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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의 내용은 현하(現下)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상당 부분 사실과 달리 왜곡 되어 있는데 그 중
공산군의 침략을 막아 내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위대한 우리의 초대 대통령-국부(國父)를, 오늘의 우리 후손 들이 “욕심 많은 비겁-파렴치 늙은이” 쯤으로 매도 함은 일본의 역사 왜곡과 달리 우리의 조상을 욕 되게 하는 것 이라 용서 할 수 없는 배은망덕 이다.
우리가 이러한 배은망덕 역사 왜곡을 시정, 자성 하지 않는 한, 하늘은 우리 대한 민국의 미래를 차단(遮斷)하여 붕괴 시킬 것이다 라는 취지에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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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뺨 치는 우리의 역사 왜곡-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 시 강제 동원한 위안부 문제의 부끄러움을 면 하고자 <위안부는 군대 내에서 강제 동원 한바 없고, 돈을 받은 매춘부 일 뿐이다,> 라고 비겁한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
이런 인면 수심(人面 獸心)의 역사 왜곡이 일본이나 중국에만 있는 일일까?
아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우리 나라의 역사 왜곡은 일본이나 중국에 절대 뒤 떨어 지지 않아 압도 되고 있는 바라, 그 탁월함이 뛰어나다 고 판단 된다.
그 역사 왜곡의 사례는
지금 우라 나라의 거의 모든 대중 들은 “
<“
<배를 가라 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를 철거 하리> 라고 지시 하여
왕을 뒤 따라 피난 하고 있는 백성의 피난길을 막아 버리고 자기 혼자
만 구명 도생(苟命圖生) 하였다는 군주(君主)의 비겁 함에 비유 하였다..
(당시 서울 도성 주민 들은 도성을 버리고 주민 몰래 빔에 몽진 길에 오른
선조를 원망 하여, 분노, 닌동, 통곡 하고 선조가 떠난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과 왕자 임해군의 집에 불을 질렀다. 한다.)
위 “
1, 6,25 개전 초기 한강 다리(인도교)를 건너 피난 하면서 즉시 한강 다리를 폭파 한 것을 보아 “
2, 위 한강 다리(인도교)를 폭파 한 사실을 보아 “
3, 위 한강 다리(인도교)를 폭파로 말미 암아, 피난 가지 못한 많은 서울 시민은 물론, 피난 하였던 국민 이라도 모두, 근세 조선 중기 선조를 백성 들이 원망, 분노 한 것과 같이, “
4, “
5, “
6, “
7, “
8, “
[6,25 사변 개전 초기 시 “
위 당연 예상 되어지는 “8개 사항”을 이하 에서 “한강 다리 폭파 시 당연 예상 되어지는 8개 사항-8개 사항” 이라고 줄여서 칭한다]
과연 위 “8개 사항”이 일어 났을까? 만일 아니라면. 6,25 사변 개전 초기시 위 한강 다리를 건너고 난 후 즉시 폭파 하였다 하는 사실은 없었었던 일이고, “
과연 위 “8개 사항”이 일어 났는지 각 순번 별로 검토 해 보자
1, 6,25 개전 초기 당시 과연 “
만일 “
“
위 기차를 타고 피난 간 것으로 보아 <한강 다리(인도교)를 차량 또는 도보로 건너 피난길에 올랐다.>는 주장은 허구의 사실 이고, 따라서 <한강 다리를 건넨 후 폭파 하였다>는 주장은 악랄 하게 “
“서울을 사수 하겠다”는 “
위 기차로 출발 하였다는 사실을 필자는 “
조갑제 닷컴 (기자 조갑제의 세계): http://www.chogabje.com/
프란 체스카 여사의 난중 일기: http: www.chogabje.com/board /subcon/list.asp?c_cc=F1086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
<남행 열차를 타기로 결정되었다. 비서관이 간단히 짐을 챙겼다. 금고를 탈탈 털어도 5만원 밖에 없었다
……………………….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차창이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온 3등 객차였다.>
<참고>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
<………………무쵸 (미국)대사는 “대구가 적군의 공격권 안에 들어갔다”면서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무쵸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슬그머니 허리춤에서 모젤 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쵸는 입이 얼어 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오면 이 총으로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2, “
“
한강 다리(인도교)를 건넌 후, 즉시 폭파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 할 것 이므로,
<”
꾸며낸 거짓 헛소문-역사 왜곡 일 것 이다.
