실적인 갈등이나 고뇌가 ‘마지막 전철’을 함께 하면서 바라보는 형상들이 그의 내면에서 분사하는 ‘삶의 경쟁의 사연들로 적막을 끌고 가던 / 굳어있는 표정들’에서 그가 탐색하는 진실과 괴리(乖離)되어 있음을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 전철’을 타고 가면서 생존의 현장에서 언제나 ‘떠밀려 살아가는 지친 몸과 마음’의 저변에는 그에게 내재되어 있는 원대한 이상과는 상당한 불협화음이 상존(常存)함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시법에서 ‘차별의 삶이 현장에서 / 길게 줄을 서서 올라가던 에스컬레이터 / 숨 가쁜 샐러리맨의 하루 / 오늘밤 잠자리에서나 풀리려나’라는 기대와 염원의 의지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현상은 작품 「주먹밥 장수」 중에서 ‘각박한 인심 속에서 / 힘들게 살아가는 / 한 여인의 삶을 생각하며 /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거나 「내 안에 담긴 꽃향기」 중에서도 ‘내 안에 알알이 맺혀오는 / 구슬 같은 감사의 열매 / 새록새록 영글어 갈 때 / 힘들었던 순간들 꽃향기로 쌓이네’라는 어조로 현실적 실상(實狀)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공감의 영역을 흡인시키고 있다.
3. 향수 또는 가족 이미지의 재생
박문순 시인의 전신을 관류하는 또 하나의 불망(不忘)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고향과 가족에 대한 정감(情感)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향수에 젖어 있으며 거기에서 생존한 가족들의 애환을 동경(憧憬)하고 있다.
일찍이 조지훈 시인도 ‘고향의 산천은 어떠한 이름난 명승지보다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고향에 대한 이미지는 내 자신이 태어나 생존을 영위한 곳이기도 하지만 가족들이 삶을 지탱해온 곳이기에 정서의 원천(源泉)에는 변함없이 존재의 혈류(血流)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초가지붕 비친 달빛에
활짝 핀 박꽃
하얀 나비 날아와 몸짓 날갯짓
꽃은 더욱 예쁘게 웃고있다
멀지 않아 박 넝쿨 마디마다
조롱박이 열려
지붕위에 둥글둥글 커가고
울타리에 호박과 키 재기를 하면
길가에 백일홍
태양아래 붉게 타오르고
하얀 박꽃과 함께 맞이하는 가을
올해도 풍년들어 인심 넉넉한
고향집이 그립다
--「박꽃 피어있는 고향집」 전문
박문순 시인의 그리운 고향은 낭만과 서정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생기 넘치는 곳이다. 초가지붕과 달빛, ‘활짝 핀 박꽃’과 흰 나비 그리고 조롱박과 호박 등 ‘올해도 풍년들어 인심 넉넉한 / 고향집’은 한 폭의 잔잔한 풍경화를 연상하게 하는 고요하고 아늑한 정경이 그의 내면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재생하는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그는 이곳에서부터 생존감을 원류로 하는 시적 진원지로 정착시키고 있다.
요즘처럼 과학문명이 발달하기 전 우리들의 농촌생활 풍광은 참으로 안온하면서도 가족 간뿐만 아니라 온 동네의 정감이 풍겨나오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작품 「고향의 저녁 풍경」 중에서 ‘온 가족 둘러앉아 / 사랑의 식탁에 대화도 무르익어 // 남은 밥 모아서 내어놓은 개 밥그릇 / 검둥개 달려와 비워내니 // 올 농사 풍년을 기약하며 / 모깃불 쑥 향기 피어오르고 // 깊어가는 여름밤 도란도란 / 삶의 이야기꽃을 피운다’는 회상의 여운(餘韻)이 바로 그에게서는 기다림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찬바람 앞세우고 산길을 오르면
소나무 아래 떨어진 솔방울들이
바람에 여기저기 뒹군다
괜시리 하늘을 올려다보면
어머니의 연한 미소가 하늘 가득 채운다
어릴 적 울 어머니
철없이 철든 손길로 솔방울 모아오면
엎드려 마른 솔잎과 솔방울로
아궁이에 불 지피시던
쪽머리 사이로 빨간 댕기 참 고우셨다
불편한 생활 속에서도
묵묵히 견디시며 오로지 자식위해
밝은 꿈 키워주시던 기억
늘 나를 놓지 않는다
--「그렇듯 흘러간 시간」 전문
박문순 시인의 뇌리(腦裏)에서 이렇게 흘러간 시간에는 가족 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사모(思慕)의 순정을 지울 수가 없다. 그는 ‘어릴 적 울 어머니’의 모정(母情)은 ‘불편한 생활 속에서도 / 묵묵히 견디시며 오로지 자식위해 / 밝은 꿈 키워주시던 기억 / 늘 나를 놓지 않는다’는 사모곡(思母曲)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지나간 시간을 통해서 재생한 ‘어머니의 연한 미소가’ 지금도 생생한 시적인 원류로 부각(浮刻)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온 가족에 대한 애정을 빼놓지 않는다. 손자들, 두 아들을 위시해서 ‘막내딸 시집보내며 섭섭했던 마음 // 큰 아들 대학졸업 취업하여 도시로 나가고 / 농사일 힘겨워 투정부리던 둘째는 / 농사일로 가업을 이어가고 / 늘그막 에 받는 용돈 가슴이 뭉클하다(「어떤 노부부의 행복」 중에서)’라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가족간의 우애와 동행하는 현실에 행복을 만끽(滿喫)하는 시법을 이해하게 한다.
