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에즈1 - 니스에서 버스를 타고는 해변가 절벽 위에 산정마을 에즈에 가다!
어제는 떼제베 기차로 지중해의 니스 빌 Nice Ville 역에 내려서 호텔 아즈레아
Hotel Azurea 에 체크인하고 로컬 기차를 타고 코트다쥐르 Cote d'Azure
해변을 달려서 모나코 Monaco 에 도착해서는 이틀 전에 개최된 F1
그랑프리 흔적이며 왕궁과 대성당에 해양박물관 를 보고 다시 니스로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코트다쥐르 Cote d'Azure 해변 절벽 위 산정에 자리한 에즈 Eze 를 보려는데
가는 방법이 기차와 버스 2가지가 있으니... 어제 모나코 가는 도중에 에즈를
볼려고 니스에서 기차를 타고 동쪽으로 20분을 달려서 빌프랑슈 쉬르 메르
Villefranche sur Mer 를 지나 20분만에 에즈 쉬머역 Gare de Eze Sur Mer 에 내립니다.
모나코 를 보기 전에 해변가 산정에 자리한 예쁜 마을 에즈 를 먼저 보기 위함인데
에즈 수메르 Gare de Eze Sur Mer 역 에 내리니 여긴 무인역으로 역사
앞쪽에 인포 Office de Tourisme 가 있어 에즈 지도며 또 버스 시간표를 물어
보니.... 정류소에 산정 마을 에즈 Eze 로 올라가는 83번 버스 는 4시에 온다고 합니다.
한시간 가량 시간이 있는지라 마을 을 둘러 보고 물이 너무나도 깨끗하며 예쁜 조약돌이
널려있는 한적한 해변 까지 구경하고 정류소로 올라오니 30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으니 인포에 들러 문의해 보지만 여직원도 뾰족한 대답을 하지는 못하는지라.....
40분이 지나 아래쪽에 기차가 오기로 포기하고는 내려가 기차를 타고 모나코 로 갔습니다.
오늘은 버스를 타고 에즈 Eze 로 가려고 니스 빌 Nice Ville 역 앞에 있는 인포에 가서
원데이 패스를 달라니 트램 정류소 머신 Machine (티켓 자판기) 에서 구입하라기에
골목을 빠져나와 장 메드생 대로 Ave. Jean Medecin 에서 트램 을 타는데 중국 연인이
자판기에서 1회권 을 구입하면서 동전을 다른 구멍에 잘못 넣어 실패하는 모습을 봅니다.
다음으로 우리 차례인데 먼저 롤러를 돌려 5유로 짜리 1일권 2매를 선택한 다음 동전이
모자란지라 신용카드 를 넣은후 티켓을 사는데 성공해 트램 을 탔는데 시내를
남쪽으로 달려서는 좌회전을 하여 아크로폴리스 에 내려 도로변에 있는 지도
를 보고 걸어서 엄청 넓은 광장에 이르렀는데...... 아니 여기엔 시외버스가 없네요?
행인에게 물으니 여자분이 우릴 데리고 도로를 건너 한 모퉁이를 지나 저 멀리 한곳
을 가르키기에 찾아가 보니 여기가 바우반 Vauban 시외버스 터미널 인데...
아크로폴리스 정류소에서 2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데, 인포에서 받은 시내
지도에 표시된 터미널 위치를 보고는 우리가 너무 일찍 내려 버린 것이 탈이네요!
터미널 사무실로 들어가 에즈 Eze 로 가는 82번 버스 시간표를 묻는데 좀 전에 만났던
그 중국인 연인 이 들어오길래 인사를 하니 중국인 치고는 영어가 아주 유창
하기로 국적을 물으니 세상에나! 여자는 호주 국적이고 남자는 말레이인(화교)
인데...... 지금 호주 멜버른에서 살고 있다며 여자는 “에즈 를 이지에” 로 발음합니다?
사무실에 앉아 쉬고 있는데 밖으로 나갔던 중국인, 아니 말레이인 화교 남자가 고맙게도
82번 버스가 들어왔다며 우릴 부르러 왔네요? 이 연인들 화교 의 유래 를 보자면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오, 월나라를 식민지화 하기 위해 북방의 천민과 상인
들을 강남지방으로 강제이주 시킨이래 이후 피난민이 강남으로 내려오니 “객가” 입니다.
