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유족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보훈가족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슴깊이 간직 하시기를
바랍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이라
나라를 구한 용사 이야기
하나 소개 하겠습니다.
6.25 전쟁의 승리는 별을 단 내로라는 유명한 어느 별을
단 모 장군들의 훈장이 아니라,
벙커(bunke)를 "목숨을 걸고 사수했던 말단의 한 일등병
병사였어야 한다"라는
실제 이야기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전황 파악차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벙커를 지키고 있는
어느 한국 말단 병사를
우연히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맥아더 : "전세가 이렇게
밀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도망 안가느냐?"
한국병사 : "후퇴하라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감동한 맥아더 : "지금 내가
들어줄수 있는 소원을 하나
말하라. 들어 주겠다."
한국병사 : "충분한 실탄과
총을 지원해 주십시오."
자신을 이 벙커에서 빼달라는 대답을 예상했던 맥아더에게
이 한국군 병사의 뜻밖의 말은
충격적이고 감동이었습니다.
이 말단 병사의 말 한마디에
감동한 맥아더는 막사로
돌아와 즉시 이렇게
지시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이 나라
(대한한국)를 지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 말 한마디에
인천상륙작전은 재빠르게
속도전으로 바꿔 진행되었고,
수만명의 미국병사가 한국을
위해 전사해야만 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간에
다른 나라가 한 나라를 위해
수만명이 죽었다는건,
미국 역사의 기록은 물론
한국 역사상에도 전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은
혈맹 보다 더 진한 우정으로
맺어준 인연이 되게 한 게
바로 6.25전쟁이란 겁니다.
그런데,
이 일화는 사실일까요?
사실입니다.
2006년 취재 기자 허영한이
취재한 내용 입니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서
상처를 입어 다리까지 절단된
"고(故)신동수(辛東秀)
일등병" 이야기 입니다.
맥아더 : “병사! 다른 부대는
다 후퇴했는데, 자네는 왜
여기를 지키고 있는가?”
병사 :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게 군인 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
1950년 6월 29일, 당시
스무 살의 한 일등병은
서울 영등포에 있던
진지(陣地) 에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과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전쟁이 터진지 나흘째,
이미 한강 이북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습니다.
그곳은 남한의 부대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강 방어선이었고
맥아더 장군은 도쿄에서
날아와 전황을 돌아보던
참이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 주겠다.”
이 군인에게 감동 받은
맥아더 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속대로 맥아더장군은,
곧바로 한국전 참전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
“맥아더 장군이 당시 한국군
병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참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참전 장성 회고록 등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고
말했습니다.
수십 년째 묻혀져 있던
이 일등병의 존재가
최근 밝혀졌습니다.
신동수(辛東秀·77, 2006년
취재당시 나이)옹 입니다.
그를 찾아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으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멀리 오게 해서
어쩌나. 다리가 이래서….”
그는 왼쪽다리를 절었습니다. 양말에 가려졌지만, 한눈에도 의족(義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쁨인지, 고통인지 모를
옛 전투 이야기를 시작하자,
신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습니다.
그가 속한 부대는 백골부대
18연대 1대대 3중대 였습니다.
6월 29일 이들은 영등포구 양화동의 인공폭포공원
인근에 진지를 편성해 놓고
있었습니다.
다른 대대는 물론 같은 대대
다른 중대도 후퇴 해버린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사흘째 굶고 있던
그때였습니다.
“4명이 지프에서 내리더라고.
처음에는 소련군인줄 알고
쏘아 죽이려고 방커에서
쫓아나갔어요.
하지만 정모의 마크가
소련군 것과 다른데.......
통역이 그분이 사령관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사령관이 뭐인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대화가 끝난 후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 연막탄 2개와 대공
표지판을 선물로 줬습니다.
그리곤 곧 그는 잊어
버렸다고 합니다.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진격한
인민군의 총포가 시시각각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머릿속에는 오로지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으니까요.” 라고
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돌아간
이후에도 그는 사흘을
더 버텼습니다.
“결국 후퇴명령을 받았습니다.
중대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며
미친 듯이 돌아 다니고 있었죠.
갑자기 다리가 오그라들더니
펴지질 않더라고요.
그러고도 150m를 뛰었어요.
살기 위해 아무 집이나 찾아가
부뚜막 아궁이에 숨었는데,
착한 주인이 온몸을 닦아주고
빨간 헝겊을 찢어서 군
치료소에 데리고 가주더군요.”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총탄에 맞은 다리를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무릎에선 구더기까지
나왔습니다.
결국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다리를 절며 절며
찾아간 강원도 춘천.
하지만 남동생은 형을 찾으러 가겠다며 인민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못 만난 세월이
무려 56년이 됐습니다.
당시 100여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7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7일 동안의 처절한
혈전 덕분에 인민군의
서울 함락은 늦어졌고,
지연전을 위한 재편성,
유엔군의 조기 전선투입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그의 잘린 다리가 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6월 25일만 가까워오면
내가 묻어준 동료들,
내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이 떠올라요. 군번도 없이 죽어간 전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그걸 알고 있나요?”
그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나라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가 있는 세상에 살라고
산화하신 미군,
다른 나라의 외국군인들,
한국 순국 장병
용사님들 이시여....!
그의 후손들에게
감사합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뒤돌아
보는 시간 되세요.
[펌글]
※오늘 6.25 발발 74주년을
맞이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고
또한 6.25에 참전하신
참전용사들의 공로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이글을 옮겨봅니다
또한 6.25때 전사하시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시는 저의 장인어른과
외삼촌님 에게도 다시한번
감사와함께 편히
영면하시기를
염원합니다~송암
◇24년6월25일 화요일
아침.송암◇
첫댓글 많은 희생으로 지킨 이 나라
한 젊은이 그 희생이 헛되지 말아야. 하는데.
감사 합니다
글 를통하여 다시 한번 참혹했던 전쟁을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라도 말로만 듣던 육이오에 힘들고 어려웠던. 어른들을 기억 합니다
그래요~
지금의 세계10대
선진국으로
대한민국이
발전할수
있었던 것은
목숨바쳐
자유를 지킨
우리 부모님 세대의
희생 덕분입니다
결코 이를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전쟁을 겪어보지않은 저희세대가 전쟁의 아픔과 비극을 감히 상상이나 할수있을까요
나라사랑하는 마음하나만
갖고있어도 애국자같은
지금시대가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전쟁의 아픔속에
가족을 잃으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를 전해봅니다
내나라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라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애국자 입니다~
요즘 발전한
우리나라가
피땀흘려
나라를 지킨분들의
덕분이라는
공로를 모르고 있는
젊은세대들이
많이 있어
앞날이 걱정입니다~^^
그시절엔
큰아들은 군인으로
작은아들은 인민군으로
갈라져서 어머니의 애를 태운
집안도 많았다고 해요
이런 비극은 다시는 없어야겠습니다
송암잠실엉아의
오늘아침 글은
감동입니다~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는 안될
동족상잔의 최대
비극이었지요~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 하여서는
안되겠지요~
"체력이 국력"
이라고 하여
저는 오늘도
국력 키우려고
친구들과 도봉산
으로 산행갑니다~ㅎ
당시 생후3개월로 엄마등에
업혀 피난중 인만군에 잡혀
내무서에서 심문중 서장이 권총발사했으나 빗나가
이렇게 살아있음니다.ㅋㅋ
친구는 우리 범방
친구들 만나려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났구려~ㅎ