한편 그는 ‘휴대폰 울리는 소리에 놀라 / 잠 설친 노부부의 새벽 헛기침 / 단촐한 차례상 차려놓고 / 행여나 하며 기다리는 동구 밖 모정 // 외지의 자식들 귀향 대신 / 이웃과 송편 녹두지짐 나누며 / 허전한 마음 달랜다(「코로나 업고 오는 추석」 중에서)’는 어조에서는 요즘 한창 위난을 맞고 있는 코로나의 세상에서 맞이하는 추석에서 ‘외지의 자식들 귀향 대신’ 안타까운 노부부의 가족애를 현현하고 있다.
4. 자연의 지혜와 서정성의 융합적 화해
박문순 시인이 여망하는 시적인 지향은 자연의 지혜에 감응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뜨거운 태양아래 /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 / 철따라 바뀌는 하늘농원에서 / 자연의 지혜를 배운다(「하늘 농원의 사계절」 중에서)’거나 ‘흙에 맡긴 늦가을에 / 땀에 젖은 수건 목에 두르고 / 밭고랑 지나 돌아가는 / 가슴에 자연을 품어 노을이 곱더라(「노을 속으로 지는 해」 중에서)’라는 순정적인 심취와 같이 자연과 동화하면서 감응하는 시법은 감명(感銘)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사계절과의 융합이다. 하늘농원에서 착목(着木)된 ‘고추 가지 토마토 호박 상추 쑥갓’ 등의 사물에서 응시한 변화에서 그는 다양한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주로 봄과 가을에 대해서 출발과 결실로 연결하는 시법을 선호하고 있어서 그가 춘추(春秋)의 시간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개구리울음 소리에
꽃봉오리 터트려서
대지위에 꽃잎은 날아올라
화려하게 방탕하게 품에 안겨
쿵! 심장 멎는 소리
뽀얀 안개 속을 봄을 이고 온
온갖 소리들로 사치스럽다
산골짜기엔
연두빛 새싹이 나풀거리며
솔바람 앞세우고
봄이 오는 길목 마다
새들도 몰아온다
저렇게 서로를 풀어헤치고
계절이 일어서는 소리
그리움도 다시 돌아 마음을 휘감고
나비처럼 날아드는 저 꽃잎 눈뜨는
농익은 환한 봄날에
--「그 소리가 그립다」 전문
박문순 시인은 주변의 다양한 자연 사물에서 취택하는 형상들이 청각적인 ‘개구리 울음’에서부터 꽃봉오리, 꽃잎, 연두빛 새싹과 나비 그리고 솔바람에 이르기까지 ‘농익은 환한 봄날’의 정경에서 청각적, 시각적인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소리가 그립다’는 추억에서 재생하는 ‘그 소리’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저렇게 서로를 풀어헤치고 / 계절이 일어서는 소리 / 그리움도 다시 돌아 마음을 휘감고 / 나비처럼 날아드는 저 꽃잎 눈뜨는’ 자연의 형상화는 바로 그가 탐색하면서 자연 서정에서 발현하는 안정된 정서의 귀결(歸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그는 ‘소란스러운 꽃 난리에 / 개나리도 한 몫 하느라 멀리 둑방길에 / 참새 떼를 모으고 / 자목련 붉은 꽃잎 황망히 / 선명한 흔적 툭툭 털어내고 / 추억 뒤로 숨는다(「봄의 향기」 중에서)’거나 ‘연초록 이파리 사이로 / 음률 타는 봄바람이 찾아와 / 나뭇가지 끝에 그리움을 깨우고 / 탄성으로 부풀어 올라 / 어쩌면 좋아!(「환상의 연주곡」 중에서)’라는 어조와 같이 봄의 서정은 그에게 내재된 정서의 충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작품 「이런 봄날에」 「목련화」 「이슬비」 「조팝꽃 피던 날」 등등에서 봄에 관한 계절적인 향훈을 만끽할 수 있는 의식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벼이삭 고개 숙여 흔드는 논두렁길
코스모스도 서로 엉켜
푸른 하늘 여백에 춤을 춘다
산국을 비웃 듯
고추잠자리 떼 오르락 내리락
툭 나온 눈 뱅글뱅글
발 앞에 툭 떨어진 알밤
쓱쓱 흙을 털어내어
주머니에 굴리며
가을 재촉하는
떨어져 날아가는 단풍잎 따라
마음도 조급하다
--「저물어 가는 가을」 전문
이제는 가을이다. 그는 이 가을에서도 ‘황금들판 가을걷이 농부마음 / 지붕위에 늙은 호박 보름달 같이 / 흐뭇하게 탁배기 한 사발로 달래본다(「가을에 피는 꽃」 중에서)’ 또는 ‘햇살 가득 담은 단풍잎 / 루비같이 불태우면 / 단풍나무 사이 비집고 찾아온 바람이 / 불구경에 신바람 났네(「가을이 가는 소리」 중에서)’라는 농촌의 정경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박문순 시인은 가을의 정취(情趣)를 듬뿍 흡인하고 있다.