당시
따라서 <”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하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하게 남하(南下)를 건의했다. “안 돼! 서울을 사수(死守)해야 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쾅 닫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신 장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수원까지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통령은 “뭐야! 누가 마미한테 그런 소릴 하던가? 나는 안 떠나!”하고 고함을 질렀다 신 장관이 때를 놓지지 않고 “각하가 수원까지만 내려가 주시면 작전하기가 훨씬 쉽겠습니다” 라면서 머리를 숙였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1월2일>
<…………. 6월에 떠날 때는 며칠 동안 수원에 내려갔다가 미군의 지원이 이루어지는 대로 즉시 서울로 돌아올 것으로 믿었었다.>
3, ”
”
한강 다리 폭파로 말미 암아, 피난 가지 못한 많은 서울 시민은 물론, 피난 하였던 국민 이라도 모두, “
위 원망, 저주와 북한 추종이 없었고 열열히 지지 하였다면 그것은 ”
6,25 전쟁에 참전 했던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중극으로 귀환 할 당시
“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
<…………… 다리는 폭격으로 모두 부서져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도로변에는 영양실조로 수척해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통령의 차를 보자 눈물을 흘리면서 만세를 부르고 손을 흔들어 환영했다. 대통령도 나도 감격에 겨워서 눈물을 흘렸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10월1일>
<오늘 대통령은 서울 거리로 민정시찰을 나갔다. 우리는 태평로를 지나 남대문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남대문 근처에 이르자 대통령을 알아본 시민들이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대통령은 차를 멈추라고 한 뒤 차 밖으로 나섰다. 삽시간에 시민들이 모여들어 대통령을 얼싸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
<……… 바로 열흘 전까지 평양은 우리의 적인 공산당들의 아성(牙 城) 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의 안위(安危)가 몹시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태극기를 손에 든 평양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수많은 시민들과 악수하며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바람에 수행했던 사람들과
4, 1,4 후퇴 당시에도, “
”
위 1,4 후퇴 당시에 한강 다리(인도교)를 폭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시실 이므로 별도로 설명 하지 않겠다.
”
5, “
“
만일 ”
“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9월26일>
<대통령은 오늘 같은 명절날 수행원들이 점심을 거르게 된 것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또 …….집 없는 동포들이 다가오는 겨울을 잘 넘길 수 있도록 서로 돕자고 호소했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1월29일>
<오후 늦게 우리는 관저 뒷산을 산책하다가 남루한 옷을 입은 열네
살짜리 동네 소년을 만났다. 대통령은 이 소년과 금방 친해져서 그의 집까지 따라가 그의 가족을 방문하게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형이 전선에 나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1월13일>
<…………보일러 시설이 없는 우리 관저에서 난로도 못 피우게 하고 온 몸을 담요로 감은 채 집무실에서 일하는 대통령을 보는 김활란 박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면서 연세도 있으시니 난로쯤은 피우고 일하시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피난민 동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하다”고 딴전이었다>
6, “
“
애초
한강 다리(인도교) 까지 폭파 할 만큼 더 살기를 바라 목숨을 귀중 하게 생각 했다면, 당연히 목숨이 안전한 일본이나 제주도로 피난 하여야 할 것 인데, 수원으로 피난 계획 하였다는 것은, <자기 혼자 만 살기 위해 한강 다리(인도교)를 폭파 하였다>는 주장은 꾸며낸 “거짓 허위 주장-역사 왜곡” 이라는 것을 증명 할 것이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6월27일
<……………“수원까지만 가면 서울에는 자동차로 갈 수 있겠지....”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서울 생각뿐인 것 같았다.
……………….. 이 소식으로 활기를 되찾았고 임시정부를 대전으로 옮기기로 했다. 대통령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충남 지사 관저를 숙소로 정했다.>
7, “
, “
그리고 따뜻한 성격이라면 국군의 희생과 국민들의 피난 생활 고통을 줄이고자 노력을 하였으며 위 한강 다리도 폭파 하지 않았을 것 이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8월19일>
<또 시민들 가운데는 대통령께서 드시라고 감자, 옥수수, 계란, 닭
등을 지게에 지고 와서 두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대통령은 이런
음식 재료가 생기면 몽땅 전방이나 후방 훈련소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도록 했다. >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
<…………..시민들은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한강교 부근에서는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는 피난민들의 대열이 처참했다. 그 피난민들의 대열을 바라보던 대통령이 침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듯 한참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 후송되어 온 부상병들을 돌아보고 온 대통령이 몹시 침통한 표정이어서 나도 무거운 마음으로 말없이 대통령의 오버코트를 받아들었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
<대통령은 오늘 아침 고기 국물이 아닌 북어 국물로 끓인 떡국을 동치미와 함께 두 그릇이나 들었다. 대통령이 “설날인 오늘 우리 국민 모두가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순간 나는 목이 메어 눈물이 나왔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1950년11월>
<시간 나는 대로 일선장병을 위문하고 부상병들을 위한해 주며 전재민들 구호 상황을 살피거나 전쟁고아들을 안아주고 어루만져 주던 대통령…………………11월 말부터는 특히 일성장병과 병원의 부상자들, 그리고 고아원에 보내 줄 위문품 및 선물 준비 관계로 분망한 나날이었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10월12일>
<……….. 요즘은 잠자리에 누우면 전쟁고아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어른거리고 부상병들의 신음 소리가 귓전을 맴돌아 통 잠을 이루기 힘든다.
