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7/17 제헌절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일 방위백서, 또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일본 정부는 17일 발표한 2009년 방위백서에서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방위백서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인 북방 영토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영토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2005년 이후 표현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에 대해 주일 한국대사관은 국방무관을 방위성에 보내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임을 분명히 하면서 방위백서의 독도관련 기술에 항의했다. 방위백서는 또 중국이 해양권익 획득과 해상수송로 확보 등을 위해 해군과 공군 전력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며, 군사력 증강에 우려를 표명했다. 백서는 중국 군사력에 대해 지난 3월 중-일 두나라 국방장관 회담에서 량광례 중국 국방부장이 “항공모함을 영원히 갖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고 발언한 점을 소개하며, 항공모함을 보유하기 위한 연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백서는 북한에 대해서는 지난 4월 발사한 장거리탄도미사일이 5월 2차 핵실험 강행과 더불어 중대한 위협이 된다면서 “비교적 단기간내에 핵무기의 소형화와 탄두화를 실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권력구조의 변화로 체제가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한겨레 2009-07-17 오후 09:32:18
2002 - 스위스 유엔가입 공식신청 200년 동안 중립국을 표방해온 스위스가 17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게 유엔 회원국 가입을 공식 요청했다. http://news.donga.com/Inter/EU/3/0218/20020718/7843854/1
[스위스의 유엔가입] 2002.09.10 - 스위스 영세중립국 지위 포기하고 유엔가입 2002.07.17 - 스위스 유엔가입 공식신청 2002.03.03 - 유엔가입 국민투표 실시, 승인 1986.00.00 - 유엔가입 국민투표 실시, 부결 1982.03.22 - 스위스 유엔가입 발의
- 슈메이커-레비 9 혜성의 목성 충돌, 1994.7.16~22
1994 - 세기의 우주쇼, 슈메이커-레비 혜성의 파편들과 목성 충돌 슈메이커-레비 혜성의 파편이 1994년 7월 17일 목성과 충돌하면서 1천년 만에 한번 보는 우주쇼를 연출했다. 한여름밤의 무더위를 식혀줄 장대한 우주쇼가 17일부터 시작돼 7월 22일 오후 5시 마지막 21번째 파편(W핵)의 충돌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대충돌은 전세계 천문학자들에게 목성의 신비를 풀어줄 수년간의 연구거리를 제공했다. 슈메이커-레비 혜성은 원래 거대한 하나의 얼음덩어리였으나 2년 전 목성 주변을 지나는 도중 목성의 강력한 중력에 이끌려 지름 1~3㎞ 크기의 21개 파편으로 조각이 났다. 이 가운데 10번째(J)와 13번째(M) 파편은 충돌 직전 얼음덩어리로 이루어진 핵이 증발하는 바람에 소멸됐으며, 17번째 Q파편은 다시 두개로 분리되기도 했다. 충돌이 6일 동안이나 계속된 것은 21개의 파편이 총길이 10만㎞ 정도로 일렬로 늘어서서 차례로 부딪쳤기 때문이다. 핵 파편들은 초속 60㎞의 무서운 속도로 목성과 충돌하면서 거대한 불기둥을 뿜고 최후를 마쳤다. /조선
1987 - 일본의 영화 배우, 가수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郞) 사망 이시하라 유지로 [石原裕次郞, 1934.12.28~1987.7.17] 이시하라 유지로( 출연 영화 1958년 * 태양의 계절 * 미친 과실 * 유모차 1968년 * 구로베의 태양 드라마 * 구로베의 태양 (1969년, 닛폰 TV) * 태양을 항해 외쳐라! 시리즈 (1972년 - 1986년) * 대도회 시리즈 (1976년 - 1979년) * 서부경찰 시리즈 (1979년 - 1984년) * 자토이치이야기 (1974년) /위키백과
이시하라 유지로는 1950년대 일본영화의 스타였다. 그는 <태양의 계절>(1956)이라는 영화로 데뷔했는데 이 영화는 당대의 문제작으로 꼽혔다.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미국적 삶을 지향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이다. <태양의 계절>은 영화를 보고 열광한 ‘태양족’이라는 세대, 다시 말해서 퇴폐적인 분위기의 세대를 일본에서 만들어냈다. 이시하라 유지로가 당시의 인기여세를 몰아 출연했던 영화가 <미친 과실>이다. 나쓰히사는 마음대로 여성을 농락하며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의 동생 신지는 신체도 왜소하고 아직 여성에 대해 잘 모른다. 에리라는 여성을 만난 신지는 마음이 두근거린다. 파티에서 에리를 처음 만난 신지는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느낀다. 한편, 나쓰히사는 동생의 마음을 알면서도 에리와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다. 친구에게 모든 사실을 들은 신지는 모터보트를 타고 나쓰히사와 에리의 뒤를 밟는다. <미친 과실> 역시 <태양의 계절>처럼 반항적인 흔적이 역력하다. 형제는 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 갈등을 겪는다. 젊은이들은 수상스키를 타며 하루를 즐긴다. <미친 과실>은 나카히라 고 감독의 데뷔작. 현장성을 중시하는 즉흥적인 연출이 당시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이후 영화는 프랑스에서 개봉하기도 했다. 영화는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에게서 “영화의 단순성과 명료함”에 대해 호평을 얻기도 했다. 인물의 대화장면을 연속적인 클로즈업으로 처리하는 등 나카히라 고 감독의 연출방식은 같은 시기 일본의 대중영화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역동성을 간직하고 있다. (발췌)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17898
- 2nd Anniv. of Revolution - 20th Anniv. of the FSLN
1979 - 니카라과에 좌익정권 탄생, 소모사 대통령 미국 망명 1979년 7월 17일 사임한 니카라과 소모사 대통령이 전용기 5대에 40명 이상의 가족을 태우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니카라과에서는 1934년 소모사 아버지가 정권을 잡은 이래 장남과 차남인 소모사 등으로 이어온 소모사家 독재체제가 계속돼 왔다. 반대파는 모두 경찰에 의해 사라졌다. 1977년 10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은 무력투쟁을 선언했다. 국내외로부터도 소모사 퇴진을 요구하는 압력이 높아졌고 소모사는 이에 저항했다. 1979년에 들어서자 쿠바의 지원을 받는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은 6월 16일에 인근 코스타리카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소모사가 망명한 후인 7월19일 혁명 축하행사가 거행돼 쿠바에 이은 2번째 사회주의정권이 중미에 탄생하게 됐다. /조선