그는 우선 ‘벼이삭 고개 숙여 흔드는 논두렁길 / 코스모스도 서로 엉켜 / 푸른 하늘 여백에 춤을 춘다’는 상황을 설정하고 코스모스, 고추잠자리, 알밤 그리고 단풍잎 등 가을을 상징하는 사물들을 총 망라(網羅)하여 가을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가을 재촉하는 / 떨어져 날아가는 단풍잎 따라 / 마음도 조급하다’는 결론으로 ‘저물어가는 가을을’ 아쉬움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가을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은 ‘어느새 햇살 기울고 / 산길 돌아 내려오는 길에 / 아직 남아있는 참나무 잎 / 바람에 바스락 바스락 / 자기들만의 대화 귓등에 매달고 / 넌지시 다시 오마 약속하고 돌아선다(「가을 공원을 걸으며」 중에서)’거나 ‘상수리나무에 매달린 갈잎 / 가는 가을 보내기 아쉬워 / 가지 붙잡고 몸부림친다 // 바람에 귀 기울이면 / 가을문 살짝 열고서 / 내 안에 감춰놓은 추억들 /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갈잎과의 대화」 중에서)’는 순수한 자연의 지혜에 서정성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밖에도 작품 「꽃밭에서」 「가을비」 「시월 어느 날」 등에서 가을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심도(深度) 있게 동화와 투사(投射)의 시법으로 승화시키는 공감을 유로(流露)하고 있는 것이다.
5. 황혼에서 탐색하는 비우는 인생론
박문순 시인이 이 시집 『황혼에 핀 꽃』에서 탐색하거나 구현하려는 정서의 정점은 먼저 자아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나를 찾아서’라는 대명제를 설정하고 나와 동행하는 사유의 범주에서 고향과 가족 그리고 주변의 일상적인 생활, 그 삶에서 도출된 경험을 재생하면서 감응한 시간 즉 인생의 황혼에서 절실하게 성찰하는 인생론이 그의 작품 전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씨실과 날실이 서로 만나
만들어 가는 인생
더덕더덕 군살처럼 덧붙여진
마음의 상처
삶의 대한 욕심 다 비우고
순간마다 빛나는 보석같이
둘만의 밑그림을
아름답게 그려 넣는다
그렇게도 절친했던 사람
저려오는 노년을 살면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자리매김하며
다시 만나 춤추고
믿고 받아드릴 수 있는
추억으로
영원하기를 바란다
이 작품 「더불어 사는 세상」 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저려오는 노년을 살면서’ 수용하고 화해하는 그의 심저(心底)에는 ‘삶의 대한 욕심 다 비우고 / 순간마다 빛나는 보석같이 / 둘만의 밑그림을 / 아름답게 그려 넣는다’는 비움의 철학으로 인생론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황혼(혹은 노년)에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의 진정한 휴머니즘의 진실을 구가(謳歌)하는 박문순 시인의 시정신과 긍정적이며 화해하는 인생의 가치관 정립은 시의 위의(威儀)나 본령(本領)을 추구하는 시의 고매(高邁)한 효용에 이바지하는 노력이 아닌가 생각되어서 무한한 찬사를 보낸다.
일찍이 영국의 시인 셸리가 말했듯이 시는 최상의 마음에서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라고 했다. 아마도 시는 영원한 진실로 표현된 우리 인생의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씨실과 날실이 서로 만나 / 만들어 가는 인생 / 더덕더덕 군살처럼 덧붙여진 / 마음의 상처’라는 현실적인 고뇌와 갈등들이 ‘변함없는 사랑으로 자리매김하며 / 다시 만나 춤추고 / 믿고 받아드릴 수 있는 / 추억으로 / 영원하기를 바’라는 그의 순정 미학이 황혼기에서 창조된 진실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