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우리는 개천쪽으로 문이 난 납작한 집들이 개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동네에서 자랐다. 그 동네에선 누구나 그렇듯 그 애와 나도 가난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번번히 월급이 밀리는 시원찮은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그 애의 아버지는 한쪽 안구에 개 눈을 박아넣고 지하철에서 구걸을 했다. 내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산처럼 쌓아놓은 개구리 인형에 눈을 박았다. 그 애의 어머니는 청계천 골목에서 커피도 팔고 박카스도 팔고 이따금 곱창집 뒷 방에서 몸도 팔았다. 우리집은 네 가족이 방 두개짜리 전세금에 쩔쩔맸고, 그 애는 화장실 옆 천막을 치고 아궁이를 걸어 간이부엌을 만든 하코방에서 살았다. 나는 어린이날 탕수육을 못 먹고 짜장면만 먹는다고 울었고, 그 애는 엄마가 외박하는 밤이면 아버지의 허리띠를 피해서 맨발로 포도를 다다다닥 달렸다. 말하자면 그렇다. 우리집은 가난했고, 그 애는 불행했다.
가난한 동네는 국민학교도 작았다. 우리는 4학년때 처음 한 반이 되었다. 우연히 그 애 집을 지나가다가 길가로 훤히 드러나는 아궁이에다 라면을 끓이는 그 애를 보았다. 그 애가 입은 늘어난 러닝셔츠엔 김치국물이 묻어있었고 얼굴엔 김치국물 같은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었다. 눈싸움인지 서로를 노려보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니네부엌 뽑기만들기에 최고다. 나는 집에서 국자와 설탕을 훔쳐왔고, 국자바닥을 까맣게 태우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사정이 좀 풀려서 우리집은 서울 반대편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친척이 소개시켜준 회사에 나갔다. 월급은 밀리지 않았고 어머니는 부업을 그만두었다. 나는 가끔 그 애에게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에는 일년동안 쓴 딱딱한 커버의 일기장을 그 애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 애는 얇은 공책을 하나 보냈다. 일기는 몇 장 되지 않았다. 3월 4일 개학했다. 선생님한테 맞았다. 6월 1일 딸기를 먹었다. 9월 3일 누나가 아파서 아버지가 화냈다. 11월 4일 생일이다. 그 애는 딸기를 먹으면 일기를 썼다. 딸기를 먹는 것이 일기를 쓸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 애 아버지는 그 애 누나가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그 애는 이따금 캄캄한 밤이면 아무 연립주택이나 문 열린 옥상에 올라가 스티로플에 키우는 고추며 토마토를 따버린다고 편지에 썼다. 이제 담배를 배웠다고 했다. 나는 새로 들어간 미술부며 롯데리아에서 처음 한 미팅 따위에 대해 썼다. 한번 보자, 만날 얘기했지만 한번도 서로 전화는 하지 않았다. 어느날 그 애의 편지가 그쳤고, 나는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고3 생일에 전화가 왔다. 우리는 피맛골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생일선물이라며 신라면 한 박스를 어깨에 메고 온 그 애는 왼쪽다리를 절뚝거렸다. 오토바이 사고라고 했다. 라면은 구멍가게 앞에서 쌓인 것을 그냥 들고날랐다고 했다. 강변역 앞에서 삐끼한다고 했다. 놀러오면 서비스 기차게 해줄께. 얼큰하게 취해서 그 애가 말했다. 아냐. 오지마. 우울한 일이 있으면 나는 그 애가 준 신라면을 하나씩 끓여먹었다. 파도 계란도 안 넣고. 뻘겋게 취한 그 애의 얼굴같은 라면국물을.
나는 미대를 졸업했고 회사원이 되었다. 어느날 그 애가 미니홈피로 찾아왔다. 공익으로 지하철에서 자살한 사람의 갈린 살점을 대야에 쓸어담으면서 2년을 보냈다고 했다. 강원도 어디 도살장에서 소를 잡으면서 또 2년을 보냈다고 했다. 하루에 몇백마리 소머리에 징을 내리치면서, 하루종일 탁주와 핏물에 젖어서. 어느날 은행에 갔더니 모두 날 피하더라고. 옷은 갈아입었어도 피냄새가 베인거지. 그날 밤 작업장에 앉아있는데 소머리들이 모두 내 얼굴로 보이데.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 애는 술집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나직하게, 나는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는 걸까.
그 애가 다단계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만나지마. 국민학교때 친구 하나가 전화를 해주었다. 그 애 연락을 받고, 나는 옥장판이나 정수기라면 하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직하고 집에 내놓은 것도 없으니 이 참에 생색도 내고. 그 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면 가끔 만나서 술을 마셨다. 추운 겨울엔 오뎅탕에 정종. 마음이 따뜻해졌다.
부천의 어느 물류창고에 직장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등학교때 정신을 놓아버린 그 애의 누나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홀아비에게 재취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애가 둘인데 다 착한가봐. 손찌검도 안하는 거 같고. 월급은 적어. 그래도 월급 나오면 감자탕 사줄께.
그 애는 물류창고에서 트럭에 치여 죽었다. 27살이었다.
그 애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였다. 한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이따금 나는 우리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손도 잡은 적 없지만 그 애의 작고 마른 몸을 안고 매일 잠이 드는 상상도 했다. 언젠가. 난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을까. 그 말 뒤에 그 애는 조용히 그러니까 난 소중한 건 아주 귀하게 여길꺼야. 나한테 그런게 별로 없으니까. 말했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계산이 빠르고 겁이 많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애가 좋았지만 그 애의 불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었다. 가난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게.