대회 최대의 스타는 루마니아 여자체조 선수 코마네치였다. 그녀는 7번이나 10점 만점을 얻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미국은 수영 13개 종목중 12종목에서 우승해 수영강국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경기는 소련이 금메달 47개로 1위, 동독이 40개로 2위, 미국은 34개로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양정모 선수(레슬링)가 우리나라 올림픽 출전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해 전국민을 기쁘게 했다. /조선
1975 - 아폴로-소유즈 도킹 성공 미국의 아폴로 18호와 소련의 소유즈 19호가 1975년 7월 17일 대서양 상공에서 도킹에 성공했다. 아폴로에는 토마스 스태포드선장과 2명의 비행사, 소유즈에는 알렉세이 레오노프 선장과 2명의 비행사가 타고 있었다. 도킹 3시간후 아폴로의 패치가 열리자 스태포드 선장을 포함한 2명의 비행사가 기내를 유영하면서 소유즈에 옮겨탔다. 사상최초로 양국의 비행사가 우주에서 악수를 교환한 것은 암스테르담 상공에서였다. 이틀간 6인의 승무원들은 우주선 사이를 왕래하며 식사를 함께하고 과학적인 실험에 협력했다. 이 도킹은 양국이 우주사고가 일어날 경우 서로 구조활동이 필요하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72년 5월 미소정상회담에서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우주개발경쟁의 데탕트라고도 한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1975년 아폴로-소유스호 도킹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70030000000134/20080717/8603778/1
1974 -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디지 딘(Dean, Dizzy) 사망 딘 [Dean, Jay Hanna "Dizzy", 1910(1911).1.16~1974.7.17] 본명은 Jay Hanna Dean.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내셔널리그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팀에서 짧지만 화려한 경력을 쌓은 투수로 단체 스포츠 역사상 가장 화려한 명성을 누린 선수로 손꼽힌다. 오른손잡이 투수인 딘은 1932~36년에 가장 우수한 경기를 펼쳐 120승을 기록했으며 완봉승과 탈삼진 부문에서도 4번이나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34년 시즌 개막전이 열리기에 앞서 자신은 30승을, 같은 팀에 소속한 투수인 동생 폴 디 딘은 15승을 올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해 시즌 동안 디지는 정확히 30승을, 폴은 19승을 기록했다. 그때 디지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우승기를 땄습니까? 나와 폴입니다. 누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까요? 나와 폴입니다." 딘 형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팀을 각각 2번씩 물리쳐 카디널스팀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겨주었다. 디지는 150승 83패의 기록을 남기고 30세에 은퇴했다. 동생 폴은 1936년에 입은 팔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일찍 끝내야 했다. 1953년 디지는 야구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되었다. 또한 야구 해설자가 되어 비록 문법을 무시한 엉터리 문장을 구사했지만 이러한 약점을 야구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 감출 수 있었다. /브리태니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反)영국주의자의 손에 암살된 후 같은해 후계자가 된 아만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 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했으나(제3차 아프간전쟁)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8월에 라왈핀디 화평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도 정부로부터의 연금이 폐지되고 외교지도권 폐지가 약정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왕은 국내 통일과 서양문화 도입에 힘썼으나 보수세력의 반대로 퇴위한 뒤 망명하였다. 뒤를 이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연 나디르한까지 1933년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히르 샤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후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으나,1973년 7월 (17일) 국왕의 (이탈리아) 외유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前)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1978년 4월에는 공산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타라키(Taraki) 정권이 수립되었고, 1979년 9월에는 궁정쿠데타로 아민(Amin) 정권이 수립되었다. /naver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에 있다. 의사당 본관은 정면에서 볼 때 나비 50m의 화강석 계단과 기단 위에 높이 32.5m의 기둥을 세워 건축되었다. 기둥에 받쳐져 처마가 있고, 그 위에는 밑지름 64m의 대형 돔이 있다. 총대지면적은 33만m²이고, 지하 2층, 지상 6층의 건물로 지반에서 돔 상단까지 69.19m, 연건평은 8만 1444m²이다. 본회의장 의석은 이동식으로 400석까지 확장이 가능하고, 방청석은 350석, 기자석은 80석이다. 본회의장의 의석 배치는 의장단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되어 있고, 의장단 오른쪽에는 의석과 나란히 국무위원석이 있다. 현재의 의사당 건물은 1969년 7월 17일 기공식을 가져, 총공사비 135억 원, 연인원 100만 명이 투입되어 75년 9월 1일에 준공되었다. /yahoo
