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까는 남자
김춘희
1. 남편이 부엌 개수대 앞에서 양파 껍질을 까고 있다. 말없이 순한 양처럼 서서 내 일이었던 것을 처리 중에 있다. 양파 장아찌를 담아서 저장해두고 오래 먹을 생각에 아침나절에 한 망을 풀어 물에 불려 놓았었다. 쳐다보면서 이걸 언제 다 정리하나 하고 있는데 남편이 내 한숨을 덥석 물은 것이다. 노련한 강태공일수록 시울질을 잘한다고 하더니 늙어가면서 꾀만 는다. 떡밥 없이 물은 것을 언제 놓아버릴지 모를 일이다. 이럴 때는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덕분에 다른 일을 좀 봐야겠다는 말을 남편 등 뒤로 흘리고서는 욕실로 가서 입을 틀어막고 키득거린다. 묘한 희열이 인다.
2. 그러면서도 남자가 부엌에 서있으니 마음 모퉁이를 쉽게 돌지 못하고 비비적거리다가 남편 옆으로 다시 가서는 힘들면 내가 해도 된다는 헛소리를 한다. 그러든가 말든가 남편은 눈을 비벼가며 양파에 집중하고 있다. 남편이 양파 껍질을 까다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3. 발을 동동거리며 바삐 살 때도 설거지 한 번 해 준 적 없었다. 부엌은 금남구역이었다. 가부장적 가치관에 매몰되어 살던 남편이 부엌에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것은 체면 구기는 모양새였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나 또한 그러한 고루함에 순응하고 살았다. 사고思考의 궁합으로 자연스럽게 부엌은 금남구역이 된 것이었다.
4.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구역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굳은 습성으로 처음에는 불편한 모습으로 비췄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가 있는 부엌 풍경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남편은 금남구역을 허물고 드나들면서 목소리마저 작아졌다.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한 언성이 영원할 것만 같았는데 점점 작아지는 기적소리가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겠는가.
5. 세월 가면 다 괜찮아지고 알게 될 것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마음을 고단하게 부렸는지 이제 와서 후회가 된다. 두 번 사는 인생이라면 앞선 경험으로 성인군자처럼 살 것만 같은데 한 번 살다 보니 불초 인생인가 싶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어느 때에 뿔뚝거리고 솟아오를지 모를 야성이 살아있어 긴장감을 완전하게 놓을 수 없다. 야성을 관리하며 감시하다가 징조가 일면 멈춰야 할 때가 있다. 완급조절도 해야 되고 적절한 밀당도 필요하다.
6. 여전히 내 눈은 남편 등 뒤에 머물고 있다. 윤기 나는 양파가 대야에 수북이 쌓였다. 얼핏 보기에 곧 부화할 것 같은 공룡 알들로 보인다. 이내 눈알 한번 굴리니 세상에 없을 만한 맵시 나는 양파로 보인다. 남편의 젊은 날과 지금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이것은 남편의 죽은 듯 하지만 죽지 않은 야성을 온전히 의식한다는 것이다.
7. 남편이 다 했다며 만세라도 부를 태세를 취한다. 이때는 행동심리학적으로 다가가야한다. 보상은 행동의 빈도를 증가시킨다. 물에 불은 손으로 뒤처리를 하고 있는 남편에게 찰싹 붙어서는 병아리 모이 쪼듯이 연신 볼에 입을 맞추며 남자가 깐 양파라서 그런지 더 빛이 난다며 고생했다고 호들갑을 떤다. 여기에는 진심 더하기 술책이 있다. 행동의 빈도를 증가시키기 위한 나만의 계산법이다.
남편은 우쭐해하면서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 한다” 예상했던 호응을 한다.
눈 주위가 빨간 남편을 쳐다보면서 “당신 울었어요? 혹시 회한의 눈물 같은 건 아니지요?”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양파의 매운 향 때문에 눈물 콧물 흘렸을 것을 알면서도 웃음으로 일괄하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여러 말이 떠올랐다. 언중유골, 일타쌍피, 일거양득...
8. 사실 남편은 파 냄새를 싫어해서 한겨울에도 베란다에서 파를 다듬어야 했었다. 그랬던 사람이 파의 사촌 형쯤 되는 양파 더미 앞에서 장시간 동안 묵언수행자가 되다니 세월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참 대단하다 할 뿐이다.
9. 남편은 이 많은 양파 껍질을 까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웃으면서 던졌던 말처럼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일었기를 기대하면서 그대로 물었다.
“아니, 아무 생각 안 했는데, 빨리 해치우자는 생각 밖에는⦁⦁⦁.”
10. 아무래도 나 혼자서 묵언수행까지 너무 깊이 갔나 보다. 이렇게 단순하니 시울질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만들어 낚싯대만 드리우면 된다. 걸려라! 물어라!
첫댓글 1문단에서 수정을 좀 했는데 넘 늦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