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홍의 나쁜 생각814 - 트라우마
누구든 한두 개의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유년기나 소년기, 청년기, 그러니까 성장기에 겪은 트라우마는 대체로 평생 지니고 사는 것 같다. 필자의 가까운 지인인 C는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것을 불편해하고 모든 것이 각지게 정리되어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을 지녔고, 무엇이든 늘어놓고 수집해야만 심리적 안정감을 갖는 듯한 K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스스로 꼼꼼히 정리하는 걸 보면서 이들이 겪은 트라우마는 무얼까 추측해보곤 한다. 물론 이들의 성격이 반드시 트라우마의 결과라고 단정 지울 순 없다. 다만 필자의 성격과는 많이 다를 뿐이다. 필자의 성격을 곰곰히 짚어보면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주로 성장기에 받은 일종의 트라우마의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생긴 편견일지도 모른다.
간혹 무슨 모임 같은 곳에서 마주 앉게 되는 사람들 중 전혀 교감이 안 되는 성격들을 볼 때, 젊었던 필자는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쉽게 화를 내는 필자의 성격도 일종의 피해의식에서 오는 트라우마의 곁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가능한 교감이 어려운 모임에는 불참하게 되었고, 이는 때로 현실적 불이익을 초래하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내 성격의 한계라고 자위하곤 했다. 이는 아직 필자 개인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같이 화를 낸다는 것도 불로 태울만한 에너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인 모양이다. 언제부턴가 화낼 힘조차 많이 쇠해진 필자를 남처럼 보게 되곤 한다. 그렇다고 트라우마가 극복된 것은 아니니, 그저 조금 서글퍼지곤 하는 것이다.
시월의 시 / 딜런 토마스 /이상섭 옮김(6)
유독 시월 바람이
유독 시월 바람이1) 서릿발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 괴롭힐 때면,
움켜 잡는 태양에게 붙들려 불 위를 걸으며,
땅 위에 게의 그림자2)를 던진다.
바닷가, 새들의 지꺼림을 들으면서
겨울 막대기 사이 까마귀 기침 소릴 들으면서
떨며 지껄이는 바쁜 내 심장
마디마디 피 흘려 낱말들을 쏟아 낸다.
또한 낱말 탑에 갇혀서 나는,
지평 위에 나무처럼 걷고 있는
여인들의 수다스런 모습과
공원의 별 몸짓한 아이들 소릴 본다.
당신에게 홀소리의 너도나무로 몇 마디 말을 지어 드리지3)
또는 참나무 목소리로, 가시 돋힌 여러 지방의 뿌리에서
당신들께 몇 가락 들려 드리지.
물의 말씀으로 몇 줄 말을 지어 드리지.
은화식물4) 화분 뒤 까딱대는 시계가
시간의 말을 들려 주고, 신경성의 의미가
지침 달린 원판 위를 난다, 아침을 웅변한다.
그리고 수탉 풍향계5) 속 바람 찬 일기를 알린다.
당신들께 초원의 신호로 몇 마디 지어 드리지.
내가 다 아는 소리 말하는 신호 깃발 초목이
벌레 꿈틀대는 겨울6)과 더불어 눈알 속에 파고든다.
까마귀의 죄에 대하여 몇 마디 해드리지.
유독 시월 바람이
(거미 혓바닥7)의 가을 주문으로, 훼일스의 큰 목소리 산으로
당신들께 몇 마디 지어 드리지.)
무우의 주먹으로 땅을 괴롭힐 때면,
무심한 낱말들로 당신들께 몇 줄 지어 드리지.
연금술의 혈액이 분주히 달리며 글자 쓰면서,
닥쳐오는 광란을 경고하던 심장을 고갈시켰다.
바닷가, 어두운 홑소리의 새 소릴 들어라.
1) 10월 27일은 토마스의 생일. 따라서 시월을 주제로 한 시는 모두 그의 시인으로서의 생활, 사상, 희망과 관계 있다.
2) 게의 그림자: 자연의 세력에 위압당한 듯이 납작한 꼴로 횡보하는 게와 자기를 비교한다. 시월의 뻘건 태양은 성난 듯이 토마스를 게 잡듯 위압한다.
3) 당신에게 ---- 말을 지어 드리지: 모든 자연, 물과 사물이 그에게는 시의 낱말로만 인식된다. 심장조차 음절처럼 뛴다. 그것은 시인인 그의 괴로운 운명이다. 광란(죽음)을 예고하던 심장의 피도 시가 되어 다 쏟아져 버릴 판이다.
4) 은화식물: <fern>은 양치류의 식물. 식물 중 가장 원시적 식물, 즉 진화가 가장 늦은(혹은 정지된) 식물로서, 살아 있는 죽음을 상징한다.
5) 수탉 풍향계: 수탉 모양의 풍향계. 겨울 바람은 죽음의 입김이다.
6) 벌레 꿈틀대는 겨울: 겨울엔 벌레가 없으나, 죽음을 상징하는 겨울 자체가 생명을 파먹는 하나의 벌레이면 궤변이다. <벌레>는 궁극적으로 큰 뱀, 용, 즉 사탄이다.
7) 거미 혓바닥: 게로 상징되던 시인이 다시 <거미>로 상징된다. 거미는 외롭게 살며 제 속의 것을 뱉아 집을 짓는 (창작하는) 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