그후 거란족과 여진족 이 북중국을 정복하자 남하한 사람들과 객가 들은 남송 정부 가
남양무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11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동남아로 진출하는데
이후 명나라 초기에 정화 (鄭和) 는 1405년 부터 1433년 까지 7차례에 걸쳐
대함대를 이끌고 인도양을 지나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까지 해외 원정을 실시합니다.
1405년 부터 3년간 제1차 원정시 함정 62척에 승무원 27,800명 으로 편성되었는데 유럽의
배들이 온 것은 93년후 로 바스코 다 가마 가 인도에 다다른건 1498년 이었으니....
중국 배의 길이는 150m 폭이 60m 3,100톤 으로 바스코가 인도로 올때 제일 큰게
700톤 이고 1492년 콜럼버스 대서양 횡단시 사용된 산타마리아호는 230톤 에 불과했습니다.
200년후인 1631년 일본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 의 가신 하세쿠라가 로마 교황청에 가기
위해 만든 서양식 배의 크기는 길이 32m 에 폭이 10m 에 지나지 않았으니... 정화의
원정 을 계기로 특히 산악지방에 살아 농지가 부족했던 복건성 주민들이 대거 동남아로
이주하니 필리핀, 베트남과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의 상권 을 장악 합니다.
2차대전후 열강은 식민지들이 독립하는걸 막으려고 전쟁을 벌였으니 베트남에서 프랑스군,
인도네시아에서 네델란드군 인데 말레이시아도 독립전쟁을 거쳐 영국 에서 독립하게
되자 싱가포르섬은 경제력을 가진 많은 인구의 중국인들이 민주주의 하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데 두려움을 느껴서 싱가포르를 말레이 영토에서 배제 하니 독립국 싱가포르 지요!
우린 버스 오른쪽 좌석 에 앉았는데 바로 앞에 앉은 젊은 부부가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지라
서로 인사를 나눈 것도 아니니 불편하지 않도록 왼쪽 좌석 으로 옮기는데... 10시에
출발한 82번 버스는 에즈를 거쳐 Plateau 로 가는 버스인데 가리발디 광장을 거쳐
구항구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니 저 아래 항구며 니스 시가지 모습이 가히 환상적 입니다!
그런데 우린 버스 왼쪽 좌석으로 옮겨 앉았는지라 좌석에서는 창밖의 풍경 사진 을 제대로
찍지 못하는게 아쉬우니.... 해서 나중에 돌아올때 새로 찍기로 마음을 달래는데,
나중에 왼쪽 좌석에 앉아지만 차량이 우측통행을 하니 이번에는 도로 건너편 이라
불가능하니 니스에서 에즈로 갈때는 반드시 오른쪽에 좌석에 앉아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커브길 도로에서는 앞지르기 하기가 어려우니 천천히 가는 버스를 보다가 문득 떠오르는게
동아일보 홍수용씨가 쓴 횡설수설 칼럼에 “보우사파밀리아” 라는 글인데 2003년 브라질
정부가 시행한 저소득층 대상의 사회복지 프로그램 으로 그 도입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미국의 코미디언 조지 칼린은 “사람들은 자기보다 운전을 느리게 하는 사람은 멍청이 라
하고 자기보다 빠르게 운전하는 사람은 미친놈 이라 한다” 고 일갈했다. 세태 비판이
사회비평가의 반열 에 올려놨다. 자기중심적인 편견 에 빠져 있는 현실을 이보다 아프게
꼬집은 말도 없다. 착각에 빠진 사람이 권력자라면 그 나라 장래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언덕에는 니스의 부자들이 많이 거주하는지 아름다운 단독 주택 들이 많은게 눈에 뛰는데 모퉁이
를 돌아 협곡에 다리 를 건너 40분만에 에즈 빌리지 Eze village 마을에 도착하기로...
젊은 한국인 부부가 먼저 내려서 저만치 앞서 가다가 시간표가 인쇄된 종이를 흘리기에
주워주니 조금 당황하는 눈치에..... 고맙다는 인사는 그예 없으니 쓸데없는 짓 을 했나 봅니다?
여기 산간 마을은 높은 독립된 봉우리 가 협곡으로 인해 다른 지역과 완전히 분리 되니
과거 "외침을 피하기에는 안성맞춤" 인 마을인데, 광장에 있는 과일 가게로 들어가
복숭아며 체리를 고르면서 보니 동양인 중에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눈에
뛰는데 인포, 투리스메 Office de Tourisme 에 들러서 지도를 받고는 화장실에 들릅니다.
