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 부상자나 죽어가는 장병들을 돌봐 '디엔 비엔 푸의 천사'란 별명으로 불린 쥐니비에브 드 갈라르가 99세를 일기로 저하늘로 떠났다고 영국 BBC가 31일(현지시간) 전했다. 고인은 70년 전 베트남 북부 라오스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디엔 비엔 푸에서 함락된 요새 안에서 프랑스군 희생자들을 돌본 유일한 여성 간호사란 사실이 알려져 유명인이 됐다.
그녀는 한 달 이상의 유혈 전투 끝에 그 요새가 1954년 5월 7일 베트민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병사들을 살펴 프랑스군의 영웅으로 추앙됐다. 당시 베트민 군에 붙잡혔다가 풀려난 그녀 사진이 프랑스 잡지 파리 마치의 프론트 면에 실릴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나중에 그녀가 미국 뉴욕을 찾았을 때 색종이 테이프가 뿌려질 정도로 환대를 받았으며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훈장을 수여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엑스(X, 옛 트위터)에 글을 올려 "인도차이나 전쟁 최악의 순간에 쥐네비에브 드 갈라르는 1만 5000 프랑스 장병들의 고통 속에 본보기와 같은 용기와 헌신을 보여줬다”고 애도했다.
1925년 파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성장한 드 갈라르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간호원 교육을 받고 육군 항공대 간호장교로 임관했다. 디엔 비엔 푸에서 부상한 장병들을 탈출시키는 여행을 여러 차례 한 뒤 그녀는 1954년 3월 항공유 유출로 비행기가 뜰 수 없게 돼 발이 묶였다. 며칠 뒤 베트민은 무차별 공습을 퍼부었다.
당시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8년을 허비한 프랑스 육군은 전쟁의 막바지에 내몰려 있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디엔 비엔 푸만은 내주면 안된다는 명령이 하달돼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워낙 외진 시골이라 군사적 중요성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저유명한 보 응구옌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 군은 산악 정글 지대에서 프랑스군을 포위한 채 50일 내리 박격포탄을 퍼붓고 사냥총같은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한 보병을 보내 기습하며 항복하라고 압박했다.
무덥고 위생 상태도 엉망일 수 밖에 없어 드 갈라르는 많은 수의 사지절단과 외과수술을 감행하는 군의관들을 도왔다. 그녀는 또 죽음을 앞둔 병사들을 다독이며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면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본인은 재앙의 한복판에 있어서 알 길이 없었지만, 세계 언론들은 부상자들을 이타적으로 살피는 '디엔 비엔 푸의 천사'에 대한 긍정적인 뉴스를 연일 내보냈다.
미국 잡지 타임의 프로필 기사가 대표적이었다. “디엔 비엔 푸의 지하 병동에서 죽음과 항생제, 그리고 썩어가는 상처들의 한가운데, 드 갈라르 간호사는 일하고 걱정하느라 체중이 8kg이나 빠졌다. 그녀는 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다. (흰색 간호복 대신) 결국은 녹색 작업복으로 갈아 입었는데 때때로 공수부대원의 바지와 셔츠로 바뀌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만의 벙커를 갖고 있는데 낙하산에서 나온 실크 천으로 덮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좀더 자주 그녀는 부상 장병 옆 들것에서 그대로 잠든다."
드 갈라르는 한때 연합군사령부(GHQ)에 “나도 갇혀 있어 좋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디엔 비엔 푸가 함락되기도 전에 프랑스군 무공훈장과 레종 되뇌르를 수훈했다. 또 프랑스 외인부대 명예회원이 됐다.
그녀는 회고록에다 “디엔 비엔 푸에서 난 약간은 어머니, 약간은 누이, 약간은 친구였다. 단지 내가 거기 있었다는 이유로, 내가 여자였으므로, 그곳이 덜 비인간적인 지옥으로 보이게 했다”고 털어놓았다.
종전 후 드 갈라르는 군인과 결혼, 파리로 돌아와 살았다. 그녀는 늘상 자신이 의무를 다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국전쟁에 파병됐다가 곧바로 인도차이나로 이동한 프랑스군 부대원들이 있었는데 한국인 노무자와 카투사처럼 프랑스군 부대에서 복무한 한국군 병사들이 있었다. 그 중 일부가 현지 입대 형식으로 프랑스군 외인부대에 입대하거나 부대를 따라 인도차이나로 갔으며 3명 정도가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혔다가 한 명이 풀려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함경남도 함주군 출신이었던 전병일 씨는 한국전쟁 때 월남해 프랑스군의 일을 도왔지만 휴전 협정 이후 귀향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군을 따라가 입대했다. 이때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됐고, 그 뒤 알제리 독립전쟁에도 참여했다. 그 후 '북한인'이면서 '남한인'으로서 프랑스에 살고 있다고 중앙일보 전진배 기자가 2008년 4월 14일자 신문에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