- 작 자 미상글-
2.
오늘은 내가 유니스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야.
그래서 그냥 이제서야 너한테 내 얘기를 해볼까 해.
이건 그냥 내 얘기야. 네가 물었을때 말해주지 못했던,
그래서 4년이 지난 이제서야 꺼내는 이야기.
너는 기억할지 모르겠어. 처음 나와 안면을 텄던 날, 네가 물었었지, 그렇게 좋은 대학을 붙어놓고 왜 울산까지 내려왔느냐고. 그래서 나는 그냥 여기가 좋아서 왔다고 그랬다. 사실이었다. 조용하고 평온한 유니스트가 내가 갈수 있는 곳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거든.
대학에 와서 누구한테도 제대로 말한 적이 없지만, 나는 사실 색청이 있다. 별 건 아니야, 그냥, 귀에 들리는 소리를 눈으로 인식하는 장애야. 소리가 색으로 보이는. 그냥 그런 거. 그래서 나는 사람이 많은 곳에는 오래 있을수가 없어. 너무 많은 색이 보일때가 있어서. 길을 걸을 때는 늘 익숙한 색깔의 노래를 틀어놓고 길을 걷곤 한다. 점심방송 저녁방송으로 스피커에서 처음 보는 색이 나올때면 물끄러미 쳐다보며 길을 걷다 넘어지기도 하고, 그냥 그런 거.
너는 파란 목소리를 가지고 하얀 피아노를 쳤다. 이상하지, 피아노는 보통 까만색도 하얀색도 아닌 그 중간의 먹먹한 빛깔인데 네 피아노는 온통 하얗게 보였다. 가끔은 눈이 내리는 듯도 했다. 내가 너의 피아노 치는 모습을 직접 본건 4년동안 꼭 4번 뿐이다. 너의 피아노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눈내리는 벌판에 혼자 앉아있었다. 너는 파란색 목소리를 가지고 말하면서 피아노는 꼭 눈처럼 새하얗게 연주했다. 나는 그런 너의 피아노를 좋아했다.
내가 색청이어서 좋다고 느낀 점은 딱 하나였다. 멀리서도 지나가면서도 네 피아노가 들리면 나는 그것이 너인것을 금방 알수 있었다. 혹시 방해가 될까 문밖에 우두커니 서서 나는 네가 내리는 새하얀 눈을 맞고 있곤 했다. 이제와 꺼내는 이야기다. 너는 어느날은 마음이 아팠고 어느날은 기뻤고 어느날엔 잠을 깨기 위해 피아노를 치곤 했다. 건방지게도 나는 그런것 같았다. 학생회관을 지나치다 너의 피아노가 들리면 나는 분수대에 멍하니 앉아 네가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았다.
얼마 전 네가 대학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좁디 좁은 학교라, 우리가 우리가 그저 인사만 건네는 사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어도 네 소식은 들려오더라. 너는 여전히 유니스트에서 새하얀 눈이 내리는 피아노를 치겠구나. 불현듯 그게 참 기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그저 4년 동안 얼굴을 마주치며 인사만 하는 사이었지만, 나는 너의 피아노를 참 좋아했다. 왜그랬는지는 몰라도 참 그랬다. 너의 피아노를 볼수, 들을 수 있어서 나는 이 학교에 있는 4년동안 참 행복했다.
그래서 그냥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솔직히 여기다 글을 쓴다고 네가 볼지는 모를 일이다. 너는 무던한 아이라서, 이 글을 보고도 거참 희한한 일이구나 하고 지나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고마워. 네 피아노 연주를 정말로 좋아했어. 도둑처럼 매번 몰래 들어서 미안해. 그래도 알아주었으면 해, 네 연주는 정말로 멋있어. 그러니까 피아노는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앞으로도 많은 소리를 보겠지만, 네 피아노를 종종 생각하게 될것 같아. 4년동안, 고마웠습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유니스트 대나무숲 글(푸른밤 종현 사연)-
3.
이제 오십일 쯤 후면 나는 관악으로 가고, 너는 안암으로 온다.
너를 처음 만났던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아마 2학년 4반 이었나 아무튼, 나의 이야기도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1년이나 같은 학교를 다녔음에도 이름조차 모르던 우리. 딱히 관심사가 맞는 것도 아니었고, 집이 같은 방향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였던지 우리는 같은 교실에서 지낸 1년 동안에 참 친한 친구가 되었다. 체육 시간이 끝날 때면 자판기에서 서로의 음료수를 뽑아오고, 네가 준비물을 빼먹고 온 날에는 내 것을 주고 대신 혼나보기도 하고, 내가 숙제를 안 해온 날에는 네가 점심시간 동안 내 것을 베껴주기도 했다. 나는 종종 집에 갈 때면 괜히 너희 집 방향으로 먼저 가서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 네가 그런 나를 보고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주는 게 참 좋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 3학년 반 배정이 발표되던 날, 너와 다른 반이 된 것을 알고 한숨을 쉬던 내 모습에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남녀 분반이었던 탓에 더 이상 교실에서 네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의 나는 온통 너로 가득했었다. 수업시간에는 내내 너랑 주고받은 문자를 다시 보고, 자습시간에는 내일 너와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것만 생각했었다. 집에 갈 때는 여전히 네 집 방향을 들렀다가 갔고, 주말에는 가끔 만나서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나름의 데이트도 했다.