1967 - 미국의 재즈색소폰 연주자, 작곡가 존 콜트레인(Coltrane, John) 사망 콜트레인 [Coltrane, John, 1926.9.23~1967.7.17] 미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작곡가, 밴드 리더. 1960, 1970년대의 재즈에 끼친 그의 영향은 찰리 파커가 1940, 1950년대의 재즈 음악에 끼친 영향에 견줄 만하다. 콜트레인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했으며 에디 빈슨, 디지 길레스피, 얼 보스틱, 조니 호지스와 함께 일했다. 1955~60년에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간헐적으로 내놓은 음반과 1957년 잠시 셀로니어스 멍크와 함께 만든 음반으로 폭넓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테너 색소폰은 갈라지는 듯한 다중음이 나는 고음역에서조차도 명료성과 풍부함을 지닌 크고 어두운 소리를 들려주었는데 이것이 그의 개성이 되었다.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힘찬 독주는 화음 진행에서의 무아경을 보여주며 그의 이러한 면모는 난해한 곡인 〈자이언트 스텝스 Giant Steps〉 연주에서 절정을 이룬다. 1960년대초에는 선법에 근거한 즉흥연주에 몰두했는데 1~2음으로 된 반주 음형의 확장된 반복 위에서 독주악기가 연주하는 즉흥연주는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 My Favorite Things〉을 녹음한 그의 음반에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다. 1960~65년 드럼 연주자 엘빈 존스, 피아니스트 매코이 타이너, 베이스 연주자 지미 게리슨을 포함한 자신의 뛰어난 4중주단과 함께 연주활동을 했다. 인도와 아프리카의 민속음악에 대한 연구를 자신이 대중화시킨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특성과 더불어 드럼·피아노·베이스의 안정된 즉흥연주 사이의 독특한 상호작용으로 콜트레인의 4중주단을 1960년대 최고의 영향력 있는 캄보로 만들었다. 1965년부터 그가 죽기까지의 짧은 기간에 그의 4중주단은 해체되었지만, 조성적 중심 주위로 미리 배열된 밀집된 음계를 바탕으로 자유스럽고 집약적인 즉흥연주를 발전시켰고, 그 결실로 앨범 〈상승과 명상 Ascension and Meditations〉을 내놓았다. /브리태니커
1963 - 핀란드의 스키 점프 선수 마티 뉘케넨(Nykänen, Matti) 출생 뉘케넨 [Nykänen, Matti Ensio, 1963.7.17~ ] 마티 뉘케넨 마티 엔시오 뉘케넨(핀란드어: Matti Ensio Nykänen, 1963년 7월 17일 ~ )은 핀란드의 남자 스키 점프 선수이다. 1980년대에 세계적인 스키 점프 선수로 활동했으며, 1988년 동계 올림픽에서 스키점프 3종목을 휩쓸며 금메달 3개를 획득했다. 현재까지 스키점프 선수로 올림픽 한 대회에서 금메달 3개를 딴 유일한 선수이다. 선수 시절에는 핀란드 최고의 영웅으로 대접받았으나, 은퇴 후 여러 차례의 결혼과 이혼, 연예계 진출 등으로 가십 거리에 올랐다. 가수 활동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한때 생활고에 시달리기까지 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는 스트리퍼가 되기도 했다. 2000년대에는 폭행, 살인미수 등으로 몇 차례 체포되었다. /위키백과
1959 - 미국의 재즈가수 빌리 할리데이(Holiday, Billie) 사망 할리데이 [Holiday, Billie, 1915.4.7~1959.7.17] 재즈 역사상 최고의 가수로 일컬어지는 미국 흑인 여가수 빌리 할리데이가 마약 중독으로 뉴욕 재활원에서 힘겨운 투쟁을 하던 중 1959년 7월 17일 숨을 거뒀다. 향년 44세였다. 마약중독으로 건강을 해쳐온 빌리는 5월 31일 수면상태에 빠져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어제의 오늘]1955년 디즈니랜드 개장 ㆍ꿈과 행복을 주는 거대한 놀이터 “이 세계(미국)가 디즈니랜드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있다”고 2007년 세상을 뜬 장 보르리야르는 말했다. 1955년 오늘 언론에 처음 공개된 디즈니랜드는 프랑스의 예민한 철학자가 보기에 미국의 상징과 같은 곳이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161746075&code=100100&s_code=ap005
대한민국학술원과 대한민국예술원 개원 50주년 "2004년은 대한민국학술원과 대한민국예술원이 개원한 지 5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1947 - 영국의 찰스 왕세자의 비(妃) 카밀라(Camilla) 출생 카밀라 [Camilla, duchess of cornwall, 1947.7.17~ ] 영국의 콘월 공작 부인 카밀라(Camilla, duchess of cornwall 1947년 7월 17일 - )는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 찰스 왕세자의 후처(後妻)이다. 원래 이름은 카밀라 로즈메리 샌드이나, 재혼 전까지 전(前) 남편의 성(姓)을 썼으므로 카밀라 파커 볼스(Camilla Parker Bowles)란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웨일스 공 찰스와 결혼함으로써 콘월 공작 부인의 칭호를 얻었다. 생애 1947년, 런던에서 애쉬컴브 남작 R. 커빗트의 외손녀로 태어나 서식스 지방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72년, 약혼자 앤드류의 소개로 찰스 왕세자를 처음 만나게 되어 서로 사랑을 느꼈으나 찰스가 입대하자 예정대로 이듬해 앤드류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찰스가 제대하자 다시 연락하여 이내 왕세자와의 혼외 관계를 시작하였다. 남편 앤드류와의 사이에서 아들 톰(1974년생)과 딸 로라(1978년생)가 태어나고 1981년, 스펜서 백작 가문의 딸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가 왕세자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지속하였다. 찰스와 다이애나 사이에서의 아들 윌리엄(1982년생)과 해리(1984년생)가 태어난 후에도 이들의 불륜 관계는 해소되지 않았기에 이로 인해 왕세자 부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1990년, 찰스와의 은밀한 통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언론에 폭로되어 어마어마한 파문을 일으킨 후에도 지속된 불륜 관계는 결국 왕세자 부부의 정식 이혼(1996년)이라는 불운으로 몰아갔으며 1997년, 다이애나가 파리에서 비명에 가자 영국 사회에서 이들을 지탄하는 목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이 둘의 불륜 관계는 끊일 줄을 몰랐고 급기야 여러 공식 행사에 함께 참석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거지로 영국의 언론과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2005년 4월 9일, 많은 논란 속에 찰스 왕세자와 재혼하여 전하(Her Royal Highness)의 경칭과 함께 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의 칭호를 받았으나 여전히 뜨거운 다이애나의 인기 등을 이유로 점점 민심을 잃어가고 있으며 사치로 구설에 올라 비난 여론이 적지 않았다. 찰스가 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카밀라가 왕비(Queen Consort)의 칭호를 받을 수 있다는 헌법부의 판결이 있었으나, 하원의 공식적인 반대 의사 표명과 국민들의 여론을 의식하여 왕비에 비해 한 단계 격이 낮은 ‘왕의 배우자’라는 의미를 지닌 빈(Princess consort)의 칭호를 사용하기로 내정하였다. 국민 여론 조사에서도 응답자 1천 503명 중 단지 21%만이 카밀라가 왕비가 되면 기쁘겠다고 대답했고, 56%는 빈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게 더 낫다고 말하였다. /위키백과
