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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2]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요한 16,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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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 : 성령께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신다 <독서 : 사도 16,22-34 / 복음 : 요한 16,5-1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리라 하신다. 무슨 뜻일까?
먼저 세상은 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세상’, 곧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하느님을 인간과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긴다. 그러므로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님은 죄인 중의 죄인이다. 하지만 이는 ‘그릇된 생각’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어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영원한 양식을 받아 모시며 하느님 자녀로 살게 하셨다. 그런데도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을 죄인으로 여기니 크게 잘못되었다.
세상은 의로움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서 ‘의로움’은 하느님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녀이자 모세의 제자로서 율법에 순종하고 있기에 의롭다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그릇된 생각’이다. 하느님의 명령은 현세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영원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왔다가 ‘아버지께 가는’ 분, 곧 영원에서 현세를 관통하시며 하느님의 명령을 완수하신 분이기에 진정으로 의로우시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그분께서 하늘과 이어져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세상은 심판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세상은 세상의 권력 앞에 무력하게 짓밟히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고 심판받았다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영광으로 ‘들어 올려지는’(요한 3,14; 8,28; 12,32-33) 일이자 하느님 영광과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11,4; 12,23; 13,31-32), 흩어진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11,50.52; 12,11.19.32)인 동시에 아버지께 건너가시는 일(13,1)이다.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모르고 자기가 이긴 줄 아는 ‘세상’은 그러므로 이미 심판을 받았다.
이렇게 ‘그릇된 생각들’은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스스로 깨칠 수 없다. 오로지 성령만이 알려주실 수 있다. 그런데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돌아가신 후에야 내리신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떠나심이 자기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고 한편으로 기뻐해야 한다..........◆
[말씀자료 : 윤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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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부활 제6주간 화요일(15-05-12) I 묵상기도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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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sp.pauline.or.kr%2Ffsp_upload%2F2015%2F05%2F20150507111956_71749.JPG)
나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주님, 이제야 내 앞에 서 계신 주님을 발견합니다. 세상의 소리, 저의 욕심에 가리워져 주님의 소리를 듣지 못했음을 용서하소서. 오늘 하루도 제가 주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제 앞에 서 계신 주님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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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진리와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 세상의 많은 교사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하시고,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 [나해]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요한 15, 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8%2F09%2F00%2F52%2F489c6bb40b3d7%26filename%3Dda_icon05.gif)
영적독서 : 과묵한 여인 마리아
마리아는 진실한 여인으로 '영적 겉치레'를 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면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마리아가 과묵한 여인이라는 것은 말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이 존재 구석구석에 스며들게 했기 때문이다.
과묵한 여인이신 성모님, 유창하게 말하다 불치병에 걸린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저희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감추는 데 익숙해져 단순한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말할 거리가 없어도 언제나 말해야 된다고 믿는 저희는 거미줄에 잡힌 파리처럼 어리석고 캄캄한 함정에 자주 떨어지곤 합니다. 저희가 당신처럼 투명하는 드러내는 성사가 되게 하시고 하느님께 단순히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무한한 사랑의 바다에 빠져들게 도와주소서.........[안토니오 벨로, '성모님과 함께하는 31일 기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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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부활 제6주간 화요일(2015-05-12) I 복음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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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의 희생자들인 바오로와 실라는 감옥에 갇혔으나 기적적으로 풀려난다. 낙담한 간수가 자살하여 했으나 실라가 구출해 준다. 바오로는 간수를 구원하려고 기적적으로 풀려난 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 간수는 주 예수님을 믿어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다. 그에게도 영원한 구원의 길이 열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슬퍼한다. 그러나 이 이별은 심판 때에 변호자의 역할을 하실 성령께서 오시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세상에 예수님의 신비를 계시하시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하게 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또한 정의와 죄와 심판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실 것이다(복음). |
<복음묵상-1> : † 예수님의 떠남으로 오시는 성령
오늘 복음의 역점은 예수께서 떠나야 하심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잠긴 제자들을 격려하려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떠남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한 즉, 떠남이 없이는 성령의 오심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시면서, 오시는 성령의 구체적인 업무(業務)를 밝히신다. 아울러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5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머물러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신다. 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사실 모두에게 중요하다.