결국 1학년 2학기의 어느 날에, 내 속의 너는 점점 커져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에게 고백하기로 다짐하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에 너는 지난 모의고사 성적이 생각보다 너무 안 좋아서 걱정이라며 종일 우울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보다 성적이 훨씬 좋던 네가 나한테 그런 고민을 얘기하는 것도 참 웃기다. 어쨌거나, 그렇게 또 하루를 함께 보내고 평소와 같이 우리는 너의 집 앞에서 헤어졌다. 너를 올려 보내고 숨을 몇 번쯤 고르고 난 후,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뭐라고 지껄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뭐 대충 내용을 말하자면, ‘기분 풀고 일찍 자’, ‘나는 항상 열심인 네가 좋아’, ‘근데 너는 나 안좋아?’ 따위의 말들이었지 싶다. 전화기 너머의 너는 약간 당황한 듯 했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다음 날 들은 대답은 물론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후로 우리는 몇 달간 말 한마디 섞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눈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몇 달 동안의 나는 항상 가슴 한 쪽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그동안 나는 공부를 참 열심히 해서, 성적이 많이 올랐다. 너 밖에 없던 인생에서 너를 빼고 나니 남는 것이 시간이었기에, 하루에 몇 시간 씩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마지막 모의고사 즈음에는, 나보다 한참 위였던 너와 비슷한 성적이 나오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의 막바지에 맞이한 크리스마스 아침에, 거의 1년도 넘게 인사조차 하지 않던 너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 뭐하냐고. 나는 아직도 네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고백했다 차인 주제에 자존심도 없었는지, 네가 부른다고 바로 달려 나갔었던 나도 참 병신 같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 날 이후로 다시 친구가 되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우리는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을 친구로서 지냈다. 너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참 힘들었다. 어쨌거나 몇 달의 힘든 시간이 지나 대학 입시가 끝났다. 그렇게 너는 관악으로, 나는 안암으로 왔다.
안암에서의 첫 학기, 학교생활은 참 즐거웠다. 과 사람들, 동아리 사람들, 교양 수업에서 만난 친구들, 다들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고연전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다만 내 학교생활에서 유일하게 힘든 점이 있다면, 여전히 내가 너의 친구였다는 사실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와 달리 꽤 먼 거리에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는 이야기도 별 것도 없었지만.
지난 5월의 어느 날, 너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 너는 그 사람 이야기를 하고, 나는 그것을 들어주며 우리는 전화와 카톡을 넘나들며 밤새도록 떠들었다. 나는 그 날 밤, 비록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매일 네가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여전히 병신이었다. 그렇게 밤을 지샌 덕분에 나는 다음 날 수업을 못가고,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일어난 나는 결정했다. 너를 따라 관악으로 가기로.
주변 친구들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않았기에 휴학도 하지 않고 반수를 준비했다. 안하던 공부를 하느라고 동아리를 나가거나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힘들게 공부한 끝에 시험은 꽤나 잘 보았고, 다행히 관악의 그 학교는 나를 불러주었다. 당연히 너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너에게 연락을 보냈다. 너는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고, 그동안의 안부도 묻고 별 시덥잖은 얘기를 좀 나누었다. 내가 이제 그만 이야기를 마무리 하려고 하던 그때, 네가 말했다.
진짜 축하한다고. 그런데 참 재미있게도 너는 내년에 안암으로 온다고.
네 말대로 인생이 참 재미있다. 나 역시 너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렇게 된 것을 보면 너와 나는 인연이 아닌가보다. 그래, 이번엔 진짜로 포기하기로 했다. 이제 내 인생에서 너의 그림자를 지우고 싶다.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온통 너로 가득 차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다, 너를 따라가겠다고 반수까지 했으니 평생 내 이력서에는 네 흔적이 남아있겠지만...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글-
4.
저는 정말 말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어요.
식당일을 하시는 엄마와 둘이서 6평정도되는 반지하방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엄마는 하루 열시간넘게 일을 하시면서 생활비를 버셨어요.
수시를 지원할때가 저는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비싼 원서비에 손을 바들바들떨면서 두 곳의 대학만 지원했어요. 당장 집에 원서비를 낼 돈이 없었기때문에, 저희 집 사정을 대충 아시는 담임 선생님이 주신 10만원으로 두 곳의 대학을 지원할 수 있었어요.
운이 좋게도 저는 서울대학교에서 면접을 볼 기회가 생겼어요.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좋아하셨고, 차비로 5만원을 마련해주셨어요. 엄마는 안타깝게도 바쁜 식당일 때문에 따라올 수 없었어요.
저는 지방에 살았기때문에, 버스표를 왕복으로 끊고, 남은돈 만 오천원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어요. 아침 면접이었기 때문에, 전날 오후에 올라가서 지하철을 타고 서울대입구로 가서, 찜질방에서 자고 학교로 가기로했어요.
그렇게 난생처음 서울에 도착했는데, 돈이 없어졌어요. 가방을 뒤져보고 주머니를 한 시간씩 털어봐도 돈이 안보였어요.
저는 대합실에 앉아서 울다가, 정신을 차리고 걷기 시작했어요. 터미널에서 서울대로 걸어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냐고 물어보니깐 다들 어이없어했지만, 대충 알려주신 방향으로 걸어갔어요. 한 2~3시간쯤 걸었을까, 너무 춥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힘들었어요.