1947 - 스웨덴의 외교관, 실업가 라울 발렌베리(Wallenberg, Raoul) 행방불명 발렌베리 [Wallenberg, Raoul, 1912.8.4~ 1947.7.17(?)] [오늘의 경제소사/1월17일] <1297> 라울 발렌베리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 스웨덴판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이다. 나치의 학살에서 그가 직간접적으로 구해낸 유대인은 약 10만여명. 오스카 쉰들러의 구출명단에 오른 1,200여명보다 훨씬 많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01/16 17:49:27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01/e2009011617492297490.htm
1945년 7월 17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 소련 연합국의 세 대표가 독일 포츠담에서 회의를 열었다. 세 사람은 8월 2일까지 유럽의 전후처리문제, 대일방침 등을 협의했다. 회담은 당초 동구에서 소련의 영향력 팽창을 염려하는 처칠의 주도로 진행됐지만 회의 중 총선거에서 처칠의 보수당이 노동당에 대패하는 바람에 24일, 영국 대표가 노동당 당수인 애틀리로 바뀌었다. 회담은 폴란드-독일 간의 국경확정을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했다. 또 프랑스를 포함 4국이 독일을 분할점령하기로 확정했다. 대일전후처리는 1.일본군국주의의 영구추방 2.군대의 완전무장해제 3.전쟁범죄인의 처벌 등을 협의했다. /조선
사마란치 [Samaranch, Juan Antonio, 1920.7.17~2010.4.21] 스페인의 외교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장(1980~2001). 제7대 IOC 위원장을 역임했다. 바르셀로나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사업가로서 은행의 고문을 지냈으며, 바르셀로나에서 행정직 공무원으로도 일했다. 또한 1977~80년 소련과 몽골 주재 스페인 대사를 지냈다. 1966년 이후 스페인 올림픽 위원회에 참여하여, 1977년 스페인 올림픽 위원장을 역임하고, 1980년 8월 IOC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0, 1984년 올림픽이 각각 서방측과 사회주의권의 불참으로 인해 반쪽 대회가 된 후, 스포츠 외교를 통한 국제적인 관계개선을 추구하여 올림픽을 부흥시키는 데 기여했다. 반면에 IOC 위원장 재임 중 올림픽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상업화시켰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유치에 공헌했고, 서울 올림픽 대회가 사상 최대의 참가국을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1988년 10월 서울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0년 8월 28일 제1회 서울평화상을 수상했다. 2001년 7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신임 위원장에 자크 로게(벨기에)가 선출됨으로써 21년간의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브리태니커
1918 -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Nikolai II) 가족 처형 알렉산드라 [Aleksandra Fyodorovna, 1872.6.6~1918.7.16/17] 올가 [Olga Nikolayevna Romanova, 1895.11.15~1918.7.16/17] 타티아나 [Tatiyana Nikolayevna Romanova, 1897.6.10~1918.7.16/17] 마리아 [Maria Nikolayevna Romanova, 1899.6.26~1918.7.16/17] 아나스타샤 [Anastasia Nikolayevna Romanova, 1901.6.18~1918.7.16/17] 알렉세이 [Aleksei Nikolayevich Romanov, 1904.8.12~1918.7.16/17] [어제의 오늘]1918년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 처형 ㆍ‘2월 혁명’으로 비참한 최후 1917년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무너졌다. 300여년간 이어져 온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황후와 네 딸, 그리고 모계유전으로 혈우병을 앓고 있었던 어린 황태자와 함께 우랄 지방 예카테린부르크의 2층 저택에 감금됐다. 1918년 7월17일 새벽 황제 가족과 주치의, 하인 등 11명은 지하실로 끌려갔다. 총소리가 시작됐고 황제가 그리고 황후가 쓰러졌다. 황태자 알렉세이도 총상을 입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보석이 박힌 드레스 탓에 첫 총격에서 치명상을 입지 않았던 공주들은 대검에 찔리거나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았다. 처형실로 변해버린 지하실에는 탄환 연기가 가득했다.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7-16 17:36:3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161736365&code=100100&s_code=ap005
김득수 [金得洙, 1917.7.17~1990.5.21] 김득수는 소릿가락을 잘 아는 북잡이로 손꼽히는 판소리 명고수(名鼓手)이다. 7세에 진도명창 최두인에게서 창(唱)을 배웠고, 10세에 명창 박동준에게 5년간 소리를 배웠다. 1936년에 서울로 올라와 국창(國唱) 송만갑에게 <흥보가>·<심청가>·<춘향가>를 배우고, 김세준에게 <수궁가>를 배웠다. 조선창극단에 입단했으나, 자신의 소리가 부족함을 느끼고 극단을 그만두었다. 중년에 이르러 목청이 상해 1960년부터는 고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시립국악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북 솜씨는 널리 알려졌고,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鼓法)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자신이 소리를 알고 장단을 짚어 주므로 그의 북가락에는 절로 흥이 나고 소리하기가 편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소리판에서는 일청중이요, 이고수요, 삼명창이라."
