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장(Make-up)의 역사
1. 한국 화장(Make-up)의 역사 한국인들은 일찍이 백색 피부를 호상(好尙)이라 선호하였고 미남ㆍ미녀를 존숭(尊崇)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청결을 존중하였다. 한국인의 화장은 엷은 색조에 은은한 화장으로,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꾸는데 미용의 주안을 두었다. 전혀 딴판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야용(冶容)이라 경멸하였으며, 깨끗하고 맑은 피부만으로도 훌륭한 미용이라 생각 하였다. 1)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 단군신화(檀君神話)에 의하면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을 먹게 하였다. 쑥과 마늘은 민간에서 널리 행해진 미용처방으로 쑥을 달인 물에 목욕을 하고 마늘을 찧어 꿀과 함께 바르면 기미, 주근깨, 잡티제거와 미백에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햇빛을 보지 않으면 흰 피부를 가질 수 있으므로 그 당시 여성들의 미(美)의 기준은 흰 피부를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 의하면 만주지방의 읍루인들은 돼지기름을 피부에 발라 추위를 이기고 동상을 예방하였다. 또한 돼지기름은 햇빛, 눈(雪)으로부터 그을림을 예방하고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하는 성분이 있으므로 유럽인들도 피부 마사지에 이를 사용하였다. 또한 말갈족 사람들은 오줌으로 세수하여 얼굴에 미백효과를 얻었으며, 낙랑시대의 유물 중 채화칠협에 나타난 인물상을 보면 머리가 정돈되어 있고 이마를 넓히기 위해 머리털을 뽑은 흔적이 뚜렷하고 눈썹이 굵고 진하게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사례를 볼 때 한반도와 한반도 주변 거주민들은 피부보호와 피부미용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2) 삼국시대(三國時代) ■ 고구려(高句麗) 고구려 사람들은 남ㆍ여 모두 깨끗한 옷을 입기를 좋아하였으며 밤이면 남ㆍ여가 여럿이 모여 배우놀이와 음악을 즐겼다. 신분과 직업에 따라 각기 달리 치장했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무녀(巫女)와 악공(樂工)이 연지 화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서기 5~6세기경 수산리 고분벽화 귀부인상을 보면 머리에 관을 쓰고 있고 뺨과 입술이 연지로 단장되어 있다. 쌍용총 고분벽화의 여인상도 여관(女官) 혹은 시녀로 보이는데 동그란 얼굴에 뺨과 입술에 연지로 화장되어 있다. ■ 백제(百濟) 백제 사람의 화장품과 화장술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 기록은 거의 없다. 중국 문헌에 나타난 것에 보면 백제인들의 화장 경향은 시분무주(施紛無朱: 분은 바르데 연지는 바르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엷고 은은하고 세련된 화장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옛 문헌을 보면 일본인은 화장품도 만들 줄 모르고 화장술도 몰랐으나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기술과 화장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의 화장 문화는 일본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 신라(新羅) 신라시대에는 영육일치사상 《靈肉一致思想: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 의 영향으로 남ㆍ여 모두가 자신의 외모와 미(美)에 관심이 높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아름다운 남자였으며 그의 왕비는 빼어난 미녀였다. 알에서 깨어난 박혁거세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났고 왕후(알영)는 몸매와 얼굴이 남달리 아름다웠는데 입술이 닭 주둥이 같은 결점이 있어 북천(北天)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완전한 미인이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목욕 일화는 한국인이 어느 민족보다도 일찍이 아름다움을 숭상하고 추구하였음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불교의 전래는 화장과 화장품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목욕재계(沐浴齎戒)와 향(香)사용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에서는 일찍이 백분(白紛)과 같은 화장품이 제조되었고 화장이 행하여졌다. 일본 고문헌에 의하면, 신라의 승려가(서기 622년) 일본에서 연분(鉛紛)을 만들었기에 상을 준 기록이 있다. 팥, 녹두를 가루로 내어 세제로 사용하였으며 콩이나 팥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하여 향료를 사용하였다. 머리 손질은 동백이나 아주꽈리 기름으로 하였고, 얼굴에는 분꽃씨 가루나 활석가루 등으로 분을 만들어 물에 개어 발랐으며, 눈썹은 나무재를 물에 섞어서 그렸다. 3)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의 태조 왕건은 신라의 정치제도와 문화전통을 계승하는 정책으로 화장술과 화장품 제조 또한 전승, 발전되었다. 그 결과 화장은 외형상 사치스러워지고, 내면으로는 탐미주의 색채가 농후해졌다. 