저는 갑자기 너무 무섭고 서러운 마음에, 길에 앉아 펑펑 울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면접을 못갈 것만 같았어요.
밤11시가 넘은 시간에 어딘지도 모를 아파트앞 벤치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데, 경비아저씨가 왔어요.
아저씨는 제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주었고, 저는 제 사정을 겨우겨우 말했어요. 아저씨는 놀라시면서, 저를 숙직실로 데려다주셨어요. 라면을 끓여주시면서, 자기는 하루정도 좀 못자도 괜찮으니깐,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퇴근하시면서 저를 태워주겠다고 하셨어요.
아저씨는 차에서 셔츠를 벗어 주시면서 옷이 너무 촌스럽다고 이거를 입고 가라고했고, 저는 죄송해서 못받는다고 하니깐 전화번호를 적어주시면서 나중에 대학에 붙고 옷을 갖다주러오라고 하셨고, 터미널까지 갈때 차비하라고 만원을 주셨어요.
저는 그 아저씨 덕에 면접을 볼 수 있었고, 서울대에 합격했어요. 합격자발표가 나고, 제일 먼저 엄마 식당에 전화를 했고, 그 다음엔 그 아저씨한테 전화를 드렸어요. 아저씨는 자기일처럼 너무 행복해하시고, 나중에 올라와서 밥 한끼 먹자고 하셨어요.
서울생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고, 과외랑 아르바이트도 한계가 있었어요.
악착같이 50만원을 모은 저는, 첫 학기가 끝난 날 눈여겨보았던 양복을 샀어요. 7개월만에 아저씨를 만나서 멋진 양복을 전해드렸어요. 셔츠는 돌려드렸지만, 그 셔츠에 맞는 멋진 양복도 꼭 드리고 싶었어요. 다행히도 아저씨는 계속해서 거절하셨지만 결국엔 정말 좋아해주셨어요.
태어나서 가장 큰 돈을 쓴 날이지만, 그날만큼은 정말 행복했어요.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글-
5.
내 열일곱 살 때 그 애는 이미 내 우주였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에게서만 나는 묘한 냄새 같은 것이 있다.
집의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사랑에 둘러싸여 자란 사람은 잘 알아채지 못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그런 동류의 냄새를 기막히게도 잘 맡아낸다.
항상 외로움에 둘러싸여 자란 그 애는 내 냄새를 그렇게 맡고 내게 다가왔었다.
그 애는 또래 애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도 항상 어딘가 혼자인 듯 겉도는 면이 있었다.
나름 성격도 밝고 여자 애건 남자 애건 간에 그 특유의 싹싹함으로 손쉽게 구워삶는 타입이었지만
정작 집에는 항상 혼자 돌아가고
남들 다 있는 핸드폰 하나 없이 항상 주말을 혼자 나는 그런 아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애는 결코 가난한 집 자식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 낡은 지갑 안에는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들과 함께 꼬깃꼬깃 접힌 편의점 영수증 따위만 어지럽게 굴러다녔지만
그 아이 아버지는 이 지역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으며
그 애의 어머니는 중학교 선생님 출신으로 근처의 나름 이름있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소위 여사님이었고
두 살 차이나는 그 애의 여동생은 피아노 전공으로
근교의 학생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고 다닌 장래의 기대주였다.
그 애는 내게 혹은 친구들에게 그런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지역 외곽에 있는 그 으리으리한 3층 주택 대신에
학교 근처에 조그만 자취방을 얻어 살았다.
3평이 좀 안되는 그 습기찬 방에서는 가끔씩 곱등이도 튀어나오고
소위 돈벌레라 불리는 그리마도 심심찮게 기어나와 신경을 건드렸지만
그 애는 그런 벌레따위보다 자기 가족들을 더 무서워했다.
성적 학대는 아니야. 맞고 자란 것도 아니야.
그래도 나는 우리 집이 너무 외롭고 무서워.
다가오는 그 애와 어렵사리 친구가 되고
어느 누구도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그런 것과 다름없는 관계로 발전하며
나는 그 애의 자취방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가끔은 학원까지 빠져가며 두드렸던 문이지만
사실 그 안에 들어가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등을 돌아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그 애는 티비를 봤고
내가 그 애의 만화책들을 읽으며 낄낄대고 있으면 그 애는 내가 빨아 놓은 제 빨래들을 갰다.
어쩌다가는 동네 비디오방에서 오래된 DVD들을 잔뜩 빌려와 보기도 했고
그러던 도중에 서로에게 기대어 발바닥을 서로 맞춰 보고는 했다.
나는 그 방에서 그 애와 키스를 하고 마침내는 그 애와 잤다.
미성년이라는 죄의식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까지 어떤 성적 경험도 전무했기에 그럴수 있었던 거 같다.
성관계 혹은 순결에 대한 어떤 명확한 개념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난 딱히 그것들이 무섭지 않았고
그냥 연인의 사랑에 있어서의 당연한 수순을 밟는다는 느낌으로 그 애에게 안겼다.
지금 돌아보면 올바른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후회는 않는다.
사랑했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억에 있다.
그 애가 내 처음이라는 게 좋았다. 두 번째나 세 번째가 아니고
그 때까지 고요하게 지켜왔던 내 처녀성을 그 애가 앗아감으로서
내가 세운 그 아이 기억의 묘비에 한 줄 더 적어넣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지만
어떤 관념적인 첫 번째가 아니라
몸을 섞음으로서 그 애가 정말 실체적인 기억이 되어 내 몸에 남아 있게 된다는 게 좋았다.