.... 한밤중에 침대에 엎드려 “하나님, 이 미련한 늙은이에게 보다 큰 능력을 허락하시어 고통 받는 내 민족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힘을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대통렁의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8, “
“
그렇게 국군과 피난민의 고통을 생각 하는 늙은 대통령이 한강 다리를 폭파 하여 서울시민을 사지(死地)로 밀어 넣었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7월29일>
<…………………밀려드는 피난민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서 쌀값은 아침 저녁이 다르게 뛰어 오르고 있다
………대통령은 점심을 밥 대신 삶은 감자나 밀가루 음식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사실 대용식을 바꾸고 나서 대통령은 몹시 허기(虛飢)를 느끼는 듯하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7월30일 이른 아침>
<이기붕 씨의 외모가 워낙 왜소하고 쪼글쪼글 한데다가 대통령도 풀 안 먹인 후줄근한 모시차림의 늙은이였으니 참외장수가 대통령과 서울시장 일행을 알아 볼 리가 없었던 것이다.> ……….. 힘없는 모시옷의 저 노인네, 대통령은 피곤해 보이고 더 늙어 보였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8월10일>
<대통령과 나는 온몸에 땀띠를 뒤집어썼다……. 워낙 물이 부족하여 밤이면 물 한 대야를 떠다가 수건을 적셔서 대통령의 땀을 닦았지만 땀띠는 점점 심해져서 진물까지 흘렀다.>
참고 : 프란 체스카 난중 일기-<9월25일>
<…….내일은 추석(秋夕)이다. 우리는 고기를 구하지 못했다. 시장을 보러 나갔던 양 노인과 경호원들이 밤과 배 등 과일과 몇 가지 찬거리를 사왔다>
위 “한강 다리 폭파 시 예상 되는 “8개 사항”의 지적이, 없었던 것을 보아. <“
위 “
(필자는 6,25 사변 당시는 10세 정도 되는 어린 나이였으나, 장남인 관계로 선친이 당시
“
“
“
그 “역사 왜곡” 실력은 일본을 뺨 친다 할 것 이고. 위안부 “역사 왜곡”으로 일본을 비난 만 할 것이 이니라, 우리 국민도 자성 해야 함을 의미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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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개승만이 죄는...지은죄가 많아 후손이 없고,.친일파, 독립자금 빼먹은놈,개독앞잡이..라고 불리는 것으로도...매우 부족하다..
눈만 버렸네.
왜넘이 쓴글로밖에 볼수없는글.
엄연한 사실을 아니라고 우긴다고 사실이 안바뀌지.독립운동 자금도 개인적으로 제멋대로 쓴 횡령범.
벨 .... 걍 내가 단군이고 예수고 부처고 공맹이다. 이말이 더 믿음이 가겠소.
그 역사적 사실이 설사 오류라고 칩시다. 그 사실이 오류이기 때문에 김일성과 같은 독재를 하고 온갖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어떤 대통령이 한나라의 국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자신의 출세와 부귀영화를 위한 촌부라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옳고 그른 것은 권력 뒤에 역사를 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가 추앙받아야 후세들이 가슴을 펴고 살겠는가?
죽일놈은 죽여야 국민의 결기가 살아서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다.
몸둥이 하나 살려고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참고 읽고 볼려고 해도 볼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어떤 fact로(프렌치스카 일기- 충분히 조작한 냄새가 남) 작성을 했는지 모르 겠으나 이 내용이 이승만이의 실정에 대해 왜곡한 글이라 밖에 볼수가 없습니다. 한강 다리에 수천명이 피난으로 건넌고 있는 중에 폭파해서 많은 유민을 죽인 아주 나쁜 넘으로 역사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 남쪽.
국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황원희 중위 등 장교 3명은 이시영 부통령이 다리를 넘어오자 도화선 4개에 불을 붙였다.
"쾅~쾅~쾅"
먼저 한강철교 3개 지점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하늘에 큰 화염이 일었다. 10분 후에는 한강인도교 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되었다.
이순간에 한강 인도교를 건너가던 트럭들과 사람들이 산산조각 나면서 한강으로 날라갔다.
남아 있는 다리 위에는 시체와 부상자가 즐비했다.
당시 강을 건너기 위해 인도교에 가까이 있었던 어느 특파원은 "지프차에서 도강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오렌지 색깔의 큰 화염으
로 밝아지고 굉장히 큰 폭발소리가 들리면서 우리가 탄 지프가 4~5미터나 공중으로 올라 날라갔다"고 회고했다.