예수께서 '가신다'는 암시는 공생활 중에도 여러 번 하신 바 있다. 초막절을 맞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상경하신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내가 아직 얼마동안은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결국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한다"(7,33)고 가르치셨다. 또 간음한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 자리에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시고 난 뒤 "나는 간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찾을 것이며, 내가 가는 곳에 당신들은 올 수 없다"(8,21)고 하셨다.
이 두 경우는 예수께서 곧 가시게 됨으로써 세상에 남아 있는 시간의 절박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로서 예수께서 아직 머무는 동안 세상의 사람들은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상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이 마지막 시간에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사(13-17장)에서도 '나는 간다'는 말씀은 여러 번 등장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13,1) 최후의 만찬을 마련하셔서 고별사를 시작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도 예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 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13,33)고 하셨다. 공생활 중에 언급한 말씀들이(7,33; 8,21)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면, 여기서는 목전에 다가와 있는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하시는 데(16,5), 사실은 제자들이 두 번이나 질문을 했었다. 가신다는 말씀과 함께 사랑의 새계명이 선포되었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13,36) 라고 질문을 했으며, 예수께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고 하셨을 때 토마스도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일까? 요한복음사가가 예수님의 2차 고별사(15-17장)를 추가로 편집할 때 앞서간 1차 고별사(13-14장)의 내용을 무시했을 리는 없다. 결국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가시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주고자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가심'이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두 번째 '가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가심'은 제자들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조장하지만, 동시에 유익한 사건이 된다. 예수께서 떠나가시는 조건으로 오실 성령께서 그 빈자리를 채워주실 것이다.(8절) 성령은 바로 이 슬픔과 두려움을 제거해 주실 '협조자'이시다. 예수께서 오시는 성령을 협조자로 계시하심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협조자로서의 성령계시는 오시게 될 성령이 제자들의 슬픔과 두려움을 단순히 제거해 주실 것임을 알아들으라는 학습(學習)이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을 제거하여 기쁨과 신뢰심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실제(實際)를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는 곧 현장감(現場感)을 의미한다. 따라서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실제로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실 것이고, 동시에 진리의 성령으로서 세상의 죄와 정의에 대한 올바른 판결을 선언하실 것이며(9절), 예수께 대한 불신(不信)을 유죄(有罪)로 판결하실 것이고(10절), 세상의 권력자, 즉 예수님을 팔아 넘긴 자와 죽인 자들을 오히려 죄인으로 판결하심으로써(11절), 예수님의 부당한 재판을 다시 세워 그분의 의로움을 밝혀주실 것이다.
그렇다고 오시게 될 성령 하느님께서 제자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처럼 이런 업무들을 수행하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업무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교회를 통하여 수행된다. 제자들과 교회가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한 검증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분의 복음을 증언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풀밭에서 시계를 잃어버린 사람이 아무리 찾아도 시계는 보이지 않고 풀만 보이다가, 간절한 기도를 올린 후 다시 찾아보니 풀은 보이지 않고 시계만 보이는 경우와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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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2> : † 성령은 우리의 보호자, 우리의 희망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죄와 정의와 심판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죄와 정의와 심판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올바르게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죄이고 정의인지 그리고 심판인지를 알려면 보호자(성령)가 오셔야 알 수 있다.
