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GI의 평화 이념과 실천
박상필ㅡ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사회에는 항상 전쟁이 있었다.
마치 인류가 사멸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간이 있는 곳에는 항상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망이 존재했다. 물론, 인간집단 사이의 폭력 행사는 국가 간의 전쟁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도 다양한 집단 간의 분쟁으로 나타났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방어하고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 전쟁을 역설하고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인류역사에서 선한 전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전쟁은 언제나 무자비한 파괴와 비참한 살상을 동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전쟁과 분쟁이 없는 평화를 갈구했다.
그러나 평화는 단지 소극적으로 전쟁이 없는 상태에 한정되지 않는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평화란 전쟁이나 분쟁이 없을뿐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를 해체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평화는 결코 국가 간의 세력균형이나 국가 내의 법적 제도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보존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타인을 지배하려 한다.
이러한 욕망이 각종 갈등과 대립의 원인을 제공한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이기심을 제거하고
평화사상의 고취와 평화교육을 실시해 인간 간의 연대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평화학자 갈퉁의 지적처럼 폭력이 무력행사뿐만 아니라, 종교와 사상, 언어와 예술,
과학과 법, 대중매체와 교육에도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더욱 그러하다.
불교는 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외경에서 출발한다.
모든 사람이 우주 가치창조의 근원인 부처의 생명을 가진 평등한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법화경 <견보탑품>에 나오는 거대한 보탑처럼 모든 사람은 우주 중심에 있는 소중한 존재이다.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에 지옥계에서 보살계까지 모든 중생은 빠짐없이 부처와 동일한 불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어떠한 인종, 성(性), 종교, 신분,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낮추어 보거나 멸시하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 된다.
심지어 자신을 가볍게 여기고 타인을 중히 여길 때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렇다고 불교의 가르침이 타인을 소중히 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관념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야말로 적극적으로 타인을 위한 보살행(菩薩行)의 실천을 강하게 요구한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자기자신만의 행복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화타(化他)를 동반하지 않는 자행(自行)은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무한한 자비심을 가지고 일상 속에서 타자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는 것이
바로 불교가 가르치는 행복방정식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평화의 종교다.
세상에 평화를 강조하지 않은 종교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에서 종교는 항상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것은 바로 평화가 외부 힘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고,
인간의 마음속에 평화의 씨앗을 심는 것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평화이념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국제창가학회(SGI)다.
SGI가 평화사상을 고취하고 평화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는 언어를 통한 대화와 연대의 구축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SGI 역대 회장들의 평화를 위한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마키구치(牧口) 초대 회장은 약소국의 인간을 무시하고 전쟁을 일삼는 일본 군국주의에 맞서 항거하다
감옥에서 순교했다. 도다(戶田) 제2대 회장은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스승을 따라 감옥으로 갔고,
'원수폭금지선언'등을 통해 평화를 주창했다.
이케다(池田) 제3대 회장은 세계 민중에게 평화의 빛을 비추라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그대로 실행했다.
1970년대에 미국과 구소련, 중국과 구소련과의 평화를 위해 양국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남북한 정상회담, 세계시민교육 등을 촉구했으며,
1990년대에도 남북한 동아시아 세계평화를 위한 각종 정상회의 조약체결 평화제언을 제시했다.
그리고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과 같은 지도자, 토인비, 갈퉁, 로자 파크스
등과 같은 지식인과 대화하면서 일관되게 평화를 위한 행동을 실천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상호 신뢰에 기반한 대화야말로 인격과 인격 간의 진정한 교류라고 확신하고
평화의 주체인 인간들 간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0년대 동서 냉전의 붕괴와 더불어 평화적 만남과 분위기로 흐름이 바뀐 것에는
이케다 회장이 평화의 어젠다(agenda)를 일관되게 실천한 노력이 숨어 있다.
오늘날 전세계 1백 92개국의 SGI 회원들도 이러한 불교의 이념과 스승의 행동을 따라
일상 속에서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나날이 평화를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어디서든 빛나는 문화
이성림ㅡ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오늘날 세계는 문화의 세계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존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삶의 존엄과 가치(價値)에 대해서 관심을 돌리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짐멜이 정의한 'More than life'는 단순히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라
여겨지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문화의 출발은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그 본능을 넘어서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나온다.
문화는 말 그대로 질박한 삶의 형태를 조금 더 장식적이고 심미적으로 삶을 추동하는 힘이다.
개인 보다는 더 큰 무리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늬와 결을 삶에 입혀가는 것이
문화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비문화적이고 반문화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종식되지 않은 전쟁과 기아, 지진과 태풍 등의 자연재해 속에서 동물로 전락하는 인간의 고통을 수없이 목도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잘못된 제도와 관습 속에서 신음하는 약자들, 병자들, 사회의 그늘에서 말없이 소외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수없이 많은 구휼활동이 벌어진다 해도 그늘이 없는 만민평등의
문화세계를 완성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한 한갓 꿈에 불과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는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보려는 의지와 도전의 역사였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SGI는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 인간 생명 존엄과 생명 존엄이 희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줄기차게 벌이고 있다.(중략)
세계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냉엄한 국제 질서 속에서
전 인류적인 보편적 가치를 천명하는 이케다 SGI 회장의 목소리는 맑고 그윽하다.
그는 일본인이지만 일본을 넘어서 있고, 그는 종교인이지만 모든 종교를 넘어서 있다.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아(我)와 대아(對我)의 변증법적(辨證法的)
초월의식이 체득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분법적(二分法的) 논리와 이데올로기의 그물 속에서 허망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면서
인류 공영과 평화를 외치고 있는가!
SGI는 그런 허망한 환상과 아집(我執)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고 어떻게 가치 있는 삶을
함께 누릴 수 있는가를 실천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케다 SGI 회장이 천명한 바와 같이 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의 핵심은 자비(慈悲)에 있다는 명제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스스로를 몰락의 길로 몰아가는 현대인에게
내려치는 죽비와 같다.
개인적 욕망의 추구는 당연할 지 모르지만 그 욕망의 채움은 스스로 알아낼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다.
인간은 타자(他者)를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고 타자에게 향한 자비의 총량에 따라
자신의 값어치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이치는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이다.
SGI는 청소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피부의 색깔과 생각의 다름을 내치지 않고
포용하는 문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장학사업을 통한 인재의 육성, 구휼활동을 통한 약자에의 배려,
각양각색의 문화나 예술활동의 지원 등으로 SGI의 활동을 국한할 수는 없다.
이 글의 앞에서 정의한 문화의 정의는 이쯤에서 더욱 깊고 풍성한 의미로 전환된다.
가치 있는 삶이란 물질적 풍요에서 오는 여유나 안락함의 추구가 아니라 나를 버리는 수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나를 찾을 수 있고 그 궁극적인 나는 평화의 의미를 알고 그 평화의 의미가 혼자가 아닌
너와 나의 융합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문화의 진정한 모습이며 SGI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예술 분야의 벌판에서 만난 이케다 SGI회장을 존경한다.
그의 심미적 삶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온 누리에 펼쳐 보이려는 열정 앞에서,
그의 조건 없는 인류에의 사랑과 헌신의 자세에서 나는 한 없이 작아져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겉으로 화려하고 풍요로운,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문화의 홍수 속에서 자아를 찾고 자아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SGI의 활동은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서나 광대하게 비치는 문화의 큰 다리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