그런 다음에 마을 언덕길을 오르는데, 정원에 몽고 기마병 차림의 동상이 있기에 촬영하려
몇발자국 들어갔다가 왠 남자의 제지를 받기로 왜 그러는가 싶어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남의 호텔 마당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는데 간판을 보니 Chateau de la
Chevre dor 라? 그럼 이 마을에 있는 2개의 옛 성 중에 "셰브르 도르 성" 인 모양이네요?
다시 언덕 골목길을 오르는데 비누 가게를 지나 드디어 14세기에 축성되었다는
성문 을 들어서니 좁고 가파른 골목길 안에 또 위쪽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나타나기로 계단을 오르니.... 또 골목길인데 동상 들도 더러
보이고 꽃으로 장식된 자그만 집은 레스토랑과 바 간판을 달고 있습니다.
골목 곳곳에 기념품 숍 이 보이고 세계 각지에서 온 희고 노란 얼굴의 관광객들은 들뜬
기분으로 이 "예쁜 골목에 마음을 빼앗겨" 사진 찍느라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는 다음
모퉁이에 1,860년 주민들이 모여 모나코에서 벗어나 프랑스에 합병을 결의한 곳이라는
예배당 Chapelle des Penitents Blancs 을 지납니다. 그럼 옛날에는 여기도 모나코 네요?
돌로 지은 집들이 빼곡이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카페나 호텔에 기념품 숍 외에도 유난히도
"화랑" 들이 많은걸 보는데, 화랑에는 지중해 꼬트다쥐르 해안과 산간 마을 에즈의
골목길을 그린 풍경화 도 많지만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인물화 들이 많이 보이는데
눈에 착시효과 를 일으키는 특이한 그림들이 있어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동안 구경합니다!
현재 고급 호텔로 변했다는 셰브르 도르 성 을 지나면서 여행 가이드북에 적힌 것을 보면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시에 이 마을의 성벽이 파괴 되었다고 하는데... 1,706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시 이탈리아 사보이 왕국에 속했던 니스와 에즈 는 프랑스 루이 14세 의
군대에게 정복되었는데 왕의 명령으로 이 지방의 성벽이 파괴 되었다는 것이라고 하네요!
스페인왕위 계승전쟁 은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가 아들없이 죽자 유럽 주요국이 왕위계승권
을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인데 어째서 머나먼 벽촌 마을 까지 피해를 입었을까요?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 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는데 한 명은 루이 14세 와
또 한 명은 오스트리아 왕 이자....... 훗날 독일 황제가 되는 레오폴트 와 결혼 했습니다.
스페인은 국왕 카를로스 2세 사후에 유언에 따라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손자를 펠리페 5세
로 스페인 왕에 즉위시키니 계승권을 주장하는 오스트리아는 군대를 출정 시키는데
여기에 프랑스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영국과 네덜란드가 가세하여 연합군 을
편성함으로써 1701년 부터 1714년 까지 유럽 전역에서 전쟁 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럽판 세계 전쟁에서 연합군을 지휘한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장군은 영국의 말버러공
이었으니 말버러가 거느린 다국적군은 참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군대였는데, 영국군은
재력이 있는 대령이 연대병력을 모집하고 무장 시켰으니 사병들은 천민 출신 들로서
사기가 낮았으며 군대는 부정부패로 군량 및 장비를 횡령하는 사건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1704년 말버러 는 창병을 없애고 총검을 모든 화승총 병사들에게 착검 하도록 하여
그들이 창병 역할 까지 동시에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전술적 우위 를
점했으니, 전쟁 초기는 중앙에 위치한 프랑스와 동맹군 측에 유리 했으니
말버러의 연합군은 서로 멀리 분할되어 있는데다가 방어해야 할 곳 이 많았습니다.
네덜란드는 연합군 주력을 북쪽인 본국 가까이 배치하기를 원했으나 여기 니스와 에즈 등
남쪽의 이탈리아 지역이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북동쪽
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 오스트리아를 간과할 수도 없는 상황하에서도... 지중해 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영국 함대를 머나먼 이곳 니스 부근에 투입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말버러는 한곳 을 선택했으니 오스트리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동시에 오스트리아와
공조하여 라인강 저지대에서 양동작전으로 프랑스군을 패배 시켰습니다? 프랑스는
이후 여러 전선에서 참패하고 1713년에 유트리히트 조약 을 체결했으니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 했지만 프랑스는 큰 경제적 피해 를 입었습니다.