- 김득수
1912 -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푸앵카레(Poincaré, Henri) 사망 푸앵카레 [Poincaré, (Jules-)Henri, 1854.4.29~1912.7.17] 프랑스 수학자·물리학자. 낭시 출생. 프랑스 제3공화국 9대 대통령을 지낸 R. 푸앵카레의 사촌형이다. 청소년기 때 수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1875년 파리 에콜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였다. 그 뒤 광산학교에 들어가 1879년 광산기사가 되었으며 파리대학으로부터 미분방정식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79년말 칸대학의 강사를 지내다 1881년 파리대학으로 옮겨 물리역학·물리수학·우주역학·확률통계 등을 강의하였고 1885년 정교수가 되었다. 1887년 파리 과학아카데미 회원을 거쳐 1906년 회장이 되었다. 그의 학문상 업적은 보형함수(保型函數)의 존재를 밝히고 이 함수를 대수함수론이나 미분방정식론에 응용한 것과, 오늘날 역학계(力學系) 이론의 기초가 되는 무한차(無限次) 행렬식의 수렴(收斂)문제와 미분방정식 풀이의 점근급수(隷近級數) 전개, 미분방정식의 정성적(定性的) 성질에 대하여 연구한 것이다. 또한 대수적(代數的) 위상기하학(位相幾何學)의 기본개념을 도입하여 3차원의 닫힌 다양체가 한 점에 응축할 때 이 다양체는 구(球)가 된다는 <푸앵카레 예상(豫想)>을 발표하였다. 차원(次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와 확률론의 기본법칙 도출도 푸앵카레가 시작하였다. 그 뒤 과학과 수학의 중요성에 대한 일반적 의미의 책을 저술하였다. 특히 과학철학에 관심이 많아 《과학과 철학(1903)》 《과학의 가치(1905)》 《과학과 방법(1908)》 등을 저술하여 일반인들에게 널리 읽혔다. 그 밖의 저서로 《천체역학의 새로운 방법(3권, 1892∼99)》 《천체역학 강의(3권, 1905∼10)》 등이 있다. /야후 백과
1903 - 미국의 외교관 빙엄 4세 (Bingham IV, Hiram) 출생 빙엄 4세 [Bingham IV, Hiram "Harry", 1903.7.17~1988.1.12] Hiram "Harry" Bingham IV (July 17, 1903 – January 12, 1988) was an American diplomat. He served as a Vice-Consul in Marseille, France, during World War II, and helped over 2,500 Jews to flee from France as Nazi forces advanced. Early life
(참고) 한나 아렌트-생애 아렌트는 1933년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 자격 취득(하빌리타치온; 독일에서의 교수 자격 취득)을 금지당했으며 따라서 독일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피신하여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그녀는 문학 평론가이며 마르크스 신비주의자인 발터 베냐민과 친구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아렌트는 유대계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일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한 뒤 독일이 프랑스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강제 이송되게 되자, 아렌트는 프랑스에서 도주해야 했다. 1940년에, 아렌트는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결혼했다. 1941년에는 아렌트를 포함하여 2500명 정도 되는 유대계 망명자들에게 불법으로 비자를 발행해 준 미국 외교관 하이램 빙엄 4세의 도움으로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그 뒤 독일 출신 유대인 공동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주간 〈아우프바우〉(Aufbau)지에 기고했다. /위키백과
- Whistler - 'Portrait of Mother'
1903 - 미국 출신의 화가 휘슬러(Whistler, James McNeill) 사망 휘슬러 [Whistler, James (Abbott) McNeill, 1834.7.14~1903.7.17] 유럽에서 활약한 미국의 화가. 매사추세츠주 로웰 출생. 어린 시절을 러시아에서 지내고 귀국 후 워싱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55년 파리에 유학하여 C.G.글레르에게 사사하였다. 그러나 G.쿠르베의 사실주의에 끌리고 마네·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점차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였다. 그 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고 회화의 주제 묘사로부터의 해방을 주장, 《하얀 소녀 The White Girl》(1863) 등으로 차분한 색조와 그 해조(諧調)의 변화에 의한 개성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구성상의 요소를 추상적으로 다루면서 주제성(主題性)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음악과의 공통성에 착안, 작품의 부제로 ‘심포니’ ‘녹턴’ 등을 사용하였다. 1877년 《불꽃》 등을 선보인 개인전을 런던에서 열었을 때 J.러스킨의 혹평에 대해 소송을 일으켜 승소하였지만, 이는 몰이해한 공중을 한층 더 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본거지를 런던에 두었으나 파리에도 체재하며 활약하고, O.와일드와 교유하여 그의 강연집을 말라르메로 하여금 불역(佛譯)하게 해서 발표하기도 하였다. 에칭에도 뛰어나 판화집을 출판한 외에, 동양취미를 내세운 피코크룸(현재 워싱턴의 프리어미술관으로 옮겨서 보존)을 설계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한때 영국미술가협회 회장으로도 있었다. 주요작품에 《자화상》《수를 놓은 커튼》《6점의 습작》 등이 있다. /naver