그 애는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고
열일곱 겨울에 학교 숙직들의 샤워실 수건걸이에 고요히 목을 맸다.
1.6미터도 채 안되는 그 높이에서 180을 웃도는 그 애가 그 낮은 곳에 목을 매며 얼마나 발악을 했을지
난 가끔 그 고통의 순간을 상상하고 또 곱씹어 보고는 한다.
어떤 말도 남기고 떠나지 않았지만
난 그 애 가족들도 끝내 밝혀내지 못했던 그 애의 자살 원인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그건 그 애가 처음 내게 다가왔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같은 사람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외로운 냄새. 오직 느낌으로만 알아챌 수 있는 것들.
그 애는 또래 애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도 항상 어딘가 혼자인 듯 겉도는 면이 있었다.
기억에는 영속성이라는 게 있어
나는 그 애가 떠난 뒤 몇 년이 지나고 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났어도
아직 제대로 남자를 마주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상실의 고통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갔다 믿었어도
비슷한 향수 냄새를 맡거나 툭 튀어나온 목의 결후같은 걸 바라보다가 보면
그 사소한 요소들이 바늘처럼 내 기억의 주머니를 툭 터뜨려
나로 하여금 그 이성과 그 애의 얼굴을 겹쳐보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 내가 누군가를 또다시 사랑하는 게 무서운 건
내가 열일곱 살에서 영원히 멈추어버린 그 아이를 아직껏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이 트라우마를 똑바로 직시하고 해소하려 노력하지 않는 이상
열일곱 겨울에 못박혀 있는 내 어떤 부분이 영원토록 성인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나 역시 알기 때문이다.
나와 어떤 관계의 종결점도 맺지 않고 그렇게 사라져버린 그 애 때문에
어딘가 정착할 듯 말 듯 애매하게 떠돌고 있던 그 애와 나의 관계성이 결국은 그 모호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앞으로 성장하고 나아가 정착하려는 내 무의식적인 부분을 일부러 붙잡아 그 열일곱에 속박해 두려 하고 있음을
몸만 어른이 된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 자 미상글-
6.
그는 새벽에 전화를 했다. 전화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혼자 있다가 자해를 하지 못하게, 나머지 하나는 그가 자해를 하지 못하게.
사실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나는 907호, 그는 809호. 전화를 하다가 문득 소리가 끊기거나 두려운 소리가 나면 언제든지 뛰어올라오거나 혹은 뛰어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느 한쪽이 먼저 잠들었다. 보통은 그가 먼저 잠들었다. 그는 고3이었고, 나는 고2였으니까. 한 살이라도 어리니까 더 쌩쌩한 거라고 나는 장난 식으로 말했다.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는 늘 어깨가 쳐져 있었다. 쳐져? 처져? 뭐가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축 늘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집 앞 놀이터에서였다. 미끄럼틀 위에 앉아 청포도사탕을 빨아 먹고 있다가 그냥, 그래 진짜 그냥 멈췄다. 공사 중이던 중학교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은행잎 하나가 내 다리 위에 떨어지기 전까지 모든 것이 일시정지 상태였다. 그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뭐지, 저 사람도 나에게 반한 건가? 번호를 따려는 건가? 나 같은 애한테도 드디어 로맨스가?
“혹시 그 미끄럼틀 탈 거니?”
“네?”
“안 탈 거면, 혹시 내가 탈 수 있을까?”
나는 허둥대며 내려왔고 그의 앞에서 멈췄다. 그는 고맙다며 계단을 통해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 몇 번이고 내려왔다. 초등학생을 위해 만들어진 그 미끄럼틀이 그에게는 조금 작아보였지만 그런 것쯤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하다가 시소 위에 앉았다. 나는 그런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게 중요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이미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나는 집으로 들어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가 같이 탔다. 나는 9층을 눌렀는데 그는 8층을 눌렀다.
“8층 살아요?”
정말 뜬금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침묵이 깔렸다.
“내일도 놀이터에 나올 거예요?”
그는 그런 건 왜 궁금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사심은 전혀 섞이지 않았다는 듯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하고 대답했다.
그 때 나는 중3이었다. 그는 고등학생이지만 학원을 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다음 날 또 놀이터에 나왔고, 미끄럼틀을 탔다. 나는 그네 위에 앉아 발을 구르며 그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기묘한 몇 주가 지나고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나는 그가 이 일대에서는 명문이라고 알려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걸 알았고, 그는 내가 어느 고등학교를 적을지 고민 중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나는 남녀공학에 가게 되었다. 나는 배정 통지서를 들고 놀이터에 갔다. 우리의 만남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저녁 7시. 보충수업까지 마친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가 미끄럼틀 위에 앉아 있자니 그가 걸어왔다.
“고등학교 발표 나왔다며?”
“응! 나 공학 간다! 부럽지?”
“그게 뭐가 부러워.”
“나 CC가 로망이란 말이야. 아 고등학교는 CC가 아니구나.”
“멍청이.”
“미끄럼틀에서 안 비켜줄 거야.”
“밀어버릴 거야.”