영국은 프랑스령 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차지했고 지브롤터 를 획득한 외에 스페인
식민지들과의 교역권을 보장 받았으며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국경선을 확정
하였던 것이고 또 오스트리아 는 밀라노와 나폴리 등을 스페인으로 부터 빼앗아
교황령과 사보이 왕국 및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훗날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서 통령 정부에 반대하는 왕당파 시위대 를 기상
천외하게 대포를 동원해 포격 함으로써 사태를 한방에 제압한 젊은 장군 나폴레옹 은
통령 정부에 참가하고 우여곡절 끝에 집권한 나폴레옹은 첫 해외원정으로 이탈리아 를
택했으니 사보이 공국을 거쳐 밀라노로 진격한후 베네치아와 나폴리 까지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아름답고 예쁜 가게들을 보자니 이 마을을 찾아온 관광객인
젊은 연인들도 예쁜데.... 문득 동아 일보에 ‘한상복의 여자의 속마음’
이라는 칼럼에 보면..... “그들의 ‘예쁘다’는 기준” 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적지 않은 남성이 여자 소개해 주겠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두 글자 질문을
던진다. “예뻐?” 세 글자일 때도 있다. “예쁘냐?”“
“여성들로 부터 비난을 단골로 받는 태도다. 그런데도 상당수
여성 이 남자 동료에게 자기 친구나 선후배를 두고 장담한다. “그럼! 예쁘지.”“
“실제 소개를 받고 만족하는 남자는 드물다 (여자 쪽도 그럴테지만?). 기대와 다른 외모에
실망한 남자에게, 주선해 준 여성이 재차 확인을 한다. “어때? 내 친구 예쁘지?
“남자들은 이 대목에서 혼란에 빠진다. 대체 여자들의 예쁘다는 기준 이 뭘까?
눈이 이상한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꽃미남 탤런트에 열광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왜 그들의 ‘예쁜 여자’ 란 기준은 믿을 수 없는 것일까. 이 주제를
놓고 30, 40대 남성 다섯 명이 논의를 거듭해 세가지 가능성 으로 추려 보았다.”
“첫째는 ‘심술’ 이다. 소개해 줄 남자와 여자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양쪽이 실망
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려는 일종의 악취미 라는 해석. 믿거나 말거나.”
“두번째는 ‘내가 제일 예뻐야 하기 때문’ 이라는 분석이다. 스스로가 예쁘다는
확인은, 여자로 하여금 온몸의 즐거움 세포를 깨워 삶의 희열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런 욕구가 은연중 반영 되어 자기만 못한 외모의 친구를 소개 상대로 떠올리게 된다는
얘기다. 이에 비춰보면 “내 친구 예쁘지?” 라는 질문은 “내가 더 예쁘지?” 나 다름없다“
“세번째는 ‘기준의 차이’, 남자들이 여자 용모만 보는데 비해 여자들은 관계 까지
반영해 예쁜지 아닌지로 표현한다는 분석이다. 여자끼리는 단순히
‘예쁘다’ 보다 ‘대인관계도 좋다’ 라는 사회적 인정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예쁘다” 는 ‘나랑 친해’ 란 의미이며 “진짜 예뻐” 는 ‘나랑 되게 친해 (그런데
나보다는 안 예뻐)’ 라는 뜻일수 있다. “걔 성격 정말 좋아” 는 ‘외모는 기대하지 마’“
“이런 세 가지 가능성과 유사한 맥락인지, 여자들은 ‘남자들 기준 예쁜 여자’ 에 대해
서는 인정하지 않는 공통점 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남자들에게 주목을 받으면
“예쁘게 입었을 뿐이잖아”. 대단한 미인이 나타나면 “딱 보니까 엄청 뜯어 고쳤네”“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아내 또는 여자 친구의 말을 거꾸로 인식 한다.
“걔는 예쁜지 모르겠더라.”(예쁨), “걔는 안 예쁜데 왜 인기가
있을까.” (정말 예쁨) “걔는.… 그래도 친구가 없잖아.” (엄청 예쁨)“
“그런데 여자들의 ‘예쁘다’ 가 실제와 일치할 때도 있다. 남편 휴대전화의
야유회 사진 을 본 아내가 말한다.
“자기네 신입사원 예쁘네.” 친하게 지내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