1899 - 미국의 영화배우 제임스 캐그니(Cagney, James) 출생 캐그니(카그니) [Cagney, James Francis, 1899.7.17~1986.3.30] 미국 영화배우. 1942년〈성조기의 행진 Yankee Doodle Dandy〉에서 조지 M. 코핸 역으로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캐그니는 보드빌(vaudeville : 1890년대 중엽에서 1930년대초에 미국에서 인기 있던 가벼운 연예 쇼)로 쇼 업계에 입문했으며, 터프가이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은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꼽히는 조지 M. 코핸에게 바치는 영화 〈성조기의 행진〉은 캐그니가 출연한 다양한 영화 가운데 그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였다. 캐그니가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누렸던 자부심과 즐거움은 친동생 진이 영화에서도 누이동생 조시 코핸 역을 맡음으로써 배가되었다. 캐그니는 이 영화를 찍을 때 40세가 넘은 나이였음에도 다리를 뻣뻣하게 뻗는 코핸 특유의 춤을 익혔고, 무대 앞부분의 아치를 달려올라가는 기술도 배웠다. 캐그니의 건방져 보이는 매력, 터질 듯한 에너지, 쉴새없이 유명한 노래들을 불러젖히는 솜씨, 발끝으로 추는 탭댄스에 현혹되어, 영화의 진부하고 단순한 플롯은 잊어버리고 만다. 캐그니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함으로써 뮤지컬로 수상한 첫번째 배우가 되는 영광을 누렸을 때도 아무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브리태니커
르메트르 [Lemaitre, Abbe Georges, 1894.7.17~1966.6.20] 벨기에의 천문학자·우주론자. 우주가 조그만 원초 '초원자'의 대폭발로 시작되었다는 현대의 대폭발이론(大爆發理論)을 만들었다. 토목공학자였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벨기에 군대의 포병장교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뒤 신학교에 입학해 1923년에는 사제로 임명되었다. 1923~24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태양물리연구소에 있었고, 1925~27년에는 미국 케임브리지의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공부했는데, 여기서 팽창우주에 관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과 할로 섀플리의 발견을 접하게 되었다. 1927년 루뱅대학교의 천체물리학 교수가 되면서 대폭발이론을 제안했다. 이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은하들의 후퇴를 설명했다. 팽창우주론은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빌렘 드지터에 의해 전에도 논의된 바 있지만, 조지 가모브에 의해 개선된 르메트르의 이론이 우주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우주선 및 서로 인력이 작용하는 3개의 물체를 수학적으로 표현한 3체문제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의 저서로는 〈우주진화에 대한 논의 Discussion sur l'évolution de l'univers〉(1993)·〈원초원자가설 L'Hypothèse de l'atome primitif〉(1946)이 있다. /브리태니커
대폭발이론[ 大爆發理論, big-bang model ] 동의어 : 빅 뱅 이론 널리 인정되고 있는 우주진화이론. 이 이론의 핵심적인 내용은 우주는 적어도 100억 년 전에 일어난 대폭발이라고 하는 극히 높은 온도와 밀도를 가진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우주론은 원래 1920년대 알렉산더 프리드만과 조르주 르메트르가 제안했으나, 1940년대 조지 가모브와 그 동료들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전시켰다. 대폭발이론은 2개의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모든 물질의 중력 상호작용이 정확하게 설명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에 대한 관측자 시점은 관측 방향과 관측자의 위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우주원리이다. 이 원리는 우주의 거시적 성질에만 적용되지만, 우주는 끝이 없으므로 대폭발의 시초는 공간의 한 특정한 점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에서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이 2가지 가정으로 플랑크 시간이라는 어떤 시간의 기점 이후의 우주역사를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플랑크 시간 이전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대폭발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고밀도의 매우 압축된 원시상태에서 급속히 팽창한 결과로 밀도와 온도가 상당히 내려갔다. 뒤이어 곧 양성자 붕괴를 일으키는 어떤 과정에 의해 오늘날에 관측되는 것처럼 물질이 반물질(反物質)보다 많아졌다. 이 단계에서 많은 형태의 소립자가 나타났을 것이다. 수초 뒤 우주가 충분히 식자 특정 원자핵이 생성되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일정한 양의 수소·헬륨·리튬이 생성되었음을 예측할 수 있으며, 그 양은 오늘날 관측된 결과와 일치한다. 약 100만 년 뒤에는 우주가 원자를 형성할 정도로 차가워졌다. 또한 우주를 채웠던 복사도 이제는 공간을 통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이 초기 우주의 흔적으로는 1965년 아노 펜지아스와 로버트 윌슨이 발견한 초단파 배경복사(3K 배경복사)가 있다. 이 이론은 보통의 물질과 복사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주가 질량과 전하가 없는 기본입자인 중성미자(中性微子)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예측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언젠가는 초기우주의 다른 흔적이 발견될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 /브리태니커