고려시대에는 화장이 이원화되었는데 여성의 신분과 직업에 따라 분대화장(紛黛化粧: 짙은 화장)과 비분대화장(非紛黛化粧: 옅은 화장)으로 나누어진다. 분대화장(紛黛化粧)은 기생 중심의 화장으로 분을 도포하 듯이 하얗게 많이 바르고 눈썹을 가늘게 다듬어 또렷하게 그렸으며 머릿기름은 반질거릴 정도로 많이 바르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 초기에 교방(敎坊)에서 기생을 훈련하고 분대화장법도 교육됨으로써, 분대화장은 기생의 상징이며 진하고 야한 분장을 분대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비분대화장(非紛黛化粧)은 여염집(비 직업) 여성들이 기생으로 오해받지 않으려고 분대화장을 기피하였는데 서긍의 『고려도경』에 고려 귀부인의 화장에 대하여 "향유(香油)를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바르지 않았다. 눈썹은 넓게 그리고 비단향낭을 패용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기녀들의 세련되고 짙은 화장에 비해 귀부인들은 은은하고 우아한 멋을 내는 자연스럽고 기생과 대조되는 화장을 즐겼다. 고려시대(12세기 중엽) 청자갑문상자 상자안에는 5개의 화장품 용기가 들어 있다. 4)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시대는 유교적 도덕관념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상으로 고려시대의 사치와 퇴폐풍조에 대한 반작용으로 화장에 대해 여러 차례 금지령을 내린바있다. 분대화장을 기피하고 한국인의 고유 미의식인 신체가 청결해야 마음도 청결하다는 사상 즉, 내면의 미와 외면의 미가 동일하다는 사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화장품 생산이 위축되거나 화장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화장개념의 세분화가 촉진되어갔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삶을 강요받았던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있어서 화장의 필요성이 점차 상실되어 자신의 아내 혹은 며느리로서의 여성상에 대해서는 '얼굴은 둥글고, 통통하며, 살빛은 흰 편이고, 흉터나 잡티가 없다. 전체적인 골격의 이상형은 건강하고 머리숱이 많고 검으며, 인중은 길고 입술색은 붉은 빛을 띠어야 아들을 잘 낳고, 인내심이 강하고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라 여겼다. 따라서 그 당시 여염집(일반 가정) 여성들의 화장은 아들 잘 낳는 모습으로서의 기능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으며, 점차 결혼, 외출의 의식 행위로 그 개념이 바뀌어 갔다. 그러나 그 시대 남성들이 이상적으로 삼았던 미인의 모습은 부덕(婦德)한 모습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앵두처럼 붉고 작은 입술, 초승달 같이 흐리고 가느다란 눈썹에 쌍커풀 없이 가느다란 눈, 마늘쪽처럼 생긴 자그마한 콧망울, 반듯하고 넓은 이마, 턱이 다소곳하게 작고, 동그랗고 아담한 계란형 얼굴의 전통 미인 모습은 한국 회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초상으로 평가되는 조선후기 화가 신윤복의 '미인도'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정실부인으로서의 여성에게는 부계혈통 보존을 위해서 화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요한 반면, 그들의 유희 대상으로서의 기생 신분의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분대화장이 허용됨으로써, 가부장제하에서의 이중적인 성윤리관이 화장 문화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음이 보여진다. 또한 그 당시 '미인박명(美人薄命)'사상이 문화적 관념으로 자리잡음으로써, 미인(美人)이나 화장과 같은 외모 가꾸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형성에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의인소설(擬人小說)인 《여용국전(女容國傳)》이 여성의 화장을 국가정치에 비유하여 권장하고 있고, 화장품과 화장기구가 18조이나 등장하느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 여성들이 여러가지 화장품과 화장구를 이용하여 화장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숙종(1673~1720) 연간에 화장품 행상인 매분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화장품의 생산ㆍ판매가 산업화할 조짐을 보일 정도로 다양하게 대량 소비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미용법도 발달하여 조선시대 《규합총서》에는 '겨울에 얼굴이 거칠어지고 터지는데 달걀 세 개를 술에 담가 봉하여 네 이레 두었다가 바르면 얼굴이 트지 않고 옥 같아진다.'는 등의 미용법이 수록되어 있고 이 밖에 여러 가지 두발의 형태, 입술 그리는 방법, 눈썹 그리는 방법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1567~1608)때 일본에서 발매한 '아사노쓰유(아침이슬)'라는 화장수(化粧水) 광고문안 가운데 '조선의 최신제법(最新製法)으로 제조한…' 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장품 제조기술은 높은 수준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수공업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고, 늦은 산업화로 외국의 화장품 기술력에 비해 뒤떨어졌다. 