이 대화를 그 때 그대로 기억하는 것은 얼굴을 보고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대화였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핸드폰 번호를 건넸다. 나는 뜬금없이 갑자기 번호교환은 왜 하냐고 물었던 것 같다. 그는 당분간은 놀이터에 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화를 했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친구들은 그 오빠가 너 좋아하나보다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부끄러워도 얼굴이 빨개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다만 무슨 소리야 하고 친구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식을 앞둔 다음 해의 겨울이었다. 그는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새벽에 전화를 해도 될까?’
나는 내 방이 있었고, 나 혼자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래도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전화해서 첫 문장을 매일 새벽을 자신에게 선물할 수 있냐는 질문으로 사용했다. 나는 기꺼이 그래도 된다고 했다. 인정한다. 그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렇게 입학식이 지나고 첫 중간고사가 지났다. 그는 새벽만 되면 우울하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괜찮다고 그를 토닥였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갔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고백을 하지 않았고 나는 내가 고백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랬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좋은 동생이라는 대답이 습관처럼 돌아왔기 때문에, 나는 장난처럼 그냥 넘겼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2013년 11월 29일. 나는 한창 2학년의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는 수능이 끝나 여유롭게 나를 놀리던 어느 날이었다.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그 새벽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 고백할 게 하나 있어.”
“뭔데?”
“나, 게이야.”
그리고 나는 침묵하다가 내일 다시 전화하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 안녕, 나의 첫사랑. 어떻게 남자를 좋아할 수가 있지? 아니 그래.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지. 나는 그냥 동생 대했던 거구나. 내 배신감의 초점은 그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했던 행동들이 연인이 되기를 바라고 한 애정 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 내 감정 소모.
다음 날 나는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고 심지어 야자까지 튀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다가 12시쯤 일어나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는 한참을 침묵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을 것이다.
“오빠.”
“왜?”
“오빠가 내 첫사랑이야.”
“어...”
“어서 미안하다고 해.”
“그래, 미안해.”
“그러면 됐어. 오늘 기분은 괜찮아?”
어쩌면 나는 그 때 본능적으로 그를 질책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의 성적지향의 문제는-성적지향이라는 단어도 대학에 와서 알게 되었지만-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나의 첫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난다는 것이었지. 나는 이것이 분하고 원통해서 공부도 안 됐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이런 나의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12월, 그의 수시 결과가 떴다. 서울대 최종 불합격. 그는 그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옆에서. 그는 재수를 선택했다. 나랑 같이 대학 가서 어쩌냐는 나의 말에 그는 그러게, 하고 힘없이 웃었다. 그는 고려대에는 붙었으니 고려대를 가겠다고 말한 모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부모님은 모두 서울대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이 그 아래의 대학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불합격”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에게 가출을 권했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그는 수능을 한 번 더 봤다. 나와 함께.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책상 위에 남긴 채 집 베란다에서 땅을 향해 날았다. 자기가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나는 그가 입시결과가 나오고도 새벽에 전화를 하지 않는 이유를 몰랐다. 바보 같이. 우연히 엄마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래서다. 내가 대학에 온 지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나는 여전히 집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그리고 방금 내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작년에도 미처 삭제하지 못한, 그의 생일을 알리는 화면이 뜬다. 나는 차마 X로 손을 밀지 못한다.
안녕, 생일 축하해 내 첫사랑. 우리 다음 생에는 백록담 아래 가라앉은 돌덩이 2개가 되자. 그래서 아무도 사랑하지 말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말고, 그렇게 살자. 잘 자. 말 안 해도 알아. 추우니까 이불 꼭 덮고 잘게.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글-
7.
나의 첫 연애는 cc였다. 그것도 우리 과에서 처음 탄생한 cc. 공교롭게도 첫 연애인건 내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cc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게감을 가진 건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손부터 잡았다.
우리의 어리버리한 연애는 금방 티가 났고, 곧 모든 과의 사람들이 우리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페이스북에 연애 사실을 공표해버린 날, 나는 내 생애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았고, 그제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성급한 공개연애를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조용히 연애를 했다. 같은 수업을 듣긴 했지만 옆자리에 묵묵히 앉아있었을 뿐이었고, 데이트의 유혹을 누르고 과 친구들과 다같이 학식을 먹은 것도 여러번이었다. 아주 쉬운 일이었다. 우린 원래 친구였으니까, 그냥 친구처럼 지내는 건 정말 쉬웠다. 그런데 그 애는 아니었나보다.
남자친구는 어느날 내가 자신을 정말 좋아하기는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싸우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나는 정말 남자친구의 말대로 내가 그를 사실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처음이라서, 서툴러서 우정과 연애감정을 착각했나보다, 좋은 친구였는데 다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울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 다음 날 과엠티는 나 혼자 떠났고, 남자친구는 오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행방을 묻는 말에 그냥 얼버무리고 술을 물처럼 마셨다. 이젠 전남친이라고 불러달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그 애가 왔다. 약속 끝나자마자 왔다면서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 웃는 그를 나는 밀어낼 수 없었다.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잠들지 못한 그 날 새벽, 남자친구는 날 붙잡고 울었다. 네가 두려워 하는 걸 안다고, 하지만 곁에 있겠다고.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러니 너도 쉽게 포기하진 말라고.
그래, 난 두려웠다. 사람들의 시선도, 알듯말듯한 내 마음도, 처음 경험해보는 감정과 새로운 관계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작정 시작한 이 위험한 관계가 내 대학생활과 친구관계, 어쩌면 평판까지 모든 걸 무너뜨릴 지도 모른다는게 너무나 무서웠다. 그래서 실수할까봐 섣불리 표현하지도 못하고 언제나 한 발짝 뒤에서 상대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나보다. 그 애라고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을텐데. 서툰 연애라고, 실수하는 관계라고 진실되지 못한 것은 아닌데.