- 'Perry Mason'
1889 - 미국의 추리 소설가 얼 스탠리 가드너(Gardner, Erle Stanley) 출생 가드너 [Gardner, Erle Stanley, 1889.7.17~1970.3.11] 미국의 추리 소설 작가. 매사추세츠주 몰든 출생. 광산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인디애나주의 밸퍼라이소대학을 중퇴하였다. 캘리포니아주로 건너와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다가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법정의 생생한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을 써서 인기 있는 대중잡지에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명성을 얻기 시작한 1933년 이전에 이미 많은 서부소설과 추리소설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 처음으로 P.메이슨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처녀장편소설 《빌로드의 손톱 The Case of the Velvet Claws》을 썼는데, 이것은 시리즈로 약 80권이나 계속될 만큼 압도적인 호평을 받았다. 주인공의 형사 ·변호사로서의 눈부신 활약은 법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미국 시민의 영웅적 존재가 되었다. 이 밖에도 그는 지방검사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와 A.A.페어란 별명으로 쓴 《두목을 쓰러뜨려라》 등의 20권과, 여러 권의 논픽션을 썼다. 장편만 100권 이상을 썼는데, 총계 1억 부 이상의 경이적인 발행부수를 올렸다. /네이버
- Shmuel Agnon - Israel, 50 New Sheqalim (Banknote)
아그논 [Agnon, Shmuel Yosef, 1888.7.17~1970.2.17] 이스라엘의 히브리어 현대소설가, 단편소설 작가. 1966년 넬리 삭스와 함께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아그논은 폴란드 유대상인, 랍비, 학자 들의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에는(1903~06) 본명과 여러 가지 필명으로 이디시어와 히브리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07년 팔레스타인에 정착해 아그논이라는 필명으로 극적이고 환상적이며 고도로 세련된 화술을 나타내고자 성서의 언어를 선택했다. 자신의 첫번째 팔레스타인 이야기인 〈버림받은 아내들 Agunot〉(1908)로 문단에 등단했다. 첫번째 주요작품은 소설 〈신부의 차양 Hakhnasat kala〉(2권, 1919)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레브 유델 하시드는 차르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인 거리에서 방황하는 모든 유대인의 화신이다. 2번째 소설 〈밤의 손님 Ore'ah nata Lalun〉(1938)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계 유대인의 물질적·정신적 쇠퇴를 그린 것으로 1950년에 비알리크 상을 받았다. 3번째 작품이면서 가장 유명한 소설인 〈그저께 'Tmol shilshom〉(1945)에서는 이스라엘은 더이상 약속된 땅이 아니라 단지 되찾은 땅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물질적·정신적·도덕적 분위기를 흡수해 서구화된 유대인들이 직면한 문제를 다루었다. 이것은 몇몇의 초기 이야기처럼 사실적 이야기도 아니고 상징적인 자서전도 아니며, 단지 아그논 자신의 실제적·정신적인 경험에 비추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아그논의 모든 작품들은 현존하는 많은 초고들과 책들을 통해 볼 수 있듯이 프루스트의 작품처럼 수없이 거듭된 교정 끝에 나온 것이다. 그의 전집에는 크게 다른 2개의 판본이 있다. 하나는 11권으로 된 〈Kol sipurav shel Sh. Y. Agnon〉(1~6권은 1931~35년 베를린, 7~11권은 1939~52년 예루살렘·텔아비브)이고, 다른 하나는 8권(1953~62, 텔아비브)으로 되어 있다. 그의 글은 고풍스러운 구문들 때문에 번역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번역판에서조차 그의 필력은 살아 있다. 유대력 중의 속죄일인 욤키프르 축일에서 영감을 받은 민간설화집 〈두려움의 나날 Yamin nora'im〉(1938)과 유명한 랍비들의 교리서 선집인 〈세페르, 소페르, 베시푸르 Sefer, sofer, vesipur〉(1938)를 편집했다. 그의 자서전격인 단편이 1958년 씌어졌고 영역된 작품 중에는 〈대양의 가슴 속에서 Bilvav yamim〉(1948)·〈두 이야기 Edo ve' Enam〉(1966)가 있다. /브리태니커
파이닝거 [Feininger, Lyonel, 1871.7.17~1956.1.13] 뉴욕 출생. 부모의 고향인 독일로 음악공부를 하러 갔으나 미술로 전향, 입체파에서 시각적 요소의 평면에의 전이라는, 화가로서 결정적 요소를 발견하였다. 바우하우스 창립에 관여했으며 독자적인 교육활동을 하였다. 1919년 이후는 건축의 영향을 받아 비구상적인 특징을 강조하였다.