폭파 장면을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은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고, 500~800명의 인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밀려드는 인파와 차량을 헌병들이 통제하면서 주로 군인과 경찰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희생자에는 민간인이 많지 않았다.
희생된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확인된 경우는 종로경찰서 직원 77명 뿐이다.
이렇게 많은 인명피해를 보면서 다리들을 폭파했는데 그 결과는 어땠을까?
한강의 다리들은 모두 파괴된 것이 아니었다.
한강 인도교와 경인철교 하행선, 경부복선철교 상행선은 완전히 끊겼지만, 경인철교 상행선과 그 옆에 있던 경부복선철교 하행선은 온전했다.
2개의 다리에 설치한 폭약이 폭발하지 않은 것이다.
인민군은 이 다리를 이용해 사흘 후 한강을 넘어간다.
미군은 6월 29일부터 이틀동안 B-26 폭격기를 동원해 한강철교를 맹폭격했지만 절단에 실패했다.
공식적으로 철교가 폭격기에 의해 완전히 끊어진 것은 7월 16일에 가서였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서울시민이 정부의 공식 발표를 들은 것은 6차례였다.
국방부 담화문이 6월 25일 정오에, 무초 미국 대사의 입장 발표가 6월 26일 새벽 6시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생방송이 같은 날
아침 8시에 발표됐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 발표가 6월 27일 밤 10시부터 11시까지 3번 반복 방송되었다.
가장 악영향을 끼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였다.
그는 피난간 대전에서 녹음한 연설을 통해 "유엔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했고,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군수와 물자를 날라 도우니까 국민들은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이 방송을 듣고 피난길에 나서려던 많은 서울시민들이 도로 짐을 풀고 주저 앉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날 새벽 3시에 경무대를 빠져 나와 서울역에서 특별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가다가 대구에 도착했으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지적에 따라 열차를
되돌려 대전에서 내렸다.
충남지사 관사에서 여장을 푼 이승만은 태연하게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담화문을 녹음한 것이다.
대통령이 도망간 것을 뒤늦게 안 신성모 국방장관이 27일 오후 2시에,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새벽 2시에... 군 지휘 라인에 있던 인물들이 끗발 순서대로 한강을 넘은 후 한강다리가 끊겼다.
채병덕은 미아리에 인민군 탱크가 들어오던 무렵 "적의 전차가 시내에 들어왔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고 다리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서둘러 한강을 건넜다.
한강다리가 끊기자 대다수의 서울시민들과 상당수의 국군, 엄청난 전쟁물자가 북한의 수중에 떨어졌다.
폭파 직후인 7월 초 주한미군사고문단이 조사한 결과,
전쟁 발발 당시 9만 8천 명이었던 국군이 5만 4천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전쟁이 터지고 1주일 사이에 4만 4천 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다는 얘기다.
또 미 극동사령부의 전방지휘소 처치 준장은 6월 29일 전선을 시찰하러 수원에 온 맥아더 장군에게 2만 5천 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전쟁 개시 4일만에 남은 병력이 1/4로 줄었다는 보고다.
군사전문가들은 인민군이 서울역 등 시내 중심가로 들어선 것을 28일 낮 12시 정도로 보고 있다.
따라서 6~8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도 폭파를 서두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너무 서두른 폭파 때문에 서울 시민 대부분은 물론 1만 명에 달하는 군사력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강다리 폭파에 대한 비난이 일자 이승만 정부는 서둘러 속죄양을 찾았다.
군사작전의 총책임자인 채병덕 전 참모총장이 하동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그의 지시를 받고 다리를 폭파한 최창식 공병감이 책임을 뒤집어 쓰고 체포됐다.
그는 1950년 9월 16일 '적전비행'의 죄목으로 부산에서 총살되었다.
폭파의 책임은 당시의 지휘체계로 본다면, 대통령 이승만~국방부 장관 신성모~국방부 차관 장경근~참모총장 채병덕~참모부장 김백일로 내려가야 하는데 최말단 실무 책임자에게 떠넘긴 것이다.
그러나 최창식 대령의 미망인은 12년 후 재심을 청구했다.
최 대령은 군법회의 판결 재심을 거쳐 1964년 10월 23일 무죄를 선고
받아 사후에 복권되었다.
그것으로 이 사건은 흐지부지되면서 역사적 심판으로 숙제를 남겼다.
한편 간신히 서울을 빠져나온 국회의원 50여 명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결의했다.
대통령이 국방을 등한시하고 정부가 경솔하게 행동해 서울시민과 국민들을 전란의 회오리에 몰아 넣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같은 결의를 전달하기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간 신익희 국회의장과 장택상. 조봉암 부의장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승만은 "내가 왜 국민 앞에 사과해? 사과할테면 당신들이나 하세요" 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승만이 저런 인간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런 인간이 아니라면 미국이 그 자리에 앉히지도 안았을 테니 할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