나는 우리가 처음 사귄 그 날처럼 남자친구의 손을 붙잡고 약속했다. 실수하고 넘어지겠지만, 경험 삼아 해보는 연애라는 핑계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 후로 우리 과에는 다른 cc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마법처럼 다른 이들의 부담스러운 관심도 옮겨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조용한 연애를 했다.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래도 반드시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는 점 정도. 계절이 바뀌고 많은 커플들이 깨질 때 즈음 사람들은 문득 우리가 아직도 만나고 있는지 조심스레 묻곤 했다. 그러다 남자친구가 군에 입대하게 되자, 사람들은 정말 우리가 헤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모든 cc가 깨진 후에도 우리는 계속 사귀고 있었다. 친구처럼, 연인처럼. 여전히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헷갈려하면서.
며칠전 말년 휴가를 나온 남자친구에게 오래된 질문을 다시 물었다. 이젠 내가 널 좋아하는거 알겠냐고. 그랬더니 이 괘씸한 녀석이 영 모르겠다면서 빙글거리기에 탁자 아래로 한 대 걷어차주었다. 그 서툴고 수줍던 연애초보 둘이 이젠 서로 놀려대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서 투닥거리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좀 더 연인다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친구 같아진 듯도 하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우리가 연애를 잘 하고 있는 건지, 이게 보통의 연인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는 걸 이젠 안다.
뭔지도 모르면서 시작한 관계는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툴지만 같이 서툴렀기 때문에 누가 옳고 그른지 몰랐고, 그래서 이기려 들지 않았기에 둘 다 이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우린 여전히 어리버리한 커플이다. 나는 아직도 애교를 부릴 줄 모르고, 남자친구는 아직도 여자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를 줄 모른다. 하지만 대신 나는 남자친구의 목소리만 듣고 기분을 알아차리고, 남자친구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 걸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연애의 일반론에 있어 우리는 표본이 하나뿐인 초보지만, 그래도 천천히, 대신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곧 전역이다. 내가 혹시 제대와 동시에 찰 생각이라면 미리 페메라도 보내서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라도 주라고 했더니 남자친구가 헛소리한다고 비웃는다. 얼마 전에 군대 간다고 울던 애가 맞나 싶다. 남자친구가 복학하면 우리는 다시 cc가 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첫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법은 아니라 하지만,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법도 없다는 걸 이젠 아니까. 아니, 사실은 그 어떤 사랑도 실패가 아니라는 걸 드디어 배웠으니까.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글-
8.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밤이되면 잠을 자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내가 깨어있는 동안 학교에서 무얼 하고 밥으로 어떤 걸 먹고 누구와 마주치고 스쳐가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죽은 듯이 살았다.
내가 겪는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버텨왔던 정신과 육신이 한계에 맞딱드린순간.
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새학기가 시작된지 얼마 안된 날, 학급 번호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했을 때 그애와 나는 처음으로 짝이 되었다.
그날은 학생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담임선생님께 내는 날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 종이의 가족관계 칸에는 할머니와 동생의 이름 뿐이었다.
슬쩍만 둘러보아도 나같은 아이는 없었다.
짝이 된 그애와 나는 태어난 날이 같았다. 며칠이 흐르고 나서야 뜬금없이 그애가 먼저 말했다.
'너 내생일이랑 똑같다.' 사실 그때 니 종이 봤어.
라고 작게 덧붙인 말은 안 듣는게 나았다.
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벅차올랐다.
너랑 나는 같은 지역에서 한날에 똑같이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는데, 어째서, 난, 나는, 왜?
'그럼 우리 엄마아빠 없다는 것도 알겠네'
한숨처럼 터져나온 말에 그애는 적잖이 당황했다.
우리의 첫번째 짝 생활 한달동안 그애는 두번다시 나에게 말 걸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수업시간에도 쉬는시간에도 체육시간에도 그애만 봤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고, 밤이 되면 잠드는 내 생활에 의미있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애의 짝으로 교실에 존재하는 일.
다음달이 되어 제비뽑기로 짝을 다시 뽑았을때, 나와 그애는 또 짝이되었다.
그애는 어느날 내 핸드폰번호를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알려줬던게 조금 창피했다.
그애는 심심할때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항상 대화의 마지막에는 '잘자'라고 인사했다.
그애와 대화할때 나는 비로소 가장 열일곱살 같았다.
내가 살아온 16년은, 달력이 몇장 뜯겨나갔는지 추석이 몇번 지나갔는지 의식하지 않는 세월이었다.
해가 바뀌어 반이 바뀌면 반이 바뀌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았으니까.
나에게 나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애는 나의 전부를 이해하고 싶어 했다.
그애가 알리 없는 외로움과 서러움을. 그애가 그걸 평생 이해 못하길 바랬다.
그애가 나에게 '힘내'라고 말할때 마다 나는 죽고싶었다.
차라리 그애를 알기 전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따지듯이 너 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때 그애는 주저없이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음악실로 갔다. 그 후로도 우리는 교회나 문화센터같이 피아노가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어느 목요일의 점심시간, 음악실에서 그애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을때,
나의 할머니는 동네 뒷산에서 실족사했다.
내가 상복을 입고 영정앞에 가만히 앉아있던 3일동안 그애는 나를 보기만 하고 돌아갔다.
