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산청군의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의 봉우리이다(고도 : 1,808m). 지리산에서 천왕봉, 중봉에 이어 세 번째로 높으며,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첫 봉우리이다.
제석봉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제석봉에 있던 신당이던 제석당(帝釋堂)과 관련이 깊다. 제석봉은 제석을 산봉우리에 동일시해 숭배하여 일컬은 지명이다. 제석은 삼신제석(三神帝釋), 천주제석(天主帝釋), 제석천(帝釋天)이라고도 하는 하늘신이며, 도리천(忉利天)에 살면서 불법을 보호하는 불교의 호법선신이다. 제석은 토속신앙인 천신신앙과 결합하였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환인을 제석과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산청의 제석봉은 천왕봉의 곁에 있을 뿐만 아니라 천왕봉에 왕래하는 주요 길목이기에 조선시대의 많은 유학자들이 유람하였던 곳이다. 1586년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두류산기행록』을 쓴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은 "제석봉을 바라보니 그 형세가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 장엄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라고 형용하였다. 『지리산기(智異山記)』를 쓴 허목(許穆, 1595~1682)은 "군자사의 남쪽 절벽을 따라 백무동을 거쳐 제석봉에 올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석봉 아래에는 제석당(帝釋堂)이 있었다. 송광연(宋光淵, 1638~1695)은 『두류록(頭流錄)』에서 "제석당에 이르렀는데, 모양이 영신당과 흡사했지만 전망이 훨씬 나았다."라고 하였다.
제석(帝釋)은 하늘신이며 불교신으로 때로는 토속신앙과 맺어지고 단군 할아버지이자 환웅의 아버지인 하느님(환인)과 똑같이 친다.
이곳은 1950~60년대 한낮에도 숲이 울창하여 어두웠으나 도벌꾼들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다.
인간들의 탐욕이 부끄러운 흔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자유당 정권말기 권력에 빌붙은 일당들이 제석단 일대에 제재소까지 차려놓고 구상나무 도벌을 일삼았다. 들통 나자 불을 질러 결국 나무들 공동묘지가 됐다.
60년대까지 이어진 소나무 도벌은 지리산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만행을 저지른 정치꾼·공무원·목재상들을 “인간송충이”라 불렀고 함양 마천 일대에서 특히 심했다. 1967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기 위해 처음으로 국립공원이 되었고 산림청도 이때 생겼다.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천왕봉(天王峰, 1,915m)과 중봉(中峰, 1,874m)에 이어 지리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높이 1,806m이다. 봉우리 근처에 산신에게 제를 올리던 제석단이 있고, 그 옆에 늘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제석봉 일대 약 33만㎡의 완만한 비탈은 고사목으로 뒤덮여 있으며, 나무 없이 초원만 펼쳐져 있다. 한국전쟁 후까지만 해도 아름드리 전나무·잣나무·구상나무로 숲이 울창하였으나 자유당 말기에 권력자의 친척이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리고 거목들을 무단으로 베어냈고, 이 도벌사건이 문제가 되자 그 증거를 없애려고 이곳에 불을 질러 모든 나무가 죽어 현재의 고사목 군락이 생겼다고 한다.
정상에서 약 0.7m 떨어진 곳에 천왕봉을 지키며 하늘과 통한다는 천연암굴인 통천문(通天門)이 있고, 통천문에서 0.4㎞를 더 가면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이르게 된다.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경상남도 산청군의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의 봉우리이다(고도 : 1,808m). 지리산에서 천왕봉, 중봉에 이어 세 번째로 높으며,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첫 봉우리이다. 제석봉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제석봉에 있던 신당이던 제석당(帝釋堂)과 관련이 깊다. 제석봉은 제석을 산봉우리에 동일시해 숭배하여 일컬은 지명이다. 제석은 삼신제석(三神帝釋), 천주제석(天主帝釋), 제석천(帝釋天)이라고도 하는 하늘신이며, 도리천(忉利天)에 살면서 불법을 보호하는 불교의 호법선신이다. 제석은 토속신앙인 천신신앙과 결합하였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환인을 제석과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산청의 제석봉은 천왕봉의 곁에 있을 뿐만 아니라 천왕봉에 왕래하는 주요 길목이기에 조선시대의 많은 유학자들이 유람하였던 곳이다. 1586년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두류산기행록』을 쓴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은 "제석봉을 바라보니 그 형세가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 장엄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라고 형용하였다. 『지리산기(智異山記)』를 쓴 허목(許穆, 1595~1682)은 "군자사의 남쪽 절벽을 따라 백무동을 거쳐 제석봉에 올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석봉 아래에는 제석당(帝釋堂)이 있었다. 송광연(宋光淵, 1638~1695)은 『두류록(頭流錄)』에서 "제석당에 이르렀는데, 모양이 영신당과 흡사했지만 전망이 훨씬 나았다."라고 하였다.
제석(帝釋)은 하늘신이며 불교신으로 때로는 토속신앙과 맺어지고 단군 할아버지이자 환웅의 아버지인 하느님(환인)과 똑같이 친다.
이곳은 1950~60년대 한낮에도 숲이 울창하여 어두웠으나 도벌꾼들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다.
인간들의 탐욕이 부끄러운 흔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자유당 정권말기 권력에 빌붙은 일당들이 제석단 일대에 제재소까지 차려놓고 구상나무 도벌을 일삼았다.
들통 나자 불을 질러 결국 나무들 공동묘지가 됐다.
60년대까지 이어진 소나무 도벌은 지리산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만행을 저지른 정치꾼·공무원·목재상들을 “인간송충이”라 불렀고 함양 마천 일대에서 특히 심했다. 1967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기 위해 처음으로 국립공원이 되었고 산림청도 이때 생겼다.
첫댓글
지리산 지명 유래
https://m.blog.daum.net/bs2200/12351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