보호자가 오시면 우리가 그 동안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죄로 드러날 것이고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어떤 것이 정의인지 그리고 심판이 올바른 것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죄이고 정의인지 그리고 올바른 판단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내 마음 안에 오셔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보호자가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복음을 통해서 오신다. "보호자가 오시면"이라는 말은 나의 삶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보면 무엇이 죄이고 정의이었는지를 심판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묵상하지 않으면 내가 죄를 짓고 있어도 죄를 지은 것인지 올바르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그런 잘못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복음을 묵상하는 사람만이 자기 죄를 볼 수 있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도 복음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자기 죄가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같은 죄인들은 죄를 짓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죄 고백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성인들은 매일 매일 통회의 눈물을 흘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고해성사를 보았던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몇 년 전에 우리 사회를 떠들썩했던 "막가파"사건이 떠 올랐다. 막가파들을 취조하던 한 형사의 고백을 일간지 칼럼에서 읽은 것이 어렴풋이 기억된다. 한 형사가 그들을 취조하던 중 설렁탕 집에 데리고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을 사주었다는 것이다. 그중 한 젊은이가 설렁탕을 먹다가 울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울먹이던 젊은 이가 말하기를 "자기는 지금까지 그 누구한테서도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다. 형사님이 사주는 설렁탕이 자기 생애에 있어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는 것을 받아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배고플 때 그래도 자기를 위해서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는 형사님이 고마워서 운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몇 년전 그토록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고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그들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행동을 저질렀던 젊은이가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는 형사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고마움에 설렁탕 앞에서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면 그 젊은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폭악한 살인마가 아니었다.
설렁탕 한 그릇에 눈물을 흘렀다면 그 젊은이는 얼마나 순수하고 나약한 존재이었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누군가가 사주었을 때 그 고마움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나는 우리 사랑에 메말라 있는 이들에게 설렁탕 한 그릇의 사랑을 베푼 적이 있는가? 그를 살인마로 만든 사람은 바로 그 젊은 이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한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이고 그 책임은 그가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 더 크다.
우리가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 42-43)라는 말씀을 묵상하였다면, 사랑에 굶주려있는 이들을 그렇게 무관심 속에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고 말씀했던 대로 우리 자신의 죄와 의로움과 심판을 빍혀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요, 말씀이시다. 우리는 그동안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 그토록 사랑을 외쳐대면서 과연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무슨 사랑을 베풀었고 어떤 하느님의 모습을 증거하였단 말인가?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우리들이 무엇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는가?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이 판단하고 의롭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심판한 것이 있는가? 정말 복음의 빛으로 나의 삶을 되돌아 본적이 있는가?
나는 소그룹 복음 묵상을 몇 그룹 지도하고 있다. 매주 복음 묵상을 나눌 때마다 울음바다가 된다. 복음을 북상하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와 심판을 보게되기 때문이다.
어느 자매님이 다음과 같은 묵상을 고백하였다. 정신적으로 약간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4살 되었을 때 너무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손으로 떼리고 그것도 안되어 빗자루가 다 망가지도록 떼렸다는 것이다. 그 때 심정같아서는 아들을 죽이도록 미워했고 죽여서도 자기 속이 풀리지 않을만큼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온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울면서 엄마 엄마하고 울고있었는데도 그냥 떼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 어느 날 피정을 갔었는데 옆 사람을 꼭 안아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옆 사람을 안아주면서 아들 생각이 나서 한없이 울었다는 것이다. 즉시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꼭 안아주면서 얼마나 귀한 아들이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아들은 하느님이 주신 큰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되고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있는지 모른다고 고백하면서 울었고 묵상 나누기하던 자매들은 그 자매의 고백을 들으면서 함께 울었다. 어쩌면 자기들의 잘못을 보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죄를 보게 되기 때문이리라.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 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히브 4, 12-1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속 마음을 보게 해주신다.
우리는 말씀에 빛을 받지 않으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죄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의로움과 심판을 보게 된다. 우리가 게으름, 이기주의, 무관심, 불성실함, 미움, 판단, 탐욕 등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죄와 정의와 심판을 말씀해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이다.
자기가 잘못된 생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말씀자료 : 유광수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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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주님,
이제야 내 앞에 서 계신 주님을 발견합니다.
세상의 소리, 저의 욕심에 가리워져
주님의 소리를 듣지 못했음을 용서하소서.
오늘 하루도 제가 주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제 앞에 서 계신 주님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