우리가 그 뒤로 피아노를 찾아 가는 일은 영영 없었다.
우리는 한번도 짝이 되지 않은적이 없었다. 적어도 1학기 동안은.
유난히 더웠던 그 해 여름이 지나고 2학기가 되었을때, 그애는 내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늘 혼자 앉았다.
우리 동네에서 그애의 집까지는 버스로 정확히 20분 거리였다.
나는 처음으로 그동네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20분동안 울었다.
인적 드문 버스 정류장에서 한시간 30분동안 앉아있었을 때, 그애가 왔다.
겨우 두살 난 동생을 업고 나타난 그애는 엄마가 우울증에 걸리셨으니 당분간 학교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때가 10월이었다.
'우리 생일이 되기 전엔 꼭 갈게' 그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애 품에 안겨 울었다.
내가 이 지옥에 태어난지 17년만에 생일이라는게 생겼다.
10월부터 12월까지의 시간은 마치 일천겁의 시간 같았다.
그리고 11월에 그애의 두살배기 동생이 내 할머니가 간 길을 따라 멀리 갔다.
그애의 소식을 더이상 들을 수 없었다.
기다렸던 우리의 생일날은 최악이였다.
열두살 여동생이 동네 빵집에서 케이크를 몰래 가져오다가 파출소로 잡혀갔다.
'12월에 언니 생일이다.' 말한 내 잘못이었다.
동생의 작은 손을 잡고 파출소에서 나오면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밤이 되면 잠이 드는 일도 더이상 없을거라고 동생에게 말했다.
연락 오지 않는 아빠의 소식을 기다리며 매일 우편함 앞에 서있는 일도,
할머니가 굴러 떨어진 뒷산 바위에 올라가는 일도, 내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훔쳐오는 일도
절대로, 절대로 다시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18층짜리 낡은 아파트의 옥상에 섰을 때 동생은 울었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더이상 그애의 소식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우리의 생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느낌이었다.
심장을 조이고 피가 터지는 느낌이 내 숨통을 졸랐다.
내 소매를 붙들고 '언니 다시는 안그럴게'라고 울부짖는 동생을 안고 도망치듯 옥상에서 내려왔다.
그 다음날 부터 독감에 걸려 열이 39도까지 치솟았고 머리 끝까지 덮은 이불 안에서 내 뜨거운 숨이 나를 감쌌다.
나는 아직도 그것이 독감이였는지, 사람들이 말하는 그 열병이였는지 모르겠다.
며칠 후 우리집 우편함에 꽂혀있는 손편지를 받고서 싹 나은걸 보면 아마도 열병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했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꼭 갈거라고 했다. 그리고 잘자라는 말. 편지 내용은 그뿐이었다.
그 애의 편지 한통은 나를 다시 살게 할 충분한 이유였다.
어쩜 이렇게 운이 없을수가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우리는 힘든길로만 흘러갔다.
내 발로 걷지도 않았는데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어쩌면, 그런 수많은 불운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행운이 되어주라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그 후로 823일동안 허공에 대고 대화를 했다.
나는 종종 그 애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없는 번호라는 안내 메시지를 들으며 하루를 얘기했다.
가끔은 그 애가 죽어버린 건 아닌지 생각했다.
스무살이 되던 해, 나는 대학교 입학을 포기했다. 당장 등록금을 댈 길이 없었다.
그래도 그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그 애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학교 교정에 개나리가 막 필 무렵, 그 애를 만났다.
뜨겁고 약하고 하얗던 내 첫사랑.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한참 쳐다보다가 그 애의 집으로 갔다. 3년만이었다.
이곳 저곳, 빨간딱지가 안붙은 곳이 없는 그 애의 집에는 차갑고 노란 공기만 맴돌았다.
그 애 엄마의 꿈이자 그 애의 꿈이었던 피아노에도 끔찍하게 들러붙어 있는 빨간딱지를 보고
더이상 그 애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대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 애는 피아노 앞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있었다. 내가 살기에는 너무 괴로운 삶이었다.
신이 정말로 있다면, 내가 태어난데에도 진실로 좋은 이유가 있느냐고 묻고싶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였다.
그 애가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 나에게 딱 편지 두통을 보내왔고,
나는 그 애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만 2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꼬릿말에는 항상 잘자라고 썼다.
그 애가 보내온 첫 편지는 그 애가 상병이었을 때, 다리를 다쳐 많이 아프다는 내용의 편지였고,
마지막 두번째 편지는 대학교 4학년일 때, 사회에 나가기 두렵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 그 애의 빨간딱지 가득한 집에 갔을 때 이미 알았다.
그 애를 이 삶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란 걸.
지금도 난 잘 모르겠다.
그 애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도.
그저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 애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말을.
니가 만일 그곳에서 총을 맞아 한쪽 팔을 절게 된다해도, 한손으로 치는 서툰 피아노 소리라도 꼭 다시 듣고 싶어.
-작 자 미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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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라고 꼽히는 글들...
<그 애> 원 글은 현재 지워져 누가 썼는지 모른다고 함.
첫댓글 와 나 오늘 이거 필사하겠다고 딱 생각했는데. 올라와서 너무 신기해 고마워 글쓴아
그 애 진짜 가독성 좋음...
'그 애'는 진짜 누가 쓴 걸까 작자 미상이라 아쉽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어..
글 너무 고마워
북마크할게
너무 눈물난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