5) 근대 개화기(近代 開化期) 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다. 일본 중국에 취중하던 외교정책이 유럽 열강들의 문호개방 요구에 따라 개항이후 서구 화장품과 화장법의 도입으로 재래식 화장품과 화장법도 대치되거나 교체되는 국면을 맞게 된다. 1920년대에는 유럽수입선의 크림, 백분, 비누, 향수들을 국내에 들여와 재래식 화장품보다 포장과 품질이 우수하고 사용이 간편하므로 수입화장품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신식화장품의 도입은 신식화장법으로 발달되어 입술, 연지의 색깔이 진해지고 향수와 비누의 향이 강렬해졌다. 종래의 쪽진머리는 퍼머머리로 바뀌고 치마와 소매의 길이가 짧아졌다. 뾰족구두와 양산을 받친 신여성이 등장하였다. 특히 이 시대에 있어서 유해이란 것은 일종의 문화적 특권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전통적인 사회에 대한 이질적인 문화르 접목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따라서 조선사회에서 어느 정도 일탈적인 행동양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 시대의 화장, 옷차림은 사회적 규범에서 어긋난 사람 내지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사회적 집단을 형성한 사람들 주로 신식여성과(기생 및 카페걸, 다방마담, 영화배우)에 의해서 먼저 유행되었다. 일부 신여성들의 자유 연애 예찬과 이에 대한 비난으로, 신식화장을 한 여성들은 바람둥이 또는 성적으로 무난한 여성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여염집 여성들은 그들과 구분되기 위해서 더욱 화장을 기피함으로써, 종래 기생 등의 화장과 여염집 여성의 화장 구분이 더욱 심화된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서구의 성해방적인 시각의 출현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화장품의 본격적인 대량생산과 광고 등을 통해서 우리의 미(美)에 대한 기준이 서구화 되어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박가분 1916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 박가분 제조 1922년 관허 제 1호 박가분 정식 제조허가 1945년 화장품의 생산과 판매를 거의 독점 하던 일본인들의 철수로 화장품의 생산활동이 일시적으로 위축 1960년 6.25이후 수입화장품, 밀수화장품, PㆍX 유출의 범람이 가속되고 본격화 됨. 6) 현대 (1) 1940년대 1945년 해방을 계기로 서양문물이 대거 몰려들었으며 퍼머넌트의 유행으로 일반여성들도 퍼머, 세팅, 아이롱으로 웨이브를 내어 멋을 내었다. 1948년에는 서울시 위생과의 관리하에 미용사 자격시험이 제정되었다. 화장에 있어서는 일본이나 유럽등지에 나가있던 사람들의 귀국으로 인하여 기초 미용마사지법이 국내에 보급되었다. (2) 1950~1960년대 6.25전쟁으로 국내화장품 산업은 위축되고 미군의 영향으로 밀수화장품이 국내화장품을 주도하였다. 기ㅗ화장품 사용에 있어서는 콜드크림의 보급으로 윤기가 흐르고 번들거리는 화장법이 유행하였다. 또한 외국영화의 수입으로 '오드리햅번' 화장의 영향을 받아 피부 톤을 밝게 하고 눈썹을 두껍고 진하게 그리고 아이라인을 길게 빼줌으로서 눈매를 강조하였다. (3) 1970년대 고도의 경제 성장과 신문ㆍTVㆍ잡지 등의 매스미디어의 보급으로 패션과 메이크업이 보편화 대중화 되었다. 또한 화장품 업계도 활기를 띄었으며 다양한 제품이 출시되었다. 많은 여성들의 사회진출로 인하여 메이크업이 대중화 되었다. 1971년에는 국내 최초로 메이크업 캠페인이 실시되어 메이크업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색체화장 계몽에 기여하였다. 투명한 피부화장에 가늘고 긴 눈썹 아이섀도우는 핑크, 보라색을 사용하여 둥글고 깊은 눈매와 볼연지 화장으로 여성미를 더해주었다. (4) 1980년대 GNP가 상승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교복자율화와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하여 생활문화수준이 향상되면서 각자의 개성을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다. 컬러 TV 보급과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색채의 사요이 다양해지고 뚜렷해졌다. 1980년대 초반에는 색감이 진하고 눈 주의를 강하게 표현하며, 디스코의 영향과 함께 펄이 들어간 메이크업으로 화려한 느낌을 주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후반에 들어 오존층의 파괴가 주된 사회 문제화 되면서 색채보다는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에콜로지 경향과 함께 자연스럽고 청초한 메이크업이 부각되었다. 88 올림픽 즈음에 아침 방송의 시작은 여성들에게 시사 교양, 미용 전반에 관심과 호응을 증가시키며 여권 신장과 여성의 미에 대한 욕구를 증가시켰다. (5) 1990년대 과학과 산업의 급속한 발달과 고학력 여성의 사회진출이 지속적으로 증가되면서 캐주얼한 패션의 착용이 증가하였고, 또한 경제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영향으로 획일적인 삶을 버리고 개인 중심의 성향을 보이는 감성세대의 등장으로 생활 패션의 변화에 따른 화장품에 대한 요구도 고급화, 다원화되었다. 특히 패션에 민감한 젊은층은 개성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가 위하여 색조제품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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