들라로슈 [Delaroche, Paul, 1797.7.17~1856.11.4] 본명 이폴뤼트 폴 드 라 로슈(Hippolyte Paul De La Roche). 파리 출생. 주로 파리에서 제작하였다. 청년시절에는 A.J.그로에게 사사하고 1832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초상 및 역사적 주제를 잘 다루었으며 고전주의적인 구성에 로맨틱한 감정표출을 가미한 절충주의(折衷主義:juste milieu)의 대표적 화가이다. 감상적 표현의 주제를 선호하였으며, 신흥 부르주아 고객이 많았고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대표작으로 《옥중의 두 왕자》《기즈 후작의 암살》 등이 있다. /naver
- Great Britain, 20 Pounds (Banknote)
1790 -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Smith, Adam) 사망 애덤 스미스 [Smith, Adam, 1723.6.5~1790.7.17]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7월 17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생애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피페의 커크칼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 커크칼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친은 애덤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 경에 일단의 집시들에게 납치되었지만 그의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모친에게로 돌아왔다. 스미스의 전기 작가인 존 레이는 장난스럽게 애덤 스미스는 별로 쓸만한 집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첨부한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란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하였다. 1740년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대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하였다. 1748년에 케임즈경의 후원하에 에딘버그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하였다. 1764년부터 귀족인 타운젠트의 아들을 데리고 가정교사를 하며 1년의 유럽여행을 시작한다. 2년에 걸쳐 프랑스등지를 여행하며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하였다. 귀국후 저술활동에 전념하여 1776년 《국부론》을 발표하였다. 그 뒤 글래스고 대학 총장등을 역임한 뒤 1790년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게리 [Gerry, Elbridge Thomas, 1744.7.17~1814.11.23] 미국의 독립선언문 서명자, 매사추세츠 주지사, 부통령(1813~14).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선거구를 자기 당에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1762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한창 번창하던 아버지의 사업에 참여했다. 매사추세츠 주의회 연락위원회 위원(1772~73)과 매사추세츠 지방의회 의원(1774~75)을 지냈으며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회의에 대표로 참석해(1776~81) 처음부터 미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는 또 연합헌장에 따라 구성한 의회 의원이었고(1783~85)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헌회의에 대표로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제헌회의에 제출된 새로운 헌법에 반대했으나 그것이 비준되자 입장을 바꾸어 지지했고 그뒤 미국 의회 의원으로 일했다(1789~93). 1797년 존 애덤스 대통령은 그를 존 마셜, 찰스 코티즈워스 핑크니와 함께 프랑스에 특사로 파견했는데, 이 특사 파견은 나중에 'XYZ 사건'이라는 프랑스로부터의 뇌물수수 혐의사건을 낳게 되었다. 특사들의 임무는 프랑스와 오랜 기간 계속된 여러 분쟁을 끝내기 위해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실패했다. 탈레랑과 그 수행원들이 미국 협상자들을 푸대접하자 마셜과 핑크니는 일찍이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게리는 그의 프랑스인 친구 탈레랑이 마셜이나 핑크니에게는 내놓지 않았던 조건을 자기에게 내놓을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파리에 남았다. 이런 행동 때문에 연방파들에게서 거센 비난을 받았고 그 비난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1800~03년 매사추세츠 주 주지사 선거에서 4번이나 떨어진 뒤 1810년 드디어 당선되었고, 1811년에는 재선되었다. 주지사로 있을 때 나중에 '게리맨더링'으로 알려진 선거구 조작방식을 이용해 유명해졌다. 게리는 1812년 영국과 싸울 것을 열렬히 주장했으며 다음해의 선거에서 공화파 후보로 매디슨과 함께 당선되어 매디슨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내다가 재임중 사망했다. /브리태니커
1566 - 스페인의 선교사, 역사가 라스 카사스(Las Casas, Bartolomé de) 선종 라스 카사스 [Las Casas, Bartolomé de, 1474.8~1566.7.17] 스페인의 성직자, 역사가. 세비야 출생. 도미니크파의 수도사. 콜럼버스의 친구 아들로서 1510년 주교가 되어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선교사로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산토도밍고 ·쿠바 ·멕시코 등지에서 인디오에게 전교하고, 그들을 위해 쿠마나(베네수엘라)에 이상적인 식민지를 건설해보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인디언 보호법을 제정하였고, 또한 식민자의 불법행위와 인도회사의 횡포 등을 평생에 걸쳐 고발하였으며, 이를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1567)라는 저서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디언을 혹사하는 식민 방법을 카를로스 5세에게 진언했다고 하여, ‘검은 전설’의 창시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1547년 귀국하여 《서인도의 역사》 등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저서를 썼다. /네이버
[유레카] 성경과 코란 / 함석진 1550년 에스파냐(스페인) 한 성당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주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볼 것인가였다. 결과에 따라 원주민 노예화의 정당성 여부가 갈리는 중요한 자리였다. 신학자 세풀베다는 날개 달린 뱀 모양을 한 아스테카 신 석상을 보여주며 “그들은 기괴한 우상을 숭배하는 야만스럽고 열등한 동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라스 카사스 수사가 맞섰다. “그들이 우리와 뭐가 다른가? 그들이 믿음이 없다고 해서 신이 수탈과 학살까지 허락한 것은 아니다.” 논쟁 며칠 만에 원주민들도 인간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엉뚱한 의견이 달렸다. 현지에서 필요한 노예는 동물에 더 가깝고 야만적인 존재들을 쓰라는 것이었다.(장클로드 카리에르, <바야돌리드 논쟁>) 수백년을 이어간 인류의 또다른 죄악, 아프리카 노예 공출의 시작이었다. 식민지 비극이 그친 것도 아니었다. 라스 카사스 수사는 중남미에 다녀온 뒤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2007년 번역서 출간)를 통해 양심선언을 한다. 가까이서 지켜본 식민지 기독교인들의 만행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인디오를 돼지처럼 순식간에 물어 찢어버리도록 개를 훈련시켰다. … 원주민이 우리를 한명 죽이면 원주민 백명을 죽여야 한다는 내부 규칙도 만들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에게 믿음을 강요했고, 저항은 처절하게 응징했다. 그렇게 마야·아스테카·잉카 문명이 무너졌다. 이후 수백년 동안 복음과 총칼로 무장한 서구 문명의 탐욕 앞에 공존은 없었다. 미국에서 다시 성경이 시험을 받고 있다. 무엇이 테러를 불렀나 반성하는 기미는 없다. 코란은 박해받고 정치인들은 이스라엘, 석유, 눈앞에 닥친 선거를 놓고 계산기만 두드린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묻는다. “차라리 이 땅에 선교사가 오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보기에 좋지 않았겠나.”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한겨레 2010-09-13 오후 06:25:5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39563.html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과(芳果:定宗)에게 선위한 뒤 상왕(上王)이 되고, 1400년 방원(芳遠)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었다. 1402년 왕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빚어진 심뇌로 동북면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사대주의(事大主義) ·배불숭유(排佛崇儒) ·농본주의(農本主義)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500년의 근본 정책이 되게 하였고 관제의 정비, 병제(兵制)와 전제(田制)의 재조정 등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묘호(廟號)는 태조, 능은 건원릉(健元陵)이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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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